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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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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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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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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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계약서 작성

DUMMY

‘엿이나 먹어. 이 미친년아.’

-악!


손목이 비틀린 그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파, 그만해!


물론 그만할 생각은 없었다. 아까 그 눈물 연기를 보고, 없던 정도 다 날아갔다. 넌 이제 뒤졌어.


약 올리려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 때문에 나는 마음이 아파.’

-아, 악! 살려줘!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괘씸죄야, 이 녀석아. 괘씸죄라고 알아?’


전혀 말이 통하지 않자 그녀가 사납게 돌변했다.


-이익! 놓으라고!


그녀는 손톱으로 나를 할퀴려는 듯 반대쪽 손을 휘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순간 손목을 붙잡은 손바닥이 불타오르고, 그 불꽃은 삽시간에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컥.


그녀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깜짝 놀라서 손을 놓으니 불꽃이 사라졌다.


불꽃이 타오른 손바닥을 한참 응시했다가, 문득 그녀가 혼절했다는 걸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음?’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뻗어 있었다. 죽은 건 아닌가 싶은 모습.


하지만 나는 쓰러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이거 또 연기하는 거 아니야?’


수상하기 짝이 없다. 업보가 그런 걸 어쩌겠는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발로 툭툭 건드려 봐도 미동이 없었다. 연결된 감정을 살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결론을 내렸다.


'이거 효과 확실한데.'


그녀가 기절한 이유는, 나의 명백한 거부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새가 날아오르는 법을 깨닫듯, 맹수가 사냥하는 법을 깨우치듯. 나는 마족을 다루는 법을 하나둘 깨우쳤다.


‘좋아. 정리해 보자고.’


하나, 마족과 나는 강력히 연결, 즉 ‘링크’되어 있다. 그래서 마족과 생각이 공유되어 있으며, 그녀의 형태까지 보인다. 둘, ‘의지’를 명확히 하여 마족을 제압할 수 있다. 불꽃은 내 의지가 시각화되어 나타난 것. 뜨겁지 않은 걸로 보아 나한테는 안전하되 마족에게는 치명상인 듯하다.


‘이 정도가 알 수 있는 한계인가······. 그건 그렇고 마족이 이렇게 허술해도 돼?’


웃기긴 했다. 무슨 마족이 강력히 거절한다고 힘도 못 쓰고 갇힌단 말인가. 악마들의 무시무시한 이미지가 퇴색되는 기분이었다.


‘아직 어린 녀석이라서 그럴지도 몰라. 다른 마족들도 이렇게 엉성하리라곤 단정할 수 없지.’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음?’


뭔가 이상했다.


평소 같았다면 건방지게 덤비는 마족을 제압했다고 기세등등했을 텐데.


학창 생활이나 직장에서 나는 그다지 철저한 편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해도 속으로는 자존심을 세우며 자만하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런 나를 아는데, 지금의 나는 과거와 전혀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허투루 방심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습관대로 허술한 그녀의 모습에 내심 풀어질 뻔했는데······ 정체 모를 감각이 나를 꾸짖었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일 때도, 거짓말로 나를 속여넘기려 할 때도 그 감각을 느꼈다. 그때마다 나타난 차가운 그것은,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이끌었다.


몸에 마족이 이식됐다면, 머리에는 시린 얼음덩어리가 박힌 것 같았다. 끊임없이 상황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바라보게 하며, 쉽게 흥분하거나 방심하지 못하게 만드는 얼음덩이. 이것이 현대인의 나약한 멘탈을 보호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유리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운 것이었다.


‘도대체 그 변태 늙은이는 내 몸에 무슨 짓을 해댄 거야.’


동의 없이 내 몸에 실험을 해댔지만, 그로 인해 얻은 침착함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마족을 제어할 수 있었다니.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




그녀를 제압한 후,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내가 남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마족을 품고 있다는 것 하나뿐.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판타지 능력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좀 사악하고 찝찝했지만, 아무것도 없이 떨어진 시절보단 나았다. 뭐라도 있는 게 어디냐.


내게 주어진 유일한 능력은 마족을 다루는 법. 찬밥 더운밥 따질 여건이 아니다. 이거라도 갈고닦아야지.


‘이것도 마법의 일종이라면, 명상부터 해볼까.’


당연히 마법에 관해선 쥐뿔도 모른다. 아는 지식이라고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마법사들이 명상을 즐겨 한다는 것 정도.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봐.’


처참한 배경지식을 가진 채 수련에 돌입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유튜브에서 본 명상 기법대로 잡생각을 비우기 시작했다.


점점 바깥세상과 멀어진다. 시커먼 밤바다에 홀로 둥둥 떠 있는 부유감에 기분이 묘해졌다.


잠시 뒤, 캄캄한 세상 속에서 희끄무레한 게 보였다.


저게 뭔가 싶어서 다가갔더니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그녀였다. 새하얗고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탓에, 팔자 좋게 퍼질러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되네.’


무협지에 나오는 개념 중 그런 곳 있지 않나. 마음속 세계에서 열심히 수련하여 강해지는 그런 거.


막무가내로 심상에 진입하긴 했는데, 이곳에서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마법사들은 이다음 단계로 뭘 했더라, 기억을 뒤지고 있을 때 부스럭 소리가 났다.


-으···윽.


끙끙 앓으며 몸을 일으키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안녕? 마침 잘 일어났다.’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나 반가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경멸하는 표정, 저거 너무하네. 혼쭐을 내줘야지.




*




그날 이후 마법사는 며칠 동안 지하실에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크하하, 죽어. 이 악마야!’

‘악마 아니라고! 악마 아니라고!’

‘마족이 악마지 뭐가 악마야.’

‘이 멍청한──’

‘닥쳐! 넌 괘씸해서 악마다!’


왜냐하면 그녀를 괴롭히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때리고 패고 불꽃을 날려 맞추기도 했다.


화아악


새빨간 불꽃이 넘실거리며 주변을 휘저었다.


나는 뱀의 혓바닥처럼 움직이는 불꽃을 자유자재로 조종했다. 신비한 불꽃을 다루는 것도 연습하다 보니까 익숙해져서 이제는 직접 때리러 갈 필요도 없었다.


-미친놈아!


뱀이 똬리를 트는 것처럼 불꽃이 그녀를 포위하자 새된 비명이 나왔다.


물론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하지. 인간이라고 얕본 죄다. 아무리 사람을 무시해도 어떻게 3연속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주먹을 콱 쥐어서 거대한 화염으로 그녀를 지졌다.


치이익


‘고놈, 참 고소하다.’


불꽃의 위력까지 조절하는 게 가능해, 그녀가 함부로 기절하지도 못하도록 신경 썼다. 세심한 배려를 녀석도 알아줘야 하는데, 이것도 모르고 빽빽 소리나 질러대다니.


-으아아아아아악! 죽여버릴 테야!

‘그럼 더더욱 그만둘 수 없지!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이 사악한 악마야!’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


시커먼 심상 세계가 밝아졌다. 기본적으로 광원이 없는 심상에서 주위가 낯처럼 환해지는 현상은 기이했다.


그녀가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들었다. 있어선 안 되는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오른 걸 보고, 자그맣게 욕설을 뱉었다.


-씨······발.

‘태양신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태양 만세!’


하하하 웃으며 거대하게 뭉쳐놓은 불꽃을 그녀 머리로 떨어트렸다.


불똥이 여기저기 튀고 잿가루가 휘날렸다.




*




한 달 동안 이어진 집요한 괴롭힘에 그녀가 항복했다.


-항복! 진짜 항복! 계약서 쓰자! 내가, 내가 진짜 잘못했어.

‘이겼다! 마침내 악마를 물리쳤다! 인간 승리다~’


나는 미친놈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미친 인간이야······.


그녀가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러니까 좋게좋게 갔으면 됐잖아. 계약서인지 뭔지 진즉에 쓰자니까 뻗대더니. 자, 앉아 봐.’


땅바닥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얼른 앉으라는 제스처인데 그녀는 굼벵이같이 느렸다.


결국 답답함을 못 참고 불꽃을 일으켜 그녀의 등을 밀었다. 이렇게 되니까 불꽃이 내 팔다리처럼 편리했다.


-앗, 뜨거워!

‘그래서 계약서가 정확히 뭔데?’


그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나도 마주 째려봤다.


‘다시 덤벼보겠다는 그 불순한 표정은 뭐야. 한바탕 더 해?’

-······아니야.


몇 번 꼬투리 잡혀서 탈탈 털린 경험이 떠올랐는지 금세 입을 다물었다. 호되게 처맞더니 드디어 예의가 주입됐다.


역시 군대식 갈굼은 여기서도 통한다.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육군!


-계약을 통해서 마족을 구속할 수 있어.


정말 하기 싫다는 표정이 다 드러났다.


특별히 이번엔 넘어가주지.


‘계약이라.’


아직 불꽃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할 때 그녀의 팔을 비틀면서 계약서라는 정보를 빼냈다. 불꽃 주먹으로 쓰다듬어주니 술술 불었다.


그런데 아직 그 필요성을 모르겠단 말이지.


‘그냥 지금처럼 때려서 말을 듣게 만들면 안 돼?’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뭘 복잡하게 계약서를 쓰나.


자꾸 계약서에 관한 정보를 털어놓지 않으려 해서 괴롭히긴 했는데, 정작 왜 체결해야 하는지는 이해가 안 갔다.


-이런 무식한······ 하. 내가 이런 애의 심장에 갇혀서 쩔쩔매는 신세라니.

‘또 맞기 싫으면 빨리 대답하자.’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 해도 되긴 해.

‘거 봐. 맞기 싫어서 계약서 쓰자는 거 아니야?’

-안 쓰는 게 마족한테는 더 좋아! 기회 보다가 뒤통수치면 되니까! 계약서를 쓰면 그딴 짓을 못 해, 이 바보야!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봤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내게 사실만을 말했다. 하기 싫은 말은 입을 다물어서 묵비권을 행사할지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 단계까지 발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녀가 뱉는 말마다 링크된 정신으로 진위를 판별한 다음, 거짓말이면 가차 없이 불꽃 펀치를 날렸다.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서 내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육했다.


얘는 마족이면서 머리가 나쁜 건지 고집이 센 건지, 도통 말을 한 번에 듣는 법이 없었다. 굳이 매를 들어야 알아먹었다.


‘바보는 너 아니야? 매를 부르는 꼴이··· 아! 너 사실 마조히스트구나?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기는 거야. 어쩐지 맞을 짓을 하더라. 폐급인 줄 알았는데 영리한 놈이었어. 이때까지 상을 주고 있었네.’

-아니라고!


녀석, 목청 하나는 좋다.


‘어쨌든 계약서를 쓰면 어찌저찌해서 네가 내 통수를 더 이상 못 치게 된다?’

-하··· 요약하자면 그래. 맞아. 저번처럼 위급할 때 내가 배신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너한테 불리한 건데 이걸 왜 알려줬어?’

-이··· 이······ 이이이!


그녀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전자가 끓듯 머리 위에서 김이 새는 것 같았다.


저런. 험한 말이 튀어나오겠군.


-개새끼야, 네가 말할 때까지 때렸잖아!


결국 그녀는 난동을 부리며 내게 덤벼들었다.


‘워워, 진정해.’


딱밤에 불꽃을 실어, 가볍게 반란을 제압했다.


날아간 불꽃이 그녀의 하얀 이마를 딱 때렸다. 얻어맞은 그녀는 벌러덩 뒤로 고꾸라졌다.


넘어지면서 퍽 소리가 들렸는데 어유, 머리 깨진 거 아니야? 아프겠다.


그녀가 바닥에 뻗은 상태로 팔다리를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아아아아악! 억울해! 왜 내가 이딴 인간한테!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오오옥!


이제 나한테는 어떤 공격이나 수작질도 통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아서 계약서를 쓰자고 한 거겠지. 만만해 보여도 속내까지 얕봐선 안 된다. 그녀도 나름의 계산을 통해 차라리 계약서를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끙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둥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봤다. 웬일로 따뜻한 행동을 하냐는 의문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좋아. 계약서를 쓰도록 하자. 대신에 우리는 불공정 조약을 맺을 거야.’

-불공정······?

‘당연하지. 어떤 바보가 악마한테 유리하게 계약서를 써?’


다시금 분노로 끓어오르려는 얼굴을 보면서 실실 웃었다.


‘뒤졌어, 악마야. 너는 전세사기, 보험사기, 보이스피싱 등 온갖 범죄에 단련된 한국인과 계약해야 한다는 말씀이야.’

-으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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