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자유를 찾아서.
“네 나이가 곧 스물이다. 가정을 꾸려야할 나이지 않더냐.”
당중월이 대뜸 불러 한 말이 맞선 권유였다.
본래 그는 나를 다른 곳에 어떻게든 비싼 값에 팔 생각이었다.
그것이 상황이 달라져 반대로 신부를 세가에 불러들일 수 있게 됐다.
‘결혼이라고?’
이제 스물인데 가정을 가지라니······. 무림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늦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스물 전후로 혼인을 했다.
아버지 옆에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는 당연강도 십 대에 형수를 데려왔다.
‘작은형은······ 예가 안 되고.’
나는 입맛을 다셨다.
‘어린애도 아니고 정략혼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고 벌써 혼인으로 가정에 묶여 살 생각은 없었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 삶도 나쁘진 않지만, 그 전에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래도 독왕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순 없지.’
얼핏 보니 맞선을 위한 서찰이 잔뜩 온 것으로 보였다.
얼굴뿐이었던 5년 전과 다르게 해온 일이 있었기에 가치가 급상승했다.
“아버지께선 오대세가와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하고 싶어하셨다만······ 나는 네 능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상계나 관과 연을 맺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서찰을 내미는 당연강.
받아 보니 신부 후보의 신상 내역이었다.
‘소호상회의 장보람, 사천윤가의 윤미정······인가?’
각각 나이는 열여덟과 스물로 혼기가 꽉 찼다.
무림인이 아닌 이상 이렇게 혼기가 꽉 찰 때까지 시집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거대 상회나 권문세족 출신이라면.
‘상대에서 보낸 프로필에 단점이 적혀 있을 리는 없겠고······ 성격이나 외모가 문제려나?’
이번에는 당중월이 서류를 내밀었다.
놀라온 금나수법에 얼떨결에 받았다.
‘남궁린이 가장 위에 있네? 이 아가씨가 없을 리 없지······.’
치료 후 그녀의 광적인 집착을 접한 뒤로 조금 꺼려졌다.
생명의 은인인 건 알겠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나한테 과하게 달라붙었다.
‘남궁린이랑 혼인하면 진짜 잡혀 살 거야.’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팽자연이나 모용애도 안면이 있었다. 후기지수 모임에서 지나가다 본 정도였다.
“하하, 이렇게 많이······ 제가 인기가 많은가 봐요.”
“최고의 신랑감이지!”
왜 당연강이 자랑스러워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와 큰형이 이렇게 기대하니 찬물을 끼얹기 힘들었다.
‘음! 튀자.’
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과분한 사랑이네요.”
***
“린아, 아직 당가에서 답장도 없는데 벌써 짐을 싸는 거냐?”
남궁적이 부랴부랴 당가로 향할 준비를 하는 남궁린을 나무랐다.
그러자 남궁린이 도리어 버럭 소리쳤다.
“혼기를 놓친 자연 언니는 그렇다 쳐도 모용애, 그 욕심 많은 년이 나섰어요. 오대세가 회합 때 그렇게 경고했는데!”
핏발이 선 그녀의 눈빛에 남궁적이 슬그머니 물러섰다.
그리고 어째선지 그녀의 짐정리를 돕는 남궁호에게 물었다.
“넌 여기서 뭐하냐?”
창천승룡이라 불릴 정도로 세가의 기대주가 남궁린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남궁호가 남궁적을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혼자서 가게할 바엔 돕는 게 낫겠죠.”
그의 말처럼 말린다고 가지 않을 남궁린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일찍 당가에 가서 얼굴도장을 찍고, 자리를 잡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도 가야하나?”
남궁린이나 남궁호만 보내기에는 무게감이 떨어졌다.
이들을 대표할 어른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했는데 팽가나 모용세가에서 누가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연우와 인연이 있는 내가 가는 게 여러모로 좋긴 하겠다만······.”
남궁적은 세가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조카 뒷바라지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궁호가 여전히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팽가나 모용세가에서 누가 올지 모르니까요.”
팽자연은 팽가가 자랑하는 여걸이었다.
얼굴도 얼굴지만 무공이 또래의 여성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 덕에 그 아이가 혼기를 놓쳤지.’
팽가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그녀는 칠척(7尺; 약 210cm) 장신에 갑옷 같은 근육을 자랑했다.
얼굴만 보면 소녀인데 몸은 역발산기개세다.
그녀나 팽가나 이번 혼약에 사활을 걸 것이 분명했다.
‘모용애라······ 이름처럼 애교가 많은 아이였는데 말이지.’
남궁적이 보기에는 팽가의 여식이나 눈앞의 조카나 신붓감으로는 아슬아슬했다.
반대로 모용애는 남궁린의 지모나, 팽자연의 무력과 같은 특색은 없었으나 오히려 그 부분이 신붓감으로는 더 가치가 높았다.
“당 공자가 신부에게 잡아 먹힐 아이는 아니다만.”
영민을 넘어 광기를 보이는 남궁린이나 건강미가 아닌 근육미를 자랑하는 팽자연이기는 하지만, 당연우는 어린 나이에 무림 별호를 얻을 정도였다.
“네? 뭐요?”
귀 밝은 남궁린이 쌍심지를 켰다.
“아, 아니다.”
찔끔한 남궁적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텅 빈 연무장 위에 두 노소가 앉아 있었다.
하루라도 땀 냄새가 나지 않는 일이 없는 평가의 연무장이었으나 이날만큼은 예외였다.
“우리 손녀, 집을 나간다고?”
자글자글 주름이 진 노인이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얼굴에 낀 검버섯이나 주름 등 나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으나 체구만큼은 작은 바위가 앉아있는 것만 같을 정도로 거대했다.
다만 그런 거구가 무색할 정도로 마주 앉은 여인의 덩치가 컸다.
“혼처를 봐주신 아버지나 오라버니의 마음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요.”
팽자연이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전대 가주 팽주영이 그런 그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음, 손자놈이 건실한 걸 물고왔어.”
“무림맹주가 일찍이 눈여겨본 인재니까요.”
“권성이 말이지······.”
팽주영이 권성을 떠올렸다.
두 주먹으로 정파 무림을 무릎 꿇린 남자.
동시대 사람인 팽주영도 그와 겨뤄본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도 역시 무림맹주에게는 닿지 않았다.
“저에겐 과분한 신랑감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는 팽자연의 모습에 팽주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아마 세상을 놀라게 할 신성이 등장했을 것을······.’
팽가의 자제들이 대부분 근골이 좋은 편이나 팽자연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인재였다.
팽주영이 아쉬움을 삼키고 다시 손녀에게 물었다.
“네가 도를 놓은 지 몇 년째지?”
“어머니의 부탁에······ 오 년이 조금 넘었네요.”
출가외인이라 팽가의 혼원벽력도를 배우지 못한 팽자연이었지만, 그녀의 도는 또래의 누구보다 무겁고 날카로웠다.
팽주영은 그런 그녀의 늘 아쉽고 안타까웠다.
“며늘아기의 부탁이란 말이지.”
“그런데도 여전히 어렵네요.”
팽주영은 팽자연의 자조적인 말에 입맛을 다셨다.
이 거대한 손녀가 마냥 귀엽다만은 세간에서는 그리 보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도를 쥐지 않았다지만 네 마음에는 여전히 도를 쥐고 있구나······ 허! 정말이지, 다른 곳에 넘기기엔 아깝단 말이야.”
“마음으로 베고 또 벴으니까요.”
무엇을 베었는지 팽자연은 말하지 않았다.
팽주영도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남궁에서는 그 공주가 나서는 모양이다.”
“린이 말이죠? 백리안의 치료로 구음절맥이 완치됐다고 들었어요. 얼마 전에 봤을 때는 살이 토실하게 오른 게 귀엽던데요.”
남궁린은 성장기에 절맥으로 크게 앓는 바람에 스물이 넘은 지금에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팽주영이 남 칭찬에 여념 없는 손녀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겐 여우 같은 마누라는 어려울 테니, 곰 같은 마누라라도 되거라.”
“곰 같은······요?”
“우리 손녀딸은 아무리봐도 범 같은 마누라가 될 것 같으니 말이야. 차라리 입 다물고 우직하게 가는 게 나을 게야.”
할아버지가 손녀딸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범 같은 마누라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요? 여우나 범이나 고양잇과잖아요. 호호”
‘딸로 태어난 게 다행이야.’
팽주영이 손녀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할 말만 하고 꼭 입을 다물거라.”
***
“일단 짐은 간편히 하는 게 좋겠지?”
나는 일단 전낭과 전표부터 챙겼다.
어딜 가든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됐다.
‘가문의 마차를 쓸 수는 없겠지.’
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기며 여행 계획을 세웠다.
마차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갈 수 있는 여행지란 한정돼 있었다.
“사천 시내라면 당문의 시선을 피하긴 어려울 텐데?”
몇 번이나 짐을 넣고 빼서야 결국 봇짐 하나로 줄일 수 있었다.
챙긴 건 속옷 몇 개와 외투 하나, 옷 두 벌 정도가 전부였다.
“아니지. 가문의 마차를 이용하지 않는 것뿐이지 다른 곳의 마차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대충 교통 같은 건 없지만 표국이나 소규모 상회 이동에 끼어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눈을 감자 머릿속에 어느 무협 소설에서 나올 법한 유려한 풍광 속 짐마차 위에서 노니는 모습이 그려졌다.
동시에 그림자가 하나 끼어들더니 습격자가······.
“아니아니, 그건 소설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이번 여행의 목표는 힘순찐이다.”
암중 세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황이라 마침 가문의 맞선 제의는 좋은 계기였다.
성인이 되면 본격적으로 세가에서 자리를 맡아 일을 해야했다.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로 시작하는 일에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를 귀 따갑게 들어야 할 것이 눈에 선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방랑을, 힘도, 신분도 숨기고 자유로운 여행을 해보는 거야.”
그 같은 자유로운 삶은 이전 생에서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목표는 멀수록 좋겠지. 여행이 길어지니까. 그러면 동정호가 좋을까? 낙양은 무림맹이 너무 가깝고.”
무림맹주의 눈에 띄면 어사패를 빌미로 이리저리 일감을 던져줄 것으로 보였다.
어사패로 무림맹의 무사 동원이나 정보 수집 등 요긴하게 쓰다 보니 거절할 핑계도 없었다.
“좋아, 동정호로 잡고 출발하자.”
생각을 마친 나는 이른 아침부터 당문을 나섰다.
어차피 당가타나 성도로의 외유가 많았던 터라 일찍 당문을 나선다고 해서 용건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당문을 나선 뒤 평소처럼 성도로 향했다.
또 어차피 성도까지는 흔적을 남겨도 큰 문제가 없었다.
‘유동인구 단위 자체가 다르니까.’
행적을 지우기에 사람들 속에 숨는 것은 고전 중의 고전이다.
성도에는 상인, 관인, 무인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나는 평소처럼 성도에 이르러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에도 당문과 연이 닿은 사람들이 많지.’
게다가 나도 성도를 자주 드나들면서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많았다.
인피면구가 있다면 조금 더 간단했겠지만, 이미 당연해에게 건넨 뒤였다. 거기에 급하게 결정한 도피행이라 새로운 인피면구를 구할 여력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없지.’
나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순간 찢어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사람들의 마음 소리를 정리해 나갔다.
‘능력으로 나를 향한 시선을 피하면 되지.’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을 들춰보며 나는 사람들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누구도 나를 응시하지 않음을 확인한 뒤 조용히 성도를 떠났다.
***
“백리안이라······.”
사파연합 총관 집무실에는 쉬도 때도 없이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메기수염의 중년인이 날아든 전서구의 발치에서 손짓만으로 서찰을 빼냈다.
“정파 무림의 신성인가?”
권성이 정파 무림의 절대자라면, 사파연합에는 신마가 있었다.
이 둘은 일성일마로 대표되는 절대고수로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막강한 무공 실력 때문에 당금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같은 평화 이면에는 수없이 진흙탕 싸움이 이뤄지고 있었다.
“무림맹주가 눈여겨 본 인재란 말이지······.”
구운재의 시선이 서찰로 향했다.
당연우의 혼약자를 모으는 일에 남궁세가와 팽가, 모용세가 등 거대 세가의 병력이 사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소호상회와 사천윤가 또한 당문으로 향하니 그 세력 면면이 만만한 것이 없었다.
“사천은 예로부터 사파가 득세하기 어려운 지역인데 지금은······.”
더군다나 사파 성도를 주름잡던 무리들이 몇 년 사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이 거대 사기에 당한 채 공중 분해됐다는 소문이 들려왔는데, 사기의 주모자는 홀연히 사라진 채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리안의 혼인을 빌미로 무림맹이 무슨 수를 쓰는 것은 아닐까?”
현재 사파연합의 손발이 없는 곳에 힘이 모이니 사련의 총관인 구운재로선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사람을 보내야겠군. 쓸만한 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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