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서열꼴찌 소환술사, 봉인된 마족, 그냥 좀비. 이젠 오타쿠까지
“주인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검은 점에서 나오자 이레스트와 익숙한 숲의 풍경이 반겨주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대신 푸릇푸릇한 나무들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검은 점의 여파에 정신을 못 차리는 다른 일행들을 이레스트가 챙겼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앙피 일행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검은 점은 밖에서 알아챌 수 없기에 쉽사리 찾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다면 하이드로에게 어떤 처벌을 받았을지 두렵다.
앙피와 마찬가지로 이레스트도 그녀대로 죽다 살아났다.
“아으...”
“어디 안 좋으십니까? 이 기력 포션을 드리겠습니다.”
“눈부셔...”
앙피는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는 게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그들이 검은 점에 갇혀 있던 시간은 몇 시간 되지 않는다.
앙피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이레스트는 다시 본인의 위치로 돌아갔다. 가깝지만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몰래 적어놨던 사직서도 품속에 넣었다. 그녀가 하이드로에게 앙피를 부탁받았을 때 한가지 충고를 받았다. 혹여나 앙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물겠다고.
하지만 이레스트는 여차하면 사직서를 제출하고 도망칠 생각이다. 새로운 주인님을 찾는 건 쉬우니까.
“아오. 허리야.”
카힐이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어.. 카힐 님 돌아오셨네요..?”
좀비였던 카힐이 무사히 마족으로 돌아왔다. 김인간이 사라지며 자연스럽게 카힐에게 걸렸던 좀비화도 풀린 것이다.
그녀는 파릇파릇한 몸이 그리웠는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그녀는 좀비가 되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몸소 체험했다.
“훅. 훅. 비비 너는 어떻게 그런 몸으로 사냐. 진짜 최악이더라.”
“꾸어?”
그 말이 비비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비비도 처음부터 좀비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좀비 이전의 기억과 좀비가 된 과정에 대해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그녀가 앙피를 쫓아다니는 이유도 단지 소환수의 본능일 뿐이다.
그리고 그 본능을 잊은 지 오래된 이도 있다.
“그리고 앙피 너···.”
카힐이 어깨를 휙휙 돌리며 다가온다.
“버린 게 아니에요...! 나오면 치료법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에? 뭐 어쩌라고. 그게 아니라, 겪어보니 어때. 역시 사람보단 귀신이 더 무섭지?”
“....귀신은 없었는데요.”
“아니 김인간인가 김사람인가 그 녀석이 귀신이었잖아!”
“느에...? 그랬어요.....?”
아마 이 대화를 김인간이 지켜봤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해하면 무서운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의 괴담을 만들어냈다면서 말이다.
그때 둘의 시답잖은 대화를 지켜보던 나영웅이 끼어들었다.
“그보다 우린 해야 할 것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생긴 건 둔하면서도 가끔씩 올바른 소리를 할 때가 있다.
그러자 앙피가 깨달았다는 듯 구석에서 버섯 하나를 따왔다.
작은 동물을 소환하고 답례로 먹이를 좀 주자. 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나영웅에게 버섯을 넘겨주었다.
“갑자기 버섯을? 뭐, 잘 먹겠네.”
나영웅은 처음 보는 버섯을 잘도 받아먹었다. 먹으면 정신적 데미지를 받는 독버섯이다.
하지만 나영웅은 이미 멘탈이 단련되어 있는지 아무 타격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가 띵한 독특한 맛’이라는 감상평도 내놓았다.
“이 정도면 한국의 민트초코보다 약하군.”
“그보다 누구냐 저 돼지 새끼는?”
버섯을 으적으적 먹는 나영웅을 카힐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나영웅이 너무 맛있게 먹자 비비도 하나 주워서 입에 집어넣었다. 물론 비비도 좀비라 애초에 데미지를 받을 멘탈이란 게 없었다.
둘은 나란히 앉아 버섯을 으적으적 먹는다.
“세 분 초면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나영웅만 카힐과 비비를 안다. 혁명군의 문박에게 얼핏 전해 들었다. 반면 나머지 둘은 나영웅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엇갈렸었다.
“그대들의 이야기는 간간이 들었다네. 이 몸을 소개하지. 난 이세계를 구할 남자. 이름은 나영웅이라고 하네.”
“말투가 앙피보다 극혐인데. 근데 너 우리랑 같이 다닐 거냐? 소개를 왜 해.”
“그야 마스터를 따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마스터? 어우. 야, 앙피. 얘 데리고 다닐 거야? 안 그래도 개노답 파티인데 더 망칠 일 있냐.”
소환수 못 다스리는 소환술사, 힘 봉인된 마족, 그냥 좀비. 그리고 이젠 오타쿠까지. 뭐 하나 제대로 된 놈이 없는 파티다.
“보기엔 저래도 똑똑하신데요..”
“참나.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그게 걱정인데...”
“뭐 시발?”
앙피와 카힐이 또 투닥대는 사이, 비비가 나영웅에게 다가갔다. 비비는 그에게 적대심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비비가 나영웅의 몸을 여기저기 찔러봤다.
“크어어어.”
“오. 그렇군.”
“꾸어어어!”
“흠흠. 그렇단 말이지.”
“뭐냐. 쟤 비비 말을 알아듣는 거야?”
“쿠에에에엙!”
비비가 나영웅의 어깨를 물었다.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모양이다.
나영웅은 어깨에 비비를 단 채로 카힐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대는 기운이 이상하군.”
“마족이니까 그렇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네. 그대는 뭔가... 완결쯤에 주인공을 배신할 관상이야.”
나영웅이 수많은 애니에서 배운 관상학을 발동했다.
“ㅈ..절대 아니야~ 개소리하지 마!”
정곡을 찔린 카힐이 어색하게 부정했다. 자유의 몸이 되면 복수할 생각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가? 뭐. 클리셰를 깨는 캐릭터일 수도 있으니. 그보다 비비 양. 이제 놔주게.”
“크르르륽...”
으적으적. 우물우물.
“후후후. 아프다네.”
“그보다 저희 어서 중지로 가야 해요..”
앙피가 오랜만에 옳은 말을 했다.
기껏 약지에서 빠르게 탈출해놓고 중지까지 가는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검은 점을 무사히 탈출한 건 잘한 일이지만 본래의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도 앙피가 나름 일행의 리더 비슷한 포지션이라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좋아. 닥치고 출발!”
그리고 5분 뒤, 중지의 반지로 추정되는 성벽에 도착했다.
사실 약지와 중지는 거의 붙어있어서 가깝다.
“뭔데. 바로 앞이잖아. 괜히 기합 넣어서 출발했네.”
“그대의 기개. 나는 좋게 봤네.”
앙피 일행이 중지의 반지 앞에 나란히 섰다.
아무래도 금방 큰 사건을 겪은 탓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보다 중지는 어떤 곳일까요...”
“뻔하지 않냐? 딱 봐도 범죄도시지. 중지잖아 중지.”
카힐이 앙피를 향해 중지를 들어 올렸다.
하긴 중지라 하면 떠올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그런 식이긴 했다.
전투 민족 다음엔 공포. 그리고 이번엔 범죄인가..?
앙피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중지의 반지로 향했다. 제발 이번엔 초면부터 창을 던지는 미친년이 없길 바라야지.
“안녕하세요. 중지입니다.”
“ㅇ..안..안녕핫..하세요.”
반지의 입구로 들어서자 경비병이 친절하게 맞이해줬다. 다행히 멀쩡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실 이게 정상이긴 하다. 다 사람 사는 곳인데 살기 좋은 마을이 되려는 게 당연하다.
“그러면 여기 여행자 관련 문서 좀 써주세요.”
“앗... 네...”
‘...이런 거 한 번도 안 써봤는데...’
앙피가 문서에 질문에 열심히 답하는 사이 나머지 셋은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야, 돼지. 뭔가 이상하지 않냐? 너무 친절한 거 아냐?”
“카힐 양. 그대는 세상을 밝게 볼 필요가 있네. 그보다 혹시 마족은 주식을 뭐로 삼는가? 마왕은 어딨지? 마족은 대부분 하늘을 유영하던데 그대도 가능한가? 또 정기를 먹는 마족도 진짜로···.”
나영웅이 참아왔던 오타쿠 기질을 뿜어냈다. 하지만 눈앞에 애니 속의 존재인 마족이 있는데 이걸 질문을 안 하고 배겨?
“아오! 좀 닥쳐!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너 살던 데는 뭐 다르냐!”
결국 카힐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후후. 한국엔 수백 가지의 음식이 있지. 그리고 하나같이 맛있네.”
“안 궁금해 돼지 새끼야!”
그때였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경비병의 얼굴이 차가워진 게.
“금방. 뭐라고 하셨죠. 거기 여성분.”
“뭐? 아. 이 돼지가 자꾸 헛소리하잖아.”
경비병이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다가온다.
“중법 제1항, 제2항 위반. 당신을 범죄자 신분으로 체포합니다.”
경비병의 말에 반지 밖에서 대기하던 다른 경비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들어온다. 그리고는 카힐에게 커다란 수갑을 채웠다.
“ㅇ..어? 카힐 님 누구 또 때리신 거예요..?”
“뭔 개소리야! 나 아무것도 안 했어!”
카힐이 경비병에게 붙잡힌 채 소리쳤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나영웅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밖에 없는데, 설마 이런 걸로 잡는다고?
“저기... 무슨 일 때문에 체포하시는 거예요...?”
“지금 저에게 질문하신 겁니까?”
“ㄴ...네 그렇죠...?”
“중법 제4항 위반. 당신도 체포하겠습니다.”
“느에?”
순식간에 앙피와 카힐이 잡혀버렸다.
그 모습을 본 비비가 “쿠에에엙!” 하며 앙피를 구하러 달려들었고 그녀 역시 잡혀버렸다.
이제 잡히지 않은 건 나영웅뿐이다.
“야! 돼지 새끼야! 좀 도와줘 봐!”
“후후후. 말 걸지 말게. 범죄자 녀석.”
“이 개새끼야아아···.”
셋은 그대로 어딘가로 끌려가 버렸다.
그렇게 중지에 들어온 지 단 10분 만에 앙피, 카힐, 비비는 범죄자가 되어 끌려갔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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