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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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최근연재일 :
2024.09.0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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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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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울상 짓는 로버트

DUMMY

“웰팅엄과 배신자 용병들이 덤비길래 다 죽였습니다.”

“어우, 예······ 에? 네? 뭐라고요?”


자동으로 맞장구치려던 로버트가 다시 고장났다.


“···누구를 죽여요?”

“침입한 기사가 웰팅엄 아닙니까?”

“맞는데요······ 예? 그를 어떻게?”

“진정하십시오.”


재차 정신을 놓은 로버트를 다독였다. 이 상태에서 뭘 뜯어내기란 요원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끝냈다.


로버트는 설명을 다 듣고도 혼란스러운지 동공을 떨었다.


“그러니까··· 덤벼드는 용병들을 차례차례 죽이다가 할버드를 든 웰팅엄이 나타났고, 그가 한스 씨를 죽이려 들길래 죽여버리고 나머지 용병들도 처리했다는··· 말입니까?”

“정확합니다.”

“어떻게요?”

“저는 불법 마법사니까요.”


간단하면서도 잘 먹히는 핑계였다.


로버트는 문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흠흠, 알겠습니다. 한스 씨가 무슨 의도로 제게 말씀하시는지도 알겠고요.”


입 아프지 않게 이해를 다 하셨단다. 아주 좋다.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샘의 보증까지 받으신 분인데요. 몰라뵙고 예의 없이 굴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자기 잘났다고 자랑질을 해대던 오만한 상인은 이곳에 없었다. 로버트는 정확히 자신의 목숨이 누구 손에 달렸는지를 깨달았다.


그의 눈빛이 바뀐 걸로 알 수 있었다.


노인도 그렇고 로버트도 그렇고, 상인이란 족속들은 눈치와 태세 전환이 참으로 빨랐다.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와 장소를 너무 잘 아는 인간들.


“제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제가 일부러 밝히지 않았으니까요. 그나저나 에드먼드라는 분은 어디 계십니까?”

“아! 에드먼드 버크 이사님께서는 상회 본부에 계십니다. 에뮐렌에 도착하면 즉시 에카르트로 가는 배를 수배해 보겠습니다!”


에드먼드 버크 이사. 노인이 나의 보호 겸 감시를 맡긴 사람인 만큼 쉽지 않은 인물이겠지.


-에카르트 상회 이사 정도면 만만찮은 권력자야. 너, 권력자랑 얽히는 거 싫어하잖아.

‘아무래도 그렇지.’


권력을 쥔 놈이랑 궁합이 잘 맞으면 좋지만, 자칫해서 심기라도 건드리면 골치 아파진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권력자에 대한 괘씸죄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그만큼 당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


‘맞는 말이야. 너도 그렇고 나도 다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권력자한테 찍혀서 교회에 끌려가면 모든 게 소용없지. 우리가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그치. 난 그딴 거 필요 없어! 멀쩡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어쭈. 이 자식이, 내가 지구로 못 돌아가는 거 알고 약 올리나.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여하튼, 중요한 건 생존이다. 더 나아가선 내가 왜 이곳에 소환됐는지, 그리고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


-나는 검은 땅!


그래. 루시아가 검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그렇다면 생존에 있어서 유리한 쪽을 택하면서도 인간들과 어울려야 한다. 변태 마법사의 말로는, 교황청이 눈에 불을 켜고 나 같은 이방인들을 잡아간다고 했으니 최종적으로 교회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루시아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왜 의식의 흐름이 그쪽으로 가지? 교회와 가까워진다니, 난 들은 적 없는 얘긴데?

‘방법이 없잖아.’

-아무래도 그건 많이 안 좋은 생각 같은걸.

‘내가 지구에 대한 단서를 얻기 전까지 루시아 너도 검은 땅으로 못 돌아가.’

-아, 왜! 월트를 믿는 미친 새끼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녀가 극렬히 반대하거나 말거나, 나는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언제 악마 숭배자로 몰려서 죽을지 모르는 세계에 계속 있을 이유가 하등 없었다.


더군다나 여긴 음식도 맛이 없다고. 빵은 딱딱하고 고기는 질기고, 마땅한 향신료도 안 보인단 말이야.


내 의지는 확고했다.


‘내가 지구로 가는 방법을 찾고 나서 놓아줄게.’

-말도 안 돼. 이건 미친 짓이야. 당장 계약 파기해!


루시아를 내려다봤다.


매력적인 홍안이 당혹스러움에 흔들렸다. 현실을 부정하는 표정마저 읽혔다.


이런, 루시아. 네가 계약을 파기하면 나는 당장 무능력자가 된다고. 내가 그것도 대비하지 않았을까? 사기꾼들의 창의적인 수법을 매년 접하던 한국인을 얕보면 안 되지.


‘계약 파기 조건이 뭐였는지 까먹었어?’


루시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고, 마주 잡은 손은 파르르 떨렸다.


정신없어 보이는 그녀 대신, 친절히 계약 조항을 읊었다.


‘상호 합의 없이, 계약은 결코 만료되거나 효력을 잃지 않는다.’


“으아──”


곧장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았다.


그러자 입이 막힌 그녀는 링크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건 무효야! 이건 무효라고!


루시아의 입을 손으로 덮은 채 싱긋 웃었다.


‘각오하라고 했잖아.’

-으아아악! 이 미친 계약자야!


더 반항하기 전, 심상에 들어가 불꽃을 일으켰다.


‘자면서 머리 좀 식히고 있어.’

-이 계약 무──


무효라는 절절한 외침은 새빨갛게 일어난 불꽃에 잡아먹혔다. 이제 마족 다루기는 능숙했다.


간단히 루시아를 기절시키고 바깥으로 나왔다.


“저기··· 그 소녀는 괜찮은 겁니까?”


어안이 벙벙한 로버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시선에선, 갑자기 소녀가 고함을 치려다가 입막음 당하고 기절한 걸로 보일 거다.


축 늘어진 루시아를 들쳐업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 친구가 종종 이래서요. 아픈 아입니다.”

“아··· 그렇군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아이를 거두신 한스 씨의 자비가 대단하십니다.”

“제가 좀 그런 편이죠.”


루시아가 깨어 있었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얘기지만, 지금은 천사처럼 곤히 자고 있는데 뭘 할 수 있겠나. 네가 어쩔 수 있는데.


“그러면 로버트 씨, 뒤처리 문제나 마저 논해볼까요?”


은화 열 닢 값은 더 뜯어낼 테다.





*




내가 이목을 끈 덕에 살아남은 마부들은 난장판이 된 현장을 정리했다.


다만, 나와 루시아가 훼손한 시체들은 혹시 몰라 내가 직접 치웠다. 훼손된 흔적은 아무리 봐도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으니까. 괜히 의심하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마부들이 파놓은 큰 구덩이에 시체를 몰아넣고 태웠다.


‘웰팅엄, 네 덕분에 목표가 확실해졌어.’


거센 불길 속에서 웰팅엄의 머리가 타들어 갔다.


웰팅엄과의 전투를 통해,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지구로 돌아간다는 건 핑계였다.


바로, 뇌에 박힌 얼음덩이에 관한 것이다.


그때 뇌와 장기를 태우듯 온몸에 열이 솟구쳤다. 슬금슬금 속을 울렁이게 한 어지러움이 본격적으로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었다.


“크윽.”


마구잡이로 뻗치려는 증오와 적개심을 겨우 억눌렀다.


지금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얼음덩이가 침착함을 제공할 때마다, 이후엔 부작용처럼 열감이 전신을 장악했다. 방향 없는 살의가 날뛰며 생명을 갉아먹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열감의 원인이라 생각되는 얼음덩이를 통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걸 심은 걸로 추정되는 변태 마법사를 만나기란 요원하다.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그를 찾기란 불가능할 터.


제작자를 찾지 못하겠으면 직접 뜯어서 고쳐내는 수밖에 없다. 얼마의 돈을 쏟아부어서든 들끓는 열기를 완화하고 치료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가 필요해. 이곳의 권력 정점에 선 성직자들은 분명히 치료법을 알고 있을 거야.’


열기가 요동칠 때면 신체는 복구할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버티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 없어. 그렇다고 교회에 성급하게 접근했다간 목숨만 단축하는 꼴.’


신중하되 신속한 접근이 필요하다.


‘교회와 안전히 접근하려면 최소한 권력자의 비호를 받아야 해.’


이것이 내가 꺼림칙해도 에드먼드를 만나야 하는 이유였다.


지구? 편안했던 시절이 그립긴 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최우선 목표는 언제나 생존.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억지는, 교회와 가까워지려는 행위를 루시아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핑곗거리지.’


핑계를 대는 이유는 단순명료했다. 타인을 절대 믿지 말라는 얼음덩이의 경계심과 불신 때문. 얼음덩이로 차가워진 이성은 이런 와중에도 약점을 공유하면 불리하다고 속삭였다.


루시아를 기절시킨 것 또한 배려인 동시에 경계였다.


적개심이 또 루시아를 찌를까 봐 기절시킨 것이기도 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게조차 약점을 감춰야 한다는 얼음덩이의 주장이 먹혀들었다.


‘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생존에 불리해진다. 어차피 루시아는 치료법은커녕 얼음덩이의 정체도 몰라. 차라리 감추는 게 낫다.’


편집증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몸에서 같은 생명을 공유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못 믿느냐고 질책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세상일은 어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법. 루시아가 적으로 돌아설 때를 대비해 치명적인 약점은 숨겨야 한다.


입안이 씁쓸했다. 열감을 참아내느라 볼 안쪽을 세게 깨물어서 피맛이 느껴졌다.


“외롭구나.”


얼음덩이는 축복이자 저주였다. 순간마다 생존을 향한 최고의 선택을 고르지만, 고립되는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다.


웰팅엄의 살가죽이 타고 해골이 드러났다.


깨우침을 준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그와의 전투에서 벼랑까지 몰리는 경험을 한 덕에 열감의 위험성을 확신했다. 마나가 몽땅 떨어졌을 때, 비로소 열감이 수명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마나로 지탱하지 않으면 서 있는 것도 버거운 상태라니. 열감을 치료할 때까지는 마나 없이 생활하기 어렵겠어.’


이후의 전투에는 마나를 소량이라도 남겨야겠다.


최후의 최후까지 모든 걸 끄집어낸 전투.


‘웰팅엄, 너보다 강한 인간들이 세상엔 많겠지.’


당장 루시아가 극도로 조심하는 교회의 전력만 해도 그렇다.


은총이라는 에너지 특성상 마족에게 치명적이기에 더욱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전투처럼 적이 감정에 휘말리길 기대하는 요행을 바랄 수는 없으니. 내가 더 강해져야겠군.’


잠시 후, 어느 정도 열감이 가라앉았다.


웰팅엄의 판금 갑옷과 할버드는 잘 챙겨서 로버트의 마차에 얹었다.


물론, 내가 쓸 건 아니었다. 나보다 훨씬 큰 덩치의 웰팅엄에게 맞는 갑옷을 입고 싸우기란 불가능했다.


‘저건 팔아야지. 쏠쏠하게 나가겠다.’


제련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못한 시대에 판금 갑옷은 매우 비싸다.


루시아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제일 싼 판금 갑옷이 금화 8닢부터 시작이랬다. 폭발에 직격으로 얻어맞아 찌그러지긴 했으나 못해도 금화 4닢은 받겠지. 이것만 가져다 팔아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로버트 씨, 해가 떴으니 출발하시죠.”


부서진 마차들을 살피며 손해를 가늠하던 로버트가 돌아봤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저 표정은 지금 손실을 본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일까, 나에게 시달릴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정답은 로버트 본인만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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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018. 개소리 그만하고 24.09.05 16 0 12쪽
» 017. 울상 짓는 로버트 24.09.04 17 0 12쪽
16 016. 감사해라 24.09.03 21 0 12쪽
15 015. 반가운 목소리 24.09.02 18 0 12쪽
14 014. 시간 끌기 24.09.01 20 0 12쪽
13 013. 루시아 코는 개코 24.08.31 24 0 12쪽
12 012. 방 빼 24.08.30 25 0 13쪽
11 011. 예의 없는 애들이 싫더라 24.08.29 1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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