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번엔 아카데미다
비비가 의문의 방으로 끌려가는 사이, 나머지 셋은 준비된 방에 도착했다.
왕궁 자체가 크진 않았지만 지내는 인물은 더욱 적은 탓에 손님 방의 크기도 어마무시했다.
약지의 모 여관이 판잣집으로 보일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금장식과 보석이 여기저기 붙은 탓에 불을 밝히지 않아도 눈이 부신 기분이었고 뭔 놈의 침대가 앙피 방만큼 큰 거지.
“야. 여기 맞아? 아무리 봐도 그 여왕 방인데?”
“...여기 편지가 있어요.”
문 바로 옆 탁자에 황금 실링이 찍힌 편지 봉투 하나가 있었다. 겉에는 ‘귀요미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썼는지 훤히 보였다.
앙피는 편지를 그대로 지나쳐 침대로 갔다.
“야. 이거 안 읽어봐?”
“누구 건지 모르잖아요...”
누가 봐도 앙피 거다.
“후후후. 친히 편지를 놓았다면, 이곳이 우리를 위한 방이 맞겠군. 편지는 내가 읽어봐도 되겠나, 마스터?”
“..ㄴ...ㅔ..”
앙피가 넓디넓은 침대에 얼굴을 처박은 채 답했다.
나영웅은 편지를 뜯어 읽기 시작했다.
그는 첫 줄을 읽자마자 “호오.” 거리며 감탄했다. 나영웅은 편지의 단어 하나하나에 감탄하며 반응했다. 라노벨이라면 질릴 정도로 읽은 그가 이 정도로 반응하다니, 심상치 않은 내용이 틀림없다.
카힐도 그 역작이 궁금한지 나영웅 옆을 기웃거렸다.
“크흑. 마스터를 위해 이런 명작을 쓰다니. 마스터의 소환수라 자랑스럽군!”
나영웅은 편지의 내용에 엄청나게 감동하였다. 대체 뭔 내용이길래.
“뭔데! 뭐가 쓰여 있는데 줘봐!”
카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영웅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영웅은 순식간에 편지를 입에 욱여넣었다.
“? 미친놈아 뭐해!”
꿀꺽.
카힐이 말릴 새도 없이 나영웅이 편지를 집어삼켰다. 희대의 명작은 나영웅의 뱃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에게도 그 내용을 말하지 않은 채.
“그대들이 버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네. 후훗. 내가 목숨을 살려준 줄 알게.”
“미친놈이 어그로는 왜 끌어 그럼!”
카힐이 나영웅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영웅은 뭐가 좋은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들어온 이르하라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침대에 빠져 죽은 듯한 소년, 어째서인지 처맞으면서 웃는 남자와 때리면서 화내는 여자.
이르하라는 이 방이 이렇게까지 어지러운 느낌이었나 싶었다.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끌었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결국 뒤에서 기다리던 비비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쿠에에엙!!”
“엥.... 비비 님..?”
“어? 비비!”
셋은 그제야 비비가 사라졌었단 걸 눈치챘다. 그들에게 비비는 존재감이 없는 걸까.
“옷이.... 왜 그래요...?”
“꾸어!”
비비는 어느새 단정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도 양갈래로 묶고 낡은 가방도 책가방으로 바꿨다.
무엇보다 교복이 비비를 위해 만든 것처럼 정말 꼭 맞았다. 실제로 이르하라가 열심히 치수를 재서 만든 것이지만. 이것도 그의 수많은 잡일 중 하나다.
그는 한눈에 비비가 모델로 제격이란 사실을 안 것이다. 음흉해 보였던 눈빛도 어서 새 옷을 선물해줄 생각에 들뜬 것이었다.
비비는 새 교복이 마음에 드는지 열심히 뽐냈다.
검은 망토와 흰 셔츠가 그녀의 하늘색 머리를 돋보이게 해줬다.
이르하라가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비비 옆에 섰다.
“이번에 가실 [명문 영웅육성과마왕퇴치그리고가문의재건 아카데미]의 교복입니다. 교복 명칭은 [죽음의블랙과고귀한화이트가침식ㄷ···.”
“씹. 뭐라는 거야! 그래서 설마 우리도 저걸 입어야 돼?”
“네. 여러분은 아카데미에 직접 잠입하게 되실 겁니다.”
그렇다. 검지의 인장을 받는 법은 교장의 인정을 받는 것.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직접 학생이 되는 것이다.
마침 나이도 아직 10대들이니 딱 좋은 방법이다. 나영웅은 20대이긴 하지만.
“제정신이야? 나 학교 다닌 적 없어.”
“ㅈ..저도 요리는 배워봤는데... 다른 건...”
“후후. 그나저나 이런 조합을 받아주는 건가? 보다시피 우린 마족과 좀비도 있다네.”
“괜찮습니다. 평범한 시민은 마족이나 좀비를 볼 일이 없으니까요. 희귀병 앓고 있는 것으로 이미 서류처리 해놨습니다.”
“너 그거 혹시 타종 병자 취급···.”
“호오? 학교라. 이거이거 오랜만에 학우를 만들 시간인가?”
“나영웅 님. 학교를 다녀봤어요...?”
앙피가 침대 끄트머리에 누워 물었다. 어쩐지 똑똑해 보였는데 배움이 많아서 그렇구나 싶었다.
반면 이르하라는 영 떨떠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봤다. 그의 눈에 나영웅은 딱히 현명해 보이는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게으르고 나태해 보였기에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네. 무려 12년. 사칙연산으로 시작해 기하와 벡터까지. 국어, 영어, 수학, 생물, 물리, 지구, 화학. 그 외 체육, 음악, 기술과 가정까지.
이 몸이 있던 한국에선 기본이라네.”
‘태반이 들어본 적 없는 과목이군. 칸국? 대체 무슨 국가길래 저렇게나 많은 교육을 요구한단 말인가.’
“나머지 세 분의 교복은 내일 아침까지 만들어 두겠습니다. 치수를 재야 하니 잠깐 제 방에 들렀다 가시지요.”
이르하라가 보기엔 조금 음흉해 보여도 그만큼 실력 있는 자다. 저래 보여도 엄청나게 꼼꼼하고 구석구석 치수를 재서 완벽한 옷을 만들어줄 것이다.
‘씁. 잠시만. 그럼 저 아저씨가 직접 하는 거잖아. 킁킁. 나 냄새 안 나나?’
카힐이 몸 여기저기를 코로 훑었다. 카힐 그녀가 맡기에도 조금 찌릿한 냄새가 났다.
“목욕부터 해도 되냐?”
카힐이 몸이 간지러운 척 벅벅 긁으며 물었다.
효과는 직빵이었다. 이르하라가 ‘마족은 원래 저렇게 더럽나.’ 하는 표정으로 목욕탕 위치를 일러주었다.
그리고 꼭 셋 다 씻고 오라고 했다.
“목욕물은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 어서 가서 씻으시지요. 전 제 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제 방 위치는 비비 님이 아시니, 그럼...”
이르하라는 원단 준비를 위해 먼저 돌아갔다.
“...카힐 님 근데. 여관에서도 안 씻으셨잖아요...”
“야 원래 마족은 안 씻어. 비비도 안 씻을걸?”
“꾸.어.”
비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코를 막고 냄새난다는 시늉을 했다.
“야 비비! 니가 잘 씻는다고? 씻으면 살점 다 떨어져 나가는 거 아냐?”
카힐이 콧방귀를 끼며 비웃자 비비도 콧방귀로 맞대응했다. 해본 적이 없어서 직접 “크흥” 소리를 냈긴 했지만.
“후후후. 목욕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영웅이 곱슬머리를 광고처럼 촤르르 털었다. 머릿결 좋은 곱슬이라니, 물렁한 치킨처럼 괴리감이 든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 카힐과 비비가 동시에 뒤돌아봤다.
둘은 나영웅을 빤히 쳐다보다 위아래로 그를 스캔했다. 그리고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동시에 뱉었다.
“하! 니가? 젤 안 씻을 것 같은 새끼가.”
“꾸어어. 쿠게게겕.”
카힐과 비비가 빵 터져서 맘껏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나영웅은 개의치 않고 정색하고 말했다.
“혹시 오타쿠 비하 발언인가? 그대들은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나 보군.”
“오타쿠? 그게 뭔데 이 씹덕아.”
카힐이 저도 모르게 새로운 욕설을 깨우쳤다.
‘또 한참 싸우겠네...’
“...”
앙피는 그 틈을 타 방문을 스윽 열었다.
혼자 복도로 빠져나온 앙피는 그대로 목욕탕을 향해 걸었다.
모퉁이를 두 번 돌자 저 앞에 따스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 보였다.
앙피가 슬그머니 그 안을 들여다보자 탈의실로 보이는 방 너머로 커다란 온탕이 보였다.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실내지만 바깥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탕 주변을 커다란 잎을 가진 나무가 감싸 아늑하면서도 개운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와...”
앙피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다닥 옷을 벗고 탕 안으로 뛰어갔다.
목욕탕도 왕궁답게 규모가 컸다. 못해도 20명은 들어올 크기의 탕이었다.
쏴아-.
앙피가 목욕물에 몸을 담그자 앙피만큼의 소박한 물이 밖으로 흘렀다.
나르여앙의 취향에 맞춘 뜨끈한 목욕물이 몸을 감싼다. 기분이 노곤해지는 게 눈을 감으면 그토록 원하던 숙면이 가능할 것만 같다.
“흐아아아...”
앙피는 코가 잠길랑 말랑할 정도로 머리를 집어넣고 물결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잠들어 물을 먹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편했다.
숙면 하나로 시작한 여행. 어쩌면 이곳에서 끝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숙면이 왜 방해되었는지 몸소 알려줄 놈들이 나타났다.
“유후!”
“꾸어어!”
풍덩-!
퐁당-
갑자기 나타난 카힐과 비비가 목욕물에 뛰어들었다.
“으~! 좋다!”
카힐이 앙피의 건너편에 떡하니 앉았다.
“꺄아아악!”
앙피가 가녀린 비명을 지르며 급하게 탕 위에 떨어진 커다란 나뭇잎을 집어 들었다. 그는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며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왜 여기로 들어오세요!!”
“아. 왜 이렇게 땍땍거려. 여기 목욕탕 하나밖에 없어서 혼탕이래.”
“후후. 맞네. 정말 좋은 제도군.”
“아. 씹···. 변태 같아 너.”
“포상이라 할 줄 알았나? 사람에게 그런 말은 실례라네 카힐 양.”
앙피는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들은 혼탕이 아무렇지도 않은가? 마족이랑 좀비라서? 나영웅이 살던 한국은 원래 그런 문화인가?
그리고 그때 앙피의 눈에 떡하니 옷을 입은 나영웅의 몸이 들어왔다.
목욕 전용 반팔과 반바지가 나영웅의 끔찍한 살집을 가려주었다.
“근데 앙피. 너 그 나뭇잎은 뭐냐?”
“ㅇ...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 어디 아파?”
카힐이 갑자기 물살을 가르며 다가온다.
그리고 앙피는 옷을 입지 않았다.
“아니라고요! 오지 마요!!”
카힐이 일으키는 물살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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