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고라니가 집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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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대순
그림/삽화
프레첼존맛
작품등록일 :
2024.07.0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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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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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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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화

DUMMY

고라니는 커다란 바위 위로 껑충 올라타고는 우뚝 서 라희를 지긋이 쳐다봤다. 순수한 동물의 맑고 초롱초롱한 눈빛이었음에도 라희는 아직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귀신을 뜯어먹었으니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이내 고라니는 라희의 심정을 아는지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듯 천천히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탁탁 앞발을 구르자 그 발 부분부터 황금빛의 아우라가 퍼져나갔다. 그 빛은 순식간에 몸을 타고 올라가 고라니의 신체를 전부 집어삼켰다.




이젠 빛을 타고 공중에 떠버린 고라니는 빛무리 속에서 무지개빛깔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고라니의 통통한 뒷다리는 굵고 탄탄한 허벅지로, 늘씬한 앞다리는 근육질의 팔로, 하나둘씩 그 형체들이 인간의 것과 흡사하게 변모해갔다.


그렇게 고라니의 얼굴마저 날렵한 턱선을 지닌 계란형 머리로 변하던 중.




쫑긋-!




사람의 머리 위에 놀이동산 머리띠마냥 붙은 고라니의 왼쪽 귀가 쫑긋거렸고, 이내 또 오른쪽 귀도 쫑긋거렸다.


이제는 거의 완벽한 사람의 실루엣을 한 빛무리 속의 누군가가 빙글빙글 돌며 바위 위로 서서히 내려왔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본 라희가 생각했다.




'마법 소녀···?'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 하기 전 저녁밥만 먹으면 달려가 티비 앞에 달려가게 만든 그 만화. 마법 소녀가 왜 지금 생각이 나는 걸까. 아니,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걸까.




라희의 머릿속이 조용하면서도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마법 소녀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게 꿈이었다지만 이건 아니잖아!! 고라니가 마법 소녀라니! 그리고 그건 10년도 더 전에 꿨던 거라고!


그것보다 귀신 뜯어먹는 고라니 마법 소녀는 더 싫어!




라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고라니의 마법 변신(?)이 다 끝났는지 황금빛의 아우라가 서서히 줄어가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선 마법 소녀가 아닌, 웬 장신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라희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큰 키. 사막의 모래가 바람을 따라 물결치듯 웨이브 진 연갈색의 약간 긴 머리칼. 석양이 일렁이는 듯한 주황빛 갈색 눈동자가 라희를 응시했다.




“사람···?!”




라희의 말소리에 남자는 머리를 한번 쓸어올리곤 바위 위에서 껑충 뛰어오르더니 이내 라희 앞으로 다가섰다.


고라니가 번쩍번쩍 빛나더니 잘생긴 남자가 튀어나온 광경에 라희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다가온 남자가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사람? 음··· 뭐, 비슷하다!”




그런 약간은 바보 같은 라희의 모습에 고라니. 아니, 남자가 이번엔 비소를 흘리며 말했다.




“봤다시피 난 너 같은 보통 사람은 아니다! 무려 이 산의 차기 산신이 될 신성한 존재지.”


“아··· 예···, 그러시구나···.”




둘의 뻘쭘한 시선 교환에 라희가 살짝 눈을 깔았을 때, 자신을 산신이 될 사람(?)이라 소개한 남자가 라희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확실히 그의 옷차림은 달랐다. 청록빛의 한복 같은 발끝까지 오는 옷을 겹겹이 입었고 사극에서나 볼 법한 신발과 부채를 들고 있었다. 미디어로나 접하던 양반의 한복이었지만 청렴을 고집하는 조선 시대 옷과는 달리 굉장히 화려했다.




“나는 너희같이 하찮은 인간들과는 달리, 태어남과 동시에 고결한 힘과 신성한 임무를 맡느니라.”




남자가 잘난 체하듯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라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엔 한껏 거만함이 배어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자기소개에 라희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자신을 죽이려 한 귀신으로부터 구해준 은인이니까, 어쩌면 이 황당한 일이 아직 꿈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자코 남자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내 임무가 궁금하다고?”


“아니ㅇ···.”


“난 태어남과 동시에 이 산을 보존하고 악으로부터 생명들을 지킬 것을 명 받았다.”


“······.”




라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남자의 장황한 연설이 시작되었다.




“현 산신님을 도와 이 산을 아주 잘 지켜오고 있었지.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 줄 아느냐?”


“무슨 일이 생겼···”


“산신님이 노쇠해진 틈을 타서 악의 무리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게다!”




남자가 마치 소극장에서 관중들에게 연기를 보여주듯 손뼉을 짝 치며 말을 이었다. 라희는 정말 듣기 싫었지만 한 번 더 참아보기로 했다. 어쨌든 위험에서 구해준 은인이니까.




“인간 따위는 볼 수 없는 악령을 난 볼 수 있고 심지어 먹어치워 버릴 수도 있어!”


“아···, 그러시구나···.“




물어보지도 않은 TMI에 심드렁해진 라희는 대충 그의 말끝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영혼 빠진 라희의 리액션에도 눈을 빛내며 떠드는 남자의 모습은 묘하게도 매우 신나 보였다.




‘아··· 이 남자··· 자랑 마려웠구나.’




라희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이거 하나 들어줬다고 강아지처럼 신나 하는 모습이 불쌍해서.




“그래! 방금 그대를 쫓아왔던 그 악령도 내가 먹어치웠지!”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지 말거라! 이래 봬도 악령을 먹으면 내 신통력이 더 강해지느니라!”


“아···, 그러시구나···.”




라희의 반응은 더욱더 심드렁해져 있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신난 상태였다.


오히려 좀 전보다 더 신난 것 같기도?




분명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명연설을 펼치던 남자가, 갑자기 큰 키의 허리를 확 숙이고는 라희의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느새 남자와 라희의 얼굴이 한 뼘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정말 오지게 잘생겼네.




가까이서 정밀하게 관찰한 남자의 얼굴은 연예인조차도 못 비빌 얼굴이었다.


이게 아까 봤던 괴성 지르던 고라니라고?


라희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헌데! 지금은 내가 악령을 볼 수가 없다, 왤까?”


“네?”




남자의 두 눈이 라희를, 정확히는 그녀의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근데 때마침 그대는 악령을 보았다.”


“······.”


“그것도 한낱 인간이.”




점점 강렬해지는 남자의 눈빛에 라희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남자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아까보다도 더 가까이.




갑자기 남자는 자신의 커다란 손을 라희의 머리 위에 살포시 얹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빛무리가 천천히 새어 나왔고, 그 빛은 이내 라희의 머릿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라희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에게 스며들어오는 빛을 받아들여야 했다. 딱히 큰 고통이나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거부감이 들었다. 처음 보는 고라니, 아니 차기 산신? 그리고 귀신인지 악령인지까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꿈이라 치부하기엔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뭐지?”


“네?”


“왜 안 되는 것이지?”




다시 눈을 감고 라희에게 이상한 빛을 쏟아내던 남자가 갑자기 당황스럽단 표정으로 말했다.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한 손으로 라희를 상대하던 그가 이제는 두 손을 사용하고 있었다.




더 많은 양의 빛이 라희의 머리로 스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라희는 여전히 아무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괜히 거북해진 라희가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쳐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왜 남한테 함부로 막 그 빛···, 뭐 아니, 그런 거 막! 아무튼! 막 뭐 하시는 거예요?”


“아니, 가만있어봐라! 아! 왜 안 되는 거야!”


“뭐가 안 되는 건데요!”


“귀안력 말이다! 귀안···. 안돼···? 왜 안 되지?”




남자가 약간은 정신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네가 내게서 훔쳐 간 귀안력! 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야!”


“귀안력? 아니! 그 보다, 훔쳐 가다뇨? 내가 언제요!”




자신을 도둑 취급하는 남자의 태도에 억울함을 넘어 분노가 차오른 라희가 빼액 소리쳤다.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고라니한테, 아니 이 초면의 남자에게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네가 악령을 보는 이유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어이가 없네?”


“뭐, 뭐?”




너무 갑작스럽게 몰아붙이는 상황 탓에 주춤했던 라희였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고 머릿속을 되짚어 보기 시작하면서 어이없다는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쪽이 나 구해준 건 참 고마운데요! 초면에 반말을 찍찍하질 않나, 갑자기 나보고 뭘 훔쳐갔다고 하질 않나. 뭐 하자는 거에요?”


“아니, 그게···”




움츠려 있기만 하던 라희가 당차게 반박해오자 남자는 금세 쭈구리모드로 변했다. 꼭 낯선 사람을 보며 으르렁 컹컹하던 강아지가 시끄럽다고 주인에게 혼난 후, 귀와 꼬리가 추욱 늘어진 것 마냥, 남자는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그의 강렬하던 눈꼬리 또한 추욱 내려갔고 눈빛에는 당황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마도 이제야 본인의 무례함을 조금은 눈치챈 것 같았다.




“하, 진짜 어이가 없는데, 일단 나도 상황 설명을 듣고 싶으니까 일단 말해봐요.”




잘생긴 남자가 불쌍한 모습을 보이자 욱한 마음이 사그라들었지만 라희는 팔짱을 끼며 애써 거만한 체하며 말했다. 어느새 남자와 라희의 태도가 반전되어있었다. 거만한 라희와 낑낑대는 고라니, 아니 남자.




“전에 그대가 기절하기 전에 나와 마주친 걸 기억하시오?”




어느새 남자의 말이 꽤 공손해져 있었다.


하지만···.




“어.”


“어, 그러니까 어. ···어?”


“뭐.”


“아, ···아니오.”




남자의 계속되는 하대에 라희가 똑같이 반말을 내뱉었다. 남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차기 산신이 자신조차 눌러버리는 그녀의 위압감에 그냥 말이나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때 그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딱 봐도 악령 같은···”


“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대의 대단한 음공에 너무나도 놀라! 귀안력이 개방됐는데 그때 어찌 된 영문인지 나의 신력 중 일부인 귀안력이 그대에게로 넘어가 버렸소.”


“그래서?”




라희가 말없이 썩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계속 눈치 없이 나불거렸다.




“그게 원래는 내가 개방하려던 것이 아니라! 머리는 길게 늘어트리고 눈은 퀭~한 것이, 꼭! 오뉴월에 서리 내릴 처녀 귀신 같았소! 비명은 또 어찌나 섬뜩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무서ㅂ···”


“······.”




한참을 나불대던 와중에 조용히 꽉 말아 쥐어지는 그녀의 주먹을 발견하고는 남자가 서둘러 화제 전환을 시작했다.




“일단은 그대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내가 병원으로 데려다주겠소. 귀안력에 대한 얘기는 차차 앞으로 천천히 합시다!”


“앞으로 우리가 또 볼일이 있다고요?”


“내가 그대를 다시 찾아가도록 하겠소. 내 힘을 가지고 있는 그대를 느끼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




왠지 뭔가 스윗(?)한 얘기에 긴장이 풀린 라희는 그제야 잔뜩 까지고 벌어져 피가 흐르는 자신의 발을 인지했다.




“아!”




방금까지 아픈지도 몰랐던 발인데 인지를 하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야!”




극심한 고통에 라희가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남자의 손길이 더 빨랐다. 쓰러지려는 그녀의 허리와 팔을 낚아채 돌려세운 남자 덕분에 라희는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앗···. 그···.”




방금까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말싸움을 주고받은 남자였지만 역시나 잘생긴 남자의 품은 언제나 짜릿했다. 짜릿함을 넘어서 새로웠다. 라희는 이 순간이 좀 더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때.




“좀 무겁구려.”




망할 남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나, 나 안 무겁거든요!”


“나한텐 무겁···. 아니, 안 무거운 것으로 합시다.”




라희가 앙증맞게 주먹을 말아쥐자 남자가 말과 시선을 돌렸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라희가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내디뎠지만 이내 고통 때문에 멈춰 서고 말았다.




“가만히 있으시오.”


“네···? 으앗!”




고통에 힘겨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라희를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외간남자에게 공주님안기를 당한 라희가 발버둥을 쳤지만 남자는 완강했다.




“그대가 다친 것에는 어쨌거나 나의 책임도 아주아주 사소하게나마 조금은 있을 것이니 병원까지는 내가 데려다주겠소.”


“무겁다면서요! 내려주세요! 나 떨어지면 어떡해!”




라희는 이 믿음직하지 못한 고라니를 원망하며 외쳤다.


그러자 이 잘생긴 남자는 어디서도 구경 못 할 환한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그댈 꽉 잡을테니 안심하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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