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 홀로 나체, 앙피 대위기
왕궁에는 단 네 명의 인물만이 지내고 있다.
여왕, 나르여앙.
칙사, 피죠.
호위병, 영점사.
잡일담당, 이르하라.
빨래, 요리, 건물 수리, 청소 등은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겐 이르하라가 있으니까.
어쨌든 몇 안 되는 인원들이기에 목욕탕을 여러 곳 만드는 것은 불필요했다. 애초에 목욕 시간이 겹칠 일도 별로 없을뿐더러 목욕용 옷을 입고 넓디넓은 탕 안에 떨어져 있으면 불편할 일도 없다.
참고로 말하자면 목욕물, 탕 관리 역시 이르하라의 몫이다.
그리고 이곳에 나체로 들어온 것은 앙피가 처음이었다.
“나뭇잎이 좋아요!”
다행히 목욕물은 특수 포션을 넣은 덕에 불투명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말이 불투명이지 가까이서 빤히 본다면 보일 건 다 보인다.
그렇기에 앙피는 더욱 필사적으로 나뭇잎을 몸에 밀착했다.
그러나 한 번도 이렇게 목소리가 커졌던 적이 없던 앙피를 카힐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 어디 아프냐? 물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 거 아냐?”
처음 보는 앙피의 어색한 모습에 카힐도 덩달아 어색하게 다정해졌다.
어느새 카힐이 거의 바로 앞까지 와버렸다.
그녀는 얘가 왜 이러지 싶은 표정으로 앙피를 빤히 쳐다봤다. 앙피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뒤로 바짝 붙었다.
하지만 이미 탕의 가장자리고 탕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그리고 그때 카힐이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앙피에게 바짝 붙었다.
“앙피... 너....”
“ㄴ...네?”
“너도 혼탕이라 그러는 거지! 이 변태야!”
카힐이 앙피의 소중한 나뭇잎을 콱 붙잡았다.
“으악!”
“이거 치워봐!”
카힐이 커다란 나뭇잎의 끝을 잡고 당겼다.
나뭇잎은 힘없이 투두둑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나뭇잎 사이로 앙피의 옆구리부터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ㅈ...잠시...잠신마..잠시마뇨!”
“꾸엙!”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 다른 비명이 들렸다.
신나게 목욕탕을 뛰어다니던 비비가 그대로 미끄러져 넘어지는 소리였다.
“엌. 쟤 뭐하냐? 야 목욕탕 처음 와봐?”
덕분에 새 놀림거리를 찾은 카힐이 비비에게 달려갔다.
“흐···. 휴.....”
앙피는 거의 다 찢어진 나뭇잎을 껴안고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앙피를 지켜보던 나영웅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마스터. 아무리 그래도 옷은 입게. 같은 남자라도 보기 부끄럽군.”
“아...”
앙피는 나영웅이 건네준 목욕용 옷을 황급히 입었다. 수치스러움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나영웅이 봐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뭐야 앙피. 애착 나뭇잎 버렸네? 드디어 진정했냐?”
비비를 잔뜩 놀리며 한참 놀던 카힐이 다시 탕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아니라... 아깐 옷을 안 입고 있었어서....”
“으. 너 진짜 변태야? 근데 뭐 그런 걸로 부끄러워하냐.
볼 것도 없으면서.”
카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지는...”
“뭐? 지는?! 야, 너랑 나는 다르지!”
카힐이 탕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카힐이 일으킨 물보라를 시작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힐의 물보라에 비비가 맞았고 비비의 반격에 나영웅이 맞았다.
조용히 탕 속으로 잠수하는 앙피 위로 셋의 치열한 공방전이 한참이나 계속됐었다.
그렇게 왕궁의 목욕탕은 지어진 이래로 처음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목욕물이 절반이나 줄고 나서야 그들의 전쟁은 끝이 났다.
홀로 물속에 숨어 있던 앙피는 조용히 다시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러고 보니 카힐 님.”
“헥.. 헥.. 뭐야 넌 어딨었냐. 왜 부르는데.”
“마왕 말인데요.. 마왕이 있으면 카힐 님도 마왕 편 아니에요...? 찾으러 안 가세요?”
“야, 내 주인이 너지 걔나? 어차피 난 어렸을 때 봐서 기억도 안 나.”
카힐은 시큰둥하게 탕 안에 늘어졌다. 그녀의 몸이 목욕물에 둥둥 뜬다.
잠시 어렸을 적의 추억을 회상할까 싶다가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젠 상관없으니까.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멍하니 목욕이나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 어렸을 때요...? 제가 소환했을 때도 아직 5살이셨잖아요.”
“우리 마족은 너희 같은 멍청한 인간들이랑 달리 어렸을 때도 지능이 높은 편이거든.”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소환하기 전에도 살아 계셨어요..?”
앙피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목욕탕에 메아리친다.
“저 돼지도 한국인가 안쿠인가 하는 원래 세계가 있잖아. 우리도 당연히 있지.”
“후후후. 그렇군. 모두가 이세계로 소환된 용사라는 건가.”
둘의 대화가 재밌어 보였는지 나영웅도 급하게 탕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엔 아직 헹궈지지 않은 비누 거품이 남아있다.
다들 모여있자 비비도 스리슬쩍 들어와 앙피 옆에 자리 잡았다.
“그럼.. 원래 삶도 있고 가족도 있던...?”
곁에 앉자마자 날아오는 패드립에 비비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젠 하다 하다 패드립까지 하냐. 시발.”
“우릴 무슨 리젠되는 몬스터로 생각하고 있던 건가, 마스터?”
앙피는 심하게 당황했다. 나영웅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았으니까.
소환수는 그저 자신이 연성하는 거라 생각했다. 세상에 없는 이를 태어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원래 다른 세계에서 사는 이들을 데려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도 본래의 삶이 있다는 것이지.
능력을 없애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건 앙피의 일방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앙피의 소환술이 사라지면 그들은 다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왼섬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건 앙피의 단순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ㅅ...소환 해제해드릴게요. 죄송해요. 몰랐어요.”
“괜찮다네. 우린 이대로도 만족···.”
“소환 해제!”
앙피가 익숙한 나영웅을 다시 원래 세계로 돌려보냈다.
아, 그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 복장도 원래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그렇다, 나영웅은 물에 흠뻑 젖은 딱 달라붙는 목욕용 옷을 입은 채 서울의 한 가운데로 돌아갔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앙피는 이번엔 카힐을 바라봤다.
“소환 해···.”
“와씨! 잠시만!!”
카힐이 물의 저항을 이겨내고 앙피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온몸으로 앙피를 제압했다.
“난 안 돌아가도 돼. 여기 있을 거야.”
“ㅎ..하지만 원래 삶이 그리우시잖아요.”
원래 삶? 고작 5년밖에 안 살았던 곳이 뭐가 그립겠는가. 게다가 마계는 이곳보다 몇백 배는 살기 힘든 곳이다.
‘그리고 여기 남아있어야 마지막에 복수한다고!’
앙피를 향한 복수의 꿈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카힐은 자유를 얻어 앙피에게 복수하기 전까진 절대 돌아갈 수 없다.
“10년이나 여기 있었는데 뭘 돌아가.”
“... 그럼 비비 님이라도.”
“꾸어. 꾸어!”
비비도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자칫하면 목이 빠질 정도로 급하게 흔들었다.
모두가 거절하자 앙피는 조금 진정되어 다시 첨벙 앉았다.
“다들... 여기가 더 좋은 거예요..?”
앙피는 무릎을 끌어안고 보글거리며 물었다.
“네가 왜 그렇게 걱정하는 줄은 알겠는데, 아마 소환수 대부분 여기 생활에 만족할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이 세계가 생각보다 살기 좋잖아.”
‘... 살기 좋나..?’
지나온 마을들을 떠올려 보니 잘 모르겠지만 앙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는 생각보다 끔찍했거든.”
카힐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눈빛에서는 그녀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감정이 보였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 그럼 카힐 님이 계시던 곳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뭐? 별로 유쾌한 이야긴 아닌데. 듣고 싶냐?”
“아뇨. 그냥 왠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그렇지. 앙피가 다른 사람의 과거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퉁명스러운 반응이 오히려 카힐의 부담을 덜어줬다. 뭐라 말해도 “아.. 네..”하고 넘길 테니까.
카힐은 이야기하기에 앞서 수도꼭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뜨거운 물을 콸콸 쏟아부으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주 뜨거웠어. 이런 목욕물은 냉탕으로 시작할 정도로. 아주 뜨거운 곳이었어.”
***
내가 말했었지. 마족은 어렸을 때도 지능이 높다고.
근데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더라.
마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난 펄펄 끓는 대지에 덩그러니 있었어. 머리는 어서 일어나라고 하는데 몸은 너무 약해서 버둥거리는 게 전부더라.
등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가 너무 아팠는데 그땐 세상이 원래 그런 줄 알았어. 땅을 짚으면 몸이 불타고 숨을 쉬면 폐가 쪼그라드는.
그렇게 겨우 기어 다닐 정도로 크고 나서야 내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지. 원래는 부모라는 존재가 아기를 돌봐주는 거래. 웃기지 않아? 마족인데 모성애는 있다, 이거야.
그럼 날 버리고 간 사람들은 마족이 아니었나 봐. 킥킥.
하.. 어쨌든 난 계속 혼자였어.
나약한 외톨이 마족이 마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굳이 말 안 할게. 너무 어두워지는 건 싫잖아.
그렇게 몸도 마음도 망가졌던 날 데려가 준 게 마왕이었어.
그리고 다섯 살까지 마왕 성에서 노예 짓을 했어. 근데 그땐 그게 잘못된 걸 몰랐어.
맛은 없었지만 배는 채워줬고 베개도 덮을 것도 없었지만 안전하게 잘 수 있었으니까. 받는 취급은 똑같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맞았던 것 같아.
근데 머리가 조금 컸다고 그게 또 싫어지더라.
매일 한두 살 많은 마족한테 맞는 것도 싫었고.
몇 년째 먹었던 뭔지 모를 물컹물컹한 덩어리도 더는 먹기 싫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마족이 싫더라.
마족이 꼭 나쁜 건 아니야. 근데. 나빠도 상관없는 게 마족이었어.
내 뿔도 원래 더 자랄 수 있었는데 어떤 마족이 마법을 걸더라. 뿔이 곧 힘인 마족한테 얼마나 치명적인데.
“그래서... 그렇게 뿔이 조그만 거예요...?”
그치. 그 마법이 뭔지도 몰라서 풀지도 못해. 근데 나한테 이걸 건 이유가 뭔지 알아? 그냥 심심해서 걸었대. 심심해서.
시발.
그래서 말한 거야.
나한텐 지금이 훨씬 낫다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너한테 고맙기도 해.
‘날 버린 건 용서 못 하지만.’
[카힐은 버려지는 게 싫었다. 아니, 혼자가 되는 게 싫었다.]
- 작가의말
선호작과 댓글, 추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