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최근연재일 :
2024.09.06 21:48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559
추천수 :
1
글자수 :
114,327

작성
24.09.02 20:19
조회
18
추천
0
글자
12쪽

015. 반가운 목소리

DUMMY

“로버트 녀석, 잘도 우리의 공격을 예측했어. 불법 마법사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운이 좋은 건지 감이 좋은 건지.”


할버드를 비스듬히 어깨에 걸친 기사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학회의 허가를 받지 않은 마법사는 척결 대상. 이는 거룩한 교회의 법이자 지고하신 아버지 월트의 뜻.”


엄청난 위압감이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숨을 골라도,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며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얼음덩이의 냉기도 소용없었다.


명백한 살기가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전신을 쑤셔댔다.


이것이 기사였다. 육체와 살인 기술을 극한으로 연마한 괴물.


그런 괴물이 날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기사가 미간을 찡그리고 목을 긁었다.


“그래도 형식상 여쭤드리지. 하, 뭐였더라. 쓸데없이 이름이 어려워서. 쯧.”


잠깐 고민하던 그는 이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아, 기억났다. ‘마법학 진흥을 위한 왕립학회’의 허가장을 내놓으시오. 내놓지 않는다면 당신을 사악한 행위를 저지른 죄로, 아버지 월트가 굽어보시는 아래서 즉시 처단하겠소.”


당연히 그딴 거 없었다.


기사도 이걸 알아서 형식적으로 물어봤을 뿐, 벌써 할버드를 고쳐잡았다. 들을 생각도 없는 게 분명했다.


“말씀이 없으시군. 그렇다면 곱게 죽어줘야겠어.”


기사가 무릎을 구부렸다. 할버드를 두 손으로 잡고 곧장 돌격하려는 자세였다.


나는 손을 들었다.


“잠깐.”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나는 도우셀 학파의 마법사요.”


기사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도우셀?”

“그렇소. 이들이 갑자기 나를 덮쳐서 대응했을 뿐이오.”


늙은 마법사를 떠올리며 최대한 그를 흉내 냈다. 근엄하고 묵직한 말투와 차분한 눈빛.


눈빛은 어두워서 안 보이려나.


여하튼 기억을 짜내면서 최선을 다했다.


“이만하고 물러난다면, 마법학회 일원을 해코지했다는 책임을 묻지 않겠소.”


얌전히 이야기를 들어준 기사가 두꺼운 목을 긁었다.


“허가증을 꺼내시오.”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기다려보시게. 여기 어딘가 놔뒀는데. 아, 까먹고 연구실에 놓고 왔군.”

“없다는 거요?”

“당장은.”

“하, 괜히 긴장했군. 유명하지도 않은 도우셀은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커다란 덩치의 기사가 비웃으며 할버드를 내밀었다.


“지랄하지 말고 죽어라.”

“이런, 입이 험하시네.”


그럼 그렇지. 통할 리가 없다.


뒷짐을 진 채 손가락을 까닥였다.


모닥불 빛에 의해 일렁이던, 기사의 그림자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칼날들이 쏘아졌다.


카강


기사는 덩치에 맞지 않는 민첩함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판금 갑옷에 맞은 칼날들은 금속음을 내며 튕겨나갔다.


“하! 비겁한 걸 보아하니 불법 마법사가 맞군!”

“정답.”


전투에 돌입한 이상에 숨길 것도 없다.


손바닥 각도를 세심히 움직여 검은 물질을 조종했다. 대화를 통해 벌어들인 약간의 시간 동안 준비한 작령을 펼쳤다.


그 순간, 모닥불의 춤사위에 맞춰 현란하게 움직이던 근방의 모든 그림자들이 제자리에 멈췄다.


기사는 기현상을 마주하고도 주저없이 달려왔다.


“네 이놈!”


짐승이 달려드는 것처럼,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찍히며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정녕 저게 사람이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코뿔소 같은데.


무거운 판금갑옷을 걸치고 저 속도로 달려오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선 불가능하다.


“죽어라!”


기사의 기합이 터져나와 고막을 강타했다. 그저 외치는 것만으로 먹잇감을 얼어붙게 만드는 맹수의 포효였다.


기다란 할버드가 밤하늘 높이 치솟고, 머리부터 쪼개버릴 기세로 내리쳤다.


하지만 내가 준비해 둔 작령이 한 발 더 빨랐다.


사아악


그림자들이 기사의 발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그와 함께 주변을 비추던 모닥불, 횃불, 달 등 모든 빛이 꺼졌다.


잠깐의 시간. 단 1초의 시간 동안 일대가 정전됐다.


“미안하지만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니라서.”


잠깐의 암흑 속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콰앙


손가락을 튕긴 방향으로 충격파가 몰아쳤다.


폭음이 터지고 어둠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까마귀의 검은 깃털이 휘날리는 것처럼 어둠이 산산조각났다.


충격파에 제대로 맞은 기사가 멀찍이 날아갔다. 뒤로 날아간 기사는 막사와 마차들을 부서뜨린 후 바닥에 처박혔다.


루시아가 알려준 ‘큰 거 한 방’이었다. 마나를 미친 듯이 잡아먹는 기술이지만 과연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이만한 위력에 휩쓸리면 죽는 게 당연하다. 갑옷을 둘둘 둘러도 다이너마이트 수준의 폭발을 정통으로 얻어맞고서 주요 장기들이 멀쩡할 리 없다.


유기체라면 죽어야 마땅한 위력.


“크흐흐, 으하하.”


그러나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기사는 꿈틀거리며 크게 웃었다.


“재밌는, 놈이야.”

“징글징글하구먼.”


폭발을 코앞에서 맞은 기사는 얼굴 가죽이 벗겨지고 판금 갑옷은 움푹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웃어 재끼는 게, 진짜 괴물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기괴했다.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향해 기사가 할버드를 겨누었다.


“네놈, 마족과 거래했군. 눈동자가 피를 머금었어.”


직접 작령할 때면, 루시아와 계약해서 그런지 눈동자가 그녀의 홍안과 동기화된다. 큰 작령까지 써댔으니 지금 내 눈알은 붉은 핏빛을 머금었으리라.


“붉은 눈을 봤으니까 죽어줘야겠어.”

“악마 숭배자 따위가 감히 누구 마음대로 죽이니 살리니 한단 말인가. 이 자리에서 죽을 놈은 네놈이다!”


버럭 외친 기사는 옆에 떨어진 할버드를 주워 들고 눈동자를 파랗게 태웠다. 변태 마법사가 주문을 읊을 때 빛나던 철창과 같은 색깔. 밝은 푸른색 불꽃이 기사의 눈에서 타올랐다.


기사가 일어나서 다시금 자세를 잡자, 은은한 바람이 발목을 스쳤다.


인간이 마나와 상호작용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상 현상 두 가지였다. 푸른빛과 묘한 바람.


그는 평소보다 영혼을 더 많이 태우고 있었다. 나를 끝장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어울려드리지, 기사 나으리.”


여유롭게 말하며 다음 작령을 준비하는 척했으나 남은 마나가 거의 바닥이었다.


고작 칼날 몇 개 날리는 것밖에 못 한다. 이걸로는 저 괴물을 절대 죽일 수 없다.


위험하다.


‘빨리. 루시아, 나 이제 뒤져.’


할버드에 스치기라도 하면 뼈도 못 추린다. 내가 아무리 신체 강화를 해 봤자 기사와 힘 대 힘으로 맞붙으면 단번에 두 동강 난다. 그걸 알았기에 최대한 근접전을 피했는데 마나가 떨어졌으니 더 이상 원거리로 끌고 갈 방법이 없다.


최대한 블러핑을 날리며 시간을 벌 심산이었지만.


“아버지 월트와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


블러핑도 상대방이 신경 써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의 마나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테지만, 기사는 특유의 용기와 무식함으로 돌진해 왔다. 그는 움직일 수는 있을까 싶은 처참한 상태로도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산했다.


기사의 눈동자가 영혼 때문에 타오르는 건지, 광기 때문에 번뜩이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상대를 잘못 잡았어.’


닥치고 돌격하는 미친놈에게 수싸움은 통하지 않는다. 하필이면 돌대가리랑 싸우다니.


속으로 한숨을 내뱉고,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상황이 나쁘다고 여유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찾아대는 월트 제삿밥으로 올려주마.”


마지막 한 줌까지 끌어당긴 마나를 손바닥에 둘렀다. 검은 물질이 양손에 얇게 코팅되었다.


실패는 없다. 이미 거리를 내줬기 때문에 실패하면 죽는다고 봐도 된다.


“그아아아악!”


기사가 커다란 할버드를 번쩍 들어올렸다.


‘역시.’


그 순간의 동작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아닌 척해도 기사는 마족을 신경 쓰고 있었다. 무리해서 저렇게 큰 동작을 취하는 것에는, 단번에 마족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것은 마족에 대한 감정이 포함된 결정.


고조된 감정은 때때로 기본적인 걸 잊게 만든다. 큰 동작에는 그만한 역동작이 걸린다는 사실을.


후웅


기사가 할버드를 사선으로 내리찍었다.


스치면 사망.


죽음의 궤적이 닿기 전,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공기를 찢어발기며 쇄도한 할버드가 머리 위를 지나는 파공음이 들렸다.


거의 넘어진 상태에서 왼손으로 땅을 짚었다. 왼손에 코팅된 검은 물질을 손바닥에 응축시켜 터뜨렸다.


폭발의 반동으로 인해 상체가 위로 솟구치고, 이미 할버드를 휘두른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역동작이 걸린 기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체크메이트.”


경악으로 물드는 기사의 눈은 푸르렀다.


그 눈을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목을 찔렀다. 날카로운 칠흑 물질은 부드럽게 살을 파고들어 목뼈를 끊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머리통.


끊어진 단면에서 피가 솟구치고,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지 눈을 치켜뜬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묵직한 판금 갑옷을 입은 몸통은 힘없이 무릎을 처박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후우.”


참았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계곡물처럼 핏물을 울컥울컥 쏟아내는 거구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부분에서 기사가 유리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훈련받았을 테고,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신체 강화로는 따라가지 못할 괴력을 보유했으며, 리치가 긴 할버드까지 있었다.


전투 경험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애들 싸움만 했던 나보다는 우수하리라.


그러면 그가 왜 죽었을까.


싸우면서도 느꼈듯이 답은 단순했다.


기사는 자신의 감정에 죽은 것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죽었다.


천천히 압박해 왔다면 내가 이길 방법은 없었다. 한 발씩 전진하며 할버드의 긴 리치를 활용했다면 죽음 외엔 탈출구가 없었겠지.


하지만 기사는 감정에 치우쳤다.


마족과의 첫 전투라는 흥분감, 아니면 익히 들은 마족의 악명에 대한 공포감, 어쩌면 마족을 죽이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송을 받을지 모른다는 호승심.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감정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괴력이 있는 만큼, 괴력으로 휘두른 동작에는 괴력에 맞는 크기의 역동작이 걸린다. 당연한 사실을 잊을 정도였으면, 말 다 했지.


“으윽.”


갑자기 몰려드는 통증에 어깨를 붙들었다. 작은 폭발이라도 폭발은 폭발. 무식하게 반동을 이용해 튀어 오른 탓에 어깨에 무리가 왔다.


왼쪽 어깨를 붙잡고 발을 뗐다.


“루시아, 얘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죽음 직전까지 몰렸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그녀를 찾아 나무랄 차례였다.


“머, 멈춰!”


하지만 이놈의 인간들은 나를 쉽사리 보내주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죽이지 못한 용병들이 모여있었다. 단체로 자취를 감췄길래 어디로 갔나 했는데 잘 숨어 있던 것 같았다.


“사악한 악마 숭배자는 죽어라!”


생존한 용병 중 고참으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똘똘 뭉친 용병들이 도끼와 창 그리고 방패를 들고 서서히 다가왔다.


밀집 대형을 풀지 않는 그들을 보고 눈가를 찌푸렸다.


저놈들, 작령자와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인간이 여럿 모여있으면 작령으로 공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나 소유권이 어지러이 얽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반인들이 작령자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은 다섯 명 이상이 똘똘 뭉치는 거다. 기사와 싸우면서 내가 마족 계약자인 사실이 들통났으니 저렇게 대응하는 것일 터.


잘 배운 녀석들이었다. 실전 경험도 풍부하겠지.


‘아이고, 지랄. 이렇게 죽는다고?’


그들의 노력과 상관없이 나는 마나가 바닥난 상태라는 것. 어차피 작령하지 못한다.


지하실에 갇혀있는 동안 약해진 몸이 여태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작금의 나는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처지였다. 도망갈 체력도 당연히 없다.


기사까지 물리쳤거늘 용병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위기에 처하다니. 이것 참.


“너 지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생각했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반가운 목소리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중단 공지 24.09.06 16 0 -
공지 월화수목금토일, 매일 연재합니다 24.08.25 15 0 -
19 019. 철없는 조카 24.09.06 16 0 14쪽
18 018. 개소리 그만하고 24.09.05 16 0 12쪽
17 017. 울상 짓는 로버트 24.09.04 17 0 12쪽
16 016. 감사해라 24.09.03 21 0 12쪽
» 015. 반가운 목소리 24.09.02 19 0 12쪽
14 014. 시간 끌기 24.09.01 20 0 12쪽
13 013. 루시아 코는 개코 24.08.31 24 0 12쪽
12 012. 방 빼 24.08.30 26 0 13쪽
11 011. 예의 없는 애들이 싫더라 24.08.29 19 0 12쪽
10 010. 원치 않는 제자 또는 종자 24.08.28 23 0 13쪽
9 009. 마법사님 맞죠 24.08.27 25 0 13쪽
8 008.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 24.08.26 27 0 15쪽
7 007. 붉은 염료 24.08.25 29 0 15쪽
6 006. 톰 아저씨는 수상해 24.08.24 31 0 14쪽
5 005. 최후의 수단이다 24.08.23 30 1 14쪽
4 004. 열려라 참깨 24.08.22 34 0 16쪽
3 003. 계약서 작성 24.08.21 42 0 13쪽
2 002. 엿 드세요 24.08.21 52 0 13쪽
1 001. 나도 납치당했다니까 24.08.21 84 0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