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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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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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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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톰 아저씨는 수상해

DUMMY

‘한국산 신파극 한 사발 하지 않으실래?’


드라마에서 봤던 대사들을 이것저것 엮은 다음 들이밀었다.


한 번 맛 좀 봐봐. 기가 막힌다니까.


“물건을 팔 수 있다면 어디를 가리겠습니까. 먹여 살릴 처자식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야지요. 날밤을 새워서라도 물건을 떼다 팔아야 아이들이 굶지 않습니다. 요즘 너무 먹고 살기 어려워서요.”


자식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먹여 살려야 한다. 아이들을 굶기는 건 모든 시대에서 통한다. ‘요즘’이 힘든 건 다들 그렇다.


당연한 것들이면서 당연히 통하기도 하는 것들을 이어 붙였다.


그러고 나서 통발을 던진 어부의 심정으로 초조하게 입질을 기다렸다.


제발 하나면 걸려라. 하나만.


“자식이··· 몇 있나?”


다행히도 기수는 자식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나불거렸다.


“다섯 있습니다. 집에 가서 토끼 같은 아내와 병아리 같은 자식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녀석들이지요.”

“책임의 무게를 아는 상인이로다.”

“그저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떠돌이 상인 주제에 나으리께 과분한 칭찬을 받는 것 같습니다.”


기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아내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충분히 치하받을 자격이 있다.”


다행히 기수는 내가 도시에 관한 대답을 얼버무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중세. 기사도와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시대다.


-내가 아는 기사도는 이런 게 아닌데······?

‘기사도에 자식을 지키는 게 포함되지 않는다고?’

-교회를 지키고 용맹하게 살고, 뭐 과부와 고아들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말이 있던 거 같은데 자식은 아니야. 그런 구절은 없어.


아뿔싸. 기사도를 노리고 말한 거였는데 기사도가 아니었다니.


근데 뭐 결과가 좋으니 된 거 아니겠나. 눈앞에 있는 기수의 기사도에는 자식들을 챙긴다는 조항이 들어가나보다. 정의든 가치관이든 다들 자기만의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속으로 실실 웃으며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수는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인근에 마법사가 거주하는 오두막을 알고 있나?”

“지나오다가 오두막을 봤습니다.”

“오두막에 수상한 흔적을 보진 못했고?”

“예. 그저 아이들이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걷느라 자세히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또 기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렇군. 몸이 삐쩍 말랐는데, 잘 챙겨 먹도록 해. 그래야 아이들을 더욱 잘 돌볼 수 있지 않겠나.”

“옳은 말씀입니다.”


기수가 은화를 한 닢 던져주었다.


“그걸로 밥 사 먹고 기운 내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은화를 챙겼다.


“조사에 응해줘서 고맙다. 아버지 월트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아버지 월트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질문을 끝낸 기수가 말 옆구리를 박차고 달려 나가자, 다른 기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기수의 뒤를 따랐다.


나는 기병들이 언덕을 넘어갈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대충 사극에서 본 장면이었다. 평민들이 높은 사람 배웅할 때 이러더라고.


짝짝짝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루시아가 상기된 얼굴로 박수치고 있었다.


-너, 왜 이렇게 아가리를 잘 털어!

‘아가리라니? 화려한 언변이라고 부르거라.’

-대단하다, 너.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까 말이 술술 나오더라.’

-키야! 이야! 다시 봤어! 할 줄 아는 거라곤 때리는 것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인생사 새옹지마다, 이 말이야. 나쁜 일이 닥쳤지만 기수의 약점을 단번에 맞췄잖아. 이제 믿겠어?’

-새옹지마, 좋아. 새옹지마 최고!

‘외쳐, 새옹!’

-새옹!

‘외쳐, 지마!’

-지마!




*




우리는 새옹지마를 찬양하며 걷다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정적에 짓눌렸다.


‘······.’

-······.


우리 둘 다 이 정적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억지로 웃어서 넘겨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뒷골이 당기고 손이 떨렸다. 이건 내 감정인 동시에 루시아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기수와 마주했을 때, 내가 본 적 없던 공포에 질렸었다.


‘그보다 우리 죽을 뻔한 거지?’

-완전히, 확실히.

‘네 작령으로도 어떻게 안 됐으려나?’

-······.


루시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때리며 터벅터벅 걸었다.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루시아?’

-···아, 응. 뭐라고 했어?


애가 진짜로 넋이 나갔네.


‘네 힘으로도 어떻게 못 했을까?’

-아··· 월트의 은총을 다룰 줄 아는 기사였어. 다시말해 성기사. 절대로 못 이겨. 내가 나타나자마자 그 창에 심장이 꿰뚫렸을걸.


몰랐다. 루시아가 힘 써주면 자칫 상황이 안 좋게 풀려도 다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뒤늦게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었는가 깨달았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흘렀다.


‘뒤질 뻔했네.’

-······맞아.


한껏 풀이 죽은 목소리. 듣는 나조차 기운 빠진다.


곁눈질로 루시아를 살폈다.


아까는 하늘만 보면서 걷더니 지금은 땅만 보며 걷는다. 어이구. 그러다가 얼굴 땅바닥에 처박겠다.


-···다 들려.

‘300일에서 뺄셈은 안 해도 됐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자.’

-넌 참 태평하다.

‘이러다 언제 또 급발진할지 몰라.’

-···네가 화내면 무서워.


루시아가 은근히 두어 발짝 멀어졌다.


이건 나도 억울하다.


‘갑자기 열기가 뇌에 침입하던데, 뭐 아는 거 없어?’

-···그냥 화가 많은 거 아니었어?

‘내가 다혈질은 아니야. 그때는 확실히 이상했어. 과하게 침착할 땐 냉기가 느껴지고, 과하게 열받을 땐 열기가 느껴져. 둘이 유사해. 굉장히 인위적인 감각이랄까.’

-흐음, 짚이는 건 없는데.


마법사를 만나면 해결하려고 했던 궁금증이었는데, 이제는 만나기도 요원해졌다. 살아있긴 하려나. 이 시대는 금기를 저지르면 형벌이 사형부터 시작일 텐데.


-마족 실험한 것만 안 걸리면 살아남을 수 있을걸. 그 변태, 은총과 마법을 섞어서 구사하는 실력이 뛰어났어. 그 정도 실력이면 마법학회에서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겠지. 어지간한 범죄는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다시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꿈 깨. 다시 만나면 지하실에 끌려갈걸.


오, 예리한 지적. 그걸 생각 못 했네.


루시아가 실소를 흘렸다.


-가끔 보면 어설프다니까.

‘내 어설픈 부분을 네가 채워줘서 다행이야.’

-······.


우리는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하던 루시아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뭐, 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침착하게 대응해 준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루시아는 그런 쪽으론 굉장히 어색해했다.


‘큭큭.’

-왜 웃어.

‘네가 부끄러워하는 게 웃겨서.’

-으윽! 다신 말 안 해! 하나도 안 다행이다!


서로 종족도 다르고 살아온 세계도 다르다. 하지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 같은 목표인 생존을 바라보는 동료.


그녀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남사스럽게 무슨 그런 생각을 해.


부끄러워하는 루시아의 머리에 팔을 걸치고 화제를 돌렸다.


‘이곳 세계 상식 좀 가르쳐줘. 앞으로 사람들 많이 만나야 하는데 하나도 모르면 이상하잖아.’

-알아서 술술 잘 지어내던데? 누가 보면 여기서 살아본 사람 같았어.

‘다행이네. 그런데 이 짓거리가 언제까지 통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대비할 필요가 있어.’

-알겠어. 나도 인간 세상은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너보단 많이 알 테니. 잘 들어.


나보단 많이 알아?


마족인 루시아가 어떻게 인간 세상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겠는가. 사람을 납치해서 실험하는 과정에서 알았겠지. 나쁜 마족이네.


-···자꾸 그러면 안 알려준다.

‘강의 시작하세요, 선생님.’

-······일단 교회부터 설명할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루시아가 강의를 시작했다. 교회, 교황청, 마녀, 사제, 기사, 마법사, 성기사단, 작령자, 마족, 용, 인간, 왕국 등에 대한 설명이 늘어졌다.


음, 그렇구나. 아하. 여긴 용도 있네. 없는 게 뭐람. 흐아암.


-야, 집중 안 해?


이런, 하품하는 걸 들켰다.


솔직히 루시아는 누구를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없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고 주제가 난잡해서 설명이 꼬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집중해서 들은 결과, 나는 이 세상을 대충 이해했다.


중간에 용이니 마족이니 하는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있었지만,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단다. 루시아 표현대로는 평생 살면서 만날 일이 없다나. 그런데 본인은 마족이란 걸 까먹었나.


어쨌든 시대상은 예상한 대로 지구의 중세 정도. 하지만 교회의 권력은 지구 중세보다 훨씬 강했다. 이상할 만큼 교황이 가진 권위가 귀족들을 압도했다.


‘교회가 지배하는 세상. 마족과 엮인 자는 사특한 악마에 홀린 죄인.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화형이라······.’


아무래도 평온하게 살기는 글렀다. 짐작은 했으나 막상 죽을 위기를 넘기고 나니까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평범하게 회사 다니며 소시민다운 삶을 살고 있던 내가 모두에게 배척받는, 언제 잡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가 됐다니.


-마을이다.


루시아가 팔을 쭉 뻗었다.


심란한 마음을 접어두고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저물어 가는 태양을 등진 마을이 있었다.


-좋아. 들어가도 되겠다. 규모가 커.

‘규모가 작은 마을은 들어가면 안 돼?’

-그건 아닌데 조심해야 해. 마을 크기가 작을수록 외부인을 극도로 경계하거든.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자고 있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콱 죽여버릴걸. 저런 큰 마을에서도 조심하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훨씬 나은 편이야.

‘뭔가 악에 받쳐 있는 것 같은데, 당해본 것처럼 말한다?’

-옛날에 계약했던 인간이··· 산골의 작은 마을 촌장한테 밉보였다가 골로 갔어.


어유. 어째 날이 갈수록 지구가 그리워졌다.


‘이곳은 정말 죽음과 삶의 거리가 가깝네.’

-그러니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 여태까지의 계약자들과 달리 네가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

‘걱정 붙들어둬.’


루시아의 흑발을 헝클이고 마을로 들어갔다.


-아, 만지지 마!


뒤편에서 투덜댄 루시아는 심장으로 돌아갔다.


마을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며 신기해했다. 규모는 있는데 외부인이 자주 들락거리진 않는 곳 같았다.


아이들을 보며 웃어주고 있으니 웬 노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어르신.”


공손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노인은 내 행색을 위아래 훑어봤다. 마법사의 오두막에서 훔쳐 입은 옷. 간편한 복장이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깔끔했다.


“어쩐 일인가?”

“지나가다가 해가 져서 그런데, 하룻밤을 묵을 장소가 있는지요.”


오두막에서 은화랑 동화가 담긴 돈주머니도 슬쩍해서 비용 걱정은 없다. 고마워요, 아낌없이 주는 마법사. 허락받은 건 아니지만 그간의 정이 있으니 이 정도는 괜찮잖아.


“가끔 외부인이 오면 방앗간 톰 집의 남는 방을 쓰지. 동화 한 닢이면 하루 정도 묵게 해줄 거요. 아니면 촌장의 집에서 머물러도 되는데, 거긴 좀 비싸. 우리 촌장은 돈에 눈이 돌아갔거든.”


돈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돈주머니는 당분간 풍족하게 먹고 살 만큼 두둑했다.


그렇지만 촌장? 권력자랑 엮여서 좋은 꼴 보기 어렵다.


심지어 루시아한테 들은 얘기도 있다 보니까 께름칙했다.


“가난한 방랑객이라 톰 씨를 찾아봐야겠군요.”

“저기 보이는 집이 톰네 집일세.”

“감사합니다, 어르신.”

“말썽부릴 사람으로는 안 보이네만, 그래도 조용히 머물다 가시게.”


뼈가 들어있는 말. 노인의 흐린 눈동자가 잠깐 예리해졌다.


나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있다가 가겠습니다.”


휘휘 손을 내젓는 노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톰의 집으로 향했다.


-이상해.

‘뭐가?’

-저 노인.

‘눈빛이 싸한 거 말고는.’

-분명 우리한테 악의가 있었어.

‘너, 다른 사람 마음도 읽을 수 있어?’


확신이 없는지 루시아가 말을 머뭇거렸다.


-그건······ 아니지만.


사위가 벌써 어두웠다.


지금 마을 밖으로 나가서 야영할 장소를 찾기엔 늦었다.


야생의 밤은 인간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재수 없는 경우에 마주할 위협이 너무도 많다.


‘불안하면 나 자는 동안 네가 보초 서.’

-···진짜 수상한데.


루시아를 달래는 한편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처음 보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누구요?”

“어떤 어르신께서 숙박하려면 톰 씨를 찾으라 하셔서요.”

“아··· 어, 아, 네. 제가 톰······이긴 한데요.”


톰은 이상하게 뚝딱거리며 불안에 떨었다. 눈알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려대는 게 매우 의심스럽다.


‘반응이 이상하네.’

-거봐, 수상하다니까.


톰은 너무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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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016. 감사해라 24.09.03 20 0 12쪽
15 015. 반가운 목소리 24.09.02 18 0 12쪽
14 014. 시간 끌기 24.09.01 20 0 12쪽
13 013. 루시아 코는 개코 24.08.31 24 0 12쪽
12 012. 방 빼 24.08.30 25 0 13쪽
11 011. 예의 없는 애들이 싫더라 24.08.29 19 0 12쪽
10 010. 원치 않는 제자 또는 종자 24.08.28 22 0 13쪽
9 009. 마법사님 맞죠 24.08.27 24 0 13쪽
8 008.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 24.08.26 27 0 15쪽
7 007. 붉은 염료 24.08.25 29 0 15쪽
» 006. 톰 아저씨는 수상해 24.08.24 31 0 14쪽
5 005. 최후의 수단이다 24.08.23 30 1 14쪽
4 004. 열려라 참깨 24.08.22 33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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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02. 엿 드세요 24.08.21 52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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