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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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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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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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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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루시아 코는 개코

DUMMY

로버트가 권하는 자리에 앉고, 제임스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이 음식들을 내왔다. 가만히 앉은 로버트는 나를 불러 놓고선 아무런 말도 없었다.


정치적 수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 사내 정치도 귀찮아했던 나로서는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국 로버트에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제 이름은 어찌 아셨습니까?”


로버트는 약간 눈썹을 꿈틀거리고, 술을 목구멍으로 넘긴 후 답했다.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한 외지인이 있다고 주민들이 제보하더군요.”


그 예의 없는 애들이 부모에게 일렀나 보다.


자기들이 저지르려 한 짓은 기억나지 않는 건지, 그만한 염치도 없는 건지 궁금했다.


“녀석들은 여자애를 겁탈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마녀의 자식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 교회법은 연좌를 엄격히 금합니다만.”


로버트의 눈밑 근육이 떨렸다.


“···오호, 법학을 공부하셨습니까?”


이 자식, 내가 법을 알고 있어서 놀란 거네.


-놀랄 만해. 네가 살던 곳과 달리 글을 아는 사람조차 많이 없거든. 글만 알아도 지식인 대접은 받을걸.


나처럼 영어 띄엄띄엄해도 지식인이라니.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나는 로버트가 놀란 사이에 대화의 기세를 잡으려고 그를 압박했다.


“제가 법학을 공부했든 신학을 공부했든, 그 여자애의 죄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놈들이 고소당해야 할 상황 아닙니까?”

“좋습니다, 한스 씨. 당신의 의견은 타당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때론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여자애를 넘기라고?”


로버트는 미간을 찡그리고 헛기침했다.


“시민들이 자기네 아들들을 폭행한 범인을 내놓으라고 난리입니다. 제가 한스 씨를 구해준 거나 다름없는데, 저한테 화를 내시면 곤란합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오늘 처음 보는 로버트 씨가 저를 어떻게 구해주셨다는 겁니까.”

“술집 주인 맥 씨가 연락을 해왔더군요. 한스 씨가 우리 상단에 동행하고 싶다고요. 그래서 저는 한스 씨를 배려해, 성난 시민들에게 이번 사건을 아무 일 없이 넘어가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한스 씨를 우리 상단 소속이라고 거짓말까지 치면서 말이죠.”


말을 마치고 당당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로버트.


나는 황당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도 안 잡혔다.


‘뭐지. 무슨 드립인가? 내가 고급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 거야?’

-···위험에서 구해줬으니 감사하란 뜻 아닐까.

‘에이, 설마. 무슨 사람이 그렇게 뻔뻔할 수가······.’


로버트의 표정을 살폈다.


음, 그렇게 뻔뻔할 수도 있구나. 내가 너를 간과했다, 로버트야.


네 멋대로 호의 부려놓고 으쓱거리지 말라고 일갈하려는데, 루시아가 다급히 불렀다.


-잠깐! 잔말 말고 고맙다고 하자.

‘내가 왜? 하나도 안 고마운데.’

-대도시로 가야지! 에뮐렌까지 동행해야 하잖아.

‘이딴 나르시스트랑 함께 가다간 복장 터져 죽을 테야. 차라리 혼자 가겠어.’

-그래도 참아야 해. 야생은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곳이라고. 게다가 시민들이 안 참고 덤비면 어쩔 건데? 또 다 죽이고 튀려고?


괜찮은 생각 같았다. 이번에도 다 죽이고 튀면 되겠네.


-안 돼! 여기는 도시라고. 너는 술집 주인, 시장 상인들, 동네 애들한테까지 얼굴이 다 팔렸어. 마을이랑 상황이 전혀 달라. 도시에서 수배가 내려지면 인근까지 쫙 퍼져! 더군다나 여기는 성당이 있어서 교회가 개입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 절대 안 돼! 아무튼 안 돼!


루시아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녀가 이만큼 강한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었기에 의외였다.


그만큼 위험한 선택지란 거겠지. 교회가 낄 가능성도 높아서 더욱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루시아의 말을 곱씹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마땅치 않았으나 지금은 숙여야 할 때였다.


이거 참, 부장님 비위 맞춰주는 것도 아니고. 저기나 여기나 세상 살기 더럽다.


“···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음하하하! 별일 아닙니다! 성 크레히벨그께서도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자를 성심껏 도우라 하셨으니까요. 그보다 말입니다,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마땅한 돈벌이가 없으시면 제가 상회에 말을 잘 해서 일자리를 드리겠습니다. 에카르트 상회에서도 저는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로버트는 껄껄 웃으며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나불대기 시작했다.


아, 예. 그러시군요.


‘그냥 얘 얼굴에 노인이 쓴 편지를 던지고 싶은데.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을까?’

-안 돼. 에카르트 상회 본부의 에드먼드라는 사람한테 말하라고 했잖아. 같은 상회 사람이라도 노인을 싫어할 수도 있는 거고.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몰라.


알고 있다. 마음에 안 들어서 해본 소리다.


나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은 채 로버트의 수다를 전부 들어줘야 했다.


이거 못 할 짓이로군.




*




며칠 뒤, 로버트가 이끄는 상단이 에뮐렌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로버트에게 은화 열 닢을 쥐여주고 상행에 낄 수 있었다. 동행 비용치곤 비싼 값을 치른 셈. 술집 주인장이 말한 것보다 로버트는 욕심이 많았다.


상인이 얼마나 돈에 미쳐있는지 잠깐 잊었다.


‘돈을 노리고서, 자기가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 그리도 자랑한 건가? 호구 잡혔군.’

-마음 풀어. 에뮐렌에 에카르트 상회 지점이 있다니까 거기를 통해서 에드먼드와 연락하는 게 우선이야.

‘로버트가 마음에 안 드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어.’

-그렇다고 죽이면 안 돼.

‘누가 들으면 내가 살인귀인 줄 알겠네. 왜 그렇게 당부하는 거야.’

-···넌 종잡을 수가 없어.

‘쉽지 않은 남자긴 하지.’

-어휴.


나와 제임스, 그리고 내 손을 꽉 잡은 소녀는 상단 중간에서 속도를 맞춰 걸었다. 자아가 없는 소녀는 내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와서 이동에 불편은 없었다.


제임스가 소녀를 흘깃거리며 말을 걸었다.


“저기, 한스 님?”

“왜.”

“이 여자아이, 괜찮은 겁니까?”

“말했잖아. 노인들한테 자주 나타나는 백내장에 걸린 아이일 뿐이야.”

“그게 아니라······.”


소녀는 체격에 맞는 로브를 뒤집어써 붉은 눈까지 가리고 있어서, 제임스는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이 변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스 님께서 아이를 챙기시는 게··· 관심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저, 무뚝뚝한 내가 소녀를 챙기는 모습을 이상해할 뿐이었다.


“잘못됐나?”

“아, 아닙니다!”

“그럼 넘어가지.”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입을 닫았다.


약간 시무룩해 보이는 제임스를 보고 있자니, 노인이 부탁한 게 떠올랐다.


기사로 만들어달라 했었지. 나부터 루시아에게서 마족의 작령을 배우느라 정신이 팔려있던지라 깜빡했다.


‘영혼을 태우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되는 건가?’

-그래도 되고, 마나를 대량으로 주입해서 영혼에 불을 붙여줘도 돼. 근데 왜 물어봐? 에카르트 상회에 도착해서 마석으로 영혼에 불붙여줄 계획이었잖아.


그럴 생각이었는데 기왕이면 스스로 불을 붙이도록 하면 좋지 않겠나.


-왜?

‘마석은 우리가 먹고, 얘는 알아서 불태우라 하면 일석이조잖아.’

-···악마다.


루시아가 입을 떡 벌렸다.


없는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야지. 나처럼 티끌 모아 태산 같은 아이디어를 내란 말이다, 이 악마야.


-그걸 날름 처먹을 생각은 못 했네.

‘작령술을 가르쳐도 된다는 거지?’

-할 수 있으면 해봐. 쉽지 않을걸.


제임스는 고개를 숙이고 걷기만 했다.


기사로 만들어주겠다고 해놓고 아무런 언급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묵묵히 있는 제임스를 바보라고 해야 할지, 참을성이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임스.”

“예, 한스 님.”

“내가 기사로 만들어주겠다 해놓고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없었는데, 왜 먼저 물어보지 않았어?”


제임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바빠 보이시던데요?”


바보였군.


-너랑 비슷한 부류 같은데.


나는 바보 아니다.


-생각 없고, 제멋대로고······.


혼자 중얼거리는 루시아를 무시하고, 제임스에게 마나 강의를 시작했다.


“그냥 마나를 뚫어줄 수도 있지만 기본기는 배우자. 마나와 소통하려면 기본적으로 명상을 할 줄 알아야 해.”

“명상이요?”

“명상은 허리를 펴서 척추를 바로 세우고, 정수리를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가 몸을 가로지른다고 상상하면서 머리를 비우는 거야.”


당연히 강의는 내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지하실에 갇혀서, 심상에 진입하려고 행했던 과정을 나열했다. 그때 요긴하게 활용한 유튜브 명상 꿀팁 같은 것들 말이다.


-넌 마나 설명을 참 특이하게 한다.


다들 이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누구한테 배운 적이 있어야지.


공기가 내장을 관통하는 걸 느끼라는 애매모호한 가르침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제임스를 놔두고, 루시아와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며칠간 수련하느라 마나를 얼마나 썼지?’

-200 정도 소모하고, 남은 건 1800.

‘생각보다 얼마 안 들었네. 전투 때는 몇 초 만에 훅훅 닳더니.’

-네가 연습한 건 단순 조작법이야. 위력을 내거나 기적을 창조한 게 아니라, 기본적인 운용을 한 후에 마나를 한 방울도 빠짐없이 재흡수하는 단순 조작. 기본기 중의 기본기라 할 수 있어.


기본기 중요하지.


덕분에 마족의 작령이 굉장히 익숙해졌다. 폭주하듯이 휘두른 마을 전투 때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아름답게 작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만족스러운 수련이었다.


-내가 잘 가르친 덕이야. 이래 봬도 검은 땅에서 작령으로는 알아줬다는 사실!


만족한 감정을 읽은 루시아가 이 틈을 타 으스댔다.


‘그런데 말이야, 루시아.’

-응?

‘저 용병들, 우리 쳐다보는 눈깔이 심상치 않은데.’


이 시대는 도시나 마을 같은 공동체를 벗어난 순간부터 온갖 위협이 도사렸다. 위험한 짐승들은 기본이고, 행인들을 약탈하러 나온 도적 떼도 바글바글했다.


이러한 위협을 대비하려고 상인들은 용병대를 고용한다.


이건 로버트도 마찬가지. 그가 고용한 용병들이 길게 늘어진 마차들 행렬을 호위했다. 무장과 유니폼이 통일되지 않아 난잡했지만, 하나하나가 건강한 장정들. 이만한 규모의 상단이면 웬만한 짐승이나 도적들을 얼씬거리지도 못하리라.


‘그런데 왜 꼬나보냐는 거야.’


하지만 길게 늘어진 마차들 행렬을 호위하는 용병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나와 소녀가 나란히 검은 로브를 덮어쓴 게 수상쩍어서 그런가, 이쪽으로 이목이 쏠린 기분. 따가운 시선들이 날아왔다.


-조금··· 아니, 많이 수상하긴 하네.


소녀의 눈을 빌려 사방을 살핀 루시아가 동의했다.


소녀의 육체를 차지할 때 탁한 눈이 붉어지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루시아는 로브 자락을 꾹 눌러, 붉은색 눈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용병들을 째려봤다.


-수상해.

‘우리 행색이 음침해서 그런가?’

-아니. 자세히 보면 눈빛들이 우리를 향한 게 아니야.


우리를 보는 게 아니면 누굴 훔쳐본단 말인가.


루시아의 말을 듣고 조심히 용병들을 관찰했다. 인중 위의 얼굴은 로브의 그림자 아래에 숨겨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루시아가 무얼 발견했는지 감을 잡았다.


작정하고 의심해야 겨우 보이는 미세한 기류가 한쪽으로 흐르는 중이었다. 내가 단순히 옷차림 탓일 거라 넘겨짚은 부분에서, 루시아는 예리하게 인간들의 감정을 간파했다.


‘확실히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니군.’

-맞아. 저들이 노리는 건······.


행렬 가운데서 굴러가는 마차를 슬쩍 쳐다봤다.


용병들이 아닌 척해도 반복적으로 고개가 향하는 방향. 루시아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것을 보고 있었다.


-로버트가 탄 마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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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016. 감사해라 24.09.03 20 0 12쪽
15 015. 반가운 목소리 24.09.02 1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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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3. 루시아 코는 개코 24.08.31 2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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