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22>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애틋한 마음도, 두 사람 앞에 놓여있는 보이지 않은 장벽을 허물지는 못하였다.
촉촉해진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을 때 그들은 서로 이렇게 느꼈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강이 흐르고 있음을...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주고자 죽립을 쳐들었던 위현룡은 힘없이 죽립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침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주점에서 절 알아보신 것입니까?"
그는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그녀를 꽉 끌어안고 울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원연홍은 꿈에나 그리던 정인(情人)의 음성이 들려오자 목이 다 메여왔다.
하지만 그녀 역시 무턱대고 가까이 할 수 없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본심(本心)을 억지로 자제시키고 있었다.
"난 위사제가 어떤 변장(變裝)과 역용(易容)을 해도 금방 알아 볼 수가 있어요...설사 전신(全身)을 검은 천으로 모두 가리고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위사제는 그렇지 않나요?"
그것은 위현룡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도 그녀의 걸음걸이는 물론이고, 하물며 숨소리까지 모두 알 수가 있었다.
위현룡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닫아둔 채 마치 생소한 만남인 척 가장(假裝)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결심하듯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정말 미안합니다...원사저께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죠? 뭐가요...?"
이렇게 묻고 있는 원연홍의 눈가엔 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꾹 인내하고 있던 슬픔과 원망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었다.
"그...그냥....다....미안합니다..."
위현룡도 가슴속에서 울분이 솟구쳐서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자책감이 또 다시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면서 조용히 서 있었다.
수목(樹木)을 뒤흔드는 밤바람 소리, 별은 반짝이고 바람은 쓸쓸하게 불었다.
그들 곁에 있던 홍후인은 착잡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깊은 한숨과 함께 그저 둥근 달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원연홍이 뺨까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면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는 그 말, 아직은 받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위현룡은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원연홍은 상감(傷感)한 표정과 함께 죄인처럼 서 있는 위현룡은 측은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단호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위사제...전 위사제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에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예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이 청천벽력이 되어 위현룡과 홍후인에게 떨어졌다.
[지금 내 귀가 잘 못 된 것이더냐?]
놀란 것은 비단 홍후인 뿐만이 아니었다. 위현룡도 자신을 옹호하는 그녀의 말에 크게 놀랄 지경이 되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처음에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어요. 어떻게 당신이 아버지를 해할 수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대사형을 비롯하여 목격자들이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않았기에 당신을 범인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더군다나 당신은 도주까지 한 상태였으니까..."
그때 원연홍이 그의 앞으로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위사제...잘 들으세요. 지금 청성파에 위사제의 결백을 염두에 두신 분이 계세요. 그리고 그 분 덕분에 전 어쩌면 위사제가 누명을 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음...청성파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원연홍이 그 분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니 분명 연배가 높은 사람일텐데....]
성격 급한 홍후인이 속으로 온갖 추측을 해대는 동안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분이 말씀하셨어요. 위사제를 범인으로 몰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다구요."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결백을 밝힐 수가 있을까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위현룡에게는 그야말로 빛과 소금 같은 말이었다.
"그럼 제 결백을 믿어 주시는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원연홍은 시원한 답변을 회피한 채 이렇게 돌려 말했다.
"현재 모든 사람이 위사제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어요. 아울러 명백한 증인도 있지요. 만약 이런 것들이 당신을 범인으로 단정짓게 하는 절반이라면, 지금까지 보고 겪었던 당신의 성품이라던가 인격 등은 제게 믿음을 주는 나머지 절반이 될 수가 있을 거예요."
비록 완전히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그녀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하지만 지금껏 위사제가 제게 거짓마음과 행동을 보인 것이라면 저는 절대로 위사제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단호한 음성이 끝나자 홍후인은 왠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현룡아! 이제 됐구나! 일단 원연홍의 마음 한쪽에 네 결백이 심어져있는 이상, 앞으로 염청석의 범행을 밝히기란 한결 수월해 질 것이다!]
이때 위현룡은 그녀에게 염청석이 범인이라고 말을 해주려다 얼른 목구멍으로 넘겼다.
청성파에서 안이하게 생활했던 위현룡이라면 모르되, 온갖 모략이 판치는 무림을 경험한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신중함이란 것을 갖추고 있었다.
만일 염청석을 입에 올린다면, 원연홍은 처음에는 믿지 않을 것이나 시일이 흐르면서 의심하는 언행(言行)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낌새를 챈 염청석이 입막음을 하기 위해 어떤 잔악 무도한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었다.
원기종 장문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인 마당에 원연홍을 제거하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녀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모르게 하는 편이 백 번, 천 번 나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네 결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좀 물어보거라.]
이 점을 아까부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홍후인이 재촉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질문을 그대로 전달한 위현룡의 물음에 원연홍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아직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위현룡과 홍후인은 그녀의 속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만약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면 원기종의 원흉은 반드시 그를 없애려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위현룡의 결백에 무게를 두는 것은 일종의 가설(假說)일 뿐, 만약 반대로 위현룡이 원흉임을 밝혀내게 된다면 위현룡이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앨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원연홍은 가급적 말을 아꼈지만, 이런 사실을 차마 위현룡에게 언급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난색을 표명하는 그녀 앞에서 위현룡은 더 이상 집요하게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색한 기운을 희석시키기 위해 다른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청성파에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입니까?"
"소림, 무당파, 아미파 등 큰 문파들만 택해 차례로 방문하고 있어요."
"청성파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혹시 속가제자들이..."
"청성파에 작은 분쟁이 일어나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 가는 중이에요. 그리고 청성파는 더 이상 속가제자들을 받지 않게 되었어요. 있던 속가제자들도 모두 돌려보냈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속가제자들을 돌려 보내다니요!!"
말이 돌려보낸다는 것이지, 위현룡은 청성파에서 속가제자들을 내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속가제자들이 자신을 도왔으므로 훗날 갖은 억압과 탄압이 예상되었었지만, 설마 모조리 내쫓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청성파를 바라보면서 함께 꿈을 키우던 사람들인데 자신 때문에 이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자 미안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원연홍은 그의 기분을 이해하여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으나, 속가제자들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은 자신에게도 있었으므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홍후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현룡아! 얼른 피해라! 염청석이다!]
움찔하여 얼른 고개를 돌리는데 어느새 염청석의 모습이 지척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때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녹무군이 모습을 들어내면서 위현룡의 앞을 보호하고 나섰다.
"누구신가 했더니...주점에서 만났던 그 약왕문의 대협이시로군요. 설마 같은 여각에 유숙(留宿)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만면(滿面)에 미소를 띄운 염청석은 위현룡과 녹무군을 번갈아 바라보며 친숙함을 드러냈다.
그때 갑자기 원연홍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염사형! 제가 오랜만에 달구경을 하러 나왔다가 이 분을 우연히 만났지 뭐예요. 그런데 약왕문은 참 재미있는 곳이더군요. 귀한 영약을 얻고자 무림인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니 말이에요."
원연홍을 은근슬쩍 살펴보던 염청석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혹시나 했던 의심이 크게 흔들렸다.
낮에 주점에서의 일이 마음에 걸려 야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원연홍의 내실을 찾았고, 그녀의 행적이 묘연하여 후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연정에 휘말려 치졸한 짓을 하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염청석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참 역시 약왕문은 참으로 신비하기 그지없는 문파입니다. 언젠가 꼭 한번 방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염청석의 눈동자에 심상치 않은 기색이 스며들었다.
"대협의 존함이 어찌 되시오...가능하다면 대협과 직접 대면(對面)하고 싶소만..."
이번에야말로 상대의 정체를 확실히 알아볼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녹무군이 다급한 음성을 내면서 방해를 놓고 있었다.
"주군!! 약왕문 문주께서 속히 돌아오시라는 전갈을 방금 받았습니다!"
녹무군은 청성파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허나 근처에서 본의 아니게 엿듣고 보니 대략적인 추론(推論)이 가능하였고, 주군인 위현룡이 이 상황에서 염청석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왕문 문주의 전갈을 거짓 운운하였고, 녹무군의 이런 기지는 위현룡을 난관에서 극적으로 구해냈다.
"어서 가보세요! 무슨 다급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원연홍이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위현룡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다.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으니...]
혹시나 청성파 제자들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홍후인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닦달을 하고 있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떠나야하겠군요. 그럼 훗날 다시 뵙기를 고대하면서 물러가겠소."
위현룡은 그럴듯하게 음성을 변조시키면서 포권을 하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자의 얼굴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던 염청석은 차마 원연홍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가 없어 억지로 포권지례(抱拳之禮)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
괜한 경거망동을 하다간 소인배(小人輩)라는 인식을 그녀에게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위현룡은 원연홍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여각을 나와야만 했다.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자신의 결백을 어느 정도 믿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알게 모르게 큰 힘이 나는 것만 같았다.
위현룡은 녹무군과 함께 마을 밖까지 완전히 벗어났다.
까마득하게 멀어져있는 마을을 미련과 함께 뒤돌아보게 된 위현룡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원사저가 믿어주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제는 적대협이 말한 대로 시간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때를 기다리겠다! 언젠가 반드시 원장문인의 죽음에 대한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몇 보(步)를 걷고 있던 위현룡은 갑자기 신형을 휘청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직한 고통의 신음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녹무군은 대경실색하여 얼른 부축을 시도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현룡아!!!]
홍후인과 녹무군이 외치는 소리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귓가로 스며들어 왔다.
머리가 터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을 치던 위현룡은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느낌과 함께 혼탁한 어둠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차가운 살기가 사방에서 뻗쳐 오는 가운데 뜨거운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떠보려 했으나 붉은 핏물이 자신의 몸뚱이에 뿌려지고 있다는 느낌만 겨우 인식할 수 있을 뿐이었다.
순간 피투성이가 된 낯익은 얼굴이 스치듯 재빨리 지나갔다.
매우 흐릿한 모습이었으나 위현룡은 그 모습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위현룡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소교주!"
분명 그 얼굴은 소교주 허혜린의 얼굴이었다.
적의 피인지 그녀의 피인지 모르겠으나 피범벅이 된 얼굴로 시퍼런 칼날아래 몸을 내 던지고 있었다.
완전히 자포자기한 모습이었고, 이승에서의 생(生)을 깨끗이 마감하기로 작정을 한 모습이었다.
정신을 놓을까 걱정이 되어 미친 듯이 위현룡을 흔들어대던 녹무군은 위현룡이 깨어나려 하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주군!! 정신 차리십시오!!"
[현룡아!!]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위현룡은 강시처럼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이 그의 전신을 축축하게 적시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 예지(豫知)가 일어난 것이더냐?]
예지가 분명했다. 허나 간혹 예지가 일어나긴 했어도 지금처럼 큰 고통을 수반한 적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위현룡은 이것이 사태의 심각성까지 미리 예견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소교주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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