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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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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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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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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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시간 끌기

DUMMY

상행이 출발하고 닷샛날 밤, 모두가 잠들고 불침번만이 깨어있어야 할 시간대에 분주한 움직임이 귓가를 긁었다.


-계약자,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들었어.’


몸을 일으키자, 소녀의 몸에 들어간 루시아가 붉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롱소드와 단검을 챙기며 상황을 파악했다.


‘숫자는 얼마나 돼?’

-열여덟.

‘용병대는 50명이었잖아. 일부만 참여한 건가?’

-나머지는 지금 죽고 있어. 이제 다 죽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용병들 분위기가 싸하다고 판단한 이후, 밤에는 용병들과 떨어져서 잠자리를 잡았다. 며칠은 별일 없이 지나갔으나 기어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놈들 내부에서도 일치된 계획이 아닌 듯 서로 죽이고 난리다.


“제임스, 일어나서 장비 갖춰. 전투다.”


제임스를 흔들어 깨웠다.


“예? 네? 무슨 일──”




비몽사몽 깨어난 제임스가 목소리를 키우려 하니까 루시아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조용히 해, 얼뜨기.”


루시아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로브를 눌러써서 그녀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입가만 보였다.


소녀와 대화한 적이 없는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짓는 멍청한 표정.


저 멍청한 얼굴은 전매특허를 내도 되겠다.


나는 보다못해 재촉했다.


“그만 얼 타고 장비 갖추라니까.”

“예, 옙.”


제임스가 허겁지겁 갬비슨을 입었다.


루시아는 스르륵 옆으로 와서 손을 잡고 경고했다.


-기사가 있어.


이전과 말이 달랐다.


‘용병 중에 기사나 작령자 없다며.’

-처음 보는 영혼, 외부인이야. 침입자. 다행히 작령자는 아니지만··· 강력해.


기사와의 전투는 처음이다. 성직자나 마법사가 아니라 해도 위험하다. 훈련도 못 받은 오합지졸 윌리엄 패거리나 도시의 애새끼들과는 차원이 다른 적.


기사란 수없이 단련한 살인 기술에, 자신의 영혼을 연료로 삼아 괴력을 발휘하는 인간이었다. 창작물에서 많이 봤던 눈 돌아간 광전사들의 이미지가 휙휙 지나갔다.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길 수 있으려나? 지금이라도 도망가?’


마족의 기술을 배웠다곤 하나, 기초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인들 상대로는 질 리 없겠지만 상대는 기사. 심지어 루시아의 평가로는 강력하기까지 하단다.


이제 갓 기본기를 배웠을 뿐인 초심자인 내가 강력한 기사를 이길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수를 마주했을 때, 루시아가 느꼈던 공포감이 그대로 감정을 헤집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박동했다. 향초에 불을 붙여서 향기가 퍼져나가듯 두려움이 정신을 잠식했다.


‘빨리, 빨리, 와라.’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기다렸다. 정신 깊숙이 할퀴어져 선명히 남은 약속의 증표를 믿었다.


이번에도 나를 구원해라.




기다렸던 얼음덩이가 두려움을 강제로 눌렀다. 냉각수가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고 침착함을 끄집어냈다.


그 사이에 루시아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진 못해. 도망을 칠──


그러나 얼음덩이가 돌아가기 시작한 이상, 약한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두뇌는 냉철하게 작전을 검토해 갔다.


도망친다?


어둠을 이용해 몸을 숨기기 쉬울 테지만, 상대방은 다수. 발각당하는 순간 수적 열세에 몰린 상태에서 싸움을 강요받게 된다.


탁 트인 야외라는 점을 고려하면 순식간에 둘러싸여 죽겠지.


루시아의 힘을 빌려 신체 능력을 강화한다 해도, 둘러싸인 상태로 다수를 상대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나한테 달린 팔다리와 눈은 두 개뿐이니까. 인체 구조상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각지대를 찔러 들어올 공격에 무방비하다.


인간은 한계가 명확하다. 군대 한복판에 들어가 수백 명을 베어 넘기는 영웅담은 현실에 없다. 그리고 나는 만화 속 초인도, 동화 속 영웅도 아니다.


막사들과 야영 구조물로 가려져 있어서 포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어둠 아래에서 기습의 이점까지 노려볼 만한 지금 이곳에서 결전을 내야 한다!


도주는 선택지에서 지우고, 머리를 굴렸다.


사용할 수 있는 패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죽은 용병들 영혼을 여기서 흡수할 수 있겠어?’

-···너무 멀어.


침착함을 눈치챈 루시아가 도망가자는 의견을 접고 내 의지를 따랐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야 영혼을 수확할 수 있어?’

-내 손이 닿아야 해.


루시아가 자유로운 반대쪽 손을 쥐었다 폈다.


‘작령자 위치는?’

-가장 큰 로버트의 막사 안에 있어. 용병들 시체가 있는 막사는 더 멀리에 있어. 가려면 작령자 근처를 지나쳐야 하는데, 들킬 거야. 마족만큼은 아니라도 기감이 예민해서 불가능해.


영혼 흡수 후 싸우려는 시도는 들킬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이것도 폐기.


남은 작전은 단 하나.


‘정면돌파.’


루시아가 손에 힘을 줬다.


-상대는 기사야. 네가 작령으로 시간을 끌어줘. 그동안 내가 몰래 영혼을 흡수할게. 30명짜리 영혼이면 대충 계산해도 9000. 한 번은 본체를 끄집어낼 수 있어.


죽은 용병들의 영혼을 털어서, 내 심장에 이식된 마족의 본체를 꺼내겠다는 계획. 본체를 꺼내면 기사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보다는, 급한 상황에서 루시아의 판단을 믿었다.


“시선을 끌 테니까 용병 막사로 가.”

“연습한 대로만 해.”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깨문 루시아가 손을 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우.”


이제 혼자다. 조언이나 충고를 해줄 루시아 없이 홀로 기사와 맞서야 한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 여태껏 해왔던 전투는 애들 장난일 터. 살인 전문가와 맞붙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해야 하고, 해내야만 한다. 생존을 위해선.


“한스 님,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갬비슨을 착용하고 도끼까지 갖춰 완전히 무장한 제임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혼자는 아닌가. 별로 듬직하진 않다만 동료가 있었다.


“하나씩 죽이면서 전진한다. 설명해 줄 시간 없으니까 따라와.”


제임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숫자는 둘.


제임스가 자세를 낮추며 도끼 각도를 기울였다. 마을 자경단 대장 자리를 가위바위보로 따낸 건 아닌지, 도끼를 움켜쥔 모습이 침착했다.


나도 힘을 끌어올렸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에 활력이 깃들었다.


루시아의 도움 없이 신체 강화에 성공했음을 직감한 즉시, 제임스의 어깨를 툭 치고 뛰쳐나갔다.


“크억!”


한 놈의 복부에 검을 찔러넣고, 손목을 틀어 반 바퀴 돌렸다. 강화된 근력은 살덩어리에 불과한 내장과 폐를 쉽게 갈아버렸다.


폐가 갈린 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장기들을 쏟아냈다. 흘러나오는 내장을 주워 담으려는 듯 허공에 손을 내저었으나 헛된 움직임이었다.


“하압!”


제임스도 신호를 알아듣고 달려나와서 다른 녀석의 두개골을 도끼로 찍었다.


일격에 머리통이 쪼개진 녀석은 맥없이 쓰러졌다. 동강 난 살과 머리뼈 아래로 뇌와 뇌척수액이 흘러나왔다.


제임스는 적의 머리에 박힌 도끼를 뽑았다.


단숨에 둘을 해치웠다. 우려했던 것보다 제임스가 살인에 능숙하다는 점이 다행. 이 정도만 해줘도 도움이 됐다.


검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면서 조금 다른 눈으로 그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제임스가 허리를 숙였다.


“우웩. 으웩, 헉. 허억.”


취소. 능숙하긴 무슨 헛구역질을 해대는군. 도움 된다는 말도 취소다.


그때 소란을 감지한 용병이 짜증 돋친 말투로 질타했다.


“뭐야? 어느 버러지가 구역질해?”


다가온다. 발소리로 유추하니 이번에도 2명.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 들어왔다.


“계집애도 아니고 어떤 놈이 웩웩거리──”


재빨리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으며 달렸다. 한 손에 롱소드, 반대 손으로는 단검을 쥐고 녀석들에게 뛰어들었다.


놈이 더 말을 이어나가기 전에 쇄도한 롱소드가 목을 찔러 들어갔다. 반대쪽 적은 조준할 여유가 없어서 단검으로 아무렇게나 머리를 찍었다.


운 좋게 단검이 적의 미간에 박히고 뇌를 관통했다. 한 놈 즉사.


“웬 놈이냐!”


하지만 롱소드는 녀석이 찬 사슬 보호구에 막혔다.


쇳소리를 내며 튕겨 나간 칼날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났다.


‘젠장. 한 번에 처리하지 못했어.’


기사가 아무리 청력이 나빠도 들릴 만한 크기로, 이미 놈이 소리 질렀다. 고요한 밤에 울린 목소리는 절망적이게도 쩌렁쩌렁 울렸다.


최대한 머릿수를 줄여놓고 기사와 마주하려 했던 계획이 틀어졌다.


‘이렇게 되면 속전속결이다!’


공격을 사슬 보호구로 막아낸 녀석은 쓰러진 적들보다 장비가 잘 갖춰져 있었다. 복부를 벴는데 숨어있는 철판에 막히면 시간이 더 지체될 뿐.


시간이 끌리면 포위당한다.


숨을 들이마셨다.


“쓰읍.”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멍청한 자식!”


녀석은 역시나 보호 장비에 자신이 있는지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마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애초에 벨 생각이 없었다.




검이 빠르게 회전했다. 칼날이 아닌 칼자루 끝에 달린 폼멜이 녀석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손아귀에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호기롭게 외치며 달려들었던 녀석은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다가 쓰러졌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발생시킨 충격력이 고스란히 뇌를 흔든 탓이었다.


바닥에 뻗은 놈의 사슬을 들추고, 목을 푹 찔러 마무리했다.


넷 죽였으니 열넷 남았다.


숫자를 세고 곧장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 뒤쪽, 모닥불의 빛이 비쳐 두 명의 실루엣이 일렁였다. 제임스를 노리고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제임스, 뒤!”


목소리를 높여 경고했으나 어째서인지 반응이 없었다.


비틀거리는 제임스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너무 멀다. 달려가선 늦는다.


“골치 아픈 놈 같으니.”


기사와 대치할 때 쓰려고 최대한 아끼던 마나를 풀었다.


손가락 끝에 검은 물방울이 맺혔다. 이것은 팍하고 날아가더니 새까만 칼날로 바뀌었다.


쌔애액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칼날들은, 제임스를 공격하려던 2명의 미간을 정확히 뚫었다. 그들의 고개가 동시에 뒤로 꺾이고, 실이 끊어진 인형들처럼 주저앉았다.


동전 지름 정도의 작은 구멍조차 급소에 생긴다면 인간은 치명상을 입는다. 그 구멍이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뇌에 개통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최소한의 마나만 사용해 적들을 쓰러트린 후, 제임스를 일으켜 세웠다.


“제임스.”

“제가, 제가 사람을······”


제임스는 넋이 나가 있었다.


첫 살인부터 거리낌이 없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 하루하루가 치열한 생존 투쟁인 삶에서 이런 알량한 감정이라니.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못 구해. 돈도, 혈통도, 지식도 없는 네놈 주제에 힘 말고 쓸 건 있냐?”


싸늘한 말을 던지고 제임스의 멱살을 잡아다가 막사에 도로 집어넣었다.


“기사 될 자격도 없는 겁쟁이는 여기 찌그러져 있어.”


저 상태면 가만히 있어 주는 편이 낫다.


천을 내려 막사 내부를 가리고 다른 용병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동했다.


발소리를 들으려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그런데 쥐 죽은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란을 듣고 몰려와야 하는 적들이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숨죽였다.


‘올 게 왔다.’


각오를 다지기 무섭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드러났다. 시체를 발로 툭툭 차고 있던 그가 이쪽을 바라봤다.


“벌써 여섯이 죽었어. 얘네는 작은 투사체로 죽인 듯한데, 미간을 뚫은 솜씨를 보아하니 마법이로군. 로버트가 고용한 마법사인가?”


막사에 기대어 놓았던 할버드를 든 기사가 엄청난 위압감을 뽐냈다.


“학회의 콧대 높은 마법사께서 상인 나부랭이를 호위할 리는 없으니, 네놈은 불법 마법사렷다.”


달빛에 드러난 기사의 얼굴은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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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018. 개소리 그만하고 24.09.05 15 0 12쪽
17 017. 울상 짓는 로버트 24.09.04 16 0 12쪽
16 016. 감사해라 24.09.03 20 0 12쪽
15 015. 반가운 목소리 24.09.02 18 0 12쪽
» 014. 시간 끌기 24.09.01 20 0 12쪽
13 013. 루시아 코는 개코 24.08.31 23 0 12쪽
12 012. 방 빼 24.08.30 25 0 13쪽
11 011. 예의 없는 애들이 싫더라 24.08.29 19 0 12쪽
10 010. 원치 않는 제자 또는 종자 24.08.28 22 0 13쪽
9 009. 마법사님 맞죠 24.08.27 24 0 13쪽
8 008.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 24.08.26 26 0 15쪽
7 007. 붉은 염료 24.08.25 29 0 15쪽
6 006. 톰 아저씨는 수상해 24.08.24 30 0 14쪽
5 005. 최후의 수단이다 24.08.23 29 1 14쪽
4 004. 열려라 참깨 24.08.22 33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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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02. 엿 드세요 24.08.21 5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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