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구환미로진(九換迷路陣).
대표단과 함께 대청을 나선 제갈 군사가 혀를 찼다.
들어왔을 때와 다르게 나올 때는 이미 진법이 전개돼 있었던 것이다.
“쯧! 실수했군.”
무림맹 병력은 현재 사파연합 본부를 넓게 포위하고 있었다.
본부에 남아 있는 간부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밖에 주력 부대라 할 타격대 천여 명은 대청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군사 그게 무슨 말이오?”
당중월이 다가와 물었다.
“당 공자, 련주가 수를 썼습니다.”
제갈 군사가 대문으로 향하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대문 앞에 도착한 그는 섣불리 문을 열지 않고 어떤 기관이 있는지, 진이 설치돼 있는 면밀히 확인하고 계산했다.
“당가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상황을 봐 연합과 싸울 예정이었습니다만.”
“대의명분이 아들을 구하기 위함이었으니, 그의 초청을 거절하긴 어려웠지.”
제갈 군사의 말에 당중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명분은 명분이고, 실익을 챙길 때는 챙겨야 했다.
당중월은 애초에 아들이 련주가 되건 말건, 상황에 따라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어마어마한 마기를 뿜어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지금 당장 데려간다고 해도 무림맹에서 마공의 출처를 조사한다고 잡혀갈 거 같았으니.’
권성과의 가벼운 비무에서 본 당연우의 실력도 이유 중 하나였다.
워낙 영특한 아이다 보니 그 정도 무공이라면 혼자라면 연합에서 몸 하나 빼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막내가 그래서 무슨 수를 썼다는 거요?”
당중월의 물음에 제갈 군사가 입만 달싹였다.
‘우리를 모두 죽일 절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생각을 입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대신 평소 당연우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구질이 대꾸했다.
“함정을 깔아놓은 거지. 우리의 호의를 이용해서!”
강호 경험이 풍부한 구질이 제갈 군사만큼은 아니지만 진을 어느 정도 볼 줄 알았다.
그가 문 주위에 놓인 수와 방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진 안에 포위되도록 준비가 돼 있는가 보군. 그래서 본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타격대가 자리에 안 보이는 거고.”
구질은 처음 대청에 들 때도 취임식장 주변을 경계하는 호위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청 안에서 취임식이 진행되는 동안 연합은 조용히 무림맹을 노리고 있었다.
“구 방주, 그게 무슨 소리요? 막내가 아비를 죽일 생각으로 살육진을 준비했다는 말이오?”
“아니,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는데······ 뭐, 당가주도 평소 아비 노릇을 잘 하진 않았잖아?”
구질의 말에 찔리는 게 있는 당중월이 더는 뭐라 따지지 않았다.
5년 전 죽어가는 당연우를 모른 척 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당중월이 입을 다물자 구질도 무안한지 대화 대상을 제갈 군사로 돌렸다.
“군사, 무슨 진이 펼쳐졌는지 알 수 있나?”
“당 공자가 단서를 주어 해석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제갈 군사가 말끝을 흐렸다.
“다만 뭐? 어떤 살육진이 기다리고 있는 거요?”
구질이 참지 못하고 제갈 군사를 재촉했다.
제갈 군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당 공자는 진법 실력도 상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서가 없었다면 어떤 진인지 몰랐을 정도로요.”
진법은 제갈 군사의 전공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가 눈치를 주기 전까지도 진의 존재조차 몰랐다. 해석에도 충분히 틈을 주지 않았더라면 풀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갈아, 이를 해석한 뒤에야 알았다니······.’
수십 년의 공부가 이제 약관인 청년에게 무너졌다.
“맹주님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재능을 가진 이가 마두가 된다면 후일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맹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거죠?”
문득 권성의 존재를 떠올린 제갈 군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대표단 사람들도 저마다 주위를 둘러보며 권성을 찾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청에 홀로 남은 것인가?”
“아니, 맹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나오셨습니다.”
서로가 권성을 찾으려고 혈안이었다.
제갈 군사도 권성을 찾으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맹주님께서 무슨 이유로 자리를 비운 것이겠지요. 먼저 안에 갇힌 타격대부터 구해야겠습니다.”
권성의 실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다.
그는 신마가 없는 사파연합의 본부쯤은 제 안방 드나들 듯이 돌아다닐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단들도 압도적인 권성의 무위를 알기에 더 급한 타격대를 구하려는 제갈 군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면 문을 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와 떨어지지 않고 주위에 계셔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제갈 군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연합의 미래에 대해서는 후일 이야기하죠.”
나는 사파연합 개혁에 대한 문제를 뒤로 넘기고 하설기와 백절인에게 뒷정리를 맡겼다.
그리고 발걸음을 신마의 연구실로 돌렸다.
지하로 향하는 길이 딱히 숨겨진 것은 아니었지만, 위치가 지하다 보니 처음 방문한 이가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후우, 반드시 죽일 생각인가?”
나는 지하연무장의 문을 열고 신마의 연구실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권성이 의지를 잃은 신마의 육신을 살피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마치 신마와 같았다.
“쯧, 이런 껍데기를 그대로 방치한 이유가 뭔가? 기분 나쁘게.”
“수십 년 동안 써온 몸이 아닙니까? 그냥 처분하는 겁니까?”
“처음도 아니잖나? 고이 보내주는 것이 몸의 주인에 대한 예의지.”
권성이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헌데 왜 내공이 여전히 남아 있을꼬? 흡성대법으로 흡수하지 않은 겐가? 알 수가 없군.”
그가 신마의 몸을 살피며 의문을 보였다.
나는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앉았다.
“제가 신마에게서 몸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믿겠습니까?”
“믿지.”
「전혀.」
권성은 망설임없이 속내와 다른 말을 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마가 대단한 자신감을 가졌듯 맹주님께서도 그를 믿으시나 보군요.”
“그야, 그 치나 나나 실패한 적이 없었거든. 횟수를 거듭할수록 더욱 확신하게 됐지.”
신마와 권성이 몇 번이나 타인의 몸을 빼앗으면서 수명을 연장했다.
영원한 삶을 살며 무공도, 학식도, 그 깨달음이 남과 다른 수준의 경지에 올랐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정신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허허, 자네가 왜 그리 애가 타는지는 잘 알고 있지. 전과 같은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내가 그 시간을 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음을 잘 알지 않은가?”
권성이 씩 웃었다.
“자네나 나나 같은 몸에서 나온 형제니까.”
어미가 같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등선에 실패한 수련자······.”
나는 신마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한 수련자가 등선을 위해 수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것을 버리고 등선길에 올랐다.
그가 버린 것은 단순히 육신만이 아닌 감정, 인연, 무공, 기억 등 그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남은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기억과 몸, 사념 등이 남은 그 찌꺼기가 선계로 향하는 또다른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신마는 남겨진 자야.’
우화등선을 위해 버린 그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등선길에 오른 수련자도 선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 나는 한 치 앞에서 실패했지. 선계에서 보내온 학을 본 것도 같은데, 선계에 가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어.”
권성이 수 세기 전의 일이었으나 똑똑히 기억하는지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등선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지라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다시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마?”
“신마가 아니니까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권성이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취임식에서 보였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운이 그의 두 주먹에 맺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마의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제 실력은 아직 맹주님께 닿지는 않았죠.”
“그야 그렇지. 무공을 복구하는 건 꽤나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 때문에 권성이 한시 바삐 나를 노렸다.
나는 시선을 신마를 향해 돌렸다.
“왜 신마의 내공을 거두지 않았냐고요? 그럴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신마가 죽지 않게 보존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권성이 의문을 드러낼 때 신마의 육신이 눈을 떴다.
“너? 이게 무슨?”
권성이 놀라며 나와 신마의 몸을 번갈아 바라봤다.
“댁들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몸에 옮기는 것이 특기였죠? 그렇다면 다른 의지를 빈껍데기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신마가 굉음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권성을 노려봤다.
“이 놈!”
권성이 소리쳤으나 나도 검을 뽑으며 자세를 잡았다.
***
“그러니까 감의 수를 미의 수로 엮어서······.”
구환미로진에 들어선 제갈 군사가 진땀을 뺐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산이 어디서부터인가 틀어졌다.
당연우가 만든 구환미로진의 구성은 제갈 군사도 알고 있는 진법이었다.
간단한 진법은 아니었으나 설치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마교의 아수라대환상진과 같이 상대의 진기를 소모케 하는 살상진도 아니어다.
그러나 진법가마다 그 설치법이 다른 만큼 그 해답은 각양각색이었다.
당연우는 구환미로진에 현대 수리 개념을 적용했다.
제갈 군사가 수에 밝다고는 하지만, 수리학 교수의 지식을 활용한 구환미로진을 쉽사리 풀어낼 리 만무했다.
‘정말이지. 당 공자는 괴물이군.’
무공도 놀랄만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진법은 전문가인 제갈 군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상황이 달랐다면 가르침을 요청할 정도로 수식이 복잡하고 어려웠다.
제갈 군사가 슬쩍 시선을 뒤로 돌렸다.
‘당가에서 이런 인재가 나왔다고?’
당중월도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암기나 독의 취급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가 출신 고수 중 멍청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에 무공 밖에 없는 무인들과 다르게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갈 군사나 제갈세가 사람들은 은연 중 얕보곤 했는데, 이번에는 패배감을 지울 수 없었다.
“군사, 아직 멀었소?”
심정이 그렇다 보니 당중월의 재촉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재촉하지 마시오. 진법이라는 것이 설치하는 것보다 해체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수십 년 공부를 한 제갈 군사가 나이 어린 당연우가 설치한 진법에 쩔쩔맨다는 건 아무래도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제갈 군사가 급한 마음에 실수를 했다.
방위 계산을 잘못해 생로가 아닌 사로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하늘이 벌컥 뒤집히더니 대표단 주위로 어둠으로 내려앉았다.
제갈 군사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실수로 당연우의 구환미로진이 본격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이런 씨······.”
제갈 군사가 평소 입에 담지 않던 욕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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