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자검왕의 딸.
남궁적은 피가 식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당연우가 피를 쏟아 내며 쓰러졌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남궁적이 벼락처럼 날아들어 제갈민의 연검을 빼앗았다.
제갈민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상처가 깊진 않다. 내상도 없고.’
당연우의 상처를 살핀 남궁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눈을 부라려 주위를 둘러봤다.
본래 애들 싸움에 어른이 나설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연우가 남궁린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이상 남궁적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간과할 수 없었다.
“남궁호!”
“옛! 숙부님.”
남궁세가의 기대주라 불리는 창천승룡 남궁호가 잽싸게 남궁적 앞으로 튀어나왔다.
사실 그도 남궁린의 일로 당연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멀찍이 그와 대화할 시기를 기다릴 찰나 당연우와 대화를 나누던 제갈민이 갑자기 칼을 빼 들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것에 당황한 건 남궁호도 마찬가지였다.
“네놈은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냐!”
남궁적이 눈을 부라렸다.
“죄송합니다. 숙부님. 제 불찰이었습니다.”
남궁호는 자신을 책망하는 남궁적의 태도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연회에 오기 전에 충분히 당연우와 관련된 정보를 숙지하고 있었다.
‘숙부님께서 당 공자에게 은혜를 입히려는 거구나.’
그리고 남궁호는 지금 유별나게 요란을 떠는 남궁적의 태도에서 그 뜻을 파악했다.
“당 가주님,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남궁적이 함께 온 당중월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행동은 남의 연회에 행패를 부린 셈이었다. 그 대신 세가의 대표로 온 남궁적이 직접 고개까지 숙여 사과의 뜻을 밝혔다.
당중월은 이해한다는 듯 그의 사과를 받았다.
“허허, 아이들끼리 치고받고 할 수 있는 거 아니요?”
도리어 오대세가에서는 후기지수들의 비무를 장려했다. 서로가 절차탁마해 실력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당중월의 배려에도 남궁적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하지만 당 공자는 현재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허, 남궁세가가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는 건가?’
당중월은 최근 당연우 중독사건까지 파악한 남궁세가의 정보력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큰 상처는 아니니 그렇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당연우의 부상이 심각했다면 남궁린의 치료는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남궁적도 당연우의 상처가 깊지 않은 걸 확인했다.
그의 시선이 일의 원흉인 제갈민을 향해 돌아갔다.
“남궁세가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세가의 대표가 이를 갈며 으름장을 놓자 제갈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당연우의 도발에 화를 못 이겨 출수하긴 했지만, 그리 대단한 수는 아니었다.
“아니, 그게······.”
“제갈 공자.”
변명하려는 제갈민 앞으로 남궁호가 다가왔다.
그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찌 무공도 익히지 않은 아이에게 살초를 뿌렸소?”
상황을 돌이켜 보니 제갈민은 아직 어린 십 대 소년에게 검을 뽑은 모양새였다.
“아니, 당문의 아이가 무공을 모른다고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그가 변명하고자 입을 열었지만 남궁호가 대뜸 그의 말을 잘랐다.
남궁호가 직접 제갈민에게 책임을 지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당 공자, 괜찮은가? 지혈만 하면······”
당연우에게 다가간 남궁적이 걱정을 보였다.
앞서 파악한대로 당연우의 상처는 거죽만 베인 정도라 지혈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당연우가 엄살을 피웠다.
“흐헉! 저는 이대로 죽는 건가요? 그러면 유언으로는 제갈세가를 믿지 말라고 말해 주세요.”
“아니 죽일 생각은······.”
남궁적이 말하기도 전에 당연우가 나뒹굴었다.
“아이고야! 나 죽는다! 무림인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네!”
당연우의 뒷말에 남궁적이 당황했다.
“다, 당 공자, 일단 지혈을······.”
“헉! 저를 죽이려고요? 역시 남궁세가는 제갈세가와 사이가 돈독하네요. 제갈세가의 범죄를 막기 위해 설마 살인멸구를 하시려는 건가요?”
남궁적은 당연우의 호들갑에 당연우를 지혈하고자 뻗은 손을 거두었다.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궁적이 살수를 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제갈민은 이 자리에서 살초를 썼기에 당연우의 말이 억지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당연우의 요란법석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허어, 조카의 목숨을 걸고 우리와 흥정할 심산인가?’
남궁세가 일행은 남궁린과 함께 당문을 방문한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남궁린이 구음절맥이란 사실은 사자검왕과 남궁세가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기에 강호에 모르는 이가 오히려 드물었다.
그래서 굳이 남궁린을 이번 회합에 데려온 일을 숨기지 않았다.
‘소문을 낸 건 아니었으나 참석자 명단에 린이의 이름이 올랐으니 모르진 않았겠지······.’
당연우는 영악하게도 남궁세가의 어려운 사정을 꼬집은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궁적이나 남궁세가나 남궁린의 목숨을 걸고 흥정할 수 없었다.
‘이 아이가 무능하다고? 그렇다면 당문은 어린 아이조차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심계가 대단하구나.’
남궁적이 당연우에게 물었다.
“공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 남궁세가의 이름을 걸고 원하는 바를 이뤄 주지.”
“아, 그래요? 조금 고통이 덜하네요. 죽을 정도는 아닌가 봐요.”
대뜸 태도를 바꾸는 당연우의 모습에 남궁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영민하게 빛을 내는 당연우의 두 눈은 제갈민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처가 깊어 몇 개월 정도 요양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당연우가 태연히 가슴팍을 보며 말했다.
‘허어, 오늘 남궁세가의 검이 당문의 손에 들리는구나.’
남궁적은 남궁린이 앞으로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남궁린이 안휘에서 사천까지 오는 것도 상당히 무리했다. 아무런 소득 없이 그녀를 본가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당연우가 그대로 이를 핑계로 드러누운다면 남궁적은 손쓸 방법이 없었다.
남궁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 단장수가 뭘 하길 원하지?”
“많이 아프네요. 이런 아픔을 알아야 다들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 않고 조심할 텐데요.”
“······알겠네.”
‘당 공자는 우리가 대신해 직접 제갈민을 처벌하길 바라는구나.’
남궁적이 당연우의 의도를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 공자, 이 자리에서 책임을 져야겠네.”
그가 제갈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제가 뭘······.”
제갈민은 남궁적의 시선에 찔끔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없었다. 연회장에 모인 후기지수들의 차가운 시선이 제갈민을 향하고 있었다.
제갈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제길, 제길! 제기랄!’
그가 원한을 담아 당연우를 노려봤다.
그러자 당연우가 곧장 엄살을 피우며 바닥에 누웠다. 명문가의 자제라고는 볼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효과는 뛰어났다. 남궁적이 당연우와 제갈민 사이를 가로막았다.
“호야, 남궁세가의 정의를 보여 주거라.”
“알겠습니다.”
제갈민의 시선이 남궁호를 향했다.
“제갈 소협, 숙부님께선 이 정도로 만족하실 거다.”
남궁호의 일격을 받아내는 걸로 단장수의 화를 모면한다면 싼값이었다.
제갈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남궁호가 제갈민을 향해 일 장을 날렸다.
‘어설프게 손을 썼다가 당 공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간 일만 번거로워지겠지.’
남궁호는 괜히 두 번 수고하지 않도록 손에 내공을 넉넉하게 실었다.
게다가 제갈민도 제갈세가에서 밀어주는 기대주였다.
제갈민은 남궁호, 당연강과 함께 오기린으로 불렸다.
다만 남궁호가 간과한 것이 제갈민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유는 무공실력보다 과거시험에서 준수한 성적을 냈기 때문이었다.
“커헉!”
남궁호의 장력을 받은 제갈민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갈민은 남궁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내상을 입었다.
바닥에 제갈민이 토해낸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에구, 괜찮으세요? 저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이를 지켜본 당연우가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는 단 한 번도 복수를 원한다거나 제갈민을 혼내 달라고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궁적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 공자가 어디서부터 남궁세가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군. 그의 의도대로 따르는 수밖에.’
남궁적이 내심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이 일은 당 공자의 의사와는 상관없네. 그저 남궁세가가 불의를 참지 못한 것뿐.”
제갈민이 이번 일을 문제 삼아 당연우를 노린다면 남궁세가가 직접 나서 지켜주겠다는 뜻이었다.
당연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상처를 지혈했다.
미리 준비해 뒀는지 금창약을 태연히 바르고 앞섬을 여몄다.
‘정말이지. 제갈민은 생각보다 허당이군. 오히려 당 공자의 심계가 대단해.’
남궁적은 유유자적한 태도의 당연우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제갈민이 원한을 가지든 말든 남궁세가가 표명한 만큼 이 사건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당 공자의 오성이 뛰어나다 들었는데 오늘 실제로 보니 굉장하구나.”
남궁적은 제갈민의 상태를 살피고 온 남궁호에게 말했다.
남궁호의 시선이 당연우가 나선 문으로 향했다.
“저희 손으로 제갈민을 치게 했습니다. 치졸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굳이 제갈세가와 원한을 쌓을 일을 벌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고수에게 내상을 입혔다. 거기에 누구 손이든 무슨 상관이더냐. 놀라운 계략이다. 어찌 이를 치졸하다고 할 수 있더냐?”
남궁적의 말에 남궁호는 입을 다물었다.
제갈민이 처음부터 당연우에게 좋지 않은 의도로 접근한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갈세가에 가렸지만 당문도 심계나 지략에 있어서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
애초에 독과 암기 자체가 머리가 나빠서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무기였다.
그래서인지 오대세가 안에서 당문과 제갈세가는 늘 이 문제로 서로가 날을 세웠다.
“제갈민이 보기에는 당문의 다른 공자들보다 막내 공자가 만만해 보였겠지.”
남궁적의 말에 남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강의 독공은 제갈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연해는 적아를 가리지 않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시선이 나이 어린 당연우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승부에서 제갈가 아이가 패하고 당문의 아이가 이겼어. 허허, 당문의 가주님께선 막내 공자를 비싼 값에 팔 생각이던데······.”
“그럼 저희가 매입해야겠군요.”
당연우는 의료계에 격변을 부를 정도로 뛰어난 의술 실력과 제갈가를 농락한 오성을 가졌다.
당장 절맥증 치료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군침이 흐를 만한 인재였다.
특히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얼마나 발전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인재를 놓칠 수야 없지.”
***
나는 연회장을 나와 곧장 의원부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이 재밌게 되어가고 있어.’
제갈민이 시비를 걸어왔을 때만 해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었다.
그가 손에 쓰러지는 것까지는 생각했지만, 남궁세가의 손을 빌리는 건 남궁적의 마음을 읽은 뒤에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일단은 내상을 입은 척 당연해의 시선에서 몸을 숨길 생각이었는데······.”
그사이 당연해가 중앙전장 사천지부와의 손을 잡은 이유를 캐낼 생각이었다.
어떤 이유로 중앙전장이 당연해의 의뢰를 받아 암살 기도를 했는지, 단순히 자금 지원을 넘어 당문의 후계자 경합에 뛰었는지 의문이었다.
‘중앙전장이 중원 전국에 걸쳐 지점을 둔 거대 금융 기관이야. 그런 그들이 왜 당문에 손을 댔을까?’
당연해를 지원한다면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만으로도 충분했다.
‘약점을 잡힌 걸까? 아니면 약점을 잡으려는 걸까?’
섣불리 중앙전장을 캐다가 당연해의 눈총을 받아 처리될 수도 있었다.
이 가운데 남궁세가의 등장은 분명 호재였다.
“그러니까 사자검왕의 딸이 구음절맥이란 말이지?”
나는 남궁세가란 패를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하며 연구실 창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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