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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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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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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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7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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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DUMMY

싸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데 이건 그 중에서도 눈치싸움이었다.


원을 그릴 것인가 말 것인가.

달려들 것인가 말 것인가.


슬리체가 마법사용에 한계가 있듯이 우리도 마냥 뛰어다닐 수만은 없었다.


멍청하게도 우리가 우리 생각을 죄다 떠들었기 때문인지 슬리체는 그려내는 원의 크기를 줄였다. 작아진 만큼 체력의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 분명했다.


좋은 방법이지만 원이 작아지면서 덩달아 우리가 그걸 피하는 것도 쉬워졌다. 녀석도 그걸 모르진 않을 것이다.

싸움은 교착에 가깝게 늘어졌다.


위층에선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한 결 여유가 생긴 나는 슬리체의 주변을 계속 배회하며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쨍쨍한 칼 소리만 계속 들리고 있었다.

반 랜드레이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녀석은 무서운 놈이었으니까.

성격이 나쁜 만큼 집요했고 그만큼 지는 것도 싫어했다.


나 같은 동네 청년에게 걱정 받아야할 인물도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녀석은 스칸달른의 용사였다. 만날 지 입으로 이야기 했듯이 이번에도 수련과 성장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정직함이 반 랜드레이를 바보처럼 만들기도 했다.


특히 영악하기 짝이 없는 적을 상대할 때는 그게 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글리 캐스트는 충분히 그런 녀석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저 알아서 할 용사 녀석은 알 바 아니다. 오히려 위에 남아있는 레샤가 걱정이었다. 침착하기만 한다면 상관없겠지만 침착할 수 있다면 그 레샤가 아니지.

다시 얼굴 보게 되면 그 때는 목이 쉬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글리 캐스트는 미력의 돌이 아직 레샤에게 있다는 걸 알아챘을까.

적어도 슬리체는 이 쪽에 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글리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도망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고 아예 붙잡아두려고 할 것이다.


다른 걸 하지 않아도 칼부림이 일어나는 장소에 가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반 랜드레이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녀석은 가끔씩 화난 황소마냥 주변을 보지 않는 터라 안심할 수도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야우라와 내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 정도가 되려나. 그러려면 먼저 슬리체를 제압해야했다.


제압이라, 그렇게 깔끔하고 완벽하게 들리는 단어를 쓰지는 못할 거 같았다.


"엄마!"


야우라의 비명이었다. 그 애는 기습적으로 날아온 벽돌을 피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저렇게 피하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야우라는 잘도 바닥을 기어 내가 있는 곳까지 왔다.


"뭐해. 그러다가 머리통 깨져도 난 모른다?!"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튕겨져 나오는 벽돌을 피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으로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뒤통수가 깨지든 코를 박든 똑같잖아."


내가 손을 내밀자 야우라는 헛소릴랑 접어두고 내 손을 잡아 일어났다. 그렇게 납작 엎드려 있는 건 어서 여기 바닥에 원을 그려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얘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금방 지칠 줄 알았더니 안 그러네."


슬슬 힘에 부치는 것인지 야우라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그럼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


"너는 마법 좀 쓰면 금방 나 죽네, 이젠 못하네, 하잖아."


"제대로 할 줄 아는 놈은 같은 마법을 써도 훨씬 효율적이야."


제대로 배우고 연습하고 갈고 닦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런 얘길 왜 이제 해? 괜히 기대했잖아."


"....그러게."


그렇게 말하는 나도 실은 실망스러웠다. 첫 째로 무한하지 않은 내 체력에 실망했고 두 번째로는 슬리체 놈의 마나운용 실력에 실망했다. 그건 실망이라기보다 원망이었다.


좀 져주면 덧나나?

좀 져주면 어디 덧나냐고.


우리 편 누구는 지 정령이 언제 돌아가는지도 아직 셈을 제대로 못하는데 마법사씩이나 되는 녀석이 별 것도 아닌 애들 상대하면서 마나 운용까지 신경 쓰다니 이건 불합리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가며 꼬꼬마 아이들 괴롭히면 재미....


"....는 있겠네!"


나는 슬리체가 손을 든 시점에서부터 깜짝 놀라 몸을 기울였다. 동시에 달려 나가기도 했다.


"너는 반대쪽으로 가!"


야우라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 안 해도 알거든?!"


호언장담한대로 야우라는 일찌감치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인 순간 대치는 풀어져버렸다. 우리는 어디론가 달려야하고 슬리체는 그걸 막기 위해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슬리체는 양쪽으로 갈라진 우릴 보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단지 그것뿐 더 도망가려 하지는 않았다. 달리 생각이 있는 걸까. 모르겠다. 알 수 있으면 여기로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쥔 검을 더 꽉 쥐고 달렸다. 빌린 거다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지. 게다가 가능하면 이대로 슬리체에게 들이받을 작정이었다.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아까도 봤듯이 마법사도 다치면 아프다. 녀석에게도 시간이 마냥 많지는 않다.


슬리체는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받아칠 대비라도 하듯이 몸을 살짝 낮추었지만 좌우를 살피는 시선은 여전히 바빴다.

아니면 너희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건가.


처음으로 얻은 기회였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고.


"진짜 마법사님 실력 한 번 보자고!"


나는 될 대로 되라 식으로 검을 힘껏 내려쳤다.


캉!


기대와는 달리 검 날은 허무하게 돌바닥에 부딪쳤다.

슬리체는 펄쩍 뛰어올라 검격을 피해냈다.

한 발짝 늦은 야우라가 위로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 끝도 닿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처음에 든 생각은 그거였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돼.

안 될 것이 없었다. 슬리체가 자기 아래 원을 그리면 간단히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원의 용도를 너무 한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튕겨져 나가듯 솟아올랐던 슬리체는 벽까지 날아가 그 위에 착지했다.


벽에 착지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그건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벽에 두 발과 손을 대고 있다가 이내 아예 일어나 두 발만으로 벽에 매달려 있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매달려있다기보단 벽을 바닥처럼 딛고 서있었다.

거기에도 원이 그려져 있다는 걸 발견한 건 그 직후였다.


"....쉽지는 않네."


슬리체는 밑의 우리를 보며 말했다.


"야! 너 안 내려와?!"


약이 바짝 오른 야우라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녀석이 순순히 내려올 리는 없었다.


슬리체는 매우 익숙한 것처럼 벽 위에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그 자리에 새로운 원이 그려져 슬리체가 떨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슬리체가 말했다.


녀석은 조롱하고 있었다. 워낙 말투와 시선에 분별력이 없어서 애매하긴 해도 저건 조롱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내려가면 다시 원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될 텐데 그래도 좋느냐, 하는 의미로 말이다.

그게 야우라에겐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었다.


"안 내려오면 직접 간다아!"


"어? 야!"


약 오르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걸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야우라가 검집마저 내버린 채 슬리체가 있는 벽을 향해 달려 나갔다.


"너 오늘 잘못 걸렸어어어!"


그리고 지금 기분을 그대로 토해내는 것 같은 섬뜩한 경고와 함께 힘차게 도약했다. 높이가 모자란 건 당연한 거였다. 그럼에도 손으로 벽을 집고 발로 차 아주 잠깐이나마 벽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거의 자기 키만큼은 더 차고 올라간 야우라는 슬리체의 바지자락을 꽉 쥐었다.


"뛰어서 닿는다고....?"


설마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들 줄은 몰랐던 것인지 슬리체는 야우라에게 붙잡혀 원 밖으로 강제로 끄집어내졌다. 마법의 영역에서 벗어나자 슬리체는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떨어질 줄 알았던 둘은 바닥에 닿기 전에 바닥에서 튕겨 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높이가 꽤 되었다. 마법의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슬리체도 당황했다는 증거였다.


야우라는?


"아이고오...."


근처에 같이 떨어진 야우라는 괜찮아보였다. 움직이고 있고 눈 뜨고 있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 다음은 곧장 슬리체를 보았다. 우선은 그 녀석부터였다.


"크흑....!"


아직 엎어져있던 녀석은 뒤늦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난 그간의 울분을 담아 검을 역수로 잡아 그대로 내려찍었다.


캉!


검날은 돌바닥과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음을 내었다.

데구르르 굴러 몸을 피한 슬리체는 조금은 버거운 듯 몸을 일으켰다.


"...자비가 없군."


녀석이 말했다.


"난 너랑 다르게 봐줄만한 여유 같은 게 없거든."


나는 저릿한 오른손을 일부러 휘휘 저었다.


"고작 그런 걸로 죽지도 않을 거고."


내가 노린 건 결국 어깨였다.


슬리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이 거리에선 섣불리 원을 그렸다간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당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하기야 나보다 더 잘 알겠지.

그럼에도 녀석은 또 다시 손을 들어 옅은 빛을 만들어냈다.


나는 발아래를 보았다.

주변엔 반짝이는 뭔가는 없었다.

여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뒤에서 챙!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켜섰다. 직후 기다란 막대가 머리 위쪽에서 날아와 슬리체의 옆에 떨어졌다.

검집. 야우라의 검집이었다.


원으로 바닥의 물건을 튕겨내서 날려 보냈다는 걸까. 우연이라도 맞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슬리체는 검집을 주워 잡았다. 그걸로 방어를 할 속셈으로 보였다.


실제로도 내가 바깥에서 안쪽으로 검으로 휘두르자 녀석은 그걸 높게 들어 검격을 막아냈다.

숙련되지는 않았다. 막아내는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좌에서 우로 팔을 펴며 휘두르자 슬리체는 겨우 막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분명히 실력차이가 나는데. 그런 사실이 눈에 고스란히 보이는데. 한 쪽에서 막기 만하니 생각대로 밀고나갈 수 가 없었다.

미숙하지만 미숙한 것치곤 제법이었다.


"어떻게 된 게 원 주인보다 더 낫냐!"


나는 무게로 찍어 누르고자 검을 높게 들었다.

그게 약간의 실수였다.

슬리체가 일찌감치 양팔을 들어 검을 위에서 막아버린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날 밀어내기까지 했다.


몸의 균형이 뒤로 쏠렸다.

넘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덜컥할 만큼 불안정한 것도 사실이었다.


"잇...!"


슬리체가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절로 잇새에서 신음을 흘렸다.


그 때 뭔가 내 뒷깃을 낚아채 뒤로 잡아당겼다.


"나 다 들었어?! 뭐라고?!"


야우라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 고할까, 나는 야우라에게 뒤로 기댄 한심한 자세에서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저저, 거기, 저기 앞에! 앞에!"


나는 앞으로 손가락을 치 들었다.

눈앞의 슬리체는 손을 바닥에 대고 원을 그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빛이 원을 그리는 속도가 더 빨라진 거 같았다.


우리는 후다닥 소리가 날정도로 재빨리 찢어져 원 밖으로 나갔다.

처음으로 슬리체가 얼굴을 찡그렸다.


"야 레이크!"


야우라가 날 불렀다.


"왜."


"협공이야, 협공!"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었더니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말 안 해도 알아요! 맨손으로 조심하기나 해!"


그 말대로 지금 야우라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먼저 앞서 달렸다.

아주 가까운 거리의 슬리체는 마법을 준비하기보단 검집을 먼저 활용할 생각으로 보였다.


"이번엔 안 봐준다?"


무안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 난 으름장을 놨다.


"아까는 봐줄 여유 같은 건 없다고 하지 않았어?"


슬리체는 담담하게 맞받아쳤다.

어우 어떻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다 기억해주시고.....


"알아줘서 감격이네!"


나는 검을 내려쳤다. 홧김에 휘두른 검은 허공을 쭉 갈라 지나갔다.

슬리체는 처음부터 막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반대쪽으로 뻗었을 때도 똑같았다. 벽까지 밀어붙여야할까. 역시 그게 가장 확실했다.

나는 공세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우에서 좌로,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슬리체가 검집을 위로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아주 잠깐.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검집을 내려친 손의 감각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이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 그런 감각은 검을 다루면서 처음 느끼는 거였다.

손목이 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난 얼른 검을 놓았다.


손아귀를 벗어난 검은 다트판을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그리고 가차 없이 바닥에 떨어져 벽돌 틈사이에 박혀 들어갔다.


어....


무슨 말을 해야할 진 모르겠고 말을 해야 할 상황도 아닌 것 같기에 난 옆에 떨어진 검의 자루를 얼른 쥐었다.


하지만 암만 뽑으려 해도 단단히 박혀 들어간 검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아.... 그...."


지금은 말을 해야 할 거 같았다. 뭔가 말이라도 해야. 시간이라도 끌어야.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머리를 써보려고 해도 역시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검집에 마법을 걸어두다니 정말 똑똑하시네요. 한 번만 봐주실래요?

뭐 그런 거?

어쭙잖은 짓이었다.


길게 숨을 내뱉은 슬리체가 검집을 들었다.


"지금! 지금이야!"


야우라가 소리쳤다.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애가 갑자기 슬리체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으아앗!"


야우라는 슬리체의 허리를 부둥켜 잡고 함께 바닥에 미끄러졌다.


"큭...!"


몸통을 둘러 잡혀 꼼짝 못하게 된 슬리체는 그대로 야우라와 함께 자빠지게 되었다.


"됐어! 잡았어!"


야우라는 아득바득 움직이는 슬리체를 더 꽉 잡으며 말했다.


내가 항상, 늘, 언제나 말은 나쁘게 했지만 역시 우리 방랑검사님이 최고였다.


"해냈어! 잘했어! 최고야!"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 베풀 줄도 알아야지. 인색하기만 하면 못 쓰는 거였다.


"거봐! 이 야우라님이 해준다고오으앗?!"


야우라가 기고만장하게 방심하는 사이 슬리체는 손아귀를 뿌리치기 위해 계속 발악했다.


"야야야야! 잡아잡아잡아!"


야우라의 말이 맞았다.

나는 슬리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쪽에 붙어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궁지에 몰리면 없던 힘도 나온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할 참인지 슬리체는 야우라를 뿌리쳐가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거기에 내 힘도 보태어 슬리체가 바깥으로 뻗으려는 팔을 붙잡았다.


녀석은 고개를 쳐들고 날 노려봤다. 희번득 뜬 녀석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위험해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난 더 강하게 붙잡았다.


"이제...."


슬리체가 말했다.


"겨우 둘을 같이.... 붙잡았군."


그와 함께 바닥이 번쩍였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크기였다. 훨씬 더 큰 원이 주변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야. 아니지? 아니잖아."


난 전에 녀석이 그랬듯 그래도 괜찮겠냐는 의미로 그렇게 물었다.


여기서 저만한 마법을 만들어내는 건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붙잡고 있었고 술자인 슬리체라고 해서 이런 상황에 혼자 마법의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려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뭐야?! 뭐하려는 거야?!"


주변에 스며 나오듯 새겨지는 빛을 본 야우라도 놀라 소리쳤다.


원은 천천히, 여태까지 중 가장 느린 속도로 그려졌다. 그만큼 넓게 그려지기도 했다.


야우라도, 나도, 탈출을 시도 했을 땐 이미 늦어있었다.


빛은 완전한 원형을 그렸고 마법은 완성되었다.

나는 온 몸이 휘청거려 넘어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넘어지고 말았다.

단지 바닥에 부딪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뭔가에 의해 밀어 오르는 것처럼 허공에 떠올랐다.


"으으....! 이이....!"


목구멍에선 절로 해괴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항할 수 없다는 건 그런 거였다.


"허! 허어! 허어허어어!"


야우라도 숨찬 소리를 뱉으며 허공에 팔과 다리를 저었다.


"이거 뭐야. 이거 완전.... 기분이.... 이, 이상해...."


속이 울렁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북한 얼굴로 한 숨을 토하기도 했다.

허공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다면 그럴 만도 했다.


"슬리체! 이걸로 뭘 어떡하겠다는 거야!"


술자인 슬리체만이 가만히 서있었다 아니 누워있는 건가 아님 앉아서?

뭐든 간에 조용히 있는 건 그 녀석뿐이었다.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던 녀석은 조금 뜸을 들였다 대답했다.


"너희는 글리에게 가지 못 하는 거야. 그것 말곤 아무것도 없어. 글리랑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글리가 반 랜드레이를 이길 거 같아? 내 생각엔 아닌데."


신경 좀 긁어보자 하는 와중에도 슬리체는 천천히 허공에서 돌고 있었다. 아니 돌고 있는 건 나인가.


"난 항상 글리편이니까. 글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뿐이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하여간에!"


듣다 못한 것인지 야우라가 성을 내었다.


"이 세상엔 이상한 놈들 천지라니까? 이게 대체 뭐야?!"


하기야 빠져나가보겠다고 팔로 날갯짓을 하는 엘프도 이상한 놈이긴 했다.


"아.... 이런 식으로 하늘을 날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건 조옴.... 우읍....!"


힘겹게 말을 잇던 야우라가 갑자기 입을 막고 구역질을 했다.


"야야야야! 내 생각엔 지금 하면 큰일 날 것 같거든? 진짜 엄청 큰 일?!"


나는 불길하기 그지없는 소리에 질색했다.

저 상태에서 저질러버린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끔찍했다.

그걸 알긴 아는지 야우라는 손으로 입을 막고 인내하듯 눈을 꽉 감고 버텼다.


다시 슬리체를 보자 녀석은 별 인상 없는 표정으로 거북해 하는 야우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사고가 일어날지 아닐지 지켜보는 것도 같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이미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슬리체가 마법을 해제한다면 우리는 다시 녀석을 붙잡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제하지 않으면 결국 마력이 다 할 때까지 버티다가 우리에게 붙잡힐 것이다.


바보짓이었다.


"슬리체!"


"...글리가 올 거야."


녀석은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그 말만을 반복했다.

어떤 절대적 믿음이 있는 것처럼, 아니면 단순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처럼.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 상대였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걸까.


"레이크.... 기분이 이상해...."


그러는 와중에도 중간 중간 들리는 야우라의 구조신호는 덤이었다.


아이잇! 진짜 돌아버리겠네.


작가의말

제발 제발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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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6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5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6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9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6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8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3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3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6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2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6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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