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마음을 읽는 상사.
“뿌득!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신임 련주.”
이렇게 날이 선 감사 인사가 또 있을까?
권성과 신마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밖으로 나온 나는 아직도 무림맹 대표단이 연합 본부를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진법을 잘 못 설치한 것이 아닌가 싶어 급하게 내려갔더니, 제갈 군사로부터 살기와 악의 가득한 감사 인사를 받았다.
‘아니 도대체 왜?’
이유가 궁금해 제갈 군사와 대표단의 기억을 읽었더니, 구환미로진을 파훼하지 못하고 된통 당한 듯 싶었다.
아무래도 내 기대보다 머리가 굳었던 제갈 군사에게는 현대 수학이 조금 난해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몇 시진 만에 폭삭 늙은 제갈 군사가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련주님, 저들을······.”
하설기가 슬쩍 살기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이번 기회에 지친 무림맹 대표단과 주력을 처리하고픈 모양이다. 그러나 그 이후 본부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이만 병력을 어찌할 것인가?
눈앞의 대표들과 주력 고수를 공략한다면 정파의 기세가 크게 흔들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흘릴 피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닥치지?”
나는 하설기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
하설기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아니, 네가 련주라고 띄워줬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련주가 된 것도 그들이 권성을 상대하기 위해 임시로 올려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무림맹이 물러간 이상, 나를 더는 련주 자리에 둘 필요가 없었다.
“네 녀석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백가 놈에게 붙는다고 해도 녀석이 너를 지켜줄 거라 생각치 말거라.”
쓰임이 다한 사냥개는 솥에 넣는 법.
하설기는 내 태도가 달라지자 내가 백절인과 손을 잡았을 거라 착각했다.
말 그대로 착각이었다.
“하 장로, 무림맹주를 상대한 자는 누구였소?”
“자네였지. 하지만 권성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간 정을 생각해 많이 봐준 것 같더구나.”
그들이 본 비무에서는 분명 권성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나는 솔직히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단과 타격대의 힘을 뺀 것은 누구였나?”
“자네였지······ 하지만 그들을 제거할 기회를 걷어찬 것도 네놈이지 않더냐.”
하설기가 독기 어린 표정으로 외쳤다.
당장 주변에는 하설기의 의견에 동의하는 연합의 간부들이 있었다.
또 반대 파벌인 백절인도 암묵적으로 하설기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쟁을 무탈히 넘긴 의견을 낸 사람은 누구였나?”
“그것도······ 자네였지. 하지만 무인이 피를 두려워 해서야 무인이라 할 수 있겠더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댁들은 그 피가 무서워 나를 련주로 세우지 않았나?”
“그건······!”
내 말에 하설기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설기의 말에 그의 파벌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에 모인 연합의 무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어 나는 쐐기를 박았다.
“또 연합의 주인은 강해야 하지. 하 장로, 내게서 목숨 걸고 련주의 자리를 뺏을 수 있겠나?”
권성의 깨달음마저 삼킨 나는 하설기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또 그의 생각이 손바닥에 놓인 것처럼 낱낱이 보이니 내공이 다소 적더라도 상대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네······ 이놈.”
하설기가 일말의 자존심 때문에 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상황은 크게 변했다.
피해 없이 무림맹의 대군단을 물리쳤으며, 권성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싸움을 벌였다.
이는 연합의 간부들은 물론, 일부 연합의 고수들도 목격했다.
그들의 입을 모두 막지 않는 이상 연합 안에서 생길 여론을 하설기나 백절인이 막을 수 없었다.
“원한다면 자네들을 전임 련주처럼 힘으로 찍어눌러 줄 수도 있어. 그러나 그런 건 내 가 바라는 바가 아니지. 민주적으로. 평화롭게.”
나는 자리에 모인 연합의 간부들을 하나둘 돌아보며 말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이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진땀을 빼거나 두려워하거나 그런 반응을 보였다.
하설기와 함께 연합의 양대 파벌의 주인인 백절인 역시 고개를 숙였다.
“하 장로, 지난 번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온전한 연합을 얻고 싶냐던 이야기 말······씀 말입니까?”
하설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투를 바꾸었다.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 여간 힘든가 보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도 좋지만, 앞서 이야기했 듯 정파 출신인 내가 련주가 된 이상, 잘 이용하라고. 그것이 연합의 장로가 해야할 일이고, 또 연합의 발전이 연합 간부인 자네에게도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하설기가 머릿속으로 어떤 것이 이익인지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명예나 정의보다 실리를 추구하기에 사파였다. 그리고 하설기는 그 누구보다 그런 사파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계산을 마친 하설기가 자존심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일단 그의 말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무엇보다 내가 이번 일로 여론을 이끌고 힘 또한 만만치 않다보니 하설기가 자존심을 내세울 수도 없었다.
하설기가 고개를 숙이자 같은 수준의 백절인도 반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마음을 슬쩍 살펴보고는 시선을 정보각의 부장들로 돌렸다.
“이제 무너진 맹내 첩보원도 다시 키워보죠. 해결방안과 함께요.”
증거는 없었으나 무림맹에 잠입한 첩보원들이 제거된 원인은 나때문이었다.
눈앞에서야 마음을 읽을 수 있다지만, 하남까지 떨어진 무림맹의 동태를 살필 능력은 없었다.
나는 정보각 부장들을 독려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신생 사파연합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 지 그림이 그려졌다.
***
당연우가 사파연합을 장악하고 어느덧 구십여 일이 흘렀다.
신임 련주는 가장 먼저 연합 본부 일층에 개인 집무실을 마련했다. 전임 련주와 다르게 연합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겠다는 의지였다.
집무실 앞에 선 대맹부장은 보고서를 들고 쉼호흡을 했다.
“후우······.”
권성이 실종된 가운데 제갈 군사가 은퇴를 표명하면서 무림맹 지휘부는 크게 흔들렀다.
사파연합 역시 신마와 철익을 잃으면서 휘청거렸지만, 신입 련주인 당연우의 수완이 너무 좋았다.
그는 업무에 들어가면서 비리를 저지르는 이들이나 업무에 태만한 자들을 가차없이 징계를 먹였다.
사파연합의 정보의 정보를 틀어쥐었다고 생각했던 정보각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외부인이었던 당연우는 그 어떤 연합원보다 더 내부 사정에 밝았다.
‘전임 련주가 남긴 비밀 감찰단이 그의 뒤에 있을 거야.’
이는 비단 대맹부장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특히 신임련주의 부하를 어르고 달래는 용인술은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맹부장이 잔뜩 긴장한 채 숨을 고를 때 집무실 안에서 신임 련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맹부장! 거기서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
“아! 넷!”
대맹부장이 새된 목소리로 답하며 급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우는 책상에 앉아 각 부서에서 보낸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대맹부장은 그 앞에서 마치 갓 입사한 사회초년생처럼 긴장했다.
대맹부장이 당연우에게 무림맹에 보낼 신입 첩보요원 훈련 계획서 및 최근 무림맹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건넸다.
당연우는 보고서를 쓱 훑어보고는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대맹부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신입 정보요원 훈련은 어떻게 되고 있나?”
“계획서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번 요원들은 무공 실력을 중점으로 뽑았습니다.”
“이유는?”
“잃은 요원들은 개개인의 무공보다는 첩보실력에만 중점을 맞춰, 무림맹의 요격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맹부장은 당연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얼른 덧붙였다.
“물론 단순 무공만이 아니라 첩보 교육도 이전과 다르게 철저하게 진행될 예정입니다.”
“무림맹의 요격에 대비할 정도의 고수를 보내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만한 고수를 키우겠다는 건가?”
당연우의 말에 대맹부장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장 무림맹에 보낼 인원에는 뛰어난 실력의 고수를, 후일 훈련받은 인재들을 보낼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혼자서 무림맹의 공격에도 도망칠 수 있는 고수? 그런 고수를 왜 첩보요원으로 돌리나?”
당연우의 물음에 대맹부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전의 실패만을 생각해 답을 내놓았더니 가장 큰 문제를 보지 못한 것이다.
당연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대맹부장을 힐난하지 않고 다독였다.
“대맹부장, 최근 무림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또 요원들을 잃으면서 힘들다는 건 알고 있네. 주변에서도 재촉도 하고 있고, 또 연합이 새로 개편되면서 압박도 많이 받는 것도 다 이해해.”
대맹부장은 자산의 고충을 이해해주는 당연우의 마음에 조금 흔들렸다.
그렇다고 마냥 풀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네가 최근 기루에 가는 일이 많다고 들었군. 정서적 불안을 여색으로 푸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이든 중년여성을 대상으로 삼는 것도 뭐, 그럴 수 있지. 취향이니까.”
“아니, 그걸 련주님께서 어떻게······.”
대맹부장이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은밀한 성적 취향이 들킨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과를 냈을 때나 할 수 있는 변명이야. 마감 시간과 결과물의 수준을 만족하지 못해서는 안 되지.”
“죄, 죄송합니다.”
대맹부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자네가 죄송할 건 없네.”
당연우는 차갑게 대꾸하고는 대맹부장을 내보냈다.
대맹부장이 힘없이 어깨를 내리고 집무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당연우 뿐만은 아니었다.
신임 련주 집무실에는 련주인 당연우 외에도 삼십대 초반의 비서와 사무보조가 구석에서 서류 업무를 돕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나이 어린 신임 련주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수십 일간 지켜봤다.
[역시 대맹부장님도 까일 줄 알았어.]
비서가 사무보조에게 전음을 날렸다.
입마저 가린 상황이라 제아무리 련주라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으아, 그렇게 쥐잡듯이 부하들을 잡더니만.]
사무보조 역시 전음으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당연우는 실무자를 독려하고 간부진을 호되게 쥐어짰다.
전 황실학사와도 친분이 있던 그는 인맥을 통해 관과도 줄을 만들었고, 상계와도 돈독한 관계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수로채의 수적들은 해운 유통사업으로 업종을 변경했고, 산적들도 남의 표물을 노리는 대신 직접 표물을 운반하거나, 산지 개간 사업, 산간 도로 정비 사업 등에 투입됐다.
[연합의 사업을 모두 양지화 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될까?]
비서는 영 미덥지 못한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옆에서 당연우를 보조하는 사무보조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문제야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되고는 있어. 련주님이 직접 나서서 설득되지 않은 곳이 없었거든.]
사무보조는 당연우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당장 절강 지역 관청을 구워삶은 것부터 시작해서 주민 복지 정책 등을 시행해 민심을 휘어잡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처음에 사무보조도 왜 돈을 애먼 사람들에게 뿌리나 싶었는데, 주변 민심을 휘어잡자, 불만을 낼 수가 없었다.
[그 정도야? 우리 젊은 련주님 수완이 대단한데?]
[착각하지마. 련주님은 사파연합을 무릎꿇린 대마두다. 겉모습과 다르게 충분히 괴물이지.]
비서가 몽롱한 눈으로 당연우를 바라보자, 사무보조가 기가 찬듯 경고했다.
[그리고 유부남이고, 너보다 열 살은 더 어리고.]
[알아, 안다고.]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비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사무보조가 앗 뜨거하고 놀라는데 당연우의 입이 열렸다.
“수다를 떠는 것은 좋은데, 손은 멈추지 말아야지?”
“아? 네!”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당연우의 말에 급히 일을 하는 척했다.
사무보조가 눈치를 보다가 비서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우와 귀신이네. 귀신이야. 어떻게 우리가 전음을 나누는 걸 알았을까? 뭐, 기의 움직임? 이런 걸 파악한 걸까?]
[닥쳐. 나 일해야 하니까.]
비서가 차갑게 대꾸했다.
- 작가의말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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