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화룡점정(畵龍點睛) <08>
[근데 말이다...]
하후산이 알려준 방향으로 경공을 펼치는 와중에 문득 홍후인이 입을 뗐다.
[네가 그 하후산인가 하는 놈과 대적할 때 말이다. 그때 네 공격력이 엄청나게 상승했음을 알고 있었느냐? 네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을 때 말이다.]
위현룡은 언뜻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하여 오히려 반문을 하였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평소처럼 검법을 시전했을 뿐입니다. 근데 제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단 말씀이십니까?"
[아니...약간 그랬는데....아무튼....거참...그렇군...]
위현룡이 조금이라도 자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았다고 하자 홍후인은 내심 아쉬웠다.
자신이 펼치는 무공에 대해서 자각을 한다는 것은 무공에 있어서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서는 조짐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그것은 뜬구름 같은 공허함을 무작정 쫓는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어째서 제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습니까? 그리고 위력이 증가했다니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위현룡이 재차 묻자 홍후인은 간략하게 정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복잡한 표정이 일어나자 괜히 마음을 어지럽게 하면 역효과가 일어날 것 같아 '크게 신경쓸 것 없다.' 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무학을 깨우치는 데 있어서 필요이상의 번민(煩悶)은 독(毒)이 될 수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략 2시진정도 헤맨 것 같았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그들은 하후산이 알려준 길목을 찾아냈다.
한동안 하후산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의심을 하던 홍후인은 자못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정말로 길이 있긴 있군. 허나...과연 협철곡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선배님께서는 사람의 진심을 너무 곡해(曲解)하시는 경향이 있으십니다."
듣고 있던 위현룡이 안타까운 듯 한마디하자 홍후인이 발끈했다.
[뭐! 곡해라니! 이놈아! 무림인이라면 응당 이래야 하는 것이다. 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주위의 동정을 살피고,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왜 이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는지 끊임없는 추론과 의심을 해대야 수명이 연장된단 말이다.]
갑자기 그의 언성이 높아지자 죄송한 마음이 앞선 위현룡은 얼른 용서를 구했다.
"네. 선배님의 말씀을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강호초출이라서 그런 것이니 선배님께서는 화를 푸시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단번에 잘못을 뉘우치는 위현룡 앞에서 홍후인은 선배로써의 체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꼭 그렇게 용서를 구한다면야...]
말끝이 점점 엷어지는 그의 어조는 이미 위현룡을 용서하고 있는 듯 했다.
[자! 그럼 어서 협철곡을 벗어나자. 그 마교놈들이야 빠져나가던 말던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고...이젠 너도 살길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도 단대인께서 소교주를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야 합니다."
잘 나가는 듯하더니 끝에 가서 옹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하여간 네 놈은 말마다 단중, 단중...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내가 무림을 활보할 시절 내 명성은 단중보다 드높았다. 단중을 모르는 사람은 부지기수(不知其數)였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홍후인이 장담하는 것처럼, 무림인들 중에 홍후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어떤 고매한 인품이나 명망(名望)때문이 아니라 무림공적으로 특히 악명이 자자했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위현룡은 속으로 슬쩍 웃기만 할뿐 홍후인의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동고동락해오는 동안 서로의 성격에 대해서 파악할 만큼 다 파악하지 않았겠는가.
간혹 홍후인의 언변에 다소 과장이 섞인다는 것을 위현룡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약간 변해있자 눈치 챈 홍후인이 다시 목청을 돋구었다.
[내 말을 못 믿겠다 이거냐? 정말이다! 단중보다는 내가....]
그때 갑자기 달리던 위현룡의 신형이 급히 멈춰졌다.
깜짝 놀란 홍후인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매복이냐?]
위현룡의 두 눈이 저 멀리 보이는 가파른 계곡에 머무르고 있었다.
불안해진 홍후인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혹시나 모를 암습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잠시 사방을 둘러보고 방향을 재면서 혼자 뭐라 중얼거리던 위현룡은 홍후인에게 말했다.
"선배님. 저 계곡을 타고 내려가면 소교주 일행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간 홍후인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서...설마....그 빌어먹을 마교놈들을 따라 가겠다는 것이냐?]
웬놈의 오지랖이 이렇게 넓은지...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홍후인이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위현룡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저 계곡은 소교주 일행뿐 아니라 대천마교 매복군에게까지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들을 급습하여 혼란을 야기 시킨다면 소교주가 협철곡을 빠져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허....이 놈아! 또 위험한 짓거리를 벌이겠다는 것이냐? 그리고 저 계곡을 따라간들 대천마교 매복군이 있을 거라고 어찌 장담한단 말이냐?]
홍후인의 반론에 위현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세(地勢)를 손가락질하며 설명하였다.
"저 계곡은 소교주 일행이 움직이는 방향과 일치하면서도 평행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매우 험난하여 수백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란 어렵지요. 그렇다면 대천마교는 계곡의 험난함을 믿고 등을 진 채 주둔해 있을 것이며, 적의 기습 가능성을 낮게 점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살길을 버리고 사지(死地)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냐?]
"사지(死地)라고 해도 반드시 가야만 합니다."
홍후인은 답답한 심정에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쳐댔다.
[도대체 마교가 너에게 뭘 그리 대단한 일을 해주었다고 그러는 게냐? 단중을 구하러 가기 위해 무사를 내어달라고 해도 너를 무시했던 놈들이다. 네가 이렇게 힘써준다고 한들 그 놈들이 네 공을 조금이라도 치하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둔한 위현룡의 두뇌를 깨우쳐 줄 생각으로 한 말이었으나 홍후인은 자신이 틀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위현룡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전 마교의 일원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전 어디까지나 청성파 제자이고 청성파를 위해서 헌신할 것입니다. 허나 소교주를 돕는 일은 교주님과 단대인께 입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렇기에 사심 없이 소교주를 돕고 나면 저는 곧장 마교를 떠날 것입니다."
순간 홍후인의 귀가 번쩍 뜨였다.
위현룡이 이미 패망한 마교에 들어가 갖은 질시와 무시를 받아가면서 생활하는 것을 내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그였다.
위현룡이야 워낙 고집이 세고 외골수 기질을 가진 인물인지라 - 자신이 아무리 반대를 한다 하더라도- 한번 행할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의외로 마교에 뜻이 없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차라리 액땜한다 치고 이번만 마교를 도와 아예 연을 깨끗이 끊어버리게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마교를 떠나야한다!]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돕도록 하여라.]
홍후인은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면서 기어코 위현룡에게 마지막 다짐을 받아냈다.
그의 허락이 떨어졌으므로 위현룡은 한적한 곳으로 이동해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조만간 땅거미가 질 것입니다. 어둠이 오면 이 험한 협철곡에서 마교나 대천마교나 모두 움직이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측 모두 암습을 우려하여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 동안 저는 내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대략 축시(새벽 1시-3시)까지면 귀혼내력을 모두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새벽 어둠을 틈타서 이동하겠습니다. 그편이 아무래도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할 테니까요."
[그래...그렇게 하거라. 그나저나 하후산의 부하들에게 입었던 검상이 모두 아물어가고 있구나. 참으로 대단하다. 네가 회복력이 기이하게 빠른 덕분도 있지만 귀혼심법으로 인한 외공이 타격을 많이 완화시켜 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위현룡은 그의 말을 듣고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역시 근골이 단단해졌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습니다. 추후에 귀혼심법과 외공에 대해 선배님께서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오냐. 그러마. 자 그럼 어서 축기(畜氣)를 시작하거라.]
** **
한편 이하민은 척후무사들에게 마교의 움직임을 시시때때로 보고 받으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지도에 놓여있는 작은 깃발들은 초반에 넓게 퍼져있던 형국과는 달리 한 부분에 세밀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른바 몰이를 끝내고 마지막 사냥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하후산이 조용히 들어왔다.
"이보시오! 하후대협! 어떻게 되었소?"
잠시 얼굴이 굳어진 하후산은 차분한 음성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단대인이 이끄는 무사대는 모두 괴멸되었습니다. 그리고...단대인께서는...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하후산의 음성이 떨리는 것을 간파한 이하민은 모른 척 한마디하였다.
"유감스러운 일이오. 단대인의 인품은 익히 알려진 바이나 대천마교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아니겠소? 그런데 시신은 수습하였소?"
"제가 거두었습니다. 허석문교주 옆에 나란히 매장할 생각입니다."
"음...좋도록 하시오. 그리고 현재 마교잔당들은 한 무리가 되어 이 부근 어딘가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오. 가까이 접근하여 살피지 못한 덕분에 확실한 곳은 모르나 아마도 이 지점이 아닌가 생각되는군. 이미 여러 차례 계략으로 그들의 전력을 약화시켜놓았으니 큰 희생 없이 뜻한 바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이오. 동이 트자마자 곧장 총공격을 시작할 예정이니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것이오."
하후산은 허리를 굽혀 탁자 위에 펼쳐있는 지도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깃발들이 몇 차례 움직이는 와중에 이하민이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재차 끄덕이던 하후산은 자신의 의견도 적절히 피력하면서 완성된 세밀한 지시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갈무리하였다.
"그럼 준비하도록 모두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런데..."
"말해보시오."
"들어오면서 제 수하에게 보고를 받았습니다만...막대협이 협철곡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후산의 보고에 이하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대협? 교주의 심복인 막청봉 대협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막대협이 뜬금없이 무슨 일로 협철곡에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막청봉이라면 단중이 소유한 지하밀성 비급을 강탈하기 위해 조양천 교주의 명을 받아 은밀하게 협철곡으로 잠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 소문없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하후산이 펼쳐놓은 정보망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아마 교주의 특별 지시를 받고 왔을 것이오. 아니면 우리들의 일처리를 감시하러 왔거나...아무튼 어차피 그가 있던 없던 우리는 할 일만 하면 그뿐이오. 상관하지 마십시다."
협철곡 전투로 인해 가뜩이나 골치 아팠던 이하민은 막청봉에게까지 신경 쓰고 싶지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잠깐 기다려보시오."
하후산이 막 몸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이하민이 불러 세웠다.
"아까 궁벽대협에게서 연락이 왔었소만...그 개방에서 흑사린과 싸우다 부상당했던 자(者) 말이오. 장로라고 했던가? 그 자가 청성파 출신이라고 하더군."
하후산은 위현룡을 생각하고는 의아해하면서 물어보았다.
"개방출신이 아니고 청성파 출신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소. 뭔가 이상하지 않소? 청성파는 아직 대천마교와 마교의 일을 모를텐데 어찌해서 갑작스럽게 청성파 제자가 관여한단 말이오. 청성파 원기종장문이 알면 필시 마교를 도우려 할 것이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일단 내가 보기엔 우연하게 청성파 제자가 끼여든 것 같은데...그 자가 청성파에 알리기 전에 무조건 죽여 입을 봉해야 하오. 청성파는 둘째치고 거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전 무림에 소문이 나면 곤란하니 말이오. 그러니 각 수장들에게 소교주 뿐 아니라 그 자도 반드시 죽여 없애라 전달하시오."
"알겠습니다."
이하민의 막사에서 물러 나온 하후산은 고개를 들어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도 다 사라진 어둠의 흑막(黑幕). 또 한차례 비를 뿌릴 기세에 임박해 있었다.
그 아래서 몇 발자국 걷던 하후산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청성파 제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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