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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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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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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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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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방 빼

DUMMY

나머지 소년들도 간단히 처리했다.


애당초 체급이 안 맞는 싸움. 루시아의 도움을 받는 나와는 상대가 안 됐다. 녀석들의 귀여운 날붙이는 옷자락에 닿지도 않았다.


딱 죽지 않을 만큼 맞은 소년들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놈들을 내려다보며 로브를 쓰다듬었다. 이 검은 로브 때문에, 마법에 대한 환상이 깨진 참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마법은 천 자락이 휘날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었는데. 내 환상 돌려줘.’


검은색 로브로 루시아의 형체를 어느 정도 가릴 수 있단다. 이제 신체 강화 정도는 그녀가 요리조리 로브 아래에 숨어서 작령해줘도 괜찮다고 한다.


‘멋없어.’

-대체 작령을 뭐라고 생각한 거야. 망상도 정도껏 해야지.


뭔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설픈 작령의 세계였다.


아이가 바라보는 어른의 세상은 성숙하고 멋지지만, 실제 성인이 되었을 때 생각보다 별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나는 차근차근 작령을 깨달았다.


싱숭생숭한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루시아는 자신의 안목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검은색을 선택한 이유가 다~ 있다 이 말이야. 작령자가 보는 마족의 색깔이 검은색이거든. 내가 이것까지 착착착 고려해서 이 로브를 추천한 거지!

‘이제 마음 놓고 작령해도 되는 거야?’

-그래도 최대한 안 쓰는 게 좋아. 어쩔 수 없을 때는 써야겠지만. 밤, 좁은 곳, 인적이 드문 시간과 장소에서 쓸수록 들킬 확률이 낮아.


스치듯이 어떤 문장이 생각났다.


‘아니면 목격자를 다 죽이거나.’


그런 말도 있지 않나. 암살은 목격자가 없는 살인을 뜻하는 단어니까 목격자를 다 죽이면 암살이다, 라는 명언.


루시아가 진절머리를 냈다.


-누구한테 또 그런 무식한 말을 들었지?


출처는 나도 모른다. 무슨 게임에서 들었던 것 같기도.


손수건으로 피 묻은 손을 닦았다.


소년들의 피로 얼룩진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여자아이를 내려다봤다.


금발 소녀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몸을 한껏 움츠린 채 가만히 있었다. 뼈마디는 앙상하고 옷에는 온갖 오물이 묻어 있어, 더러운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마녀의 아이. 마녀는 마족의 씨앗을 품은 인간 여성 작령자를 의미한다. 이 말인즉 교회가 제거해야 할 적이라는 뜻.


그로 인해 어머니는 현재 화형당하고 있으며, 아이는 도시 남자애들한테 험한 꼴을 당할 뻔했다. 제임스가 관심갖지 않았으면 더러운 짓을 당했겠지.


힘없고 돈 없으면 세상 살기 힘들다. 더군다나 지켜줄 보호자도 없는 셈.


곧 죽겠군.


‘이래서 잠깐 드는 동정심에 구해줘 봤자 의미가 없다니까. 괜히 헛된 희망을 품기 마련이야.’


어차피 죽을 목숨인 생명을 구해서 뭐 하나.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아니면 구해선 안 된다.


그리고 나 하나 먹고살기 바쁜 곳에서 남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여자아이를 두고 떠나려는데, 뒤에서 제임스가 불러세웠다.


“한스 님!”


한숨을 삼키며 걸음을 멈췄다.


“또 왜. 구해줬잖아.”


귀찮은 티를 내면서 뒤를 돌아보자,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아가 여자아이 앞에 꿇어앉아 눈을 마주하고 있던 것이다.


쟤까지 왜 저래.


‘함부로 밖에 나오면 안 된다고 고막이 닳도록 경고하던 분이 누구시더라.’

-아, 미안.


루시아는 급히 로브 아래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는 게, 눈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가 문젠데?’

-저 아이······.

‘음?’


루시아의 말이 완성되기 전에, 나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한스 님, 얘, 얘 눈이······!”


놀란 제임스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소녀를 가리켰다.


나와 루시아가 동시에 생각했다.


‘루시아, 너를 정확하게 쳐다보는데?’

-작령자가 아닌데 나를 인지했어.


금발 소녀가 새하얀 눈으로, 로브 아래에 숨은 루시아를 정확히 응시했다. 백내장이 낀 환자의 눈으로.




*




서커스 관람은 안타깝게도 포기해야 했다.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다.


동화 네 닢을 지급하여 숙박을 연장하고 방에 들어왔다. 제임스는 따로 방을 잡아줬기 때문에 옆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나를 맞이하는 건 금발 소녀의 하얀 눈동자였다.


“이거 곤란하네.”


요즘 따라 부쩍 늘어난 한숨을 뱉었다.


백내장을 처음 본 제임스가 놀란 건 상관없었다.


진짜 문제는, 작령자도 아닌 맹인 소녀가 루시아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


소녀는 물끄러미 허공을 관찰했다. 아니, 정확히는 루시아를 쳐다봤다.


내가 아닌 남이 이렇게 구경하는 상황이 이상한지 루시아가 삐질삐질 말했다.


-가만 보니까 이 아이, 영혼이 텅 비었어.

‘영혼이 비었다니?’

-생명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영혼의 주체가 없어. 그러니까 인간 영혼의 껍데기만 있고 내용물이 없다는 말이지.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란 거야.

‘변태 마법사가 말하기로 나는 은총을 전혀 품지 못한다던데. 나 같은 이방인 아니야?’

-넌 영혼도 있고 주체도 있어. 은총만 없을 뿐이야. 얘는 너랑 완전히 달라. 영혼은 있는데 자기 자신이 없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는 안 가지만, 정신머리가 없다는 소리 같다. 애가 말도 못하고 멍하니 루시아만 바라본다.


아아, 이해했다.


‘한 마디로 정신이 나갔다는 소리구먼?’

-···그렇게라도 이해하시든지.


그렇게 말한 루시아는 손가락으로 소녀를 이곳저곳 눌러봤다.


소녀의 볼을 쿡 찌르고 이마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만졌다가 냄새를 킁킁 맡는다. 이거··· 루시아도 만만치 않은 변태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거든.

‘네 행동만 보면 변태 마법사를 능가할 변태력이야.’


입 닥치라는 루시아의 손짓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저리 보여도 영혼 분야에서는 전문가인 마족이니까 믿어보는 수밖에.


소녀는 자신을 살피는 루시아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루시아는 그 시선을 불편해하면서도 꿋꿋이 소녀의 몸을 눌러댔다.


-음, 되겠는데?


한참 소녀를 조사하던 루시아가 무어라 중얼거린 뒤 사라졌다.


나는 루시아가 심장에 들어간 줄 알고 말을 걸었다.


‘궁금한데 이제 좀 말해줘.’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싶어서 그녀와의 링크를 살폈으나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얘 어디 간 거야.’


당황하며 일어섰다.


그때 소녀가 내 팔을 덥석 잡고 말했다.


“계약자! 나야.”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시야가 아직 안 보이는데··· 으음, 아. 됐다!”


소녀는 변태처럼 내 팔을 더듬더듬 주물럭거리더니, 이내 허연 눈알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금발 머리카락도 뿌리부터 까맣게 물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루시아의 모습으로 완전히 바뀐 소녀가 해맑게 인사했다.


“안녕, 계약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잠깐 멈춰서 이 황당한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 나를 소녀가 툭툭 건드렸다.


“야, 정신 차려.”


익숙한 말투와 음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녀에게 질문했다.


“루시아?”

“응. 나야.”


소녀, 아니 루시아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며 대답했다.


태연한 반응이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아! 내가 이 아이의 영적 행위자···라고 설명하면 못 알아들을 테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얘 몸을 장악했어.”

“남의 몸을 함부로 써도 돼?”

“이 아이는 영혼에 주인이 없어. 소유권이 상실된··· 마치 죽은 사람의 마나 같은 상태야. 그런데 또 영혼의 형체는 유지하고 있으니 신기할 노릇이지.”


어려운 이야기는 못 알아듣겠다.


대충 요약하자면.


“빈집 털이네.”


좀도둑 루시아였다.


루시아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네가 쓰는 단어들은 이상하게 저렴해 보인단 말이야.”

“너 이제 그 몸에서 사는 거야?”

“아니! 본체는 여전히 네 심장에 있어서 이 몸에 머무르는 시간마다 마나를 써야 해. 네 심장을 뽑아서 이 몸에 이식하면 모를까.”


루시아가 싱긋 웃으며 내 가슴을 쿡 찔렀다.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은 루시아가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나는 네 몸에 털끝 하나도 위해를 가하지 못해. 우리 계약했잖아.”

“계약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마침 나는 괜히 계약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루시아? 우리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잖아.”

“장난이야. 놀라긴.”


루시아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흑발과 반짝이는 홍안, 얼굴형도 루시아와 동일했다. 삐쩍 말랐던 팔뚝과 퀭했던 볼살에도 살이 차올라 보기 좋게 변했다. 이제 본래 소녀의 추레한 형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루시아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라면 이것과 똑 닮았으리라 생각될 만큼, 눈앞의 소녀는 루시아와 완전히 동화됐다.


솔직하게 감탄했다.


“생긴 게 너랑 똑같다.”

“내가 영혼을 차지했으니까, 외형도 나로 변했을 거야. 성장이 아직 덜 돼서 체격이 작은 건 어쩔 수 없고.”

“링크도 끊긴 것 같던데?”

“다시 네 심장으로 돌아가거나, 이러면 연결될걸?”


루시아가 덥석 손을 잡았다.


-어때?

‘그러네.’


익숙한 그녀의 감정이 느껴지고, 루시아의 눈알에서 붉은색이 사라졌다.


-이러면 다시 돌아온 거야. 내가 저 몸에 있을 땐 작령자한테 검은 기운이 들킬 수도 있어서, 네 옆에 딱 붙어있어야 해.


소녀는 다시금 하얀 눈이 되었지만 나머지 외형은 루시아의 것 그대로였다.


나는 윤기가 흐르는 소녀의 흑발 끄트머리를 만지며, 의문을 던졌다.


‘쟤 몸에 들어가면 무슨 이득이 있는데? 괜히 거추장스러운 거 아니야?’

-괜히 들어간 게 아니라구. 들어가 있는 동안 마나를 소모하고 너랑 약간만 떨어져도 작령자한테 들킨다는 단점이 있지만, 괜찮은 효과가 있거든.


눈이 붉게 물든 소녀, 즉 루시아가 고갯짓했다.


“네 손을 봐.”

“···와.”


그녀가 가리키는 것을 내려다보자마자 감탄을 흘렸다.


윌리엄 패거리를 죽일 때 썼던 검은 물질이 손아귀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액체와 고체 사이에 있는 성질을 가진 물질. 아름답고 유연한 그것.


다루는 감각은 심상의 불꽃과 유사하다.


한 번 다뤄봐서 어렵지 않았다.


신기해서 손을 기울이며 가지고 놀고 있으니, 루시아가 팔목을 잡아주며 이것의 원리를 설명했다.


“네가 열기에 잠식당했을 때, 나는 네 영혼에서 쫓겨났었어. 지금도 비슷해. 네 영혼에서 내가 이탈하면 너는 마족의 기술을 그대로 쓸 수 있어.”

“마족의 기술······.”

“마족의 작령을 할 줄 아는, 아주 위험한 인간이 됐다는 뜻이지.”


위험한 인간이라.


“교회는 마족과 계약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불태우고 싶겠지.”

“두렵지 않아?”

“어차피 태워질 신세인데 뭐가 두렵겠어.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삶에 대한 나의 의지는 분명하고 간결했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주인공은 아닌 것 같지만 끝까지 살아남겠다. 마족과 엮였으니 순순히 내 모가지 가져가십쇼~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 머리를 가져다가 월트인지 뭔지의 제사상에 올리고 싶거든, 네놈들도 죽을 각오를 해라.


루시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계약자의 뜻에 따라서, 나도 살아야겠네.”

“내가 죽기 전에는 너도 쉽사리 못 죽어, 루시아.”

“명심할게, 계약자님.”


우리 둘은 킥킥 웃으며 마족의 작령을 연습했다.


손목과 손바닥의 각도, 손가락의 움직임,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이것들에 의지를 투여해서 검은 물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날카롭게, 부드럽게, 세심하게, 정교하게, 강력하게.


마족 특유의 예리함과 심상 속 불꽃의 유연함이 합쳐져, 아름답고 정교한 작령을 이루었다.


그렇게 우리는 작령을 익히느라 밤을 지새우는 줄도 몰랐다.




*




다음날, 저녁에 소녀를 방에 앉혀두고 제임스와 커다란 여관을 찾아갔다.


거처를 옮기거나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로버트 씨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근사한 여관에 도착해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중세의 큰 여관은 단순한 숙박업소가 아니었다. 거래의 장이자 공동체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안쪽은 상인들과 주민들로 북적였다.


직원을 따라간 끝에 로버트를 만날 수 있었다.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긴 로버트가 나를 반겼다.


“반갑습니다, 한스 씨.”


어째선지 로버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바로 어제 지었기에 제임스 외에는 아무도 모를 내 이름을.


‘이 새끼 봐라?’


속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능구렁이 같은 로버트와 악수했다.


“저는 로버트 씨와 초면인데, 로버트 씨는 저를 언제 본 적이 있나 봅니다.”

“하하, 제가 여기저기 아는 친구가 많아서요.”


뼈가 튀어나온 말에도 로버트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호쾌한 척, 유쾌한 척하는 무뢰배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얘는 뭐 하는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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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016. 감사해라 24.09.03 21 0 12쪽
15 015. 반가운 목소리 24.09.02 18 0 12쪽
14 014. 시간 끌기 24.09.01 20 0 12쪽
13 013. 루시아 코는 개코 24.08.31 24 0 12쪽
» 012. 방 빼 24.08.30 26 0 13쪽
11 011. 예의 없는 애들이 싫더라 24.08.29 19 0 12쪽
10 010. 원치 않는 제자 또는 종자 24.08.28 23 0 13쪽
9 009. 마법사님 맞죠 24.08.27 25 0 13쪽
8 008.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 24.08.26 27 0 15쪽
7 007. 붉은 염료 24.08.25 29 0 15쪽
6 006. 톰 아저씨는 수상해 24.08.24 31 0 14쪽
5 005. 최후의 수단이다 24.08.23 30 1 14쪽
4 004. 열려라 참깨 24.08.22 34 0 16쪽
3 003. 계약서 작성 24.08.21 42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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