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성의문의 주인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먼저 힘을 죽여놓아야 할 곳은 수라마교겠지. 당문과 성의문과의 문제도 있고.”
당연우의 활약으로 최근 당문이 강호 의료업계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여전히 성의문의 존재는 당문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간단한 방법은 무림맹에 밀고하는 건데······.”
무림맹 어사 자격으로 표적 수사를 한다면 성의문도 버텨낼 수가 없었다.
성의문이 지금까지 쌓아온 민심도 수라마교와 연관된 증거를 찾는다면 쉽게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일단 직접 가보면 알겠지.”
나는 여행 짐을 싸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성의문행은 이전 14인객을 상대했던 강행군과는 달랐다. 비유하자면 여행과 출장의 차이였다.
“충격흡수장치가 달린 마차가 그리 편하다던데, 이번 여행에서는 허리가 편안하겠구먼.”
비포장도로인 탓에 전생만큼의 쾌적함은 누릴 수 없다지만, 14인객을 잡으러 다닐 때는 충격 흡수 장치조차 없어 제법 고생했다.
행낭을 어느 정도 추슬렀을 무렵 당연강이 방을 찾았다.
“성의문에 간다고 했더냐?”
당연강이 심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발명한 상품들이 짭짤한데······ 또 기발한 상품이 없을까?」
돈에 눈이 먼 당연강의 속내에 나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네, 그들의 의술이 상당하단 이야기를 들어 한 번 고견을 나눠보고 싶어서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의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혈도를 고치기 위함이었지, 애초에 의술에 뜻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꾸준히 의료학회와 인연을 맺어와선지 당연강은 큰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리어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 그러면 간 김에 나를, 당문을 대신해 코를 납작하게 해줘.”
「성의문 놈들에게 당문의 의술이 강호 제일이란 걸 보여주는 거야!」
콩깍지가 단단히 낀 당연강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 믿으세요. 성의문 코를 납작한 정도가 아니라 박살을 내고 올게요.”
‘그들이 정말 수라마교의 껍데기라면요.’
아니면 그들의 사업 기반을 꿀꺽할 속셈이었다.
***
“결국 우리 싸움에 염라와 청정경 놈들도 고개를 쳐들었군.”
일장로가 수하의 보고에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수라, 염라, 청정경.
이들 세 조직은 강호 이면에서 진흙탕 싸움을 해온 사이였다.
14인객은 세 조직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조직이었다.
“황금충과 먹물 놈들이 나서봐야 어쩌겠는가?”
일장로는 수하의 보고서를 아무렇지 않게 던져 버렸다.
세 조직간 암묵적인 휴전 이후 수라마교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비축했다.
난데없는 정의회의 등장으로 색이 조금 바래긴 했지만, 수라마교는 아직 본 힘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혈마님의 비원을 찾진 못했으나, 우리는 불사의 마인을 완성했다!’
피부는 강철과도 같으며 빠르기는 비호와도 같았고, 사나흘은 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괴물이었다.
무림맹이나 사파연합을 상대로는 중과부적이라 할 수 있었으나, 상인 조합이나 먹물 샌님 따위가 감당할 힘이 아니었다.
“장로님, 회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 지금 염라나 청정경이 문제가 아니지.”
그 말에 일장로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수차례 정의회와 일전을 벌인 수라마교는 정의회의 마인들이 익힌 마공이 어떤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수라마교의 것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분파가 있었나?”
종교 단체는 갈라서면 원수보다 더한 관계가 된다.
수라마교는 성의문을 세우기 전부터 갈라져 나온 세력들을 철저하게 뭉개왔다.
일장로가 기억하는 분파 중 살아남은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모르는 선대의 실수가 남아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일단 그들이 우리 것을 가지고 있으니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수라마교는 혈마와 함께 혈마공이라 불리는 수라마공을 잃었다.
그들의 품에는 하급 마인이나 익힐 법한 허접한 마공뿐.
그렇기에 기를 쓰고 청명해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반드시 회수해야 해.”
일장로의 시선이 수하가 아닌 문밖, 더 먼 곳에 자리한 이상향으로 향했다.
***
호남성 장사.
성의문 정문에는 언제나처럼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성의문은 백 년 전 여덟 명의 성의가 장사에 모습을 드러내고 지금까지 의료 봉사를 이어왔다.
뛰어난 의술과 성품으로 장사는 물론 호남성에서는 구파나 오대세가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일부 사람들은 성의문에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의 믿음을 보였다.
“당문? 그 새끼들은 독이나 뿌려댈 줄 알지. 감히 어디 성의문에 비벼?”
“실력이나 인품이나 당문이 넘볼 수 없지. 애초에 그놈들은 의원이 아니라 독쟁이들이잖아?”
성의문의 명성이 높아진 만큼 비견되는 당문의 평가는 바닥을 기었다.
나는 성의문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객잔에서 그런 상황을 살폈다.
조명식 의원이 성의문의 정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말했다.
“연우야, 성의문에 무작정 쳐들어갈 생각은 아니지?”
“사천 의료학회장님께서 소개장을 써주셨어요.”
나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흔들었다.
정확히는 호남의료학회장에게 보낸 소개장이었다.
현 학회장이 성의문의 사람인 걸 생각하면 결국 성의문에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놈의 자식은 연우의 스승인 나에게는 한마디도 없이······.”
조명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
그는 여전히 학회장을 향해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성의문을 바라봤다.
의원은 사람의 명줄을 쥔 전문 인력이다.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강호에서도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의료 봉사란 말이지? 그러면 너희들 돈은 어디서 나는데?’
기부금으로 대신할 정도로 약재는 저렴하지 않았다.
개인사업자도 아니고 현대로 치면 종합병원의 규모로 운영하는 성의문이 단순히 환자들의 기부금만으로 운영될 리 없었다.
“상회 하나 정도 거느리는 정도로 쉽지 않을 거고.”
성의문은 약재 수급을 위해 약재 전문 상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윤을 남기기보다는 원활하게 약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보통 저런 단체는 후원자가 필요한데······.”
수라마교의 흔적이 성의문에 이어져 있으니 그 배후에 마교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자금을 어디서 구하냐가 관건이었다.
‘어느 세력이든 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까.’
나는 조명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의원님, 성의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도는 좋으나 뒤가 구리구나. 역겨울 정도로.”
조명식도 사천 의료계에서 닳도록 구른 인물이다. 성의문이 가진 불분명한 재정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조명식뿐만 아니라 성의문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성의문의 명성과 민심 때문에 행동할 수 없다는 거겠지.’
성의문의 의료 봉사는 근처 의원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일이었다.
호남성의 의원들, 특히 장사의 의원들은 결국 성의문에 굴복하거나 호남성을 떠나거나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호남성의 의료 독점을 했을 때 생기는 이득이 어느 정도일까요?”
내 물음에 조명식이 미소를 지었다.
“호남성을 쥘 수 있지. 의료 봉사 따윈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성의문의 입김이 모든 호남성의 의원들에게 닿았다면 호남성 모든 이들의 목숨을 쥐었다고 볼 수 있었다.
‘당장에 떠오르는 건 약재 상인들을 쥐락펴락 할 수 있을 거고.’
성의문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 유추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의술 교환이란 명목으로 성의문에 쳐들어 가볼까요?”
“어휴, 명목이 아니라 그게 목적이란다.”
조명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리안이라 불리는 당 공자께서 이 먼 성의문까지 찾아뵐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웃으며 환대한 건 성의문주 나명한이었다.
깔끔한 흰 의원복을 입고 있었지만, 곧추선 자세나 불쑥 튀어나온 태양혈 등 상당한 수준에 이른 무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의문주가 수라마교의 삼장로구나.’
그의 머릿속을 홀라당 까본 나는 그의 정체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애초에 첩자건 비밀단체건 능력 앞에서는 무효했다.
‘직접 돌아다니는 게 귀찮긴 하지만 여행이라 생각하면 뭐.’
14인객을 상대했을 때와는 다르게 여유가 있었다.
누군가 인질이 잡힌 것도 아니었고,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엄연히 수라마교의 상대는 정의회였다.
“당 공자께서는 의료기술 교류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명한이 난처하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근 당문이 치고 올라오고 있다지만 성의문은 강호 제일의 첨단 의료기술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이 굳이 당문과 기술 교류를 할 필요가 없었다.
‘보통은 대기업에 기술을 모조리 빼앗기는 것이 걱정이겠다만, 너희들은 그게 아니잖아?’
수라마교의 삼장로 나명한은 수라마교 출신이 아닌 성의문 출신이었다.
마공보다는 오랫동안 성의문에 집중해 수라마교의 장로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그가 의술 향상을 위해 수라마교에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는 두 번 들춰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인체 실험을 거리낌 없이 했군.’
역설적으로 산 사람을 째고 자르고 녹여보면서 성의문의 의료기술은 월등히 향상됐다.
당문도 살짝 맛이 간 놈들이 있었지만, 성의문처럼 돌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문은 성의문에 합당한 대가를 드리려 합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당문은 성의문이 의료 연구에 들어가는 인적·물적 재산을 모두 제공할 것입니다. 또한 당문의 제약기술과 의술 역시 모두 성의문에 제공하죠.”
“그건!”
내 말에 나명한이 깜짝 놀랐다.
당문의 제약기술은 강호를 호령하는 독공과도 크게 연관돼 있어 말 그대로 가족이라도 함부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당문에서는 이번 기회에 의원부를 의독당에서 분리해 새로운 당으로 승격시킬 생각입니다. 그 대표로는 여기, 제 스승님이신 조명식 의원님이 맡으실 거고요.”
조명식이 그게 무슨 이야기냐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명한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설명했다.
“성의문이 당문의 그림자에 가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당문의 행사가 성의문의 명성에 누가 되는 것은 성의문이나 저희나 원하는 일이 아니지요?”
당문은 원수나 은혜를 두 배로 갚는다는 가훈 아닌 가훈이 있었다.
독과 암기를 주로 사용하다 보니 때론 손속이 과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술 제휴를 한 성의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현재 조명식 의원님이 이끄는 당문의 의원부는 사천의료학회나 다른 의술 단체와도 꾸준히 협력 및 교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성의문도 함께 하는 거지요.”
나명한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당문이 아닌 한 다리 거쳐 거래한다고? 게다가 그 주인은 당문 사람이 아닌 조 의원이라······.」
본래 미끼는 먹음직할수록 좋다. 그리고 그럴싸한 이유가 붙으면 쉽게 낚이기 마련이다.
조명식을 향한 나명한의 눈이 번들거렸다.
「당문 사람이 아니라 조명식 의원이라면······ 우리 입맛대로 굴릴 수도 있지.」
나명한의 사특한 생각이 훤히 보였다.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닌 거 같군요. 장로들과도 상의를 해봐야겠습니다.”
‘성의문이 아니라 수라마교 장로들이겠지.’
나명한이 당문이란 미끼에 군침을 삼켰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
“손을 잡겠다고? 겨우 당문이지 않나? 남궁세가라면 또 몰라.”
일장로가 가당치 않다는 듯 말했다.
나명한이 일장로에게 당연우의 방문과 목적을 보고하자 보인 반응이었다.
“삼장로, 우리는 천하를 지배할 신교야. 겨우 오대세가, 그것도 성의문에 밀리는 당문 따위와 손을 잡을 필요가 있더냐?”
일장로가 마치 손자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완강한 거절이 담겨 있었다.
나명한은 불만으로 속으로 삼켰다.
‘그건 댁들 생각이고.’
일장로를 비롯한 수라마교 출신 교인들은 숭상하는 수라신이 강호에 강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반면 나명한처럼 성의문에서 차근차근 올라온 사람들은 자기 보신이 최고였다.
‘당문이 몸을 굽힐 정도의 제안을 한 건 신교가 아닌 성의문의 업적이거늘.’
더군다나 최근 당문이 상승세는 남궁세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절맥증 치료법을 비롯해 새로운 의술을 거듭 선보이며 의술의 신세계를 열었다. 또 재정적인 부분에선 신제품 개발로 금화를 쓸어 담고 있었다.
‘수라신교······ 그래봐야 너희들은 세상에 나설 수 없는 마인들이 아니더냐.’
성의문이 수라마교의 위장으로 사용된 지 백 년이 다 되어갔다.
그들은 수라마교에서 태어났으나 수라마교보다 더 큰 위세를 갖게 됐다.
“······후일 저희가 세상에 나왔을 때 당문은 쓸만한 방패막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명한이 일장로를 설득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언제까지 신교가 세상에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살 순 없다.’
그는 세간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성의문의 문주였다.
그리고 평생을 그런 떠받듦 속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문은 수라마교와 거리를 두고 신분 세탁하기에 아주 좋은 도피처였다.
***
“당문에서 의독당을 독립한다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성의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객잔에 이르자 조명식이 입을 열었다.
나는 창문 밖으로 수라마교에서 푼 사람이 없나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그야 그렇죠. 아버지나 형은 모르는 일이니까요.”
“뭐?”
조명식이 당황하자 나는 미소를 보였다.
“의원님께 성의문을 맡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조명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의문이 저잣거리에서 파는 당과도 아니고 맡기고 자시고를 외부인이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을 지탱하는 건 오랜 의료봉사로 쌓은 민심이죠. 그러나 그 민심이 그들의 폐부를 찌를 검이 될 것입니다.”
당연우는 여론을 몰아 수라마교를 도려낼 생각이었다.
- 작가의말
샾으펜을님, 추천 글 감사합니다.
더욱 재밌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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