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살수문.
송재신의 시선이 알록달록 꽃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은 중년인으로 향했다.
가마에 탄 그는 느긋하게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그는 끝 모를 정도로 깊게 곰방대를 빨더니 긴 잿빛 연무를 뿜어냈다.
“하아, 내가 왜 여길······.”
그의 무료한 시선이 송재신과 일백의 소활파 문도들을 향했다.
화려한 옷과 태도, 가마 등으로 송재신과 소활파는 단번에 중년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 당중화······ 당문의 미친개!”
소활파는 나름 실력으로 이름을 알린 중소문파였다.
그러나 그들도 당중화를 알아보곤 기겁했다.
“······와 가지고 이런 개 같은 소릴 들어야지?”
당중화가 짜증을 내자 가마를 짊어지던 시종이나 함께 따라온 무사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중화 앞으로 나간 이들은 독룡대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소활파의 문도들을 향해 거침없이 독을 뿌렸다.
“애들아, 적당히 해. 그러면 내가 많이 화가 난 거 같잖아?”
당중화가 느긋이 재를 툭툭 털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몸을 사리는 독룡대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선임 무사라 볼 수 있는 고수들은 이를 갈며 소활파 문도들에게 힘껏 독장을 날렸다.
“크악!”
비명이 끊임없이 터지자 송재신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하아, 저놈은 내가 나서야 하잖아?”
당중화가 결국 가마에서 나와 땅을 박찼다.
가공할 내공에 그가 밟은 땅이 움푹 파였다.
송재신이 숲으로 도망치자 당중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게······.”
당중화가 이를 단숨에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 가로막은 수목들이 부러지며 그의 손길을 따라 길이 만들어졌다.
이를 본 송재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고 있어.”
당중화는 송재신의 뒷모습이 보이자 다시 도반삼양귀원공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평소 게으르기 짝이 없는 그였지만 데굴거리면서 익히는 심법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당문 안에서도 손꼽히는 내가고수로 성장했다.
***
“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야? 어떻게 애새끼 하나 못 잡아?”
청명해가 버럭 성을 내며 찻잔을 던졌다.
이에 객주들의 눈가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14인객을 지금까지 키운 공이 있다지만······.’
‘아니, 자기가 천라지망을 권하고 망하니까 지랄이야?’
‘일이 안 풀리는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구먼.’
청명해를 향한 객주들의 시선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제아무리 수십 년 동안 14인객을 무림에 암약하는 세력으로 키운 공이 있다지만, 이 같은 처사에 무시당할 객주들이 아니었다.
객주들 개개인 모두 구파와 오대세가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장문인 후보나 가주 후보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후우, 후! 젠장! 우린 아직 본격적인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청명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은거고수 연쇄 살인 사건도 그들이 구파와 오대세가를 뒤집기 전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사전 작업이었다.
중앙전장의 금력과 중원 전서협회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크게 세력을 키운 그들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 그 힘을 과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중일과 백료강, 송재신이 잡혔다.
모두 당문의 나이 어린 소년이 벌인 일이었다.
“급하게 천라지망을 구축하느라 정보가 새어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천이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
청명해가 흘깃 그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정보를 흘리지요.”
“역으로?”
제갈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우가 현재 우리 결사의 걸림돌이지 않습니까? 그를 유인해 죽이는 겁니다.”
청명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우는 오대세가 회합 이후 무림맹에 등에 업고 14인객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도 그가 무림맹주의 어사패로 무림맹 무사들을 끌어들였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누가 나설 거지?”
청명해의 말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번 일로 그의 인간성을 확인한 탓이었다.
오직 제갈천이 그 가운데 입을 열었다.
“굳이 아이 하나 죽이고자 저희가 나설 필요가 없지요. 혹 문제가 생겨서 이번처럼 잡혀서도 안 되고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면 되지 않나.”
“만에 하나라는 게 있고, 또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살수문을 쓰시지요.”
살수문은 강호에서도 이름난 살수 단체였다.
“당가의 막내 공자가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다 하지만, 숨은 칼을 이겨낼 정도는 아닙니다.”
실제로 당연우의 무공이 드러난 건 제갈민과 비무에서 이긴 것뿐이었다.
후기지수 중에서는 두각을 나타낼 정도긴 하지만, 고수라 보기는 어려웠다.
“살수문이라······.”
“기왕이면 전부 고용하는 겁니다.”
“통째로?”
살수문은 그 명성 때문이라도 의뢰비가 절대로 싸지 않았다.
청명해가 불편한 표정을 짓자 제갈천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방해자는 확실히 제거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14인객은 은거한 고수들부터 제거에 나섰다.
제갈천의 제안에 한참을 고민하던 청명해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적당히 해라? 응?”
송재신을 반병신으로 만든 당중화가 으름장을 놓았다.
어떻게든 당문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당중월을 설득했던 그였다.
그런데 결국 천라지망 사건으로 독룡대를 이끌고 직접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뭘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가내 고수 중 하나인 당중화가 직접 나선 걸 보면 당문 안에서도 내 위치가 크게 바뀐 것이 느껴졌다.
‘막 환생했을 때라면 버려졌겠지?’
당중월이라면 무공도 익히지 못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당중화는커녕 독룡대를 내보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방구석 폐인이나 다름없는 당중화가 직접 나서게 했다.
“······됐다. 너랑 말싸움했다간 나만 피곤해질 것 같다. 이놈은 알아서 처리해라.”
당중화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사지가 부러지고 얼굴이 뭉개진 송재신을 발로 한 번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숙부님, 감사합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필요 없다.”
그 말만을 남기고 당중화가 자리를 떠났다.
나는 자리에 모인 제갈세가의 무인들과 무림맹 섬서분타 무인들을 돌아봤다.
“이놈 공동파 출신인 거 같은데······ 아무래도 무림맹에서 거둬가는 게 좋겠죠?”
나는 송재신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의독당주인 만큼 당중화는 송재신을 딱 죽지 않을 정도만 조져놨다.
단전을 뭉갠 터라 섬서 분타의 일반 무사도 데려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쪽이 낫겠지.”
제갈세가 측 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재신의 신원은 무림맹을 거쳐 공동파로 압송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홀로 천라지망을 무너트리다니 정말 당 공자는 대단하구나.”
이는 제갈세가나 무림맹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그들의 솔직한 마음이 전해져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아니요. 실제로 이들과 싸운 건 여러분들이신걸요.”
“허허, 겸손도······ 이미 이야기를 들었네. 미끼를 자처했다고?”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지라 일단락된 뒤 상황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덕분에 내가 문파들을 이간질해 싸우게 하고, 소규모 낭인들은 직접 암기를 풀어 상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하하······.”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특히 제갈세가와는 제갈민 문제로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자기네 후기지수를 뭉갠 터라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나를 보는 눈이 크게 바뀌었다.
“그래서 호정문으로 갈 예정이었다고? 그럼 무운을 빌겠네.”
호의에 찬 그들과의 작별 후 나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안에는 지친 표정이 역력한 오기린들이 보였다.
“후아, 적토마가 된 기분이었어.”
팽기웅이 해진 신발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갈세가까지 쉴 틈 없이 달렸던 탓이다.
이는 섬서분타를 찾은 모용경준이나 당문으로 뛰어간 남궁호도 마찬가지.
게다가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적들과 사투를 벌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았네요.”
“무사히라······.”
팽기웅이 슬쩍 나를 보더니 우물거렸다.
「천라지망에 빠질 뻔했는데 이렇게 사지 멀쩡히 살아남았다고? 이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나를 향한 그의 시선에는 조금이지만 두려움이 서렸다.
‘괴물로 볼 것까지는 없는데 말이지.’
모용경준도 말은 없었지만 팽기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남궁호만 이전부터 지금까지 마냥 호의적이었다.
“정말 다행이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말이야.”
처음에는 세가를 위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어느덧 남궁호에게는 동료애 같은 것이 싹텄다.
나는 씩 웃으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제가 말했죠? 전 겁쟁이라서 저 혼자 죽을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니까요.”
“하하, 그래, 당 공자는 겁쟁이지. 아주 무시무시한 겁쟁이지.”
남궁호마저 그리 말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호정문은 아미산에서 말로 사흘거리에 떨어진 의흥에 있었다.
삭천에서 출발한 우리가 의흥까지 가려면 제법 여러 도시를 지나야만 했다.
마차는 도시 중 하나인 두천에 들어섰다.
남궁호는 솜씨 좋게 객잔을 구하고 가게 주인과 마차 주차 문제나 숙박 및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팽기웅은 1층 식당에 자리를 잡고 술부터 찾았고, 모용경준은 조용히 자기 방 열쇠를 받고 계단을 올랐다.
“당 공자, 한잔해야지?”
팽기웅이 술병을 탁자 위에 올리며 나를 불렀다.
‘아! 슬슬 집에 가고 싶네.’
돈을 펑펑 쓰면서 하는 호화여행도 하루 이틀이지, 슬슬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았다.
당중화가 왜 집 밖을 나서지 않으려는지 슬슬 공감되기 시작했다.
‘아니지, 그러려면 먼저 14인객으로부터 작은형을 받아내야지.’
게다가 그들이 내 목숨을 노리는 이상 가만히 놔둘 수도 없었다.
객주들을 일부 잡기는 했지만 그들은 아직 11명이나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잡아서는 끝도 없어.’
나는 팽기웅에게 술잔을 받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언제 주문했는지 식탁 위에는 오향장육이 올랐다.
“술안주에는 이것만 한 게 없지. 이 야들야들한 속살과 입에 착착 감기는 간이 딱 좋다니까. 게다가 지역마다 맛이 약간 달라서 매번 그걸 확인하는 것도 재밌지.”
팽기웅이 입맛을 다시며 돼지고기를 집어 들었다.
나는 웃으며 그 위에 가루를 위에 뿌렸다.
푸른 거품이 오향장육 위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 공자!”
팽기웅이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서려는 걸 남궁호가 말렸다.
그제야 팽기웅이 낌새를 눈치채고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독인가?”
“고기에 양념을 아주 진하게 쳤어요. 저야 속이 조금 쓰린 정도일 텐데······ 팽 형이라면 일곱 걸음도 못 걷고 죽었을걸요?”
내 말에 팽기웅은 무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역시 잘 아는 맹독이었다.
“칠보단혼독.”
남궁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칠보단혼독은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은 가격에 거래되는 물건이었다.
함부로 뿌릴만한 독이 아니었다.
“맛집 탐방은 한동안 접어둬야겠어요.”
“이 새끼들이······.”
팽기웅이 이를 갈며 젓가락을 내던졌다. 그리고 호랑이 같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다고 하독한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도 주위를 살피며 객잔에 몸을 숨긴 살수들의 수를 셌다.
나를 향한 살의가 훤히 드러났다.
그들이 제아무리 살기를 절제한다고 해도 그의 생각마저 숨길 수 없었다.
“형님들, 살수문이라고 아세요?”
“유명한 살수 단체지. 본래 이름 없는 살수 단체였는데 워낙 실력이 좋아 세간에서는 살수문이라 부르는······ 설마 당 공자?”
남궁호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이야기도 오늘까지. 내일부터는 들을 일 없을 거예요.”
나는 씩 웃으며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살수 따위가 나한테 통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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