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42>
무천동과 마교 고수들의 혼전을 면밀히 주시하던 홍후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체력적으로 한계점에 이른데다가, 무천동이 담벼락을 등진 이상 아무리 많은 공격을 퍼부어도 결국 단 세 명에게 협공 당하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저 놈의 무기는 공격뿐 아니라 방어에도 굉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 않느냐.]
어쩌면 도끼야말로 막강한 공격과 방어를 위해 최상의 무기일지도 몰랐다.
허나 보통사람이 이토록 무거운 무기를 두개씩이나 휘두르며 과연 몇 초식이나 싸울 수 있겠는가.
또한 검(劒)과 도(刀)가 아닌, 소외된 무기이기 때문에 무학에 있어서 많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국 힘만 앞세우다가 백전백패(百戰百敗)할 공산이 다분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쌍도끼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닌 고수 무천동에게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무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현룡아! 이렇게 되면 무조건 저 녀석을 아군이 몰려있는 한가운데로 끌어내야만 한다. 그래야 더욱 강력한 협공을 가할 수가 있게 된다.]
위현룡은 불안한 눈초리로 미친듯이 기름을 퍼부으며 탁자와 의자를 불길 속으로 집어던지고 있는 약왕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반대편에서 적들이 강력하게 소화를 하고 있기에 어차피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큰일이다...)
그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그의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위현룡의 눈동자가 커졌다.
"선배님 좋은 방도가 생각났습니다!"
[오! 무슨 방도가 있는 것이더냐!!]
위현룡은 마교 무사들에게 기름을 묻힌 탁자와 의자에 불을 붙여 따로 준비하라 명했다.
그리고는 무천동이 있는 담벼락으로 일제히 던지게 하였다.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목재들이 유성처럼 공중을 가로질렀다.
"이런!"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무천동은 머리 위로 불길이 날아들자 무의식적으로 벽에서 다섯 장(대략 15m)이상 떨어졌다.
그러자 그 순간 그의 배후를 사검귀천과 허혜린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얼떨결에 몸을 움직였던 무천동은 그때서야 자신이 더 많은 수의 마교 수장들에게 공격로를 허용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건 곤란하게 되어버렸군...)
그런데 그 뿐이 아니었다.
위현룡은 마교 무사들을 무천동의 주위로 두 겹 포진시킴으로써 그의 행동반경을 좁혀놓는 동시에 심리적 압박까지 가했다.
[좋구나! 이렇게 되면 좀 더 효과적인 협공을 가할 수가 있지!]
위현룡은 모든 준비가 마쳐지자 무천동을 향해 단숨에 들이칠 수 있는 방위를 선점한 채 검을 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자 무천동은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교 수장들의 협공이 더욱 광범위해진데다가 사정거리 안에서 버티고 있는 위현룡의 존재 때문에 싸움에 집중조차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자신을 공격한 위현룡의 괴이하고도 막강한 귀혼검공의 환영을 말이다.
이렇게 신경이 분산되어 있는 상태에서 받는 귀혼검공의 압습은 위험천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천동의 판단이었다.
"높은 담을 뛰어넘느라 무거운 철갑옷을 벗어놓은 게 아쉽군."
패색이 짙어진 무천동의 입가에서 변명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천동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둔해지자 주유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녹대협! 들어갈 테니 방어를 부탁하겠소!"
상대의 허점을 파악한 주유천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검을 회오리바람처럼 휘두르면서 무천동의 삼대요혈을 한꺼번에 노리며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 무천동은 백운과 사검귀천의 협공 때문에 잠시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날아 들어오는 주유천의 공격에 그만 다급해져버렸다.
무천동은 한쪽 도끼를 한번 넓게 휘두르는 것으로 백운과 사검귀천의 공격을 일거에 무력화시키면서 오른손에 쥔 도끼를 뻗어 주유천의 공격을 쳐낼 시도를 하였다.
순간, 위현룡이 갑작스럽게 신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는군!)
싸우는 내내 위현룡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무천동이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주유천의 검을 도끼로 쳐내더니 몸을 돌려 곧장 위현룡의 검공에 대항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처럼 위현룡의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상 내력이 거의 고갈되어 귀혼검공을 함부로 내지르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위현룡은 왜 무천동에게 움직였단 말인가?
무천동은 어떤 의아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리에서 번지는 뜨거운 통증을 맛보게 되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허벅지가 검날에 의해 길게 찢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가운데 점점 큰 고통을 느낀 무천동은 절뚝대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위현룡의 간계에 넘어가 주유천의 후속공격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무천동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네 놈 목숨은 내가 거두마!"
주유천은 그에게 큰 부상을 입히자마자 마지막 일격을 위해 검을 앞으로 찔렀다.
순간 위급을 뼈저리게 깨달은 무천동이 갑자기 들고 있던 도끼를 암기처럼 내던졌다.
묵직한 두자루의 도끼가 표창처럼 주유천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설마 무기를 던져 공격할 줄 예상 못했던 주유천은 다급히 공격을 위한 검을 거두며 연달아 날아오는 두 자루의 도끼를 힘겹게 쳐냈다.
이때 마교수장들은 무천동이 근처에 있던 마교 무사의 어깨를 힘껏 밟는 동시에 곧바로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곰처럼 우람한 덩치를 가진 자가 깃털처럼 가볍게 공중 도약하는 모습을 본 그들은 방금 전 싸움을 벌이던 것도 잊고, 그저 무천동의 놀라운 경신술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며 같은 무인으로서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도망쳐 버렸습니다..."
무천동이 가까스로 담을 넘어 사라지자 마교 수장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격렬한 싸움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맙소사! 간신히 무천동을 물리쳤구나! 하지만 서둘러야한다.]
홍후인은 무천동이 물러간 후에도 계속해서 적들이 불을 끄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재전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모두 움직일 수 있으시겠습니까?"
위현룡이 급한 음성을 내자 마교 수장들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는 별 문제 없소."
주유천이 가장 먼저 일어나면서 무미건조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어서 여기를 벗어납시다. 안 그러면 무천동이 다시 싸움을 걸어 올 것이오!"
백운의 외침이 이어지자 마교인들은 애써 고갈된 체력을 끌어올리며 병장기를 챙겼다.
"녹대협! 앞장서십시오! 어서 여기를 떠나야겠습니다!"
녹무군을 필두로 마교무사들과 약왕문 사람들은 상경각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다음 대문을 관통할 즈음, 군중들은 주위에 가득 쌓아놓은 목재가구들과 그 곁에 두 명의 약왕문 사람이 횃불과 기름통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군중들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즉각 알아차렸다.
무천동이 불을 끄고 추격해오더라도 이 곳의 불길을 잡기 위해 또 한번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할게 불문가지(不問可知)였던 것이다.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로다. 만일을 위해 다음 문에도 이런 조치를 미리 취해놓다니...]
홍후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는 동안, 위현룡은 달리는 와중에 슬쩍 허혜린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는 살포시 웃음을 지어주었다.
** **
그 시각, 상경각 근처에서 적무평과 제갈무, 그리고 손일극은 그야말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빌어먹을...약왕문 내에 대막천궁 수장들과 무사들을 부르러 보냈던 이들은 왜 이리 함흥차사란 말인가...이러다 적무평에게 죽고 말겠다!)
제갈무와 함께 적무평을 협공하던 손일극은 내심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던 대막천궁 무사들은 현재 마교 무사들과 엇비슷한 상황까지 몰려 있었다.
이는 유원학과 마교무사들이 적무평 때문에 사기충천한 이유도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적무평이 이끌고 온 십인(十人)에게서 받은 타격이 주된 이유였다.
"으합!"
주춤거리던 제갈무가 우렁찬 기합과 함께 적무평의 측면으로 무영보법을 밟았다.
두 줄기 짧게 끊어 친 권풍이 적무평의 안면과 어깻죽지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적무평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검으로 막아내면서 오히려 접근전으로 역공을 취해 제갈무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젠장....괜히 건드려놓았나...)
지하밀성 무공만 믿고 하룻강아지처럼 행동했던 제갈무에게 이런 후회가 소록소록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연성한 무영권풍(無影拳風)의 특징은 독(毒)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과 권(拳)에서 기(氣)가 발출되어 상대를 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헌데 독은 이미 모두 소모되어 바닥 나 있었고, 권풍이라고 해봐야 이미 눈에 익을 때로 익은 적무평에게는 더 이상 신기한 묘수도 아니었다.
그나마 무영보(無影步)가 아니었다면 사실 제갈무도 벌써 적무평의 검에 맞아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손대협은 뭐하고 자빠져 있는 건가!!)
적무평의 광폭한 검세 속에서 쩔쩔매던 제갈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일극에게 분노를 표출해냈다.
그가 적무평을 공격하다가 뒤로 밀리면 곧바로 손일극이 뒤에서 받쳐주기로 했던 것인데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일극은 손일극대로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싸움판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적무평의 수하들의 활약을 더는 좌시(坐視)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적무평을 상대하는 동안 수많은 대막천궁 무사들이 그들에 의해 황천길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갈무와 같이 힘을 다한다면 구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어떻게든 백중지세로 이끌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만일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군이 모두 제압되고 마교 무사들에게 협공을 받게 된다면, 적무평은 힘 하나 안 들이고 수월하게 자신들을 죽일 게 뻔했다.
손일극은 이 순간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무평과 홀로 싸우고 있는 제갈무가 큰 부상을 입거나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대막천궁 무사들의 수만 보존만 시킨다면 그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몸 하나 빼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머리를 굴렸다.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번 싸움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음을 말이다.
(어떻게든 대막천궁 무사들의 수적우세를 유지시켜놓아야만 한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한 그는 적무평에게 밀리고 있는 제갈무를 흘깃 곁눈질하였다.
(그의 무학이 뛰어나니 최소한 오십여 초식은 너끈히 버틸 수가 있겠지...단 오십여 초식이다! 그 안에 최대한 적무평의 수하들을 죽여 없앤다!)
손일극은 제갈무를 방치한 채 적무평의 수하들부터 찾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으악!"
그가 움직인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적무평의 수하 하나가 장력에 맞아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 십인(十人)은 적무평이 협철곡에서 수하로 거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본바탕이 일개 무사에 불과했던 자들이라서 그리 출중한 무학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협철곡에서 약왕문에 이르는 동안 적무평이 필요한 무학의 깨달음을 주입시키고, 급한 대로 무공을 가르쳐 일개 부장정도는 되는 실력으로 격상시켜 놓은 것에 불과했다.
반면 손일극은 대막천궁 내에서도 이름난 고수인 바, 어찌 적무평의 수하들이 그를 상대할 수가 있겠는가.
손일극은 한 녀석을 저승길로 보내자마자 신이 나서 다른 놈에게 달려들었다.
대막천궁 무사들과 접전을 벌이던 적무평의 수하 한 명은 가까이 있는 동료가 손일극에게 죽음을 당하고, 연이어 그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오자 낯빛이 변하였다.
"건방진 애송이놈! 죽어버려라!"
손일극의 막강한 장공이 얼어붙어 있는 적무평의 수하에게 사납게 뻗어나갔다.
-펑.
미처 피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던 적무평의 수하는 둔탁한 폭발음이 들리고, 연이어 적무평의 호통소리가 들리자 두려웠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어느 새 적무평의 검이 손일극의 장력을 쳐내면서 자신을 구해냈던 것이었다.
"가급적 내 주위에서 멀리 벗어나서 싸우거라!"
적무평의 수하들은 그의 음성을 듣자마자 얼른 손일극과 제갈무의 주위에서 떨어져나갔다.
"손일극! 이게 무슨 치졸한 짓인가!"
적무평이 엄중한 음성을 내자 손일극은 얼굴에 비웃음을 내비쳤다.
"적대협! 지금은 혼전 중이 아니오? 난 단지 적들의 예봉을 꺾으려 했을 뿐인데 난데없이 무슨 도의라도 운운하시려는 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손일극은 지금 적무평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오래 전부터 그는 굉장히 냉혹한 성품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만일 자신이 그의 수하를 죽이는 시기를 기회 삼아 제갈무에게 모든 힘을 집중했다면 최소한 제갈무에게 작은 부상이라도 입힐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뜬금없이 수하들의 목숨을 살리겠다고 제갈무에게 향한 공격을 돌려서 오다니...
"이보시오! 손대협!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던 제갈무가 따라오면서 손일극에게 잔뜩 쓴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난 적무평의 수하들을 처리할 터이니 제갈대협께서는 적무평을 좀 붙잡고 있어주시구료."
"뭐...뭐라고?"
가뜩이나 힘이 부쳐죽겠는데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제갈무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저런 얍삽한 놈! 지는 뒤로 빠져 있다가 여차하면 몸을 빼내겠다는 심산인 줄 누가 모를 줄 아는가!!)
허나 손일극은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 제갈대협! 적무평의 수하들을 처리하는 동안 잘 좀 부탁하겠소이다!"
제갈무가 당황해하는 사이 손일극은 재빨리 적무평의 수하들을 쫓아갔다.
"소...손대협!!"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제갈무는 필시 적무평이 자신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하여 공격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차였는데, 희한하게도 적무평은 손일극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손일극이 죽이려는 그의 수하들을 위급함에서 구해주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잠시 멍하게 있던 제갈무는 교활한 눈을 꿈뻑거렸다.
보고 있자니 손일극이 뭔가 적무평의 약점을 잡은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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