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고라니가 집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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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대순
그림/삽화
프레첼존맛
작품등록일 :
2024.07.03 08:57
최근연재일 :
2024.07.22 00:00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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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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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DUMMY

거의 일주일 간 밤마다 제임스의 전화 수다를 받아줘야 했던 라희는 퀭한 눈으로 여름 방학식에 참석했다. 교장 선생님이 연단에 서서 무어 무어라 한 시간째 훈화 말씀을 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잠이 자고 싶은 라희였다.




제임스는 낮에는 라희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붙어서 조잘조잘 거렸고 밤에는 산을 돌아다니면서 전화로 모든 상황을 전했다. 라희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고 몇 번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도 보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음날 나타나서 대차게 삐진 척을 하는 제임스 때문에 전화를 함부로 끊지도 못했다. 이런 면에서는 은근히 마음이 약한 라희였다.




덕분에 라희의 눈동자 밑에는 다크써클이 날이 갈수록 진하게 쌓여만 갔다.




“라희 너 요새 밤에 뭐 봐?”


“뭐?”




영혼 없는 눈으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친구가 라희의 퀭한 눈을 보고는 말을 걸었다.




“뭐 므흣한 거라도 보는 거 아냐? 다크써클 좀 봐!”


“하핫...”




차라리 보고 싶은 거라도 마음대로 보느라 잠을 못 잔거면 억울 하지라도 않지. 라희는 속으로 또 한 번의 참을 인을 새겼다.




고3에게 주어진 방학은 비록 보름뿐이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들뜬 마음으로 각자 집을 향해 하교하기 시작했다.




“방학동안 뭐하지?”




라희도 교문을 나서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옆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긴 뭘 해. 공부해야지”




성현이 바이크에 몸을 기댄 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는 라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와 모습 덕분에 모든 여학생들의 시선이 성현에게로 꽂혔다. 그리고 덩달아 라희도 화제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너가 여긴 왜 왔어?”




라희는 얼른 그를 바이크에서 끌어내며 말했다. 성현도 별 반항없이 라희의 손에 몸을 맡겼다.




“잊었어? 계약?”




성현의 앞뒤 다 잘라먹은 말에 주변 여학생들이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라희는 어른들이 왜 이런 상황에서 뒷목을 잡는지 알 것만 같았다. 찐하게 당겨오는 뒷골을 붙잡고 싶었지만 일단 이 자리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알겠으니까 일단 가!”




라희가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며 재촉하자 성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헷맷을 꺼내 라희에게 씌워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 때문에 주변 여학생들이 더욱더 발광하기 시작했다.




주변 관심이 부담스러워진 라희는 얼른 바이크 위에 올라 출발하자며 재촉했다. 성현은 뭐 어떠냐는 듯 어꺠를 으쓱이며 라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헬맷을 썼다. 성현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도 여학생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라희는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랄 뿐 손바닥으로 조용히 교복의 명찰을 스윽 가렸다. 천천히 바이크가 출발하는 와중에도 성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학생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주며 반응했다.




라희에게만 지옥같은 시간이 끝난 건 성현이 바이크를 출발시켰을 때였다. 드디어 우글거리던 여학생들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어느새 뻥 뚫린 도로가 눈앞에 보였다. 그렇게 꽤나 오래 달려 도착한 곳은 똑같이 생긴 건물들로 가득한 빌라촌이었다.




성현은 바이크에서 먼저 내려 라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희도 별 생각 없이 그의 손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발을 땅에 디뎠다. 라희의 두 발이 완전히 내딛을 때까지 성현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괜스레 부끄러워진 라희가 직접 손을 빼내어야 했다.




“여기가 어디야?”


“신당이자 집.”




성현은 라희가 뺴낸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곤 앞의 빌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신당에서 살아? 부모님은?”




라희의 물음에 빌라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던 성현이 잠시 멈칫했다.




“없어.”


“아, 응...”




라희는 머쓱해진 분위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성현을 따라 그의 집 거실로 들어갈 때까지 한마디 못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오색천이 사방에 널려있고 화려하면서 무서운 분위기일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이 매우 깔끔한 일반 집이었다. 라희는 예상 외의 인테리어에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런 라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성현이 말을 툭 내뱉었다.




“왜, 그냥 일반 집하고 같아서 놀랐어?”


“아하하...”




의중을 간파당한 라희가 멋쩍게 웃었다. 성현은 그런 라희를 바라보다 피식웃으며 등에 대충 매고 있던 가방을 식탁 의자 위에 걸쳐두며 말했다.




“신당은 앞집. 여긴 그냥 집이야. 처음에 할 땐 집이랑 같이 뒀는데 갈수록 일도 안돼고 개인공간도 없고. 여기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줌마들이다 보니 내 사생활 간섭까지 하려 해서 아예 분리 시켰어. 덕분에 돈은 좀 깨졌지만. 여기 앉아.”




성현이 다른 식탁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희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멀뚱멀뚱 성현을 바라보았다.




“뭐해? 책 펴.”


“책? 뭔 책?”




라희가 갸웃거리며 묻자 성현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공부 가르쳐달라는 학생이 책도 안 들고 와?”


“그게 오늘인 줄 알았냐구!”




깊은 한숨을 내쉰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방으로 향했다.




“있어봐.”




열린 방 문틈으로 보인 그는 책꽂이 앞에 서있었다. 잠시 정갈하게 나열된 책들을 노려보더니 한 권을 집어 들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라희 앞에 무심하게 툭 던졌다.




“봉투 모의고사?”


“실력을 봐야 뭘 가르쳐 줘야하는 지를 알지.”




성현이 내민 것은 수능 대비 모의고사 시험지였다. 너무나도 본격적인 그의 행보에 라희가 잠시 얼을 탔다.




“뭐하고 있어, 안 풀고? 과외 받기 싫어?”


“어? 아냐! 풀게!”




라희는 후다닥 가방을 풀고 필통을 꺼내 모의고사를 풀어내려갔다. 얼마 전 처음 만난 동갑내기 박수무당의 집에서 모의고사를 풀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웃겨 잠시 실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공부만큼은 진심이었던 라희였기에 이내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현은 자신의 문제지를 풀어내려가며 힐끔힐끔 라희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초집중을 하며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때는 아랫 입술을 강하게 물어뜯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 내가 지금 웃은건가? 그냥 문제 풀고 있는 쟤를 보면서? 성현은 평소에 저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에 순간 당황했다. 그냥 모르는 문제에 헤매는 게 웃겨서 그러는 거라며 혼자 속으로 변명을 했다.




“다 풀었다!”


“줘봐.”




약 3시간 가량 자리에 앉아 화장실도 가지 않고 문제만 푼 라희가 드디어 빳빳해진 고개를 들어올리며 환호했다. 라희가 모든 문제를 다 풀 때까지 자신도 공부를 하고 있었던 성현이 그녀의 문제집을 가져왔다. 그리곤 필통에서 새빨간 색연필을 끄집어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반짝이는 붉은색에 라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성현이 채점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반짝이던 라희의 눈망울은 처참하게 내리는 ᄈᆞᆯ간색 비와 함께 흐릿해져만 갔다.




“아 왜에에!!”




동그라미가 가득한 다른 과목들과 달리 우중충하게 비만 내리는 수학 문제지를 들어올리며 라희가 절규했다.




“이 회차 등급컷 보면...”




꿀꺽-




성현이 문제지를 핸드폰에 검색하며 등급컷을 찾자 라희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6등급.”


“하...”




라희의 무거운 한숨이 지구를 뚫고 들어갔다. 축 늘어져 울먹이는 라희의 모습에 성현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 입꼬리는 성현 자신도 라희도 알아채지 못했다.




“보니까 수열에서부터 기본기가 망가졌네. 일단 오늘은 이거 푸느라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야자 하지 말고 나랑 수학 기본기 채워. 아, 너 방학했지? 내일부터 수학 문제지 들고 이리로 와.”


“내일부터 바로? 넌 괜찮아?”




라희가 어느새 구겨져버린 모의고사 시험지를 펴며 말했다. 언제 구겨버렸는지 아주 꾸깃꾸깃했다. 성현이 그런 시험지에게 속으로 애도를 표하며 말했다.




“나도 방학이고 어차피 잠깐잠ᄁᆞᆫ 신당 다녀오는 거 말고는 일 없으니까 괜찮아. 예약제로 받거든. 아줌마들 불쑥불쑥 찾아오는 거 싫어서.”


“아하.”


“너 봐주면서 나도 공부하다가 잠ᄁᆞᆫ 예약있을 때만 다녀올거야. 그때는 너 혼자 풀면 되고. 이정도면 너도 괜찮지?”


“응! 나야 아주 좋지!”




성현이 얘기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할 말이 생각난 듯 멈칫했다.




“그럼 너는 그 산신이랑 뭐하는거야?”


“응? 아, 제임스? 그냥 같이 영역 돌아다니면서 막 생겨난 원혼들 처리하고 다들 잘 있나 살피고 그런거? 근데 나는 매일 ᄄᆞ라가진 못 해. 너무 피곤해서.”




물론 전화는 매일 받아주고 있지만 그 말은 굳이 안해도 될 것 같아 라희는 말하지 않았다.




“도깨비는?”


“아마 지금도 내 옆에 있을 걸? 모습이 보이니ᄁᆞ 내가 너무 신경 쓰여서 숨어있으라 했거든.”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말에 토라져서 입을 삐죽이던 지우의 모습이 생각나 라희가 웃음을 흘렸다. 그런 라희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성현이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이, 이제 가야지.”




말을 더듬은 건가? 라희는 순간 성현의 말더듬을 포착했지만 그저 말이 꼬였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는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너는 나한테 필요한 거 없어?”


“뭐?”




라희가 성현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잖아. 너가 나 공부 가르쳐주는 대신에 내 힘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했잖아.”


“그건... 잊어먹지 않고 챙길테니 신경 꺼.”




할 말이 없어진 성현이 괜히 심퉁맞게 얘기했다. 갑작스런 그의 냉대에 라희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왜 내 주변엔 멀쩡히 상호작용하는 존재가 없을까. 라희는 ‘내가 문제인가?’라고 생각하며 성현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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