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제갈민과 친선(?) 비무.
“분명 세가의 손님을 이리 세워두는 게 제갈세가의 법도는 아니지.”
제갈인이 순순히 항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거인이고 말이지.”
제갈천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거인은 향시 급제자를 일컫는 말로 교육을 받으면 언제라도 지방직에 오를 수 있는 준 관인이었다.
또 제갈민이 낙방한 시험이기도 했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제갈인이 직접 접객실로 안내했다.
당연강은 당종철과 호위대원에게 포로를 지키라 명했다.
나는 제갈인의 뒤를 따라 제갈세가 안을 구경했다.
의독당과 철암당으로 인해 의약품 제조실이나 대장간이 주축을 이루는 당문과는 크게 달랐다.
‘평범······한가?’
건물은 별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위치 선정이 눈에 거슬렸다.
전각이 몇 개 있는지, 드문드문 놓인 석탑의 위치 등 혼잡하다는 인상을 줬다.
‘진이란 건가?’
암제가 남긴 태극분열심법의 비밀이 이 제갈세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 가주인 제갈인에게 강압적으로 나선 것도 있었다.
“자, 여기서 이야기를 다시 나누지요.”
접객실에 이르자 제갈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강과 당종철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여, 연우야······.”
「그건 강하게 나가는 게 아니라 무례한 거란다.」
당연강이 제갈인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와, 큰형이 이렇게 순진했었나?’
나는 그의 생각을 읽고 도리어 놀랐다.
당중월이 계속 채찍질해가면서 당연강을 가르쳤던 게 이해가 갔다.
‘사람이 좋은데······ 물러.’
당연해라면 제갈이고 지랄이고 제갈인 면전에 쌍욕을 박았을 거다.
그리고 습격 사건을 빌미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까지 이권이든 뭐든 제갈세가에서 빼앗아 먹을 건 빼먹었을 게 틀림없었다.
“형님, 적에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여, 연우야!”
“허! 그럼 당문은 우리 제갈가를 적으로 보시겠다 이 말인가?”
제갈인이 오히려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우리는 가주를 대신해 온 사절단이었다. 때문에 그 말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먼저 당문을 적으로 보고 습격한 건 제갈세가겠죠?”
이백 명의 습격자는 도를 넘었다.
열 배가 넘는 전력이었으니 일반적이라면 이기기는커녕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번 승리는 온전히 당문의 독공과 암기술이 다수를 상대하는데 특화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서 제갈세가는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
나는 톡 까놓고 물었다.
동시에 제갈인의 표층 심리를 살폈다.
도반삼양귀원공으로 중단전이 열린 뒤에는 절정고수라도 표층 심리가 어느 정도 보였다.
「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일까? 당연강 소가주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걸로 하고 호북성 내 당문의 사업을 지원해 주는······.」
제갈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는 정작 나에 대한 보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뭐, 길게 이야기를 나눠 봐야 의미가 없죠. 저희는 거래하려는 게 아니라 사죄를 받으려고 하는 거니까요.”
나는 제갈인에게 입장 차를 상기시켰다.
이어 요구를 말했다.
“먼저 저희 형님을 대표자 회의 때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운영하는 표국이나 상회에도 편의를 부탁드리고요. 아! 이건 문서로도 남겨 주세요.”
먼저 그가 생각한 요건을 던졌다.
제갈인도 세가에서 지은 죄가 있으니 쉽게 수긍했다.
“좋지. 그걸로 충분한가?”
“아뇨. 제가 받은 피해에 관한 보상은 아직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요?”
나는 제갈인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제갈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이야기하게.”
“제갈세가의 기문둔갑을 배워 보고 싶습니다.”
“기문둔갑?”
제갈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문둔갑이란 학계에선 잡학이라 무시됐고, 무인에게는 사술이라 기피하는 물건이었다.
그런 인식에 제갈세가도 진법에 열을 올렸지, 등한시해 왔다.
「그러고 보니 장로 중 기문둔갑에 목맨 분이 계셨지. 기문둔갑이야 뭐 그 정도야.」
제갈인의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제갈세가의 비전을 쉽게······.”
“기문둔갑이 뭔 비전인가요? 잡학이라고 무시하는 걸로 아는데요? 저야 어차피 취미지만······.”
내가 사정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자 제갈인도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가주인 그도 기문둔갑을 천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제갈민이랑 비무를 한번 해 보고 싶은데요? 저도 최근 무공을 배워서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거든요.”
“비무?”
「음, 아들을 패주고 싶다는 건가?」
“사생결단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제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거니까요. 집안에서는 그게······ 아무래도 어렵잖아요?”
내 말에 제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수를 속속들이 아는 터라 세가 내 비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한데 그래서야 쉽지 않을 텐데?”
「녀석에게 좀 봐주라 할까?」
“제 실력을 제대로 알아야 밖에 나가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겠죠?”
‘안 봐줘도 그 새끼 하나 정도는 짓밟을 수 있어. 그것보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이미 제갈휘를 상대로 싸워 본 바, 그보다 하수인 제갈민따위가 성에 찰리 만무했다.
‘일단 제갈민, 날 노린 그 새끼. 아주 피똥을 싸게 해주마.’
비무대 주위로 각 세가의 무인들이 자리를 채웠다.
나보다는 오기린인 제갈인의 실력을 보고자 모인 이들이었다.
‘비밀로 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무공 실력을 숨길 생각이 없었던 터라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얻어터질 상대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네가 나를 지목했다 들었다.”
「잘됐다. 이번 기회에 혼쭐을 내줘야지.」
비무대 맞은 편에서 제갈민이 올라서며 말했다.
이 눈치 없는 놈은 이 자리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 그게 더 밟아 주긴 좋긴 하지.’
괜히 참회하고 반성하면 마음만 불편했다.
나는 제갈민에게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당가의 연우가 한 수 배우고자 합니다.”
“제갈가의 민이 한 수 가르쳐 드리겠소.”
제갈민이 이죽거리며 목검을 들었다.
「네놈이 검이 뭔지 알겠더냐?」
독과 암기를 제한당하는 당문 출신 무인들은 비무에서 늘 손해를 보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제갈인이나 당연강도 내가 비무를 요청했을 때 의아해했다.
‘탐명검법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탐명마인이 자취를 감춘 지 삼백 년. 강달이 민명검법이라는 이름으로 개조한 검법으로 개조했으니 민명검법으로 알아볼 순 있었다.
제갈휘에게 빼앗은 칠현무형검이 떠올랐다.
‘제갈세가에서 제갈가의 무공을 쓸 순 없지.’
두 개의 검법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춤을 추며 얽혀들었다.
마치 두 명의 검객이 논검을 나누는 듯한 모양새였다.
탐명검은 수비를 도외시한 필살의 검공이다. 목검이더라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만한 힘이 담긴 무공이었다.
철저히 실초로 이뤄져 있기에 빠르고 강맹했으나, 반대로 초식들이 수비를 도외시한 일격필살로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실력 차가 큰 상대에게는 도리어 스스로 사지로 뛰어드는 꼴이 됐다.
역으로 칠현무형검은 허초 속에 실초를 숨기는 것이 주된 검이었다.
가지의 수를 만들어내 상대를 현혹하는 검이다.
‘이 두 개의 검을 하나로 한다면······.’
그간 다양한 무공을 익혀왔지만 깨달음의 주체가 되는 이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제갈휘를 상대할 때 그 아쉬움이 무엇보다 컸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검을 하나로 합치면 어떨까?’
그런 의문이 들었고 제갈민을 한 번 짓밟는 겸 시험해보고자 비무를 청했다.
나는 생각 끝에 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탐명검 일식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흐헉!”
소름 끼치는 맹공에 제갈민이 숨을 들이켰다.
제갈민이 칠현무형검으로 반격했다.
그의 검이 울며 세 갈래로 뻗어나갔다,
‘역시 제갈휘에 비해 화후가 부족해.’
제갈세가의 기대주라 하지만 실전에서 구르고 구른 제갈휘와 같은 수준일 순 없었다.
같은 무공에 깨달음은 제갈휘가 월등히 높았다.
‘이렇게 약해서야 실험이 되질 않는데?’
이미 제갈휘의 칠현무형검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고, 그의 검도 모두 삼켰다.
검을 몇 번 나누기도 전에 제갈민의 자세가 크게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탐명검의 검로에 칠현무형검이 겹쳤다.
강달이 칠현무형검을 펼쳤고, 제갈휘가 탐명검을 휘둘렀다.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쉽진 않은데 못할 건 또 아니네.’
제갈민의 검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머릿속에 강달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칠현무형검을 펼쳤다. 제갈휘 또한 탐명검으로 답을 냈다.
‘마치 제갈민이 내린 문제에 두 명의 고수가 저마다 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두 개의 검이 같은 답을 내놓았을 때야 검을 내밀었다. 그것은 탐명검도 아니고 칠현무형검도 아닌 검이었다.
‘탐명무형검······이라고 해야할까?’
허초와 실초가 어지럽게 섞인 검이었다.
정리할 것은 많았으나 새로운 검의 단초를 볼 수 있었다.
제갈민의 상대로는 그 이상의 결과를 보기 어려웠다.
‘자, 이 정도면 됐고······ 그럼 이제 이놈을 다시는 깝죽대지 못할 만큼 짓밟아 줘 볼까?’
나는 크게 뒤로 물러서 제갈민이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를 줬다.
“너······ 왜 갑자기 도망치는 거냐? 아! 몰아칠 체력이 없는 거구나. 헥헥! 하긴 일 년 만에 어찌······ 쿨럭! 내공을 쌓겠어!”
기침까지 토해내는 제갈민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나는 한 마디 툭 던졌다.
“쉽네.”
제갈민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이래서야 한 수 배우긴커녕 내가 가르쳐 줘야겠어.”
속을 살살 긁어내자 제갈민이 결국 폭발했다.
“이 자식!”
그의 검이 부르르 떨며 굉음을 냈다.
칠현무형검의 특징이자 공부가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대신 제갈민의 검이 순식간에 일곱 개로 늘어났다.
‘그래서야 내공 소모가 극심할 텐데?’
나는 제갈민의 생각을 읽고 허초를 분간했다.
‘목인가?’
힘이 잔뜩 들어간 검은 작은 힘에도 방향을 잃었다.
나는 그의 검면을 조금 밀어 궤도를 수정했다.
“이익!”
제갈민이 이를 바득 갈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검은 공간을 베어낼 뿐이다.
얼굴을 붉히며 아득바득 검을 휘둘렀지만, 어느 하나 나게 닿지 않았다.
“헥헥! 너, 너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사술을 허어억, 컥 쓰는 거냐?”
내공과 체력을 모두 소진한 제갈민이 숨을 헐떡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목검을 들었다.
“사술은 무슨, 그러게 수련 좀 하지 그랬어?”
이젠 매타작을 시작할 때였다.
***
“당문의 막내 공자는 머리도 좋을뿐더러 무공 실력도 뛰어나군요.”
이번에도 회합에 남궁세가를 대표해 찾아온 남궁적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다른 세가의 대표들과 임시 관전석에서 당연우와 제갈민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갈인이 자리를 비웠던 터라 남궁적은 눈치 보지 않고 당연우를 마냥 칭찬했다.
“녀석이 사고로 운기가 어려웠던 적이 있었으나, 수련은 꾸준히 해 오고 있었습니다.”
당연강이 기분 좋게 웃으며 남궁적의 말을 거들었다.
물론 당연강도 동생이 무공을 수련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막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당연강이 그렇게 생각할 때 남궁적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동생을 정말 잘 키우셨소.”
“하하, 아시다시피 제가 막내를 업어 키우다시피 했거든요.”
‘업긴 무슨······ 얼마 전까지 죽이려고 이를 갈던 동생이 아니었던가?’
당문의 후계자 경합을 알고 있던 남궁적이 굳이 속내를 토해 내지 않았다.
최근 당연강이 소가주로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된 것에 당연우의 도움이 있다는 사실은 첩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제갈가의 아이와 저 정도 차이라니······ 올해 막내 공자의 나이가 열여섯이라죠?”
남궁적은 눈을 빛내며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장수를 잡기 위해선 장수부터, 당연우 주위 사람부터 공략해 나갈 생각이었다.
“이제 혼인을 생각해도 부족하지 않을 나이네요.”
***
사람들이 비무대에 몰렸을 무렵 당중일이 조용히 연회장을 찾았다.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린 그는 직접 조재한 독무를 연무장 구석구석 설치에 나섰다.
처음에는 무색무미의 산공독이 뿜어지고 이어, 마비독이 흘러나오는 이중 구조였다.
시간에 맞춰 동시에 퍼지도록 기관을 설치해야 했기에 당중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넓은 연회장에 단숨에 독이 퍼질 수 있도록 마흔여덟 개의 기관을 천장에 설치했다.
‘이걸로 오대세가는 분열할 거다!’
당중일이 주위를 살피고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조용히 연회장을 떠났다.
“저놈이 비밀결사 14인객에서 온 놈인가?”
제갈인이 은신을 풀고 당중일이 설치한 기관들을 확인했다.
“당 공자가 말한 대로군. 허! 휘가 첩자였을 줄이야.”
그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 첩자인 사실에 놀라고, 당연우의 선견지명에 다시 한번 놀랐다.
‘당문에 당 공자가 있으니 내 다음 세대엔······ 상당히 힘들어지겠구나.’
제갈인은 부족한 아들을 둔 덕에 가슴앓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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