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썩어빠진 것을 없애는 법
“그럼 카힐 양, 비비 양 출발하게. 이곳은 나와 소년이 맡도록 하지!”
“하. 근데 이거 괜찮은 선택 맞겠지?”
“후후. 카힐 양. 이제 와서 그런 말 하기엔 우리가 지나온 마을들을 떠올리게.”
“... 오케이 확인. 시작해!”
카힐이 비비에게 매달려 앙피에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 비비한테 속도가 밀리는 카힐이었기에 이게 더 빨랐다.
이 둘의 역할은 앙피 구출이었다.
아무래도 앙피가 교장과 단둘이 있는 것이 영 찝찝했기에 어서 달려가야 했다. 게다가 곧 일어날 일을 위해서도 앙피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비비를 자전거마냥 타고 사라지는 카힐을 보고는 나영웅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소년이여. 우리도 시작하지.”
“웅!”
이들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쉼터의 뒤편이었다. 다시 말해 아카데미의 가장 안쪽이자 검지에서 가장 깊은 곳.
그리고 ‘추방의 문이 있는 곳’.
“추방의 문이 여기가 맞는가?”
“마자! 당겨!!”
나영웅과 천재가 추방의 문을 잡고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번에 일외동이 열었을 때 균열이 생겨서 그런가, 문이 무게에 눌려 뻑뻑했다.
“제길! 이것까진 같이 하자고 할 걸 그랬군!”
“으아아악!”
나영웅과 천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당겼다. 그러자 문은 조금씩이나마 움직이긴 했다.
드득-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더디다. 이 작전의 핵심은 ‘동시 다발성’이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거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지저 왕이 나타났다.
“끼갸가각-!”
“지저 왕!”
“아, 저자가 지저 왕인가? 설명한 것보다 더 복슬복슬하군. 자네도 빨리 와서 이것 좀 돕게!”
나영웅이 반갑게 인사할 시간도 없이 일단 부탁부터 했다.
그러자 지저 왕은 잠시 비키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리고 이내 추방의 문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콰아앙-!
그러자 추방의 문은 순식간에 부서졌다. 만약, 이것이 평범한 지저 왕의 벽이었다면 아무리 지저 왕이라고 해도 이렇게 쉽게 부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검지인이 이런 문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작전은 불가능했다는 소리였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추방의 문이 지금, 정말 이름값을 하게 되었다.
쿠구구구궁-!!
메이커들이 조악하게 뚫은 추방의 문이 무너지며 벽 전체에 균열을 일으켰다. 벽을 뚫는 터널처럼 만든 탓에 그 내구성이 더 약했던 것이었다.
추방의 문의 윗부분에서 일어난 균열은 그대로 하늘로 치솟아 벽의 윗부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는 드디어 검지를 씻어낼 재앙이 시작되었다.
틱-
티디딕-
균열의 틈새로 바닷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이내 추방의 문이 있던 자리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온다 해도 막을 수 없는 해일과 같았다.
“후후후. 작전 성공이네!”
“나가. 나가야대!!”
작전 성공에 심취한 나영웅을 천재가 뒤에서 밀어댔다. 이를 눈치챈 지저 왕이 다급히 둘을 등에 태우고 몰려오는 바닷물에 몸을 실었다.
지저 왕은 마치 서핑보드가 된 것처럼 해일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본관을 향해 내달려오기 시작했다.
해일은 순식간에 쉼터를 덮쳐 호수까지 당도했고, 기숙사 건물의 아카데미생들은 자연재해와도 같은 상황에 황급히 탈출을 시작했다.
그렇게 너나 할 것 없이 해일을 피해 누군가는 공중을 도약해서, 누군가는 뛰어서, 누군가는 자신의 발명품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여기저기 뒹굴던 작은 지저들도 지저 왕을 보고는 옆으로 달려와 같이 해일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검지를 덮어버리는 걸세! 유후!”
나영웅은 잔뜩 신난 채 지저 왕의 정수리에 자리를 잡았다.
***
다시, 앙피의 시점.
“뭐냐 이 굉음은!”
교장이 앙피를 밟는 것을 그만두고 창밖을 내다봤다. 밖은 평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불안한 짠 내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덮쳐올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너. 너 이 왕궁 놈이 이런 목적으로 왔구나!”
교장은 시가용 재떨이를 들고는 앙피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아무 가책도 없이 앙피에게 그것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내 카힐이 비비와 함께 열린 창문으로 뛰어 들어왔고 교장은 순식간에 저지당했다.
“왕궁 놈? 좆까는 소리 하네. 우리가 진짜 왕궁 놈으로 보였냐?”
“쿠에에엙!”
비비가 이제 좀비임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뭣.. 어쩐지 하나같이 이상한 놈들만 오더니. 이 나를 속였겠다!”
“속은 게 병신이지. 세상에 마족이나 좀비랑 똑같이 생기는 희귀병이 어딨냐?”
카힐이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매도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 아카데미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모르나 보구나!”
교장이 본인의 지위를 팍팍 내세웠다. 이제 곧 물거품이 될 지위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가 아무리 씩씩대며 화를 표출해도 앙피 일행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전후 상황을 모르고 보면 웬 테러 집단과 불행한 학교장으로 보일 정도였다.
“병신. 그럴 시간에 도망이나 치지 그러냐?”
“큭. 제길!”
교장은 점점 더 커지는 소음에 지레 겁을 먹고 교장실을 뛰쳐나갔다. 그는 끝까지 학생들은 생각하지 않고 홀로 아카데미 밖을 향해 곧장 도망갔다.
“근데 이거 다른 애들은 어카냐? 걔네 도망갈 수 있나?”
“ㅇ... 아.. 네.”
앙피는 이미 지저들한테 혹여나 탈출 못 하는 아카데미생을 데리고 나가라고 명령해두었다. 몸집이 작은 지저였지만, 물을 만난다면 두 마리만 있어도 사람 하나는 끌고 도망갈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 넘쳐나는 게 지저였으니 인명피해는 아마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앙피는 교장실 구석을 뒤져 교장 전용 마이크를 찾아냈다. 예전에 각 기숙사 대표를 불러냈던 그 마이크다.
교장이 뭐만 하면 개인 마이크로 교내 전체에 훈화와 설교를 하던 탓에 음질은 끝내주었다.
앙피는 적당히 버튼을 눌러 마이크를 켰다. 그런데 너무 아무거나 누른 탓에 교내가 아닌 교외 마이크까지 켜버렸고 그의 목소리는 검지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 안녕하세요... 저는 그... 앙피에요..”
한시가 바쁜 마당에 일단 인사부터 하는 앙피였다.
결국 우물쭈물하는 그를 보다 못한 카힐이 마이크를 뺏어 들었다.
“야. 나와봐.
야! 검지 벌레들 들리냐? 지금 검지 침몰하고 있으니까 살고 싶으면 반지 쪽으로 뛰어!!”
쿠과가가강-!
방송이 끝나자마자 해일 소리가 바로 근처까지 들렸다. 그래도 아카데미가 워낙 컸던 탓에 그나마 느리게 온 것이었다.
“좋아. 옥상으로 가자!”
“꾸어!”
셋은 본관의 옥상으로 부지런히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가 보였다. 실시간으로 수면이 차오르는 게 보일 정도로 크고 가파른 파도였다.
옥상에 지어뒀던 박스 집도 이미 바닷물의 짠 기를 머금고 흐물흐물대고 있었다.
“이야. 화끈하게 터뜨렸나? 니가 말한 지저 왕은 나오긴 하는 거지?”
“ㅇ.. 아마요...?”
사실 앙피 쪽은 아직 지저 왕이 합류했다는 것을 몰랐다. 앙피는 막연히 호수가 막혔으니 아카데미 어딘가 숨어있겠지 싶었다. 그러다 해일로 검지가 잠겨나가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근데 걔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더라?”
“어... 뽀송뽀송... 보들보들... 복실복실...”
앙피는 손으로 복슬복슬한 느낌을 표현했다. 지저 왕의 모습을 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겠지만, 카힐과 비비에겐 헛짓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근데 걔 크기 엄청 크다며.”
“ㄴ... 느에.”
“저건 아니지?”
카힐이 파도 중앙에서 헤엄치는 거대한 무언가를 가리켰다.
물에 너무 젖어버려 골격이 다 드러난 지저 왕이었다. 그의 옆에 같이 헤엄치는 잉여 지저들도 똑같이 물에 털이 다 젖어 있었다.
“끼갸가각-!”
울부짖는 지저 왕 위로는 해일을 피해 도망가는 아카데미생들이 보였다. 그리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아카데미생들은 조그만 지저들을 튜브처럼 양 겨드랑이에 끼고 둥둥 떠밀려오고 있었다.
“으아악! 이게 뭐야!!”
“귀여워! 근데 징그러! 근데 귀여워!”
말하는 꼴을 보니 딱히 심각함을 느끼고 있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아카데미생들과 달리 바깥의 검지인들에겐 비상이 걸렸다. 그들은 저 멀리서 쏟아져나오는 바닷물과 주변을 감싸던 벽을 가로지르는 균열에 집단패닉이 일어났다.
“뭐야 저거. 야! 밖에 개백 없냐! 야!!”
검지는 반지가 있는, 즉 손바닥과 가까운 곳일수록 낮은 계급이 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새로 개척한 영토에서는 살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이점이 되었다.
개백들이 모여 사는 개백 마을은 최소한 수면 위에는 있었으니까.
그리고 위기감을 느낀 개백과 설지거들과 달리 조금의 위험성도 모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아카데미 가까이서 살고 있던 메이커들.
아카데미의 위상을 구경하며 흡족하게 웃는 게 하루의 전부인 놈들.
이날, 축제의 열기를 느끼기 위해 많은 메이커들이 아카데미 근처로 모여있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바깥의 주민들에게도 방송을 송출했기에 원한다면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메이커 계급에 한해서였지만.
이들은 알고나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을 내치고 밟아가면서 더 깊고 넓은 영토로 들어간 것이 나중에 화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아카데미 축제는 이제 기숙사 대전이 끝났기에 곧 있을 폐막식을 앞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메이커들도 아카데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때, 교장이 아카데미 밖으로 뛰쳐나왔다.
“오! 이봐! 오늘 폐막식은 직접 하는 것인가?”
“비켜! 꺼져!!”
교장은 이미 도망치던 와중 뒤에서 몰려오는 거대한 해일을 목격했다. 그는 앞을 막아서는 메이커들을 밀어내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메이커들은 교장의 연출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를 막아서며 즐겁게 농담이나 던졌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굉음이 계속 들리던데, 뭔 폭죽을 쓰는 거냐?”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으면 개백 놈들 시켜서 먹을 거나 더 준비해두는 건데.”
메이커들은 검지인의 특성을 넘어서 지나치게 거만했다.
“비키라고 이 멍청한 것들아!”
그렇게 교장이 아카데미 입구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을 무렵, 어느덧 해일이 모습이 드러냈다.
“저게 뭐야. 야! 뭐야!”
“으아악!! 해일이다! 벽이 깨진 거야!!”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메이커들은 급하게 개백들을 찾아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절망하고는 직접 두 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축제가 시작될 무렵, 그들은 개백들에게 “니네랑 관련 없는 축제니까 다 꺼져.”라고 말했었다. 지금 와서는 그들의 안전을 챙긴 꼴이 된 것이었다.
쏴아아-! 쿠구궁!
그렇게 해일은 그대로 아카데미의 정문을 부수고는 메이커들을 하나둘 삼키기 시작했다. 지저들이 그들을 구해주지는 않느냐고?
글쎄, 사람도 하대하는 놈들이 동물이라고 덜했으랴.
“이얏호!”
“무슨 이벤트야 이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해맑은 아카데미생들을 실은 파도는 그렇게 메이커들을 짓밟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 작가의말
선호작과 댓글,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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