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
앙피 일행은 그대로 100층으로 이동되었다.
여전히 높고 깎아지르는 절벽과 매섭게 부는 바람이 반겨주었다. 분명 튜토리얼을 끝내면 말하라고 했지만, 앙피는 일단 비상탈출을 했다.
한참을 달리고 도망친 탓에 앙피는 절벽 위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그 옆으로 카힐과 비비(머리통과 몸통이 따로)가 나타났다.
카힐의 가슴팍에 있던 나영웅도 전리품 취급의 슬라임 조각이었지만 같이 이동되었다. 그렇다는 건 비비 몸에 숨겨둔 검은 구슬도 같이 이동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쉴 시간도 주지 않고 윈스가 허공을 가르며 등장했다. 그는 날갯짓으로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앙피 앞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ㅇ... 안녕하세요...”
“이보게 주인 되는 자여. 튜토리얼이 안 끝났는데 왜 부른 거지?”
“... 아... 그게 그.... 이거...”
앙피는 옆에 딸려온 비비의 몸통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검은 구슬은 마치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엄청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시한폭탄처럼 검은 구슬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게 무엇인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인다네.... 아?”
윈스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 눈을 앙피에게 들이밀고는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구슬은 더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기존 위치에서 99층이나 위로 올라왔으니 이 잠시를 버틴 것만으로도 얼마나 튼튼한지 알 수 있었다.
“... 어라...”
챠르르르.
검은 구슬은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져 앙피 손에 흘러내렸다.
그리고 심장을 잃은 미궁의 탑은 즉시 붕괴하기 시작했다. 아니, 소멸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미궁의 탑의 모든 것이 미지의 공간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앙피 일행은 다시 왼섬으로 튕겨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궁의 탑이 사라질 때 나영웅은 아무개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 뒤로 몇 마디의 말이 잇따랐지만, 왼섬으로 순식간에 나가지는 탓에 듣지는 못했다.
그렇게 왼섬에서 가장 큰 검은 점이었던 ‘미궁의 탑’은 최후를 맞이했다. 웬 얼빵한 소년 하나 때문에.
여러 차원에서는 몇 년 만에 돌아온 사람들이 나타났고 한동안 기쁨과 눈물의 축제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좀비랑 악마와 몬스터를 다스리는 소년이 우리를 구원해주었죠.”
라고.
***
“꺄아아아악!”
카힐은 검은 점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가슴팍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나영웅이 밖으로 나오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조그만 슬라임 조각이었던 모습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탓에 카힐의 윗옷을 찢어버렸다.
아, 안에 티셔츠 하나 더 있어서 야릇한 장면 따위는 펼쳐지지 않는다. 조금도.
“후후후. 역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니 좋군.”
“이 돼지 새끼야! 내 옷 어떡할 거야!”
카힐이 나영웅의 뺨을 때렸다. 슬라임일 때는 안 아팠지만, 인간의 몸으로는 뺨이 얼얼했다.
나영웅은 코에서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고 무심하게 자신의 윗옷을 훌러덩 벗어주었다.
아, 나영웅은 안에 티셔츠 없다. 윗옷을 건네주니 맨몸이라 가슴이 출렁거리는 게 다 보였다.
한편 앙피는 메스꺼움을 표하며 땅에 널브러져 침을 질질 흘렸다.
“우에에에엙...”
소멸하는 검은 점에서 강제로 튕겨 나가니 온몸이 흔들리고 뒤집힌 기분일 것이다.
“우리가 소환될 때 그런 기분이었어. 이제 알겠냐?”
“으에엙......”
앙피는 카힐의 면박에도 바닥에 누워 하늘만 바라봤다.
“부에엙...”
어느새 몸통과 머리를 붙인 비비도 앙피 옆에 누워 그를 따라 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누워서 공명했다.
검은 점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다행히 엄지의 바로 앞에 도착하였다.
몇 달은 걸릴 거리를 하루 만에 왔으니 이득인가?
“우에에엙....”
저쪽의 나무 사이로 엄지의 반지도 보였다. 하마터면 검은 점에 영원히 갇혀버릴 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간을 엄청나게 아꼈다.
“근데 나영웅. 너 어떻게 돌아왔냐?”
“아마 미궁의 탑이 사라지며 자연스레 원래 몸으로 돌아간 것일 걸세.”
“슬라임 조각일 때가 차라리 귀엽기라도 했는데.”
“후후후. 이 몸은 연애할 생각이 없네만.”
이 이후의 이야기는 뻔했고 사실 나영웅은 몸이 조금 달라진 게 느껴졌다. 분명 원래 몸으로 돌아갔지만, 어째서인지 몸속 어딘가가 꿈틀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슬라임으로 있던 탓에 생긴 후유증으로 생각하고 일단은 넘겼다.
“네. 엄지에 방문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ㅇ... 어.... 그게...”
엄지는 워낙 교류가 활발한 곳이라 그런지 반지 앞에도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당연히 대부분이 물건을 운반하는 상인이었고 앙피 같은 여행자는 드물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보수적인 다른 섬과 달리 엄지는 이방인에게 관대했다. 그렇기에 반지에서도 딱히 앙피 일행을 수상하게 여긴다거나 막지도 않았다.
반지에도 무장한 경비병이 아닌 편한 옷차림의 안내원이 앉아 있었다. 여러 개의 창구에서 간단한 질문에 응답하면 곧장 엄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
“ㅇ... 인장을 얻으려고요...”
“야 임마!!”
카힐이 앙피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어딜 가도 인장은 중요한 것이었기에 함부로 들먹이면 경계를 받았다. 근데 그걸 물어본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이야.
카힐은 안내원의 눈치를 보며 도망쳐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안내원은 딱히 신경 쓰지도 않는 듯 오히려 세심한 설명을 해주었다.
“네. 인장은 중심 상가에서 구매할 수 있으십니다. 그 외에 목적은 없으신가요?”
“어... 응.”
카힐은 조금 당황했다. 당연히 또 창 같은 게 날아올 줄 알았더니 친절하게 위치까지 알려주다니.
그렇게 앙피 일행은 별 어려움 없이 엄지로 들어갔다.
반지를 지나 엄지로 들어서니 넓은 논밭이 반겨주었다. 무슨 작물인지 모를 것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고 드문드문 축사도 보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전부 농작물이나 수목원 같은 식자재뿐이었다. 엄지가 수출하는 상품은 전부 식자재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중앙의 넓은 길을 따라 저 멀리 커다란 도시도 보였다.
상인들과의 원활한 거래를 위해 모든 수출품을 반지와 가까운 곳에서 생산했다. 안내원이 말해준 상가라는 곳은 엄지의 가장 안쪽이었다. 둥그렇게 원 모양의 도시엔 팔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럼 인장부터...”
앙피는 도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이번엔 혁명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무언가를 무너뜨릴 필요도 없다. 난장판을 피울 필요도 없이 그냥 인장을 구매하면 된다고 한다. 골드도 적지 않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인장이 아무리 비싸봤자 50골드가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넘으면... 잠깐 빌리는 조건으로 깎아달라고 해야지...’
앙피는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서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쫓아오고 있지 않았다.
“... 안 오세요...?”
“휴식! 휴식부터!!”
“휴식이 필요하네...”
“꾸에에에에엙!!”
셋이 완고하게 팔짱을 끼고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긴 충분히 피곤한 일정을 소화하긴 했다. 앙피야 원래 잠을 못 자니 이런 일정이 익숙했지만, 나머지 셋은 당장이라도 졸려서 눕고 싶었다.
게다가 인장을 받는 방법도 저리 쉬우니 쉬는 게 더 중요했다.
“...... 그럼 쉴 곳을 찾아보죠...”
“휴. 드디어...”
다행히 여관은 도시까지 가지 않아도 많이 있었다. 워낙 오가는 상인이 많으니 자연스레 여관도 많은 것이었다.
대부분 일반 가정을 여관처럼 꾸민 것이었지만, 이조차도 모자라서 도시까지 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빠르게 상품만 구매해서 나갈 상인들에게는 굳이 도시까지 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반지와 가까운 여관을 선호했고 그로 인해 여관 가격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네?”
앙피 일행은 가장 가까운 ‘대파 여관’이란 곳으로 들어갔다. 여관 이름대로 알싸한 대파 내음이 풍기는 곳이었는데, 여기 역시 일반 가정집을 공사한 곳이었다.
앙피는 조심스레 여관 주인에게 네 명이 묵을 방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앙피는 마른침을 삼켰다.
“1,000골드!”
“......?”
이전 혁명 여관 주인도 저런 농담을 했었다. 앙피는 여관 주인들은 저런 장난을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앙피는 여관 주인이 언제 농담임을 밝힐지 기다리다가 먼저 다시 물었다.
“1골드에요...?”
혁명 여관도 셋이서 3골드였으니 장난기를 빼면 이 정도일듯했다.
“뭔 소리니. 1,000골드라니까. 그나저나 부모님은 없니? 너희 네 명이서만 온 거야?”
여관 주인아주머니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태도에서 농담이 아님이 느껴졌다.
“뭔 1,000골드야. 우리 하루만 있다 갈 거야.”
“그래. 하루에 1,000골드라니까?”
“미친. 그럼 한 명당 250골드나 받는다고?”
“그건 또 뭔 소리니? 인당 1,000골드지!”
주인아주머니는 앙피 일행이 탐탁지 않은지 흘겨봤다.
근데 무슨 여관에 하루 묵는데 4,000골드야.
앙피 일행의 손에는 고작 50골드밖에 없었다. 그것조차도 유랑 상인에게 옷과 각종 물품을 구매하고 남은 일외동의 돈이었다.
그렇게 앙피 일행은 그대로 여관에서 쫓겨났다.
“...... 뭐지?”
“ㅁ... 모르겠어요...”
앙피 일행은 덩그러니 도로에 서 있었다.
아무리 반지에 가까운 여관이라지만, 가격이 상상을 초월했다. 앙피가 평생 슾밥을 팔아도 모으기 힘든 돈이었다.
하지만 엄지의 물가는 다른 손가락의 100배 수준이었다.
워낙 수출하는 상품이 방대한 탓에 엄지인은 전부 돈이 넘쳐흘렀다. 얼마나 부유했으면 엄지에는 이런 속담도 있었다.
[도둑이 무서우면 금고를 열어라.]
도둑이 제아무리 훔쳐 가도 돈이 남는다는 뜻도 있었고 무언가 두렵다면 돈으로 해결하라는 뜻도 있었다.
뭐, 실제로 엄지인 중에 도둑은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앙피 일행은 도둑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날은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여관은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앙피 일행은 그냥 노숙이나 하기로 했다. 길에서 자는 것까지 돈을 받는 곳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 걷다 보니 논밭 대신 사과나무가 빽빽한 과수원 하나가 있었다. 그 입구 부분에 사과나무 잎을 잔뜩 버려둔 곳이 있길래 거기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다행히 나뭇잎이 잘 말라 있어서 누울 만했다. 과수원 주인이 나타나서 내쫓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시발. 자본주의 마을이야, 여기?”
“ㄱ... 그런가... 그럼 인장은 대체 얼마.....”
“후후후. 그래도 방법은 있네.”
“뭔데? 너 숨겨둔 돈 있냐?”
“여왕님에게 부탁하는 걸세.”
그래. 생각해보면 앙피 일행은 나르여앙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입장이었다. 인장을 받기 위해 골드 좀 달라고 하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지의 물가는 왕국조차 감당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당장 손바닥의 밑에서 사는 그들보다 엄지인이 훨씬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 연락할 방법이 없어요...”
검지에서 해일에 모든 걸 떠내려 보낸 탓에 남은 게 없었다.
카힐은 밤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ㅈ같은 마을.”
그녀의 욕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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