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
한스는 본토에서 서류 작업을 마친 이후 건물 밖으로 나가서 30분 정도 걸어가서 공중 전화를 이용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3A, 자우어크라우트와 맥주가 아이스바인 3인분, 맥주가 좋을 것 이오."
이렇게 암호를 쓰는 이유는 도청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스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레드 오케스트라의 도청 뿐만이 아니었다. 나치당에는 한스 파이퍼를 노리는 정적들이 많았고, 이들이 한스의 통화 내용을 도청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후 한스는 집무실로 돌아온 다음 다그마가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한스가 말했다.
"여기서 세우게."
한스는 지갑에서 돈을 꺼낸 다음 다그마에게 말했다.
"이걸로 근처 레스토랑 가서 식사라도 하고 있게. 3시간 정도 걸릴걸세."
그렇게 한스는 10분 정도 걸어간 다음 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한스는 모자를 푹 눌러쓴 다음 자신을 환영하는 지배인에게 말했다.
"고위급 장군들이 모일 것이니 철저한 보안 유지가 되어야 하오."
이렇게 고위급 장군들이 비밀리에 본토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잘못 알려졌다가는 쿠데타를 시도한다는 누명을 쓸 수 있었기에 무척 조심해야했다. 하지만 현재 프랑스의 민병대가 알자스 로렌 지역을 되찾아야한다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프랑스 군부는 고약하게도 이를 전부 방치하고 있었다. 한스는 프랑스 군부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이 새끼들 뒤에서 부추기고 무기 지원하는거 아냐?'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만은 막기 위해서 알자스 로렌에 일부러 군대 대다수를 빼둔 상태였다. 민병대가 무기를 긴빠이쳐서(긴빠이쳤다고는 하지만 프랑스 군부로부터 모종의 지원을 받고)알자스 로렌을 다시 점거할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이게 성공하고 주민 투표로 알자스 로렌이 다시 프랑스로 편입되고, 프랑스의 민병대는 더욱 세력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현재 프랑스 민병대는 깃발을 들고 애국주의의 광기에 물들어 매일같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한스는 프랑스 군부의 움직임와 민병대에게 뒤에서 무기를 지원해주는 것이 아닌지, 현재 민병대 수장은 누구인지 특수 부대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하라고 시키기 위해서 오늘 모임을 준비한 것 이었다.
'나폴레옹이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러시아의 겨울을 에상 못한 것 이고, 두번째는 외교적으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것이지...양면 전선이 형성되면 모스크바 점령에 성공하더라도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다...하지만 프랑스쪽 민병대가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만약 프랑스 민병대가 군부로부터 무기를 지원받는다는 증거를 잡아낸다면 혹여나 서부전선이 형성되더라도 국제 사회로부터 이를 명분으로 호소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서부전선은 형성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알자스 로렌은 군사적으로 절대 뺏길 수 없다...'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며 한스는 회의를 마치고는 자택으로 향했다. 이제 조만간 최전선으로 가야했고, 마지막으로 에밀라와 마야를 보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한스는 짐을 쌌다. 에밀라의 표정이 언제부턴가 어두웠지만 한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한스는 작년에 뇌물로 받았던 만년필을 찾았다.
'어디갔지?'
한스는 에밀라의 서재로 들어가서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 서랍 안에는 수녀원에 피크 핑커가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여태까지 수녀원에 후원을 해주어서 고맙다는 편지가 있었다. 한스는 피크 핑커가 사망한 것은 알고 있었다.
'수녀원에 에밀라가 후원을 했었군...'
그 때, 에밀라가 자신의 서재로 들어온 다음 한스가 편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억..."
"에밀라?"
에밀라는 완전히 하얗게 질린 상태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스는 그 편지와 에밀라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아...아니지?"
에밀라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헉...허억...헉...허억..."
한스는 에밀라를 눕히고는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에밀라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한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왜...당신이..."
한스가 에밀라의 어깨를 잡고 외쳤다.
"나...나는 이미 수 만명도 넘는 사람을 죽였어!! 근데 어째서 당신이 이런 짓을..."
한스는 에밀라의 손을 바라보았다. 에밀라가 흐느꼈다.
"한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선량한 사람이 아니야...나는 여태까지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운동을 했지만...그 가엾은 여자 때문에 오토가 잘못되는 것만은 원치 않았어..."
한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밀라가 울부짖었다.
"내가 오토를 신경썼다면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거야...오토는 분명 평생동안 후회할거야...사회운동이나 하느라 불쌍한 오토를 돌보지 않았어..."
"에밀라,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오토가 강간을 저지르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
"마야?"
한스의 말에 에밀라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스와 에밀라를 보고 있었다.
"엄마, 강간이 뭐야?"
"마...마야..."
"강간이 뭐야? 오토가 강간했어?"
"아..그..그게 아니야...엄마가 잘못 말한거야..."
그로부터 몇 시간 뒤, 한스는 최전선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열차는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트그덩 트그덩 트그덩 트그덩 트그덩 트그덩
1948년, 사춘기가 된 마야는 이 때 어떤 일이 있었은지 깨닫게 된다. 마야가 가족 사진이 있는 액자를 박살냈다.
쨍그랑!!
카를은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논문을 검토했다. 마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토야 전쟁 도중에 정신이 나가버려서 그랬다고 치자. 근데 엄마가? 엄마가 강간당한 여자를 독살했다고? 오토를 위해서?"
카를이 말했다.
"이봐 마야, 생물학적으로 엄마의 선택은 정당했던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마야 너도 수학을 공부하니까 알거 아냐.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강간을 저질러서 여자들에게 씨를 퍼트리면 그 만큼 여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퍼트릴 수 있는거잖아. 그니까 어머니라는 이름의 사악한 여자들은 자신의 아들의 강간을 막을 필요가 없는거야."
"그..그렇지 않아...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오토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거야."
"도덕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인간은 짐승이고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해서 사랑이나 가족이라는 이념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야. 전쟁도 남성 민족이 자신의 정자를 타 국가의 여자들에게 뿌리기 위해 벌이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아!"
마야는 서재에 주저앉았다.
"아니야...으흐흑...아니야..."
마야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카를은 자신의 여동생이 아무리 괴로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야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카를 네 논리대로라면 인간도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는 짐승일 뿐이라는거야? 하지만 카를 너는 결혼도 안할거라며?"
"나는 유전자 번식의 욕구를 져버린 특별한 인간이지. 나는 인간이 99프로의 본능과 1프로의 자유 의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나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치 없는 프로파간다 따위보다는 절대적인 진리인 물리학만을 사랑하지."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책장에 꽂혀있던 톨스토이의 책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도덕, 종교, 문학 이런건 다 거짓말이야! 종교나 문학이나 착한 사람은 결국엔 잘 되고 악한 사람은 파멸한다는 식으로 따분한 설교를 늘어놓는데 너는 이게 말이나 되냐고 생각하냐? 만물은 사악하기에 생존과 번식이 가능했던거야! 하다못해 식물도 자신이 햇빛을 더 받기 위해서 잎사귀를 최대한 넓게 피운다고!"
카를은 톨스토이의 책을 내팽개친 다음 발로 밟았다.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 공학, 그리고 예술 중에는 음악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거짓과 거리를 두고 있어! 문학 나부랭이 종교 나부랭이 이딴거에 종사하는 새끼들은 인생을 헛사는거야!"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고 있던 마야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카를 네 말이 맞아."
마야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
다시 1940년 9월로 돌아오자. 오토 일행과 집행유예 부대원들은 모스크바로부터 불과 15km 떨어진 시가지에서 지옥의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다. 보병들은 등에 야전삽, 수통, 빵가방, 방독면 케이스를 매고서 뿌연 연기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앞서 간 녀석들은 화염 뒤에서 MP40를 냅다 갈기고는 골목으로 튀었다.
뒤쪽에 기갑 척탄병 한 녀석은 구덩이 속에 엎드리고 있다가 소련군이 있는 방향으로 수류탄을 더졌다.
쿠과광!! 콰광!!
그 틈을 타서 독일 보병들이 우르르 한 번에 앞으로 전진했다. 중구경 포탄이 떨어진 곳에 크레이터가 하나 있었고, 경기관총 팀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그 안에 자리를 잡고는 경기관총을 설치했다. 경기관총팀이 엄호를 해주는 동안, 집행유예 부대원들은 수류탄을 달고는 건물로 돌격했다.
"돌격!!!"
쿠과광!! 콰광!! 쿠구궁!!
드륵 드르륵 드르륵
건물 점거에 성공하고 경기관총 팀은 즉시 경기관총을 들고 건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이 시각 오토 파이퍼는 요하네스와 함께 사이드카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는 기관총 탄약을 운반하는 임무를 하고 있었다. T-34의 연료와 탄약이 모조리 떨어졌기에 오토는 집행유예 부대원으로서 온갖 임무는 다 도맡아 하고 있었던 것 이다. 오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오토바이를 기동했다. 저 앞에 중구경 포탄에 의해 발생한 커다란 크레이터가 보였다. 오토는 그 크레이터를 피해서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끼이익!!
우측 건물 창문에서 소련군의 모신나강이 불을 뿜었다.
타앙!!
쉿! 쉬잇!!
"으아악!!!"
오토는 최고 속도로 오토바이를 운전했다. 마침내 아군 보병들이 점령한 건물에 도착했다.
끼이익!!
오토는 에밀과 함께 탄창을 들고는 급하게 3층으로 올라가서 기관총팀에게 탄약을 주었다. 보병들이 외쳤다.
"왜 이렇게 늦는거야!!"
"빨리 좀 오라고!!"
다른 보병들이 와서는 외쳤다.
"뭐야!! 수류탄은 없잖아!"
"이봐 운반병!! 똑바로 하라고!!"
이제 오토는 탄약 뿐만 아니라 식량까지 운반해야 했다. 오토는 오토바이를 타고 급하게 본부로 돌아갔다. 가던 도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티거 소대장이 된 앙뚜완이었다.
'시발!!!'
앙뚜완은 보병과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 오토는 빠른 속도로 오토바이를 기동해서 앙뚜완을 피해갔다. 현재 오토는 장교가 아니었고 앙뚜완은 소위였기 때문에 지금은 엮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이었다. 그렇게 오토는 본부로 돌아간 다음, 식량이 들어있는 컨테이너를 등에 매고 다시 오토바이를 탔다.
트르릉 트르릉 트르르릉
그렇게 오토는 에밀과 함께 식량이 들어있는 컨테이너를 운반해서 갖다주었다. 오토는 보병들과 함께 식량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좆같네...'
창문 밖을 보니, 대전차 포병 두 명이 뒤에서 대전차포를 밀고 한 명은 앞에서 포신을 잡고는 셋이 힘을 합쳐서 대전차포를 운반해오고 있었다. 멀리서 대구경포가 둥둥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근 건물의 창문이 와장창 박살나는 소리도 들렸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쿠르릉 쿠릉
옥상 위에 있는 저격수가 간간히 저격총을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탕!! 타앙!!!
독일 병사들은 골목 하나를 전진할 때마다 골목 뒤에서 엄폐했다가 수류탄을 던진 다음 한 블럭씩 전진해야 했다.
쿠과광!!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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