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 (여자)악마와 동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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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암스테르담
작품등록일 :
2024.08.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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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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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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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개소리 그만하고

DUMMY

마차로 3일을 더 달려서야 로버트의 상단은 에뮐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에뮐렌입니다, 한스 씨!”


사흘 사이에 로버트는 침울함을 벗어던지고 싹싹하게 굴었다. 뜯기는 건 확정됐으니, 비위를 열심히 맞춰서 조금이라도 덜 뜯기자는 심보인 듯했다.


-굽신거려봤자 이 악.마.계.약.자님께는 소용없을 텐데.


루시아가 잔뜩 토라진 티를 내며 구시렁거렸다.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 계약 해지는 없다고 못 박아둔 이후로, 루시아는 틈만 나면 투덜댔다.


아무리 강력히 링크된 루시아일지라도 내가 알리길 원하지 않으면 듣지 못한다. 따라서 루시아는 나의 진짜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말해주지 않는 이상 지구로의 귀환이 목표인 줄 알 터.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는 끝까지 약점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 오해는 생각보다 오래 유지되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약점을 공유하면 어떤 창의적인 수법으로 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일이다.


다른 생각을 티 내지 않고 미소 지었다.


‘입술 그만 삐죽여.’

-아, 눼눼. 알겠눼요. 힘없고 약한 마족 따위는 입닥치고 있겠습뉘다.


약 올릴 때 몇 번 썼던 말투를 곧잘 이용해 먹는 루시아였다.


그러나 고작 얄미운 말투에 밀릴 내가 아니다.


‘좋아. 부당함에 유쾌하게 굴복하는 바로 그 태도. 아주 마음에 들어.’

-아악! 열받아!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는 저항하는 것보다, 받아들이는 게 한층 성숙한 대응이야. 계약상 넌 내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그렇다면 순순히 굴복하라고.’

-으으으아아악!


심상에서 발버둥 치는 루시아를 넘기고, 고개를 돌려 제임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쟤는 그날 밤 전투 다음부터 말이 없었다.


‘실어증 걸려서 벙어리 된 거 아니겠지? 기사로 각성시켜 주기로 해놓고 벙어리로 만들어버리면 곤란한데.’

-후우, 후으.


목청 좋게 소리 질러봤자 자기만 손해란 사실을 깨달은 루시아가 숨을 골랐다. 그녀도 제임스 상태가 평소 같지 않단 걸 인지하고 있었다.


‘목청 자랑 그만하고 네 의견을 얘기해 봐.’

-아, 몰라. 그냥 살인은 처음이라 충격받은 거 아니야?

‘참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그깟 살인이 뭐라고.’

-그, 네가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해봤니? 보통은 쟤가 정상 같은데.


그런가.


-네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충격이야.


아무튼 기사가 되겠다는 놈이 저 모양이니 갑갑했다. 코뿔소 같은 웰팅엄에 비하면 제임스는 햄스터에 가까웠다.


‘말랑말랑한 햄스터는 집에서 키워야지, 왜 바깥에 내보냈담.’


능구렁이가 기어다니고 사람 잡아 죽이는 데에 도가 튼 교회가 눈알을 희번뜩 뜨고 있는 세상에 햄스터 혼자 살아가기란 벅찼다.


이대로 돌려보내야 하나. 스스로 돌아가기로 선택했으면 노인도 뭐라 할 말이 없을 텐데.


제임스를 떠 보기로 결정하고 말을 걸었다.


“제임스.”

“예?”


어깨를 흠칫한 제임스가 대답했다.


“집에 가고 싶으면 보내줄게. 로버트 씨를 통해서 마을까지 가는 마차를 알아봐 줄 수 있어.”


제임스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저건 사연들이 스쳐 가는 눈빛이다.


누구나 사연이 있지. 하지만 세상은 그런 에피소드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독자에게 스토리를 전달해야 하는 작가가 없거든.


나도 제임스의 사연 같은 건 관심 없었다.


“기사가 되고 싶다 했지.”

“···그렇습니다.”

“네가 꿈꿨던 기사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다만, 계속해서 그 길을 걷겠다면 지금 네 상태로는 안 돼. 어림도 없어.”


제임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

“나야 너를 기사로 각성시켜 주기만 하면 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은 지키는 셈이니, 그 이후는 상관없지만 말이야. 곧 죽을 놈을 각성시켜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이 끝났으나, 제임스는 침묵했다.


할 말이 없을 수도 있고, 돌아갈지 말지 간을 재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할 말을 억지로 삼킬 수도 있는 일이고.


뭐가 됐든 제임스는 입을 열지 않았고, 나도 굳이 캐묻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정적 속에서 에뮐렌에 당도했다.




*




로버트는 우리에게 상태가 좋은 여관의 방 세 개를 내어줬다.


소녀는 루시아가 언제 써야 할지 몰라서 내 방으로 데려왔고 제임스에게는 옆방을 줬다. 남은 방 하나는 공실로 뒀다. 어차피 내 돈 아니니까.


알고 보니 이 여관은 에카르트 상회가 운영하는 에뮐렌 지점이었다. 에뮐렌에서 가장 큰 여관이기도 한 이곳에서 업무와 미팅, 거래와 정보 교환 등 모든 게 이뤄졌다.


현대로 치면 큼지막한 호텔에 다양한 부서들을 몰아놓고 업무를 처리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저녁, 나는 에뮐렌 지점장의 식사 초대를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녁 시간이 되니까 식사를 하는 사람들과 거래를 트는 상인들로 한껏 붐볐다. 이 넓은 공간이 꽉 차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파가 북적였다.


“이거, 지점장이 누군 줄 어떻게 알아?”


사람들 틈에 끼여 불평하고 있자니 옆을 지나가던 직원이 반응했다.


“혹시 지점장님을 찾으시나요?”

“식사를 초대받았는데 대체 어딘지를 모르겠네요.”

“아하, 한스 님이시군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모리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어느 방에 들어갔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스 님. 저는 에카르트 상회의 에밀렌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헨리 모리스입니다.”


직원이 방문을 채 닫기도 전에 후덕한 인상의 중년 남성, 헨리가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옆에는 로버트가 이미 와 있었다.


과하게 나를 반기는 헨리와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헨리 모리스 씨.”

“아이고,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상회의 동료를 구해주셨으니 제게도 은인이십니다.”


헨리는 그간 있었던 사건을 로버트에게 보고받은 듯했다. 그는 턱살을 출렁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귀공이 아니었다면 로버트는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어찌 그렇게 영웅적이고 대담한 결단으로 무시무시한 웰팅엄과 맞서 싸우셨는지. 비범한 용기와 용맹입니다. 로버트, 이 사람아! 생명의 은인께 보답은 했는가?”


로버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상행의 값나가는 물건들이 파손돼서 적자를 메꾸느라······.”

“예끼! 이런 몹쓸 친구를 봤나. 자네는 목숨을 빚진 게야. 웰팅엄한테 끌려갔으면 자네는 만신창이가 됐을 걸세.”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말투나 표정이 어색하지는 않으나 각본대로 대화를 주고받는 티가 많이 난다. 이미 오갔을 이야기를 가지고 밑밥을 까는 건, 뒤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뻔한 찬사를 늘어놓던 헨리가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그나저나 한스 씨가 보여줬다는 그 문서 말인데요.”

“샘의 추천서 말입니까?”

“예, 예.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시는지요? 혹여나 제가 볼 수 있을까 해서요.”


헨리에게 보여줘도 될까, 하는 의문이 튀어 올랐다.


그렇지만 답은 정해놓은 뒤였다.


“여기 있습니다.”


품속에서 문서를 꺼내 전달했다.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교회를 건드리지 않고서도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는 일. 일단 권력이든 재물이든 쌓아서 정보를 긁어모아야 한다.


내 유일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불법 마법사’로서 활동하며 방법을 찾아봐야지.


헨리는 문서를 다 읽고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역시, 로버트의 말대로 샘의 보증을 받으신 분이시군요. 좋습니다, 한스 씨. 저희와 함께 일해보시죠.”


빈 식탁 위에는 문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거기엔 분명히 ‘에드먼드’를 찾아가라고 쓰여 있다. 뭔가 맥락이 안 맞다.


“이 문서는 샘이 에드먼드 버크 이사에게 저를 추천한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에드먼드의 이야기가 나오자, 순간 헨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있다.


헨리는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


“맞습니다. 추천서는 버크 이사님께 전달되어야겠죠. 하지만 저도 조합의 엄연한 임원으로서 채용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은인께 보답도 할 겸, 버크 이사님이 제시할 조건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일을 같이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를 가로채겠다는 소리다.


웰팅엄이 그만큼 뛰어난 기사였나? 내 능력이 탐나서 상사를 제치고 스카웃 제안을 할 정도로.


아니면 에드먼드와 모종의 관계가 있어서 저러는 걸 수도 있고.


이건 시간을 가지고 더 알아봐야 할 부분이었다.


‘어떻게 할까.’

-인간들 일은 네가 더 잘 알잖아. 나는 이런 복잡한 건 잘 모르겠어.


왠지 조용하다 했다.


‘그러면 조건이라도 들어보자.’

-좋아.


루시아도 딱히 이견이 없어서 질문을 던졌다.


“더 좋은 조건이라 하면?”

“확실한 신변의 보장, 1년치 봉급 선지급, 1년 급여는 금화 20닢, 계약기간은 우선 7년으로 하시죠. 만료된 후에는 서로 조율을 통해 재계약하는 걸로. 어떠십니까? 불법 마법사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후한 조건입니다.”


-20닢? 금화 20닢이라고? 미쳤다. 이렇게 돈을 쉽게 벌어?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이긴 하다. 은화로 200닢, 동화로는 4800닢. 자그마치 일반병사의 13년 치 봉급이다.


-우와. 미쳤는데? 당장 하자!

‘진정해, 루시아.’


처음 들어본 금화 개수에 눈 돌아간 루시아를 진정시켰다.


대충 들으면 괜찮은 조건 같지만, 헨리는 교묘하게 중간에 어떤 걸 끼워 넣었다.


살면서 계약이란 걸 해볼 일이 거의 없는 이 시대 사람이라면 루시아처럼 금화에 눈이 멀어서 좋다고 덥썩 받아들였을 터.


하지만 계약이 희귀한 광경일 리가 없는 현대인에게는 헨리의 노림수가 너무 잘 보였다.


“7년 계약이요? 거절하겠습니다.”


바로 7년짜리 노예 계약이라는 사실을.


매몰찬 거절을 돌려받은 헨리가 당혹감을 드러냈다.


“기간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러면 10년으로······.”


저 인간이 미쳤나.


“아뇨, 모리스 씨. 계약기간이 너무 깁니다.”

“네?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계약기간 동안 우리 상회가 한스 씨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기간이 길수록 좋은 겁니다!”


이 아저씨가 누구한테 약을 팔아?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기울였다.


“아뇨. 불법 마법사는 교회법상 사형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마족처럼 집요한 추적을 받는 것까지는 아니잖습니까. 이건 모리스 씨도 아실 테고. 그래서 저를 고용하는 걸 망설이지 않으시는 거겠죠.”

“······.”

“모리스 씨의 태도를 보아하니 상회는 제법 많은 불법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군요.”

“허,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조합의 결속력이 단단해도 결국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아닙니까. 이렇게 선뜻 계약을 제안하기 위해선, 불법 마법사를 고용해도 별일 없다는 선례가 많이 쌓여있다는 뜻이겠죠.”


-오··· 예리해.


루시아가 감탄하고 헨리는 침묵했다.


헨리야, 같잖은 수작질은 통하지 않는단다. 날 잡고 싶다면 제대로 된 제안을 해봐.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솔직해집시다. 제 구미가 확 당길 수 있는 제안을 해보시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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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8. 개소리 그만하고 24.09.05 1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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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016. 감사해라 24.09.03 20 0 12쪽
15 015. 반가운 목소리 24.09.02 18 0 12쪽
14 014. 시간 끌기 24.09.01 20 0 12쪽
13 013. 루시아 코는 개코 24.08.31 23 0 12쪽
12 012. 방 빼 24.08.30 25 0 13쪽
11 011. 예의 없는 애들이 싫더라 24.08.29 19 0 12쪽
10 010. 원치 않는 제자 또는 종자 24.08.28 22 0 13쪽
9 009. 마법사님 맞죠 24.08.27 24 0 13쪽
8 008.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 24.08.26 26 0 15쪽
7 007. 붉은 염료 24.08.25 29 0 15쪽
6 006. 톰 아저씨는 수상해 24.08.24 30 0 14쪽
5 005. 최후의 수단이다 24.08.23 29 1 14쪽
4 004. 열려라 참깨 24.08.22 33 0 16쪽
3 003. 계약서 작성 24.08.21 41 0 13쪽
2 002. 엿 드세요 24.08.21 5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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