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보다
미하엘은 다음 날 동료들과 함께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왠일로 오늘 아침은 뜨뜻한 고기 스프가 나왔다. 참호였다면 상상도 못할 진수성찬이었다. 하지만 고기 스프를 먹는 조종사들의 얼굴은 썩 밝지만은 않았다. 로이스가 말했다.
“건더기가 그득한 것을 보니, 오늘은 몇 명은 못 돌아오겠군.”
보리스가 말했다.
“닥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위험한 임무를 하는 날이면 꼭 아침부터 진수성찬이 나온단 말이지.. 여태까지 아침에 건더기 많은 고기 스프가 나온 날에 저녁도 다 같이 먹었던 적은 하루도 없었어.”
디터가 말했다.
“그것이 우리 임무 아닌가? 하늘에서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하네.”
미하엘이 속으로 디터를 욕했다.
‘지난번에 꾀병 부린 주제에 아가리만 잘 놀리는 새끼..’
미하엘은 예전에 참호에서 보냈던 나날을 회상했다. 동료들과 함께 지겨운 삽질을 하는데, 갑자기 저 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끼기긱 끼기기긱
한스 파이퍼가 동료들과 함께 영국군의 마크 전차를 노획해 온 것 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한 보병이 중얼거렸다.
“자살 특공대 오셨군.”
“재네들 저러다가 얼마 안 가서 뒤질 것 같지 않냐?”
“저 새끼들 중대장도 미쳤지. 저런 임무를 시키다니..”
미하엘도 잠시 삽질을 멈추고 한스 일행을 쳐다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노획해 온 전차를 기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재넨 뭐가 그렇게 좋을까?”
“나도 전차 한 번 타보고 싶다.”
“밖에서 볼 때야 멋있지 안에 들어가면 엔진 때문에 지옥이 따로 없대. 뜨거운 용광로 안에서 유독 가스를 계속 마시는 거야! 하나도 부럽지 않아.”
미하엘은 동료들과 함께 지겨운 삽질을 시작했다.
‘전차 노획 부대보단 내가 훨씬 처지가 낫지..’
몇 달 뒤, 참호에 겨울이 찾아왔다. 병사들은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자다가 중간에 일어나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걸어 다니다가 다시 잠을 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화와 코트에 묻은 진흙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렇게 한번 군화가 얼어붙으면 동상에 걸려서 발을 절단해야 했다. 미하엘은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동료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뒤질거 뭘 저리 열심히 하냐? 멍청한 새끼들..’
미하엘은 차라리 병에 걸리거나 이대로 얼어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하엘이 있던 쪽에서는 전투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까지는 꿀이라고 생각했지만 겨울이 되니 지루해서 죽을 맛 이었다. 차라리 전투라도 벌어져서 놈들의 통조림을 빼앗아먹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미하엘과 동료들은 발에 동상이 걸렸다. 상태가 심각한 새끼들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는 지경이라 무릎으로 기어다녀야 했다. 절대 꾀병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 그런 녀석들은 위생병한테 발을 잘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미하엘은 동료들과 함께 참호에 쭈그리고 앉아서 모두 양말을 벗고 위생병한테 발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미하엘은 자신보다 심각한 상태의 동료들의 발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조만간 저렇게 되는 건가..
동상에 걸려 발을 절단한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시발..차라리 얼어 죽거나 폐병 걸려 죽는 것이 낫지..’
빌어먹을 위생병이 커다란 바늘을 들고 다니며 뭉툭한 쪽으로 미하엘의 발을 여기저기 찔러댔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나?”
하지만 미하엘의 발에서는 바늘의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말하는 것도 귀찮았던 미하엘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안 느껴지는데?”
그러자 위생병은 점점 대범하게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푸욱!
“아악!!!아악 시발!!! 시발 새끼야!! 존나 아프잖아!”
“상태가 그리 나쁘진 않네. 양말을 자주 갈아 신으라고.”
위생병은 다른 동료의 발을 검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정신이 번쩍 든 미하엘은 여전히 욱씬거리는 발을 손으로 쥐었다.
‘저 시발 새끼가..’
순간 미하엘의 머리 속에는 큰 부상을 입고 죽어 가던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작 바늘에 찔리는 것도 이렇게 아픈데..절대 부상만은 당하고 싶지 않아!’
위이이잉 위이잉
참호 안에 쭈그려 앉아 다시 양말을 신던 미하엘은 정찰기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하늘 위로 정찰기가 비행하고 있었다. 옆에서 발검사를 받던 동료가 말했다.
“조종사 자식들은 침대에서 자고 맨날 고기 스프를 먹는대.”
“저 새끼들은 발에 동상 걸릴 일도 없겠군?”
“고기 스프를 먹으면 뭘해 시발..저 새끼들 평균 수명이 2주가 안된대!”
“발 썩어들어가느니 차라리 고기 스프 먹고 일찍 죽을래.”
미하엘은 동료들이 대화에 끼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위이이잉
펑! 펑!
적군의 대공포 소리와 함께 하늘 여기저기서 시커먼 포연과 함께 포탄이 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정찰기는 포탄을 맞지 않고 유유하게 비행하였다. 미하엘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런 세상이 있구나! 저걸 조종하는 녀석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정찰기가 떠나자 미하엘은 주변에 참호를 둘러보았다.
‘어차피 죽는다면 여기서 썩고 있을 수는 없어! 단 한 번이라도 저걸 내가 직접!’
그로부터 얼마 뒤, 미하엘은 훈련용 팔츠를 타고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와호!!!존나 좋아!!”
거센 바람이 미하엘의 얼굴을 때렸다. 구름 속을 비행하며 미하엘은 눈으로 덮힌 대지 위를 날라 다녔다.
‘이대로 여기서 뒤져도 좋아!!’
하지만 미하엘의 그 착각과 망상은 첫 정찰에서 깨어지고 말았다. 이제 미하엘이 하늘에서 봐야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시커멓고 지그재그 형태로 갈라져 있는 참호였다. 적들이 대공포를 쏘기 시작했다.
펑!펑!펑!
“아아악!!”
미하엘은 재빨리 사진을 촬영한 뒤, 비행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찰기를 선회했다. 그런데 미하엘의 눈에는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황록색의 가스가 마치 낮게 뜬 구름처럼 서서히 바람에 흩날리며 천천히 독일군의 참호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뭐..뭐지?’
그 황록색의 가스는 마치 해일이 밀려오는 것 마냥 엄청나게 긴 전선에서 대규모로 몰려가고 있었다.
‘저..저게 염소 가스?’
“아아악!!!”
참호 속에서 독가스에 의해 얼굴이 초록색으로 변해가며 죽어가던 동료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하엘은 미친듯이 최대 속도로 비행해서 비행장에 도착했다. 정비사들이 미하엘의 비행기를 봐주기 위해 달려나왔다. 미하엘이 벨트를 푸르지도 않고 자리에서 외쳤다.
“가스다!!가스 공격이다!! 조만간 이 쪽에도 몰려올 거야!!빨리 전달해!!”
미하엘의 말을 듣고 정비사와 다른 병사들도 외쳤다.
“가스다! 가스!!”
한 시간쯤 뒤, 적군이 살포한 황록색의 염소 가스는 비행장에도 도착했다. 미하엘은 방독면을 쓴 상태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시발!! 조종사가 되면 방독면 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한참 뒤, 방독면을 벗었음에도 그 특유의 염소 가스 냄새는 비행장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미하엘은 고기 스프를 먹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날 오후, 미하엘은 자신이 게르하르트, 노르만을 이끄는 편대의 편대장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하엘이 식은 땀을 흘리며 장교에게 말했다.
“저보다는 좀 더 숙련된 조종사가 편대장을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첫 전투도 안 치뤄본 애송이들 사이에 껴서 비행하라고? 적이랑 싸우기 전에 놈들이랑 부딪쳐서 뒤질 거야!’
장교가 말했다.
“지금 자네가 제일 고참이야! 게르하르트, 노르만이 편대를 이탈하지 않도록 자네가 미리 잘 교육시키게나! 이번 임무에 성공하면 진급할 수 있을 걸세!”
장교가 자리를 뜨자 미하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 놈들이 훈련만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재일 수도 있어! 일단 교육을 해보자!’
미하엘이 급하게 게르하르트와 노르만에게 달려갔다.
“이보게 자네들, 훈련은 몇 시간 받았나?”
게르하르트가 멍청한 표정으로 말했다.
“15시간 받았습니다!”
노르만이 말했다.
“저는 17시간 받았습니다!”
미하엘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게르하르트와 노르만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편대 비행은 배웠지?”
게르하르트와 노르만이 서로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안 배웠습니다!”
미하엘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인!!!!!!’
이 때, 한스는 뮐러씨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요새 항공기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더군.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왠지 전쟁에서 항공기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것 같네. 하늘을 장악한 군대가 전쟁을 지배하게 되는 걸세.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이나 아이디어는 없는가?”
한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맞는 말이야..하지만 딱히 방법이 있을까..지금의 대공포로는 영..’
근처에서는 신병들이 고참들 앞에서 연극을 하고 있었다. 그 신병들 중에는 프란츠도 있었다. 한스도 머리도 식힐 겸 근처에 가서 주저 앉아서 구경을 시작했다. 신병 스테판은 장교 역할이었고, 마크는 상병 역할, 프란츠는 탈영했다가 잡혀서 사살당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스테판이 근엄하게 프란츠에게 말했다.
“네 놈을 사형에 처한다!”
프란츠는 사형 선고를 받았음에도 겁에 질리지 않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죽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스테판이 물었다.
“뭔데?”
프란츠가 말했다.
“죽는 방법은 제가 선택하게 해 주십시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어떻게 죽고 싶나?”
프란츠가 말했다.
“대공포에 죽고 싶습니다!”
스테판이 대답했다.
“그래! 소원대로 해주지! 이봐 마크! 저 녀석을 나무 위에 묶고 대공포로 사살하라!”
마크는 입으로 대공포 소리를 냈다.
“펑! 펑! 펑! 펑! 펑!”
스테판이 말했다.
“그래! 놈은 죽었는가?”
마크가 쌍안경으로 나무 위를 보는 시늉을 하더니 말했다.
“대공포가 한 방도 맞지 않았습니다!”
스테판이 화를 냈다.
“뭐라고? 한 방도 못 맞춰? 계속 쏴!”
마크가 다시 입으로 대공포 소리를 냈다.
“펑! 펑! 펑! 펑!”
스테판이 말했다.
“이제 그 정도면 됐지?”
마크가 다시 쌍안경으로 관찰하고는 말했다.
“놈은 휘파람 불고 있는데요!”
스테판이 펄펄 뛰며 외쳤다.
“빌어먹을! 죽을 때까지 쏴! 쏘라고!일주일 동안 계속 쏴!”
“펑! 펑! 펑! 펑! 펑! 펑!”
다시 스테판이 마크에게 물었다.
“그래. 놈은 죽었나?”
“죽었습니다!”
“하하! 겨우 맞췄군! 우리 독일의 과학 기술은 세계 최고다!!”
마크가 말했다.
“그..그게···녀석은 굶어 죽었는뎁쇼?”
대공포의 성능은 이렇게 병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조롱당하고 있었던 것 이다. 한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현재로선 지상에서 전투기를 격추시킬 방법은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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