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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렁
작품등록일 :
2021.07.30 17:00
최근연재일 :
2021.08.25 00:21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4,885
추천수 :
88
글자수 :
118,855

작성
21.07.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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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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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평범한 동생

DUMMY

중학교 3학년의 가을. 스탠드에 앉아 가만히 앞을 바라보니 석양이 저무는 태양 아래 학생들이 한껏 기합을 넣고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나와 같은 야구부원들이었다.


하나- 둘- 기경중 화이팅!


곧 다가올 시합에 흥분돼서인지 긴장돼서인지 목청이 터지라고 구호를 부르며 러닝을 하는 데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내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를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응? 뭐라고?”


내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신예지가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니 석양에 닿아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새삼 익숙한 얼굴인지라 나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꿉친구로 벌써 10년씩이나 봐온 사이였다.


나 참, 다시 말하기 귀찮은데. 그래도 중요한 얘기이므로 다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야구 그만둘 거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래. 투정 부릴 거면 나한테 하지 말고 감독한테 하던가.”


아무래도 녀석은 나의 얘기를 그저 흘려들은 것이 분명했다. 뭐, 평소에도 많이 이랬으니 뭐라 할 말이 없긴 하지만. 훈련이 너무 힘든 걸 어떻게 해.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침묵을 이어갔다. 계속 멍하니 스탠드에 앉아 있으니 문득 신예지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왜.”


“진짜?”


“뭐가.”


“야구 그만둔다는 거.”


“한 번에 좀 듣지 그랬냐.”


나는 괜스레 퉁명하게 대답했다. 왠지 세 번이나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싫었다.


“그래서 진심이냐고.”


신예지가 이번에는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되물어 왔다. 그 녀석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니 무시할 마음도 나지 않았다.


“진심이야. 중학교까지만 하고 그만두려고.”


“여태까지 잘하다가 왜?”


굉장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니, 내가 야구를 그만둔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내가 계속한다고 해서 프로가 될 것 같지도 않고.”


“음,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에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사실이긴 했다. 나는 그저 그런 9번 타자이자 평범한 외야수에 불과했으니까. 우리 중학교가 워낙 약체팀이었던지라 이런 나조차도 주전으로 뛸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너희 우성 오빠처럼 말이야. 좋아하잖아. 야구.”


우리 형처럼이라.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형은 현재 프로 스카우트들에게 주목받는 에이스 투수였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이다. 온종일 야구만 하고, 또 잘하는 형과 나는 결코 비교될 수 없었다. 한 10년 전 이야기면 몰라도...


아니다. 그때도 형은 야구를 잘했다.


“글쎄.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서.”


어쩌면 일종의 회의감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마냥 좋아서 하던 것이 현실과 마주하게 되어 그 환상을 깨트려버린 모양이었다. 지금의 나는 결코 형과 같이 될 수 없었다.


“너 말이야 혹시-”


신예지가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야! 방성우! 농땡이 그만 부리고 튀어나와!”


감독님의 벼락같은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일어섰다. 일어서서 문득 신예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한 것일까.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 봐.”


“...그래.”


뭐, 별말 아니었겠지. 오히려 지금 더 걱정되는 것은 나였다.


“이 새끼가, 빨리 안 와?!”


“넵!”


또다시 터져오는 감독님의 호통에 나는 바람과 같이 달려갔다. 정말 맞을 수도 있으니.


달리면서 뒤를 힐끔 바라보니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저 휑한 스탠드에 뿌연 흙먼지만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이틀 뒤에 바로 연습경기가 있으니 다들 딴생각 말고 집으로 곧장 돌아가라.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이상!”


““네!””


모든 훈련이 끝나고 나는 가볍게 샤워를 한 뒤 조용히 짐을 챙겼다.


연습경기라. 그럼 그날에는 훈련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참 편한 날이다. 어차피 연습이니 그렇게 부담감도 없고. 눈에 띄어야 하는 얘들에게는 물론 중요하겠지만 나는 어차피 고등학교 올라가면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으니 말이다.


올해가 마지막이라. 나는 조용히 야구부에 있는 나의 수납장을 바라보았다.


“야, 아까 예지랑 뭔 얘기 했냐?”


멍하니 서서 수납장을 바라보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빠르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또 익숙한 얼굴이었다. 3년 동안 야구부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뭐라고? 옛날에 같이 동네 야구를 했었던 포수 김수영?”


“갑자기 뭔 헛소리야. 아까 예지랑 뭔 얘기 했냐고.”


그냥 갑자기 소개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헛소리라니.


“그게 왜 궁금한데.”


“아니, 그냥. 모두 훈련하는 거 뻔히 보이는데 왜 앉아서 염장질이나 하고 있는가 싶어서.”


거 참 나보다도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군.


“어딜 봐서 염장질이야? 그냥 옆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우리한텐 그것도 환상이다, 인마.”


...이건 좀 불쌍하네. 하지만 나도 신예지가 없었으면 아는 여자 사람이라곤 엄마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니라 쟤네겠지. 너도 예지랑 같이 앉아있던 적 있었잖아.”


“그건 좀 느낌이 다른데... 아무튼, 묻는 거에나 답해!”


“그냥 야구 얘기만 했지. 걔는 야구 광팬이니까. 사람도 별로 없는 고교야구를 혼자 보러 다니기도 하는걸.”


야구 얘기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 하긴, 걔 아니면 어떤 여중생이 프로도 아니고 고교야구를 보겠냐. 거기에 우성이 형이 있어서도 있긴 하겠지만.”


김수영이 웃으며 말했다.


김수영은 워낙 인상이 푸근해서 어떨 때 보면 곰... 그냥 곰보다도 테디베어 같은 느낌이 나곤 한다.


아무튼, 굉장히 친근한 얼굴이란 소리이다. 녀석의 얼굴도 내게는 참 닳고 닳은 얼굴이다. 새삼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부실의 문을 잠그고 나와 수영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녀석과 우리 집은 굉장히 가까웠기에 늘 같이 하교를 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켜진 전등이 길거리를 환하게 비췄다. 회색의 아스팔트가 달빛과 전등이 섞인 빛을 반사했다.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지만 그런데도 가끔 보면 감상에 젖을 때가 있다. 그 종종은 지금인 모양이었다. 밤의 마력은 대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까부터 계속 머리에서 떠올리고 있던 고민 탓에 머리가 답답했다.


“너는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야구 계속할 거야?”


“음, 그렇지. 나는 너희 형 공도 잡아본 특급 포수거든.”


“뭐 동네 야구 시절 얘기를 하고 있냐...”


아직 중3인데 벌써부터 과거의 영광에 젖어있다니. 아무래도 녀석은 그른 모양이다. 속 편해서 좋겠다.


“젠장, 지금도 괜찮은 투수 하나만 있으면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수영이가 주먹을 꽉 쥐고는 말했다. 어지간히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근데 쟤가 그렇게까지 잘하던가?


“꿈 깨라. 만약 그런 놈이 있어도 넌 그 공 못 받을걸?”


그러자 김수영이 나를 힐끔 바라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투수였으면 공이 너무 느려서 받을 마음도 안 날 게 분명하겠지.”


쓸데없는 소리지만 쓸데없는 만큼 사심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라? 이것이... 분노?


“느린 공도 못 받는 게 무슨 포수래.”


나는 일부로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녀석의 대답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연히 못 받지. 던진 순간 깡-하고 공이 저 너머로 가 있을 텐데 내가 어떻게 받아.”


허허, 열 받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수영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옆에 있던 공터로 향했다.





휘익-


퍽-


무언가 바람을 뚫고 날아가 탁하고 받는소리. 당연하게도 공이 글러브에 박히는 소리였다. 잠시 공터에서 야구로 내기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뭘 상상했는가?


전등 바로 아래서 수영이와 몸풀기로 캐치볼을 하고 있을 때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야, 괜찮겠냐? 나는 한 번에 떡볶이 4인분 이상 먹을 수도 있다고.”


“제대로 하고서나 말하셔. 그런데 정말 내 공을 받아보는 것만으로 구속을 알 수 있어?”


“그럼! 내가 평생 공만 받아본 사람인데. 그 정도면 한눈에 봐도 딱 알지. 120km 이상만 던지면 네 승리, 아니면 내 승리. 오케이?”


“콜.”


솔직히 개 억지 같기는 하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 수영이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수락했다. 틀리면 틀렸지.


그리고 내가 설마 120km도 못 던지겠어?



“아, 기회는 다섯 번이다. 특별히 많이 준거야.”


“조용히.”


나는 손에 글러브를 끼고 조용히 공을 손에 감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형이 내게 알려준 적이 있었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직구 그립이었다.


중지 검지를 실밥에 두고... 이렇게였나?


“구종은 다 골랐냐?”


“아, 조용히 좀.”


좋아, 아마 이거겠지. 뭔가 감기는 느낌이 나니까.


“좋아, 던진다!”


휙-


턱...


...형편없는 위력이었다.


“한 번. 야, 그 동작은 좀 아니지 않냐...? 형이 투수인 놈이 말이야.”


녀석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시끄러워. 그러고 보니 포수 장비도 가지고 다니는 놈이 지금 안 써도 되겠어?”


“깜빡하긴 했는데, 괜찮을 것 같네.”


...하긴.


어쨌건 아까는 힘이 아예 실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에이씨. 뭔가 빼먹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아까 수영이는 동작이 이상하다고 말했지. 동작이라. 동작?




“공을 잘 던지려면 뭐가 가장 중요한 줄 알아?”


분명 형의 목소리였다.


“근육인가?”


“아니, 답은 동작이지. 정확한 동작으로 공에 제대로 힘을 싣는 거야. 먼저 이렇게 발을 뒤로-”




음? 갑자기 웬 회상? 연출이 이상하잖아. 형이 죽은 것도 아닌데.


아무튼, 떠올랐다. 그때 형은 이 직구의 그립과 정확한 동작까지 자세히 알려준 적이 있었다. 물론 이 동작을 따라 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떡볶이 4인분을 내 돈으로 사는 끔찍한 일만은 막아야 한다.


“언제까지 준비만 할 거야? 이러다 아침 되겠다야.”


수영이의 말이 내 귀에 스쳐 지나가듯 했다. 나는 그때,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었다. 조용히 나는 그 회상 속의 형의 모습을 따라서 움직였다.


온몸에 힘을 싣도록, 다리를 들어 올린 후, 최대한으로 벌리고, 릴리스 포인트를... 어, 뭐였지?


훅-


콰아앙!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서 빠져나간 공이 수영이 바로 뒤에 있던 전봇대에 직격했다. 그러자 전봇대 위에 앉아 잠을 청하던 비둘기들이 푸드덕대며 저 멀리 날아갔다.


흠, 이번엔 형편없이 빗나가긴 했지만 어쩐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스트레스가 약간 해소되는 느낌.


“아 씹, 실수. 야, 다시 던져볼게. 지금 뭔가 느낌이 좋았는데.”


그리고 앞을 보자 수영이는 잠시 굳은 채로 떨어져서 굴러가는 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아? 뭐해?”


“아, 아니... 잠깐만 준비 좀 하고.”


갑자기 영문모를 소리를 하더니 수영이는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안 써도 된다며.”


“...신경 꺼.”


다시 돌아온 녀석은 포수 장비를 모두 장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제구가 불안했나 보다. 안 불안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자, 플레이볼!”


어쩐지 쭈그려 앉아 글러브를 내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조금 신나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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