엔쿠라스 2부 38화(592화)-
"으음.."
벤하르트가 정신을 차렸을때는 아침이 되어 있었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자책했다. 레니아가 봉인 당하고 난 뒤 그는 마음을 놓지 않았고 방심을 하지 않았다. 어떤 작은 일이라도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임했다.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의 결과만을 내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박관념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였지만 지금 이 상황은 명백하게 자신의 실수라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을지 모르나, 그 과정은 벤하르트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기절을 해버릴 줄이야.'
쉬에프 종족이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던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눈 앞에서 기절을 한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의 일이었다. 레니아와 함께 여행을 하던 어리숙한 그 시절조차도 이정도로 맥없이 기절한 적은 없었다. 새삼스레 방심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그 나무작대기는.. 굉장하군. 아무리 내가 막지 않았다고는 해도, 기절을 할 정도로 타격을 입을 줄은 몰랐는데,'
그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나무집의 안이었는지, 은은하게 똬리를 튼 것처럼 꼬인 나무결로 이루어진 아늑한 집이었다. 그의 옆에는 캐뱃이 간호를 했는지 고개를 파묻고 자고 있었다. 그는 캐뱃에 대해서 약간 복잡한 심정이었다. 탁 터놓고 웃기에는 전날 있었던 일이 신경쓰이지 않을리 없었고. 그렇다고 차마 자신을 '좋아한다는' 캐뱃에게 정색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해둬야지.'
벤하르트는 캐뱃을 흔들어 깨웠다. 캐뱃은 부시시하게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
캐뱃은 벤하르트를 보고 흠칫 놀라며 떨어졌다. 둘은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보았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캐뱃이었다.
"저.. 미안하다."
캐뱃이 사과하자 벤하르트가 되물었다.
"뭐가 말이지?"
"그..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버려서."
"네가 나한테 미안할 것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을 했다는 것 하나 뿐이야.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벤하르트의 말에 캐뱃은 고개를 숙였다. 벤하르트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자신 때문에 이런 중상을 입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후우.. 참 어째서냐.."
벤하르트는 반쯤 체념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잘생기지도 않았잖아? 네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일 뿐이고, 그래 일이 살짝 꼬여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말이지. 나같은 인간을 좋아하는건 네 손해라고,"
벤하르트는 못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절대로 주변사람들이 돌아볼정도의 미남은 아니었다. 그에비해 요정족인 캐뱃은 자연히 선천적으로 생김새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쉬에프중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에 속하고 있어서 남성들로부터의 인기도 높은 편이었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 하고 그녀는 말을 흐렸다.
"내가 이곳을 떠나고 나면 금새 잊게 될 한때의 추억거리정도 밖에 안되는 일이야 이건.."
"아냐.. 그렇지 않다."
"그래? 그렇다면 송구스럽군. 나로써는 한때의 추억으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벤하르트는 캐뱃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하지만 미안해. 나는 네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다. 나한테는 마음에 둔 여자가 있으니까,"
"좋아하는 여자?"
"그래. 나를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이번에는 '어쩌다가' 쉬에프와 호루탈 숲을 구했을 뿐. 나는 우유부단한 녀석이거든, 제멋대로인 남자지. 이런 남자를 좋아하다가는 네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나는.. 너를 좋아해!"
벤하르트는 캐뱃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나는 너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아."
딱부러지게 벤하르트는 그녀에게 그렇게 선고했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여인을 앞에두고 흐지부지하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흣.."
"미안하다."
캐뱃은 한껏 숨을 들이켰다.
"아니 미안한 것은 이쪽이다."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당찬 얼굴로 벤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벤하르트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곧 캐뱃은 방에서 나갔고, 여인이 들어왔다. 벤하르트는 그녀가 이니프라고 불리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니프.."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영광이네요 벤하르트씨."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녀는 벤하르트의 옆에 살랑거리며 다가왔다. 벤하르트는 살짝 그녀를 쓸듯이 보았다. 일전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다른 쉬에프들과는 꽤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푸른색의 머리와 투명한 피부 아름다운 외몬는 비슷했으나, 이곳 쉬에프종족만이 가지고 있는 녹색의 문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 점을 의아해 했지만, 그는 딱히 그녀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다.
"무슨 볼일이지?"
벤하르트는 약간 날이 선 어조로 물었다.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이니프가 벤하르트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그렇게 거창한 일로 온 것은 아니에요. 캐뱃과 벤하르트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흥미가 나서 왔을 뿐이죠."
"그래 그럼 볼일이 끝났으니 돌아가면 되겠군."
그녀는 벤하르트의 침대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에 둔 자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그리고 그녀는 매혹적인 눈으로 벤하르트를 보았다.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섬뜩한 눈이었지만, 벤하르트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 상황을 지속하기 싫은 벤하르트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벤하르트의 대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는 벤하르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과할 정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무렵 이니프가 말했다.
"하나.. 아니 둘?"
벤하르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실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람둥이시군요."
"큿.."
아무래도 이니프같은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벤하르트였다.
"볼일이 끝났으면 얼른 나가는게 어때?"
퉁명스레 쏘아 붙히자 이니프는 키득 거리면서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인걸요. 주인인 제가 나가야 하는 걸까요?"
벤하르트는 살짝 당황하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위기상 그는 당연히 캐뱃의 집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니프의 집이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럼 내가 나가지."
하지만 벤하르트의 몸은 그녀의 팔에 간단하게 봉쇄되어 버렸다.
'이녀석..'
아무리 힘이 없다고는 하나 벤하르트는 유려의 움직임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간단하게 제자리로 돌려놓는 그 움직임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자 자.. 놀린건 죄송해요. 일단 요양하지 않으면 곤란해요. 호루탈의 신목으로 만들어진 무기에 상처를 입으면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점차 곪아가서 살이 썩게 되니까요. 하나 의문스러운게 있는데, 벤하르트씨라면 호쉬르 정도는 쉽게 이겼을텐데 어째서 그때 '일부러' 져준 거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에이. 알려주세요. 제 집을 빌려주고 있는데 그정도는 말해줘도 되지 않겠어요?"
"그녀석이 캐뱃에 대해서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것 뿐이야. 나에게 있어 캐뱃은 그저 아는 친구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녀석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었다고 그 순간에 그렇게 느꼈다."
벤하르트는 그때 호쉬에게서 흡사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상황에 대한 크기가 다를 지언정, 레니아를 구하고 싶었던 벤하르트와 캐뱃을 잃고 싶지 않았던 호쉬르의 '절박함'은 누가 더 우위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질감이라도 느꼈었나..'
"고작해야 그런 이유 때문에? 에이 더 있겠죠?"
"없어. 굳이 만들어 붙힌다면 네 간계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 정도?"
이니프는 요염하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벤하르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안정을 취하세요. 아무래도 미움 사버린 것 같으니까,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테니까요. 혹시라도 일어날 생각이시라면 그만 두는 것을 추천하고 싶네요. 한번 일어날때마다 완치되는데 하루씩 늘어난다고 생각하시면 될테니까요."
이니프의 말을 억지로라도 거역하고 싶었지만, 상처의 크기를 알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 작가의말
생전 처음으로 시간에 쫓겨 연참대전에 실패 할 뻔 했네요.
이야.. 여행 준비하다가 트러블 생겨서 수습하는데, 트러블을 수습하고 나니 30분.. 남아서 정말 허겁지겁 썼습니다 --;;
다 쓰고 나니 2800자 ;;
연참대전의 최소 글자수는 3000천자여서 부랴부랴 중간에 행동묘사를 넣어서 200자를 채우고 겨우겨우 세이프... 하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 않네요.
너무 날림으로 쓴것 같아서 마음에 안듭니다...
이후 새벽에 고치고 자겠습니다. 네..
수정 완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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