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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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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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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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94

DUMMY

정원로가 동촌을 얼씬거리고, 집앞을 기웃거릴 적에 알아봤어야 했다. 석정은 손발이 차갑게 식은 채로 거친 숨을 골랐다. 홍만종이 무슨 죄인가 싶었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애꿎게도 허적의 얼녀를 소실로 삼은 친구였다. 자칫 정원로와 엮였다간, 정원로가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사건이 정리될 무렵엔 홍만종도 함께 결딴날 터였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질하며 어탑을 보았다.


홍만종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게 정원로의 비열한 수작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첩의 아비와 오라비인 허적과 허견 부자를 홍만종이 팔아넘길 리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억울했다. 미치도록 억울했다. 이러다 홍만종이 잘못될까 불안했다.


하지만 애타는 석정의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숙종은 무신경히 고개를 비끼고 다시 한번 상소를 쳐다볼 뿐이었다. 정원로는 역모고변 과정을 주저리주저리 떠벌리면서도, 자신이 역모 과정을 직접 목격하진 않았다고 슬쩍 발뺌을 해놓았다. 겉으로는 공치사를 늘어놓았지만, 속으로는 빠져나갈 구멍까지 만들어놓는 형국이었다. 교토삼굴狡兔三窟이라고, 교활한 토끼는 세개의 굴을 파놓는다 했다. 떡하니 굴을 서너개씩 파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김익훈, 신범화, 홍만종...세사람 모두 김석주의 사람인 것은 분명한데, 물에 이들이 빠졌다면 김석주가 손을 내밀어 구해줄 이는 오직 신범화 정도였다. 한손을 내밀든, 두손을 내밀든, 어떻게든 김석주는 신범화에게는 손을 내밀어줄 터였다. 하지만 나머지 김익훈과 홍만종은 죽은 다음에야 고이 묻어줄 정도의 의리였다. 이유정의 흉서를 일부러 감춘 혐의로 모진 고문 끝에 죽은 이우의 억울함을, 고작 요 사흘 전에 고하여, 신원시켜준 것처럼.



그래도 김익훈에겐 중궁과 광성부원군 김만기 형제가 있었다. 김만기와 김만중은 일찍이 아비를 잃고 숙부들의 손에 교육을 받다시피 하였다. 김익희는 직접 끼고 가르쳤고, 김익훈은 틈틈이 책이나 옷들을 구해주었다. 그나마도 김익희가 20여년 전에 유명을 달리하고, 그나마 남은 김익훈에 대한 정리가 남달랐다. 그러니 김익훈이 다치지 않도록 중궁 쪽에서도 필사적일 터였다.


허면 홍만종은? 허적의 첩사위였던 홍만종은 누가 보호한다는 건지. 숙종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더듬어보는데, 별안간 김석주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신 병조판서 겸兼 홍문관 제학 김석주, 삼가 고할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여기...사직차자이옵니다."

"사직차자?"


숙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김석주가 권력을, 특히 병권을 놓을 리가 없었다. 그저 불리할 때 잠시 내려놓는 언권이나 또 내려놓으면 모를까. 보나마나 이번에도 홍문관 제학 자리를 내어놓는 것이 뻔하였다. 그저 일종의 시위였다. 닭은 벼슬이 하나인데, 김석주는 벼슬이 둘이니, 이런 것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미심쩍은 눈초리로 김석주를 지켜보았더니, 김석주가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승지 한명이 그 사직차자를 엉거주춤 받아들고 눈치만 보다가 머뭇머뭇 어탑으로 왔다. 숙종이 사직차자를 펼쳐들자, 김석주는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홍문관 제학이 정1품의 품계를 얻으면 대제학의 반열에 오르는 바, 신이 이번 보사공신 봉작으로 정1품에 올랐으니, 대제학이라 불려야 마땅하오나, 이미 대제학이 있사옵고, 대제학이 둘 일 수는 없사오니 감히 체직을 청하옵니다..."


핑계도 좋았다. 물론 남구만이 북벽에 앉는 마당에, 김석주가 나란히 북벽에 앉기도 민망했을 터였다. 하지만 정원로의 상소가 어탑에 오르자마자 허둥지둥 홍문관 제학의 자리를 내놓는 속내가 너무도 뻔하였다. 김석주도 허적처럼 매일매일 품속에 사직차자를 품고 다녔던가.


"윤허한다."


말리는 시늉도 없었다. 보통 세번은 만류하고, 세번은 사양하고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심지어는 성균관에서조차 이런 허례허식이 관례로 굳어 있었다. 그런데도 왕은 마음에도 없는 변죽을 치기 싫었는지 단칼에 사직차자를 윤허해 버렸다. 그나마 김석주한테 병조판서라는 직임이 또 있는 탓일 지도 몰랐다.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사전에 미리 고변한 그 정성은 알만 하다. 행行 응교는 그리 비답을 제찬하라."


숙종은 뼈 있는 말로 비답을 지시하며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귀는 밝고, 목은 막힌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착각은, 이쯤 목소리를 냈으면 상대가 알아듣겠거니 믿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기의 날갯짓 같은 목소리 그대로 말하다 보면, 듣는 사람들, 특히 귀는 어둡고, 목은 트인 사람들로선 답답해서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특히나 가당치도 않는 정원로의 상소에 애써 장단을 맞춰주는 듯한 저 비답을 자신의 손으로 제찬해야 하는 최석정으로선.


"들었는가, 행行 응교?"

"예, 전하."


재우쳐 묻는 왕의 옥음에 황망히 답하고서 석정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수식어도 없이 비답을 적다 보면, 더욱이 내키지도 않는 글이라면, 고작 한줄도 못 넘길 것 같았다. 그래도 좋으시다면야, 붓끝에 먹물을 더 찍을 필요도 없이 한붓에 써드릴 요량이었다.


숙종은 내친 김에 서안 위에 도승지, 승지, 판윤, 집의 등의 망단자望單子(3망, 즉 3인의 후보를 적어놓은 종이)를 올려놓았다. 이미 정원로의 상소는 안중에도 없이, 권점한 후보들의 이름을 거명할 기세였다.


"헌데 박세채는 어이하여 망단자에 이름이 없는가? 영상과 우상이 극력 천거하여 오랜만에 그를 용서하고 서용하겠다 하였거늘."


숙종이 망단자를 들추며 묻는 말에, 김석주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김석주가 머뭇거리는 사이, 석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박세채는 공교롭게도...이조, 병조, 삼사에 이르러 두루 상피제相避制(친족간엔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에 저촉되는 실정입니다."

"박세채가 상피제에 저촉된다?"

"예, 이번에 전하께서 이번에 군자주부軍資主簿에 임명하신 신범화, 이조참판 박태상, 대사헌 신정, 수찬 박태손까지 모두 박세채와 8촌 이내의 친인척간이옵니다. 정언 신완과도 사돈간이며, 이번에도 사간직을 사양할 것이 분명한 박세당과도 8촌간이고, 또한 이번에 평안감사로 임명하신 유상운과도 사촌간으로..."

"그만, 알았으니 박세채를 따로 기용할 방도를 마련토록 하라."

"예, 전하."


숙종은 최석정이 입을 다물기 무섭게 이미 권점까지 마친 망단자를 한장한장 넘기며 선고했다. 상피제에 걸려서 박세채를 조정에 기용할 수가 없다면, 최석정은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아낼 것이었다.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머릿골이야 조금 앓겠지만, 썩어도 준치고, 최석정이니까.


"신익상을 정3품 도승지로 명한다."

"..."

"박순을 정3품 승지로 명한다."

"..."

"김우형을 정2품 판윤判尹으로 명한다."

"..."

"윤증을 종3품 집의執義로 명한다."

"..."

"이민서를 종2품 예문제학藝文提學으로 명한다."

"..."

"김만중을 승배陞拜(벼슬을 높여줌)하여 종2품 홍문제학弘文提學으로 명한다."

"..."

"신양을 정5품 지평으로 명한다."

"..."


숙종은 망단자를 그대로 추려서 신익상에게 내밀었다. 방금 전에 도승지로 거명된 터라 신익상으로선 그저 얼떨떨하였다.


"이만 정리하라."

"..."


도승지를 새로 선임하였지만, 신익상으로선 당장 도승지입네 나서기가 멋쩍었다. 전임 도승지를 함경감사로 내돌리고, 번갯불에 콩 볶듯이 망단자에 권점을 콕 찍었으니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 아직 권점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신익상은 난감한 얼굴로 다가와서 망단자를 받아들었다. 그나마 망단자를 꼬깃꼬깃 구겨서 던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요즘 왕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기에 신익상으로서도 조심스러웠다.


그런 신익상의 귓전에 신료들 두어명이 쑥덕거리는 목소리가 강아지풀 털끝처럼 닿았다.


"하나같이 꺽정이와 친한 사람들인데..."

"꺽정이 눈밖에 나면 떨려 난다는 얘기가 있던데...이번에 함경감사가 된 윤계나, 평안감사가 된 유상운이나..."

"에이 설마. 승배되어 가는 건데 무슨..."


신료들 두어명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최석정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최석정은 초사를 적다 말고 윤증尹拯이란 이름에 손길을 머뭇거렸다. 송시열의 애제자로 손꼽히는 인물이 윤증이었다. 권상하나, 이상이나, 이단하, 김만기, 민정중 같은 제자들도 있다지만 우선 인정받는 제자는 윤증이었다. 그래서 김수항과 민정중 역시 입을 모아 윤증을 천거했다.


윤증이라...


송시열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조정을 장악한다는 것은...왕이 더욱 고립된다는 의미였다. 저쪽에선 석정 자신과 가까운 이들이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꺼렸지만, 이쪽에선 송시열의 제자들이 왕의 주위를 에워싸는 사실이 어쩐지 떠름하다 못해 꺼림했다. 물론 윤증이 스승들과도 친밀하니 그리 나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조선에선, 적어도 송시열이 주름잡는 조선에선, 제자에게 스승은 군주나 친우보다도 우선이었다. 도대체 윤증은 왜 여태 관직을 마다하며 계속 출사를 미루는 건지, 누굴 기다리느라고? 석정은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다잡으며 아뢰었다.


"하오나 전하...윤증은 벌써 여러 차례 전하께서 부르셨어도 벼슬을 계속 사양하고 니산尼山에서 은둔하여 나올 생각을 않사온데..."

"그럼, 사관을 보내어, 개유해야겠군."

"사관까지 보내기엔 좀..."


난처한 얼굴이 된 최석정을 보고 숙종은 잠시 짓궂은 웃음이 두눈에 스쳤다. 자신이 윤증에게 보내겠다는 사관은 다름 아닌 석정이었다. 물론 빈말이었다. 그저 석정을 놀리느라 해본 말에 불과했다. 당황하는 석정의 얼굴을 보니 숙종은 괜히 마음이 편해졌다.


"나머지는 이따가 주강에서 논하도록 하지. 하직하는 감사, 병사, 수령 또한 주강이 끝나고 인견할 것이니, 대령하라 이르라."

"예, 전하."


왕이 윤대를 파했다. 도승지로 선임된 신익상은 힐끔 최석정을 쳐다보곤 보일락 말락 눈웃음을 짓고 가버렸다. 석정은 난처한 기색으로 눈밑을 실룩였다. 이미 김석주의 눈길이 집요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참이었다.


김석주는 새로 선임된 도승지 신익상이 최석정에게 모종의 눈짓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히 조정을 장악한 이들은 하나같이 송시열의 문인인데, 누구를 보더라도, 하나같이 최석정과 연이 닿은 느낌이었다. 김석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일부러 홍문관 관료 몇몇을 부추겨서 이번 인선에 최석정의 입김이 작용한 거라 숙덕거리게 하였지만, 갑자기 한가닥 의심이 들었다. 떨려 나간 함경감사와 평안감사는 과연 최석정의 눈 밖에 난 것인가.


윤대를 파한 뒤로도 왕의 하루 일과는 여전히 번다했다. 군자주부軍資主簿로 선임된 신범화를 비롯하여 몇몇 관료들의 사은을 받았고, 낮것을 부랴부랴 들고 나서, 먹은 것이 채 내려가기도 전에 대청에서 주강을 열었다. 말이 주강이지, 경전 공부와 아울러 주로 정사를 논했다. 지경연사知經筵事(경연청의 정2품직) 민유중, 특진관特進官(경연청의 정2품직) 구일, 승지 최일, 가주서假注書 윤세초, 사관 남치훈 등이 배석한 자리였다.


"박세채는 상피제로 인해 정관政官으로는 의망하기 어려우니, 단망單望(단독후보)으로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정4품 학관) 에 올리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성균관 사업이라...그리 하라."


숙종은 시강관인 최석정의 의견에 군말 없이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이어서 함경감사 윤계, 평안감사 유상운 등 이번에 선임된 지방관료로들의 하직인사를 받아야만 했다. 대청에서 주강을 실시한 만큼, 경연청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함경감사 윤계, 평안감사 유상운, 평안병사 이세화가 입시했다. 저마다 1품계씩 높은 관직을 맡고 지방으로 떠나는 것인데도, 당장 중앙에서 밀려나는 것인 만큼 안색들이 좋지 않았다.


"대전 형전에 적힌 관절금조關節禁條(뇌물 및 청탁을 받는 일을 금지하는 조목)를 각별히 거행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삼가 근신하고, 또한 신칙하겠나이다."

"허면 한지寒地에서 몸상하지 말고, 수고들...해주시오."


왕의 어색한 공대에 지방관리들의 얼굴이 알게 모르게 꿈틀거렸다. 꼬박 2년을 한사와 습사에 시달리게 생겼으니 심사가 편할 리가 없었다. 그나마 유상운의 안색이 밝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 북도로 가는 김에 미색이 빼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한 평양기생이나 실컷 품어볼 요량이었다. 물론 염불보다 잿밥만 탐할 생각은 아니었다.


"전하, 신臣 유상운 사뢸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보...시오."


멀쩡한 중앙관리를 한습寒濕에 몸을 상하기 쉬운 북도로 승차시키는 만큼, 조심스러운 공대로 위로하는 참이었다. 송시열을 풀어달라거나, 평안감사를 사양하겠다는 말만 아니면 얼마든지 들어줄 요량이었다.


"폐사군廢四郡은 동서는 황해도보다 길고 남북은 조금 못 미치니, 버려두기엔 아깝습니다."


폐사군은 세종 때 여진족을 막으려고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사군四郡을 폐했다는 의미로 불려지는 이름이었다. 단종 이후로는 점차 방치되고, 또 여진족과 군사적 충돌이 잦다는 이유로 백성들의 입주마저 금하면서 그저 불모지가 되었다. 하지만 평안감사로 부임하는 유상운이 폐사군의 지형까지 따져보고 미리 고한 것이었다.


숙종은 자못 흡족했다. 도승지나 대사간으로 있을 때는 지나치게 남인들을 몰아내려 혈안이 된 모습만 보였기에, 내심 마뜩치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폐사군까지 신경을 쓰니 유상운이란 인물이 다시 보였다. 가주서는 붓을 놀려 유상운의 말을 적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유상운이 누군가의 눈치를 슬쩍 본 듯했다.


착각인가.


유상운이 쳐다본 건 최석정이었다. 하지만 그간 대사간과 도승지 같은 청요직에서 권세를 휘두르던 유상운이 최석정의 눈치를 볼 리가 없었다. 오히려 최석정이 사은례를 차일피일 미룰 때면 사납게 눈총을 던지거나 하였으니, 오히려 최석정이 저들의 눈치를 볼 법했다. 하지만 최석정의 성품으로 기껏해야 제 스승 남구만의 눈치를 보면 모를까, 유상운의 눈치를 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최석정은 박세채와 상피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거명하며, 유상운까지 거명했다. 그리 소상히 알 정도라면 최석정이 최소한 박세채나 유상운, 둘 중 하나와는 인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박세채인가, 유상운인가.


벼슬은 실력보다는 눈치로, 인의보다는 인맥으로 하는 것인 만큼 가주서는 분위기를 살피느라 눈길이 분주했다.


"평안병영은 불온한 자들이 여러차례 다스려서 탐욕의 풍조가 기승을 떨친 곳이오. 관서關西(평안도와 황해도)는 중요하니 방치할 수도 없소. 경을 믿고 맡기니 모쪼록 힘써 주시오."

"예, 전하,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사관이 아니라 경연관으로서 자리한 석정은 가주서와 사관이 붓을 놀려 사초를 기록하는 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유상운이 언뜻 자신을 쳐다본 것 같았다. 석정의 얼굴에 얼핏 복잡한 감회가 스쳐갔다. 관찰사의 임기는 2년이었다. 원래는 1년이었으나 이제는 2년이었다. 앞으로 2년씩이나 도성을 비우게 되니 허전한 모양이었다.


주강은 신시申時가 훌쩍 지나고 햇볕이 흐리터분해져서야 끝났다. 석정이 대청을 나서는데, 두어발치 앞에서 걸어가는 유상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석정은 가만히 유상운의 뒤를 밟았다. 궐문이 가까워지자, 석정은 새삼스레 고개를 젖혀서 궐문 위에 누각처럼 포개진 성상소城上所를 올려다 보았다.


성상소는 평소 사헌부 관원들이 모여 차를 마시면서 궐에 드나드는 관리들을 감찰하는 곳이었다. 전란 이후 흐지부지되긴 하였으나, 지금 저 성상소에 청단령의 사헌부 장령 한명이 올라서서 찻잔을 입가로 기울이며 궐문 앞을 내다보는 참이었다. 평소 유상운과 사헌부에서 죽이 잘 맞아서 대소사를 논하던 아랫관리이자, 유상운의 성균관 전적 시절 제자였다.


한가로이 차를 마시면서 성상소 아래를 내려다보던 심유가 유상운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슬쩍 숙여보였다. 업무 상 배웅을 나가지 못하느라 성상소에서 눈길로 배웅을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2년은 만나지 못하게 생겼으니 아쉬운 마음에 유상운에게 눈인사를 보내던 심유는, 유상운의 등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석정을 보고 보일락 말락 한 웃음을 지었다. 석정 역시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인사로 화답하고 조용히 지나갔다.


앞서가는 유상운은 다리를 질질 끄는 듯이 무겁게 걸어갔다. 구종들이 초헌을 대령해 놓고서 자신을 기다리는 참이었다. 그런데 초헌 앞으로 다가가는데,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가슴 한켠 묵직한 납덩이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품계는 오르지 않은 채로 '수守 평안감사'라는 직함만 달았다. 물론 한품계 높은 관직을 맡는 것 자체가 영전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 이건 기회였다. 게다가 조선팔도에서 가장 미색이 빼어나다는 평양기생들도 품어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마흔 중반의 나이가 되고 보니, 찬바람만 들어도, 호되게 몸살을 앓는 터라, 이러다 고뿔에도 숨이 넘어갈까 두려웠다. 그러니 먼길 떠나기 전에 우선, 한동안 만나지 못하게 될 친우들을 만나봐야 했다.


유상운은 초헌을 타고 집에 들렀다가 다시 지팡이 하나 짚고서 길을 나섰다. 붉은 노을이 감싸안은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의 언덕을 오르내리는데, 웬 홍단령에 목화 차림의 젊은 사내도 숨이 턱에 차서 뒤따랐다.


최석정이었다. 멸어 소리를 들을 만큼 빼짝 마른 아우보다는 그나마 살이 토실토실 올랐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하지만 이 더운 여름에 귀하디 귀한 홍단령을 입고 땀을 쪽 빼면서 산기슭을 오르내리니 살도 쏙 빠질 것만 같아 겁이 났다. 그나마 이목구비가 준수해서 꺽정이 소리라도 듣지, 여기서 살이 더 빠지면 그야말로 줘도 안 먹는다는 멸어 소리를 듣게 생겼다.


"자네, 언제까지 내 뒤를 밟을텐가?"


마침내 흰 너럭바위 투성이인 개울을 만나자 유상운이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석정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휘청였다. 딴에는 조심스레 미행을 한 건데, 뜻밖에도 유상운한테 들켜버렸다. 마흔을 훌쩍 넘긴 유상운이 귀가 밝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숨소리나 걸음걸이가 거친 건지, 하지만 당장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석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대꾸했다.


"저 신경...쓰지 마시고...가던 길 가시지요."

"자네가 날 따라오는데 어찌 신경이 안 쓰이겠나..."


개울을 건너려니 더 신경이 쓰였다. 갑작스레 등을 밀거나 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최석정의 시선을 뒷통수에 달고 개울을 건너고 싶진 않았다.


"제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유감사께서 앞서 가시는 겁니다."

"뭐라?"

"도봉산도 넘었겠다...저도 호원동虎院洞(범골, 지금의 장암동)에 가는 길이거든요."

"..."

"그러니 저 신경 쓰지 마시고, 가던 길 가시지요."

"그냥 자네가 앞서 가게나..."


유상운이 짜증스레 손을 휘저으며 대꾸하다가는 무심코 최석정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멈칫했다. 최석정의 등뒤로도 낯익은 얼굴이 하나 보였다. 불과 세시진 전에 궐문 위 성상소에서 눈짓으로 배웅했던 심유였다. 자신은 최석정을, 최석정은 심유를,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달고 뒤를 밟힌 참이었다. 혹시 심유도 누군가에게 뒤를 밟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워낙 쓸데 없는 생각이라 그대로 떨쳐버렸다.


"아, 심장령도 뒤에 오시는 길이셨나..."


석정이 심유를 발견하고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심유는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실없이 웃었다. 정말로 세사람은 방향이 같았다. 최석정의 말마따나 유상운이 범골로 갈 터였다. 심유는 먼발치로 보이는 삿갓 모양의 산봉우리를 힐끗 쳐다보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삿갓산이라고도 불리는 사패산, 저 어귀인 범골엔 다름 아닌 서계西溪 박세당과 남계南溪 박세채가 있었다. 반남박씨 문중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곳이었으니.


"자넨 예서 어디로 갈 건가? 위? 아래?"


유상운이 짜증스레 방향까지 따져 물었다. 도봉산과 수락산을 수많은 개울들이 굽이굽이 흐르는데, 특히 수락산 선부봉 아래로는 도성의 동쪽이라 하여 박세당이 동계東溪라 이름 붙인 개울이 흘렀다. 그 개울 위로는 박세당의 집이, 아래로는 박세채의 집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유상운이 찾아가는 곳은 동계의 아래쪽으로, 자신의 사촌인 박세채의 집이었다.


"위든, 아래든 무슨 구분이 필요하겠습니까? 잘 아시면서."


석정은 얄궂은 웃음으로 응수했다. 여기 수락산의 주인은 박세당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비를 여의고, 수락산 일대의 큰땅을 분급 받은 탓에, 의령남씨를 아내로 맞아 한동안 범골을 떠나서 정릉동에서 10년이 넘도록 처가살이를 해야만 했었다. 학업을 이끌어줄 아비도 없었지만, 아이들이 코흘리개를 면할 때까지 처가살이를 하는 것 자체가 워낙 흔한 풍습인 탓에, 흉될 것도 없었다. 처남인 남구만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처숙부 남이성의 그늘에서 학업을 쌓다가 의령남씨와 사별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8촌 아우인 박세채가 얼싸안고 반겨주었다. 고작 두살 어린 박세채는 같은 문중 식구이기 이전에, 박세당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죽마고우였다. 그런데 남구만이 어린놈을 하나 데리고 와서 범골을 찾아와서 한참을 죽치고 지내더니, 결성현으로 돌아갈 때는 아예 그 둘한테 최석정까지 덥썩 떠넘겼다.


- 내 새끼 잘 부탁하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도 전인을 시켜서 온갖 낯간지러운 미사여구로 제자를 추켜세우는 편지를 보내오며 돈독한 정을 과시하는가 하면, 수시로 박세당에게도 서찰을 보내어, 최석정은 자신이 몹시 기대하는 제자임을 강조했다. 덕분에 박세당과 박세채가 함께 최석정을 끼고 가르치는데, 박세채의 다섯살 어린 이종사촌인 유상운이 장래가 촉망되는 주서가 되어 모처럼 범골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유상운도 사실은 최석정과 인연이 있었다. 아니, 깊었다.


"누구한테 용무가 있는 지가 중요하지..."

"가까운 곳부터 들르는 법이지요. 이를 테면 저기 남계 말입니다."


최석정은 박세채의 집쪽을 가리키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끝까지 얄밉게 대꾸했다. 듣는 유상운의 속을 실컷 긁어놓을 심산이었다. 사실은 누구보다 얄미운 인물이 저 유상운이었으니, 이 정도는 해줘도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이지, 유상운은 당해도 쌌다. 남들은 모르고, 석정 혼자만 아는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으니, 이 정도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진 유상운은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던지며 심유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심유는 그대로 간격을 유지한 채로 딴청을 부리듯 해작질을 할 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아 그러면 같..."


차마 같이 가자는 말은 겸연쩍어 건네지 못하고 외마디 앓는 신음을 내고서, 유상운은 등을 홱 돌려 걸음을 내딛었다. 그 발꿈치로 늘어지는 그림자를 밟기라도 할 것처럼, 최석정의 목화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 최석정의 발꿈치로도 심유의 목화가 뒤따랐다.


박세채는 집에 없었다. 더부살이를 하는 사위, 송순석만 퉁명스레 그들을 반겼다. 최석정을 알아본 탓이었다. 송시열의 손자인 그는 유상운과 심유를 반기다가, 최석정의 얼굴을 보고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물 한잔도 건네지 않고 좀더 위쪽을 가리키며 잠구潛丘에 갔다고만 대꾸했다.


잠구는 박세당이 은거하는 곳이었다. 박세당은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울타리 삼아 집주위를 에둘러 심어놓곤 탁 트인 자연경관을 즐기며 개울가에서 노닐었다. 그래서 잠구였다. 숨을 잠潛자를 써서, 박세당이 숨어있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하지만 잠구는 잠구가 아니었다. 워낙 유명하여 도성 안에서 번듯한 중치막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붙들고 박세당의 집을 물으면, 열이면 열, 여기 수락산 어드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잠潛자에 자맥질하다는 뜻도 있으니 차라리 박세당이 물놀이를 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잠구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박세당이 잠구 밖으로 나오질 않는 한은, 잠구는 잠구였다. 그 대신 박세채나 남구만, 그리고 최석정이 종종 이곳 잠구를 찾아왔다. 박세당의 명성을 흠모하여 제자로 삼아달라고 찾아오는 유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세간에선 잠구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았다. 남인의 눈이 아니라, 같은 서인의 눈으로도, 잠구에 사는 박세당은 악의 축이었다. 단정짓긴 곤란해도, 그리 심증을 품은 자들은 많았다. 언제나 송시열의 반대편에 서는 자, 그 이름도 당당한 박세당이었다.



"어디다 집을 얻었다고?"

"노고산 아래요."


잠구 취승대에서 박세당은 8촌아우 박세채와 나란히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두발을 개울물에 담그고 더위를 쫓았다. 얼핏 보면 그다지 닮은 구석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박세당은 넉넉하게 각진 턱에 유난히 깊고도 길쭉한 눈이 오히려 우직한 느낌을 주는데다, 박세채는 오히려 광산김씨 사람들처럼 길쭉하고 홀쭉한 턱에, 턱수염이 가운데만 희끗한 터라 영활한 느낌을 주었다. 그나마 둘이 함께 개울에서 맨발로 물장구를 치는 것이 닮았을 뿐이었다. 특히 박세채는 낮에 집을 구하러 잠시 도성에 다녀온 뒤라서 등골이며 자개미며 온통 땀이 배여 꿉꿉하던 것이, 시원하게 더위가 식어서 좋았다. 게다가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느라 퉁퉁 부었던 발바닥의 열을 식히는 데도 그만이었다.


"정말 출사하려고?"

"예."

"안되는데, 아 안되는데."

"안되긴 뭐가요."

"너무 멀잖아. 그냥 나랑 같이 예서 살지, 벼슬길은 왜 나가?"

"형님이야말로 저랑 같이 벼슬길에 나가자니까요. 또 사절하지 마시고."


두 팔촌형제는 말을 사주느니 마느니 하며 옥신각신 다투었다. 왕이 내리는 온갖 귀한 벼슬을 마다하고 여태 수락산 서쪽자락에서 사진仕進(관리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 것) 및 사퇴仕退(관리가 퇴근하는 것)를 하는 박세당을 박세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초배인 의령남씨가 살아있기만 했어도, 정릉동에서 사진하고 사퇴하고 했을 테지만, 의령남씨가 죽고 광주정씨를 후처로 들이면서, 정릉동을 떠나 이곳 호원동으로 돌아온 터라, 이제는 정릉동에서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아니, 작은놈도 홍문록에 들었다면서요. 곧 홍문관에 복귀할 텐데, 이왕이면 같이 삽시다. 우리 다 같이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큰놈은? 그놈은 아직 과거급제를 못했는데 어떻게..."

"에이, 데려가요, 데려가. 꺽정이 그놈, 우리가 급제시켰으니, 이참에 책임지고 가르치라고 하든지요."

"아니 겨우 두살차인데 어떻게 가르쳐? 그놈이 얼마나 바쁜데!"

"하긴, 바쁘지. 조선팔도에서 제일 바쁘지!"

"그리고 큰놈이 3년상 때문에 과거를 못봐서 그렇지, 원래 머리는 좋은 놈이야. 꺽정이한테 맡기지 않아도 얼마든지..."


어느덧 개울 앞에 이른 석정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끼여들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느니, 양반은 못된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게 생겼다. 사실은 아까 박세당이 집 한 채 사서 다 같이 살자고 하는 얘길 듣고 머릿속으로 그 집의 규모를 가늠해 보던 참이었다. 박세채와 4남 3녀나 되는 자식들, 박세당과 그 큰아들 박태유, 그리고 박세당의 사촌 박세후 밑에 계자로 이름을 올린 박태보, 그 박태보가 양어머니로 깍듯이 모시는 파평윤씨, 그 파평윤씨의 남동생 윤증까지...설마 하니 이 엄청난 대식구가 한집에 살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노고산 밑에 집을 얻었다는데, 그 집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나 싶었다. 머릿속이 가뜩이나 번잡하고 분주한데 박태유의 박사업博士業(과거공부)을 떠넘긴다, 어쩐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사안士安(박태유의 자字 녀석한테 가르칠 게 뭐가 있다구요? 그냥 혼자 과거만 보면 되는데."


결국 석정이 너럭바위로 폴짝폴짝 건너뛰며 끼여드는 말에, 박세당과 박세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금 조정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가장 바쁘다는 녀석이 눈앞에 있었다. 지제교가 문사낭청까지 맡아서 국청에 참여하질 않나, 승지들이나 받아쓴다는 사사전지를 받아써서 금부도사와 함께 사사를 집행하러 다니질 않나, 또 시강관으로서 경연청에 참석하여 왕에게 경전을 가르치질 않나...그런데 지금은 또 이곳 수락산까지 찾아오다니 신기했다. 그것도, 말 한필도 없이.


"네가 여기 웬일이냐? 바쁘신 몸이?"

"하여간 얼굴 한번 보기 힘들구먼."


박세당과 박세채의 핀잔에, 석정은 겸연쩍은 얼굴이 되었다. 지금 여기서 빈말이라도 한가하다고 대꾸했다가는 박태유를 고스란히 떠맡을 판이었다. 청탁이나 부탁을 받으면 가장 거절하기 어려운 상대가 남구만, 그 다음이 박세채와 박세당이었다. 불법이나 불의가 아닌 이상 더욱 거절하기 어려웠다. 석정은 눈길을 돌려서 뒤쪽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먼저 와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엿듣던 유상운과 심유도 어쩐지 나서기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반발짝을 뒷걸음질 치는 참이었다. 최석정이 박태유보다 고작 두살 위라 가르치기 힘든 반면, 심유는 여덟살이나 위인데다, 유상운은 아예 열두살이나 위였으니, 오히려 태유의 과거공부를 돕기에 적합했다. 그러니 보나마나 석정이 자신들에게 떠넘길 것이 뻔했다. 자연히 박세당과 박세채의 눈길이 석정한테서 유상운과 심유에게로 건너갔다.


"왔는가?"

"그러고 보니 우리 여시汝時(최석정의 자字)보다야..."


유상운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전 내일이면 함경감영으로 떠날 몸이라... 사안士安이 따라와준다면야..."

"흠, 우리 태유는 몸이 부실해서 말이지."

"과거공부를 하러 북쪽으로 올라갈 필요는 없지."


이번에는 박세당과 박세채의 눈길이 심유에게 쏠렸다. 심유는 입을 비죽거리고선 이내 화제를 돌렸다.


"참, 성균관 사업을 맡게 되실 것 같던데...얘기 들으셨습니까?"

"사업?'

"누구 말마따나 두루두루 상피제에 걸리셔서 말이지요. 남는 자리가 딱 그 자리라더군요."

"음..."

"여기 이 친구가 주상전하께 성균관 사업으로 단망에 올리라 아뢰었습니다."

"우리 꺽정이가?"


덕분에 화살은 또 석정에게 돌아왔다. 그 틈을 타서 심유와 유상운은 석정을 슬쩍 밀치고 나머지 두개의 너럭바위에 걸터앉아버렸다. 너럭바위가 많다지만, 동서남북을 각각 점하고 앉아서 휴식을 취할 겸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도 나눌 만한 너럭바위는 고작 넷이었다. 나머지 바위들은 모두 궁둥이 반쪽이나 앉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개울에 잠긴 채로 푸른 물이끼가 잔뜩 껴서, 그 위로 개울물이 졸졸 흘렀다. 그렇게 박세당과 박세채에 이어, 심유와 유상운까지 너럭바위를 선점해버리니 석정은 앉을 곳도 없었다. 그저 물에 젖을세라 목화를 벗어서 두손으로 안아들 뿐이었다. 그러자 박세당과 박세채가 잘난 얼굴 뚫어지게 석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석정은 조정에서 워낙 따가운 눈총을 당해내느라 이골이 난 터라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어차피 딱 한두달만 계실테니 나쁠 것도 없지요."


박세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피제에 걸려 성균관 사업으로 빠지게 되었으나, 최석정 말대로 나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처럼 명망이 있는 거유巨儒(유명한 유학자)는 당이든 왕이든 후학을 양성하는 성균관 사업이란 자리에 오래 놓아두지도 않는 법이었다. 오히려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선동하고 여론을 조장할까 의심하여 다른 자리로 옮기게 마련이었다.


"출사...하실 거지요?"


석정이 조심스레 묻는 말에 박세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서용하라는 왕의 하교가 떨어지고 나서, 사헌부며, 홍문관이며, 관청마다 사람을 보냈다. 송시열에게 단단히 밉보인 박세당과는 달리 박세채 자신은 오라는 곳이 많았다. 당장은 자리가 없어도, 한두달 후면 망단자에 이름을 올릴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미리 언질도 받았다. 어차피 성균관이야 먼길을 가다가 임시로 거쳐가는 역참처럼 그저 잠깐 있는 곳이니, 출사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마다할 이유는 못 되었다.


"안 그래도, 자인子仁(윤증의 字)형에게 같이 출사하자고 서찰을 보내두었으이. 같이 천거를 받았는데, 나만 출사하긴 좀 그래서."


김수항과 민정중이 왕에게 윤증과 박세채를 출중한 인재라고 천거한 탓에, 박세채는 혹시라도 윤증이 벼슬을 마다하고 자신 혼자 출사하는 모양새가 될까 저어되어 미리 손을 내민 것이었다. 박세당의 둘째 아들 박태보가 호적상으로는 윤증의 조카인 덕에, 박세채까지 윤증과 교분이 깊었다.


"언제요? 며칠 됐는데요?"

"글쎄, 한 닷새 되었나?"

"곧 답신이 오겠네요."


최석정은 겉으로는 심상한 어투로 대꾸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송시열이 아끼는 애제자로는 권상하, 이단하, 이상, 김만기, 민정중, 민유중 같은 자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지만, 항상 첫손 꼽는 고제자高弟子가 윤증이었다. 그런 윤증이 출사하게 되면 송시열은 천군만마를 얻을테니..정말로 께름칙했다.


"스승도 풀려났는데, 고제자답게 당연히 출사해서 보필을 해야지요."


유상운이 무심코 대꾸하자, 박세당과 박세채가 어색한 헛웃음을 지으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석정은 그런 뭔가 양쪽에서 오가며 엉기는 시선을 느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마치 잘 안 보이는 글씨나 그림을 억지로 보려고 애쓰는 듯하면서, 어서 말해보라고 보채는 듯한 눈짓이었다. 그 집요함을 익히 아는 터라 박세당도, 박세채도 안면근육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럴수록 석정은 콧잔등까지 잔뜩 주름이 잡히도록 찌그렸다. 박세채가 슬그머니 눈길을 피해봐도 최석정의 반질반질한 얼굴은 더 가까워졌다. 박세채는 두눈을 신경질적으로 깜빡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흐, 네놈을 어떻게 당하냐."

"역시, 무슨 일 있지요?"


박세채의 한숨을 허락으로 알아들은 박세당이 냅따 입을 열어 해명했다.


"송가가 청풍부로 양이 되면서 한벽루에 제자들 수백, 수천이 몰렸는데, 그중 있어야 할 둘이 보이지 않았다더군."

"형님도 참, 송가가 뭡니까, 송가가...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뭐 어때서? 여긴 이 박세당의 마당이야. 내 마당에서 내가 욕좀 하겠다는데 왜? 이 박세당이 욕하는 인간이 천하에 셋도 안되는데, 그 중 하나가 송시열이면 말 다 했지. 다했어!"


역시 박세당이었다. 박세채는 두눈을 찔끔거렸다. 괜히 서인들 도가니에서 대놓고 송시열을 '송가'라 부를 만한 인물은 흔치 않았다. 송시열의 제자든, 아니든, 서인이라면 누구나 대로大老라는 존칭을 써서 존경의 뜻을 표하는 판국에, 박세당은 언제, 어디서나, 누가 보든, 듣든 '송가'였다. 심지어는 서로 동문간인 서필원과 송시열이 조정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일 때 조차도, 아예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승정원에 넣은데다, 만류하는 사람들이 듣건 말건, 여전히 '송가'였다. 그러니 가끔 박세채 자신도 난처했다. 아마도 8촌이란 굴레마저 없었으면 자신은 박세당과 인연을 끊었을까.


"헌데, 있어야 할...둘이라니요? 그게 누굽니까?"

"김만기, 그리고 윤증."


박세당이 송시열이란 이름만 생각해도 화가 나는 지 울화통을 터뜨리자, 석정은 가만히 말머리를 도로 되돌렸다. 그런데 박세당은 여전히 격앙된 음성으로 김만기와 윤증이란 이름을 밝혔다. 석정은 고개를 비끼고 생각에 반쯤 잠긴 음성으로 대꾸했다.


"광성부원군이야 도성과 궁성의 수비를 하는 입장이니 안 오는 게 당연한데, 명재明齋공(윤증의 별호)은 좀 이상하군요."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지. 송가가 그 와중에 김만기만 찾고 윤증은 안 찾았다니 말일세."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석정은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눈빛만은 은근히 들떴다.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가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윤증의 아비 윤선거가 죽었는데, 송시열이 성의없이 행장을 써준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윤증이 송시열에게 한바탕 성을 낸다거나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고 달갑기도 하여,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두눈이 반짝거렸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다기 보다는..."


박세채는 해명하려다가 석정의 두눈을 보고 멈칫하며 말끝을 흐렸다. 박세채 자신은 누구보다 서인다운 서인이었다. 서인의 뿌리인 율곡 이이를 줄곧 추앙해 왔고, 김집의 문하에서 유학과 예학을 익혔으며, 예송논쟁 때는 자의전이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송시열의 입장을 지지하여 왕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송시열의 손자까지 사위로 맞아서 여태껏 데리고 살았다. 송시열이 풀려났으니 곧 송시열도 돌아올 것이고, 외손주들도 코흘리개를 면했으니, 딸과 사위도 곧 송시열의 그늘로 돌려보내야 하겠지만. 이렇게 송시열과도 혼맥이 닿아 있으니, 자신은 버젓이 서인 중의 서인이었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송시열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죽은 서필원이 사사건건 송시열을 상대로 비난상소를 올리자, 박세당은 아예 드러내놓고 서필원을 편들어, 송시열의 배척을 당한데다, 아끼는 제자인 최석정은 송시열이 간인奸人이라 공격한 최명길의 손자이니 알게 모르게 송시열에 대한 원망이 뿌리를 내렸을 지도 모르고, 또 족질 태보의 표숙表叔(외삼촌)이자 자신의 친우인 윤증도 송시열에 대한 반감이 싹텄을 지도 몰랐다. 자신의 주변이 검은 건지, 송시열이 검은 건지...자신의 주변이 온통 송시열의 적이니, 이러다 꼭 사건 하나 터질 것만 같았다. 박세채는 석정을 돌아보며 대뜸 물었다.


"전하께선 여전히 대로를 미워하시지?"


석정은 뜻밖의 물음에 혀끝이 경직되었다. 자신이 어심을 꿰었다는 소문이 나더니, 요즘 들어 비슷한 질문을 몇번 들었다. 너무나 뻔한 질문이고, 너무나 뻔한 답이지만, 석정은 섣불리 답하지도 못하고 그저 할 말을 잃었다.


"뭐 좀..."

"혹시나 싶어서 미리 말해두지만, 경거망동하지 말게나. 대로는 결코 적으로 돌려선 안되는 거물이니."


혹시나 석정이 왕의 증오심에 동조할까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다. 박세채의 노파심에, 석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적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대로께서 적으로 돌리신 거겠지요. 그동안 저하고 친했던 사람들도 대로의 눈치를 보느라 발길을 끊고, 눈길도 끊고, 했거든요. 또 누구는 밖에선 모르는 척, 집에선 친한 척...!"


석정의 시선이 꼬챙이처럼 유상운과 심유를 콕 찔러들었다. 심유는 겸연쩍은 헛웃음을 흘리며 유상운에게 눈을 흘겼다. 유상운이 최석정을 외면하는 바람에 자신까지 덩달아서 아는 척을 못했을 뿐이었다. 유상운은 유상운대로 얼굴이 벌개진 채로 연신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끝까지 석정을 외면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어쩌다 가끔씩 용기를 내는 데에 시간이 걸려서 탈이었다. 평소엔 이래저래 거침 없이 왕에게 직언을 하는 자신인데도.


"험, 그래서 날 평안감사로 보냈나?"

"보내다뇨?"

"내 평양행에 자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좀 있으이."

"병판대감이 아니구요?"

"자네라던데."

"전 입김이 약해서 촛불도 못 끕니다."

"뭐?"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과장된 겸손을 보이는 석정을 보고 유상운이 어이가 없어서 냅다 반박하려는데, 이내 석정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


"혹시나 싶어서 말씀 드리는 건데, 관기는 첩실로 삼으시면 안됩니다."

"뭐? 자네 나를 뭘로 보고..."

"제가 대감을 한두해 봤습니까?"

"..."

"평양기생이 아무리 빼어나도, 정신을 빼놓으시면, 전하께서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석정이 두번세번 신신당부하자, 유상운과 심유는 정색을 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놀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충고였다. 관기를 첩으로 삼아선 안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하지만 당대의 사대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임지에서 관기를 첩실로 데리고 살며 씨앗까지 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유상운도 더는 화를 낼래야 낼 수도 없었다. 유상운이 평안감사로 제수받고 나서 스스로 위안삼아 심유에게 했던 말도, 평안기생이나 실컷 품을 수 있겠다는 말이었으니. 최석정은 보나마나 자신이 평안감영에 당도하면 평양기생 수청부터 받을 것임을 예견했을 터였다.


"촛불도 못 끈다고?"


유상운이 대뜸 석정의 말을 곱씹으며 딴죽을 걸었다. 여기 수락산 박세당의 초가에서 박세채의 집을 오가며 함께 과거공부를 할 때만 해도, 석정이 일일이 촛불을 붙이고 끄고 하는 것을 지켜본 마당에, 입김으론 촛불도 못 끈다는 겸손 아닌 엄살이 기가 막힌 탓이었다. 물론, 최석정이 말하는 촛불이라는 것이 그 촛불이 아니라, 유상운 자신이 사고를 칠 기미를 보여도 꺼주질 못한다는 비유이자 암시라는 사실을 알 것 같긴 했지만.


"네, 그러니 불씨도 안지 마시라구요. 정히 불씨를 안아야겠거든 그대로 물에 뛰어들 각오 하시구요."

"..."


유상운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불씨도 안지 말라니. 혹여 불씨를 안으면 그대로 물에 뛰어들라니. 좀 야속했다. 자신은 정말로 최석정을 끝까지 외면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나설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평안감사로 떠나게 되어, 차라리 홀가분했다. 이대로, 사실은 최석정과 함께 과거공부를 한 사이라는 것을 밝히고 한 2년간 평안감사로 숨어있다 오면 그만이었다. 그때쯤 되면 자신의 세상은 좀 조용해져 있지 않을까.


작가의말

1. 덥습니다. ㅠㅠ 선풍기도 에어컨도 다 고장이라 이러다 더위 먹겠습니다. 선풍기를 주문을 했는데 하루 빨리 왔음 좋겠네요.


2. 유상운과 심유는 실제로 최석정과 아주 절친한 관계입니다. 특히 심유는 최석정의 형 최석진의 친우였습니다. 최석정과 친하고도 송시열 눈치를 보느라 아는 체를 못하는 캐릭터를 잡으려고 숙종이 송동에 갔던 에피 때부터 계속 벼르고 별렀는데, 결국 유상운으로 선택을 했을 뿐...실제로는 저렇게까지 눈치를 보진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유상운이 나중에는 좀 소심한 구석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유상운은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한 신하였다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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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7.06 11:05
    No. 1

    일요일 아침에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중간쯤에

    ... 아끼는 제자인 최석정은 송시열이 간인이라 공격한 최석정의 손자이니...

    두번째 최석정은 오타인듯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최명길인데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7.06 22:01
    No. 2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7.06 22:36
    No. 3

    촛불도 못끈다라...
    그래도 홍만종은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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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해의 그림자 189 +4 14.06.01 2,196 47 41쪽
189 해의 그림자 188 +12 14.05.26 3,056 43 40쪽
188 해의 그림자 187 +8 14.05.22 1,957 31 42쪽
187 해의 그림자 186 +8 14.05.18 2,169 32 40쪽
186 해의 그림자 185 +13 14.05.11 2,178 35 43쪽
185 해의 그림자 184 +12 14.05.05 2,100 37 42쪽
184 해의 그림자 183 +10 14.04.27 1,861 34 37쪽
183 해의 그림자 182 +8 14.04.21 2,182 45 35쪽
182 해의 그림자 181 +8 14.04.15 2,307 32 42쪽
181 해의 그림자 180 +12 14.04.10 1,899 33 39쪽
180 해의 그림자 179 +12 14.04.06 2,127 29 41쪽
179 해의 그림자 178 +10 14.04.02 1,765 31 42쪽
178 해의 그림자 177 +7 14.03.29 1,685 32 41쪽
177 해의 그림자 176 +7 14.03.25 2,322 32 43쪽
176 해의 그림자 175 +6 14.03.21 2,233 38 36쪽
175 해의 그림자 174 +2 14.03.17 2,108 24 39쪽
174 해의 그림자 173 +4 14.03.13 2,259 98 37쪽
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9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171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9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7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4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4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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