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34>
사검귀천은 대막천궁의 서열 따위는 알지 못하였지만 장손무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장손무는 과거 북마교 출신이었다가 마교가 남마교를 중심으로 통합되자 미련없이 적월교로 발길을 돌린 사람이었다.
그의 절기는 쌍조도법(雙爪刀法)이라 불리는 도법이었는데, 애병(愛兵)인 쌍조도(雙爪刀)는 도(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한 끝은 길고 한 끝은 보다 짧고 넓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반적인 도법과는 달라 쌍조도의 특징을 이용한 다양하고 괴이한 초식들을 발전시켜놓고 있어서 멋모르고 상대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사검귀천은 내심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체적인 전력도 약세인데다가 적의 수장이 그라면 싸워보나마나 승산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마교에서 명성이 쟁쟁한 사검귀천 여러분들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오! 헌데 사검귀천 중 백인검 대협은 협철곡에서 고득련 대협에게 죽음을 당했다지요? 이거 마교의 내분에 휩쓸려 애꿎은 백대협만 죽었구료."
장손무가 많이 안타깝다는 얼굴을 과장되게 꾸미고 있었다.
이에 사검귀천은 이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무슨 저의(底意)로 저러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적월교와 대막천궁은 평소 사검귀천 대협들과 같은 인재들을 흠모해오고 있었소이다. 그러니 서로 안면이 있는 처지에 괜한 분란을 만들지 말고 손을 맞잡고 한번 잘 해보십시다."
유화책(柔化策)이었다.
사검귀천은 주위에 빽빽이 들어선 대막천궁 무사들을 흘깃 살폈다.
어림잡아 사백여 명은 족히 되는 수로 아군의 네 배를 상회(上廻)하고 있었다.
장손무는 사검귀천이 다소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주시하면서 은근한 어조를 보냈다.
"어차피 싸우나마나한 싸움 아니오? 이 사람은 사검귀천 대협들을 헛되이 저승으로 보내고 싶지 않소이다."
비록 돌려 말하긴 했지만 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사검귀천중 한 명이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하였다.
"마교를 위해서 죽는 것이 헛되이 죽는 것이겠소?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한번 붙어봅시다."
장손무의 입꼬리가 쭈뼛거리며 올라갔다.
생각보다 투항을 종용(慫慂)하기 쉽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다가 허혜린을 발견하고는 얼른 반색을 하였다.
"거기 있는 낭자는 혹시 허석문 교주의 여식이 아니오?"
허혜린은 굳은 얼굴로 장손무의 느글느글한 눈길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오! 이 사람이 어릴 적에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듯 장성해서 마교를 이끌고 있다니 과연 허석문 교주의 여식답구료."
"..."
"허나...마교는 허석문 교주가 있을 때가 황금기였지...지금은 이미 폐문(閉門)한 문파나 다를 바 없소. 아무리 소교주가 노력을 해도 한번 기운 세력은 다시 올려놓기 불가능한 법, 여인의 몸으로 거친 세상풍파를 견디려하지 말고 적월교로 들어와 일신을 편히 지내시오. 그것이 내가 소교주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가 될 것이오."
이에 허혜린은 조금도 상량하지 않고 즉각 대답을 해주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장손무는 많은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사검귀천도 모자라 한낱 계집에게까지 무안을 당하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하지만 무림에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당황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다.
"허허허, 소교주가 얼떨결에 마교를 떠맡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 현명한 판단을 할 줄 모르는구료...그럼 사검귀천 대협들은 어떻소? 정말 끝까지 항전해 볼 참이오?"
사검귀천은 들은 척도 안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행동이었다.
이렇듯 사검귀천이 노골적으로 도발을 해오자 장손무는 더 이상 온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검귀천!! 정녕 개죽음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가?"
장손무의 언사가 갑자기 돌변하면서 거칠어졌다.
"설마 장손무 따위에게 죽기야 하겠소?"
"뭐라!! 네 놈들이 얄팍한 명성만 믿고 날뛰는구나! 잘 들어라! 과거 마교가 북마교와 남마교로 나뉘어 내분을 겪고 있을 때 너희들 사검귀천은 겨우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사검귀천이라는 별호로 명성을 얻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마교가 승리하여 얻은 소득에 불과할 뿐! 당시 북마교에는 그대들보다 높은 무학과 명성을 지닌 고수들이 즐비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자 한번 코웃음을 친 사검귀천이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 쳤다.
"맞는 말이오. 북마교 뿐 아니라 남마교에도 당신보다 높은 무학과 명성을 지닌 고수들이 즐비했었지. 척 보니 장손대협께서 대막천궁에서 꽤나 높은 서열을 꿰차고 있으신 모양인데...솔직히 마교에서 그런 서열은 엄두도 못 낼 터이니 장손대협으로서는 그나마 대막천궁이라도 찾아가서 한자리 구걸해야만 했을 것이오? 안 그렇소?"
사검귀천의 이 말은 꾹 참고 있던 장손무의 살심(殺心)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주었다.
기실 그는 남마교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서 굳이 이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단지 대막천궁 궁주가 가급적 많은 마교인사들을 끌어안으라는 명을 해놓았기 때문에 억지로 권유해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권유를 해 볼만큼 해보았으니 이제는 끝이었다.
장손무는 살기 어린 안광을 번뜩이면서 애병인 쌍조도를 뽑아 들었다.
"오늘 이후로 그대들은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소교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오명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뒤에 있던 허혜린이 검을 뽑아들면서 차갑게 대꾸하였다.
"마교인들은 북마교 출신이든 남마교 출신이든 영원히 마교인으로 남아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요. 이는 북마교가 남마교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마교 고수들이 고스란히 남마교에 투신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허나 장손대협만큼은 마교와 척을 지고 있던 적월교로 들어갔으니, 장손대협의 그 얄팍한 지조(志操)야말로 훗날 무림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허헛!"
자신보다 한참 어린 계집에게 조롱을 듣게 된 장손무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어린년이 꽤나 방자하구나. 어차피 네 년이 허교주의 딸이 아니었다면 기껏해야 내 애첩정도나 될 팔자가 아니었겠느냐?"
그의 불손한 말에 사검귀천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손무는 말조심하라!!"
그러자 듣고있던 허혜린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장손무에게 이렇게 응수하였다.
"신분을 보더라도 소녀가 장손대협의 애첩이 되어준다면 장손대협의 가문에는 무한한 영광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교무사들이 조롱하듯 일제히 크게 웃어댔다.
장손무는 두 눈을 무섭게 치켜 뜨면서 허혜린을 노려보았다.
"이런 건방진 계집 같으니라고!!! 오냐 네 년이 언제까지 그 입을 놀리나 보자!! 여봐라!! 이 놈들을 모두 죽여버려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가 공격 명을 내리자마자 대막천궁 무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공격하라!!"
마교 측에서도 지지않고 즉각 대응을 하였다.
허나 마교 무사들의 수는 기껏해야 백 여명에 불과했다.
때문에 수적으로 열세에 봉착하는 동시에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검귀천을 공격하라!!"
대막천궁 무사들이 사검귀천을 노리고 개미떼처럼 몰려 붙었다.
그 사이 장손무는 음흉한 눈웃음을 지으며 허혜린에게 접근하였다.
"네 년은 내가 직접 버릇을 고쳐줘야겠구나!!"
그의 쌍조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허혜린에게 휘둘러졌다.
허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그의 선공을 막아내면서 빠른 역습을 선보였다.
의외로 그녀의 무학이 정순하자 장손무는 의외라는 반응을 내비쳤다.
"제법 무학을 깊이 쌓았구나! 허나 내 상대로는 아직 멀었다!"
그가 숨을 한번 들이키면서 본격적인 공격을 가해오자 허혜린은 금세 위급함에 빠져버렸다.
"하하하! 이래도 덤벼보겠느냐!!"
장손무는 현묘한 도법을 앞세워 그녀가 반격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허혜린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빠졌음을 느끼면서 생각하였다.
(이렇게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혼전(混戰)을 통해서 기습을 노려보는 것이 낫겠다.)
그녀는 그의 공격을 피해내면서 격렬히 싸우고 있는 무사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디를 가는 것이냐!!!"
장손무가 서둘러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허혜린은 싸우다가 움직이고 싸우다가 움직이고를 반복하면서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장손무의 무공이 워낙 월등한 탓에 그저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것일 뿐 어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손무는 허혜린을 여유있게 쫓아다니면서 틈틈이 마교 무사들을 척살하였다.
이 때문에 마교 무사들은 더욱 수적열세를 맛보아야만 했다.
허혜린은 장손무의 손아래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만일 장손무가 그녀를 사로잡아 자신의 애첩으로 만들 흑심을 품지 않았다면 그녀는 벌써 그의 쌍조도에 맞아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지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쉬지도 않고 공격당하는 통에 심신(心身)에 극심한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제 슬슬 항복하지 그러냐...흐흐흐."
한편 사검귀천은 협공에 몰려 위급한 지경에 이르면서도 허혜린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특히 그녀가 장손무의 공격에 위험천만한 일을 당할 뻔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까지 했다.
"소교주!! 저희들은 상관말로 어떻게든 몸을 피하십시오!!"
밀려오는 적들에게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면서 사검귀천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장손무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마교 소교주인데 수하들을 저버리고 혼자만 살아나가라 하는 것이냐? 마교의 위신도 생각은 해야지."
그런데 허혜린이 사검귀천의 외침을 듣자마자 정말로 도망치기 위해서 대막천궁 무사들이 비교적 뜸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녀가 수하들을 남겨놓고 혼자만 살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지라 장손무는 '아차' 싶어 허겁지겁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깝게 따라붙었을 때 다급한 마음에 한 손을 뻗어 혈도를 짚을 시도를 하였다.
그 순간 도망치던 허혜린이 급히 제동을 걸더니 전광석화처럼 역(逆)으로 장손무에게 몸을 날려왔다.
"헛!"
설마 도망치던 그녀가 한순간에 뒤쪽으로 날아올 줄 몰랐으므로 장손무는 혈도를 짚기 위해 뻗었던 손을 얼른 빼면서 도(刀)로 그녀의 공격을 저지하려했다.
-치익.
그녀의 검날이 장손무의 옷자락을 찢으며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장손무의 도(刀) 역시 그녀의 이마 부근을 스치듯 베면서 허공으로 뻗쳤다.
이마에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한쪽 얼굴을 적시면서 흘러 내려왔다.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실패해버리다니..."
이런 아쉬운 생각을 하던 허혜린은 옷소매로 떨어지는 피를 얼른 훔쳤다.
반면 장손무는 방금 입은 상처로 인해 어깻죽지가 화끈거리고 통증마저 느껴져 오자 대노하며 길길이 뛰었다.
"이 년이!! 내가 어여삐 여겨 목숨을 보존해주려고 하였거늘 내 몸에 감히 손을 대!!"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허혜린을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이젠 애첩이고 뭐고 간에 봐주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그가 휘두르는 공격은 정말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그의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미 더 이상 몸을 빼낼 퇴로도 없었고, 심신이 지쳐서 버틸 기력도 없었다.
-쨍강.
그녀의 검(劍)이 장손무의 쌍조도에 맞아 힘없이 날아갔다.
장손무는 아예 끝장을 내려는 듯, 무기를 잃은 그녀를 내려치기 위해 도(刀)를 하늘높이 들어올렸다.
"아...."
허혜린은 모두 끝났다고 체념하면서 눈을 감고 날아오는 그의 공격에 몸을 맡겨버렸다.
"소교주! 위험합니다!!"
"안돼!!!"
"장손무!! 이놈!!!"
사검귀천은 허혜린이 위급해지자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적들에게 적지 않은 검상만 입고 말았다.
이때.
사검귀천은 자신들을 에워싼 많은 적들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되었다.
그것은 마치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저 멀리에서부터 자신들에게까지 밀려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으악!!!"
갑자기 대막천궁 무사들 사이에서 요란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적들을 마구 쳐 넘기면서 접근해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하더니 어느새 사검귀천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었던 포위망 한 축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이오!! 어서 포위망에서 빠져 나오시오!!!"
낯익은 얼굴.
사검귀천은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크게 놀랐다.
"당신은!! 녹무군!!!"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저만치서 잔뜩 몰려있는 적들을 꿰뚫고 붉은 유성(流星)처럼 허혜린에게 돌진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보이고 있었다.
사검귀천은 큰 충격과 기쁨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위현룡 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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