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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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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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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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9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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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34. 헛것이야(4)

DUMMY

약초집 카밀... 아니 까뮤라고 해야겠지. 까뮤 안에는 가게에 비해 비교적 넓은 마루가 있었다. 그리 자주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먼지가 제법 쌓여있었지만 그 정도는 손으로 쓸어내고 앉아도 별 문제없었다.

심지어 난 쓸어내지도 않았다. 옷이란 본디 더럽혀지기 마련인 것을 청결에 너무 집착하면 피곤해지는 법이었다.


이런 얘기를 빨래당번 앞에서 했다가는 대판 싸웠겠지. 없으니까 하는 것이다. 안 들리니까 하는 것이고 나중에 엉덩이나 좀 털어내면 되겠지.


그보다는 차를 대접하겠다는 까뮤 할머니가 두고 간 책이 더 궁금했다. 빨간색 가죽이 표지로 덧씌워진 그 책엔 제목이 없었다. 그래도 꽤 오래되고 귀중한 것인지 아주 딱딱했고 원래도 누런 종이는 갈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막 책 구경이나 제대로 해볼까 하고 손을 뻗던 참이었다.


"레이크는 뭘 믿고 이걸 덥썩 하겠다는 겁니까...?"


레샤의 말이 내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뭐 어때 책 좀 읽는 건데. 나이 드신 분들은 눈이 잘 안 보이니까. 흔한 일 아냐?"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건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자 레샤는 책을 보호하듯 자기 쪽으로 살짝 당겼다.


"뭐가 그렇게 문제인데?"


나는 그걸 다시 가운데로 끌고왔다. 대체 뭐가 그렇게 캥기는 것인지,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것인지 한 번 중립적으로 이야기해보자는 거였다.


"까뮤 할머니를 쉽게 봐선 안 됩니다..."


"내가 언제 할머니를 쉽게 봤다고 그래. 책 읽는 게 쉬운 일이라고 했지."


"아무래도 수상해요..."


"수상하다니 잘 아는 분이 아니야?"


"그, 그건 아닌데... 원래도 장난기가 많은 분이라서... 이 책에도 분명 뭔가 있을 겁니다..."


책에 있긴 뭐가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책이었다. 두꺼운 표지와 손가락 두 마디만큼 쌓인 종이 더미가 두꺼운 양피지에 싸여있는 걱 뿐이다.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을 거 같이 생기긴 했지만 이걸로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건 정말 괜한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특이한 애칭으로 부를만큼 이뻐하는 아이에게 위험한 걸 가져다 주었으려고.


"그건 그렇고 르시아는 뭐야?"


나는 레샤에게 물었다.

왠지 뜻을 알면 놀려먹을 거리가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별 거 아닙니다."


말하기 싫다고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레샤는 순순히 르시아의 뜻을 알려주었다.


"까뮤 할머니랑 똑같은 거예요... 읽는 방법의 차이일뿐이라 레샤라고 쓰지만 르시아라고 읽을 수도 있는 겁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까뮤 할머니는 다른 곳에 계셔서 편지로 소식을 받았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절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제가 르시아인 줄 아셨데요..."


그래서 간혹 그 이름이 더 익숙하게 느껴져 가끔씩 그렇게 부른다는 거였다.


"절 만나는 걸 꽤 기대하셨데요... 그래서 저희 할머니도 특별히 편지를 쓰신 거고요... 까뮤 할머니한테는... 아이가... 없으니까요..."


"아. 그래...?"


"...그런 겁니다."


왠지 놀려먹으려고 한 내가 다 무안해지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구요...? 까뮤 할머니는 항상 절 놀릴 생각으로 가득 차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레샤의 눈에선 뭔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재가 되어가는 건 옛 추억일까 아니면 악몽일까. 그게 무엇이든 간에 레샤는 지금 그걸 통해 한 단계 더 강력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에이 설마 그래도 저렇게 반가워하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오늘은 안 그러시겠지."


게다가.


"그리고 책 안 읽어준다고 했다가 더 험한 일이라도 시키면 어떡하려고. 간판을 새로 파달라고 한다던지, 약초 같은 걸 창고에서 옮기는 거. 암만 풀더미라도 많으면 무겁다?"


"그래도..."


아니 뭐가 그렇게 의심럽다는 건지, 나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머뭇거리는 레샤가 답답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어린 애들을 보면 놀리는 거야 으레 있는 일이고. 잘 모르는 사람인 것도 아닌데 너무 진지한 게 아닌가 싶었다. 설령 장난이라 해도 가벼운 정도라면 한 번쯤 당해주는 것도 예의가 아닐까 싶었다.


까뮤 할머니는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막기위해 나타나기라도 한 듯 그제야 쟁반에 찻잔 두 개를 얹고 다가왔다.


"자, 급할 거 없단다. 여기 약초 차 마시면서 천천히 하렴. 과자도 먹고."


할머니는 마루 위에 쟁반을 놓고 손잡이 없는 둥근 컵을 하나씩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보니 거무죽죽한 초록색 과자가 너댓 개 담긴 접시도 있었다.


"할머니... 또 이상한 거 하는 거 아니죠...?"


그 때까지도 레샤는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레샤를 사랑할 줄 밖에 모른단다."


홀홀 웃으며 양손으로 레샤의 뺨을 문지르는 까뮤 할머니, 레샤는 꽁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보았지만 뿌리치진 않았다.


"예전에도 그렇게 말하고서 저한테 벌레 튀김 먹이셨잖아요..."


끔찍한 이야기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는 동안 나는 할머니가 주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목이나 축이자는 생각으로 먹은 약초차는 의외로 엄청 달았다.


"오와! 이거 뭐야, 엄청 다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맛에 나는 절로 감탄부터 튀어나왔다.


"그야 쓰면 애들이 싫어하잖니. 자자, 다 먹으면 또 줄테니 많이 마시렴."


나는 사양않코 쥬스나 다름없을만큼 단 약초차를 마시고 한 잔 더 얻어 마셨다. 둥글게 대충대충 생겨먹은 과자도 한 입에 넣기 좋고 맛있었다. 레샤도 어떻게 입에 담기는 했으니 할머니의 바람은 벌써 반은 이뤄진 셈이다.


맛있는 걸 먹으니 사람이 한껏 고양된다고 해야할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약초를 탄 물을 마신 것이니 건강해져서 그런 건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제가 이 책을 읽어드리면 되는 거죠?"


아까의 빨간색 표지의 책 말이다. 레샤가 입에 넣으면 넣는대로 손에다가 새 과자를 쥐어주던 까뮤 할머니는 내 말을 듣고선 그 요란스럽게 책을 집어 내게 내밀었다.


"그래그래. 할머니는 가마아안히 앉아있을테니까 레이크 네가 읽어주렴. 자, 레샤도 낭랑하게 한 번 읽어주렴. 예전에 할머니들 앞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그것도 할머니가 시킨 거잖아요오...!"


"아이고 참. 할머니 귀 아직 잘 들린다."


그러는 사이 나는 책을 펼쳐 맨 첫 장을 보았다.


"레이크, 저는 얘기 했어요...?"


"그래 알았다니까."


알았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첫 줄부터 읽어내려갔다.

어 그러니까...


"더 멀리 볼 수 있는 건 최대의 장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저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면 매일 모양은 바뀌지만 반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건..."


이게 뭔 소리야? 읽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항상 이런 걸 읽는 건가.

하하 모르겠다. 그거 알아서 어디다 써먹겠다고 지금 해야할 일은 책을 읽는 것이고 글자를 읽는 건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고 하지 못 하고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 없었다.


"파리는 시야가 매우 넓어 뒤에서 다가오는 포식자조차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건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역리와..."


이건 또 뭔 소리래.


"열매와 씨앗 중 핵심은 사실 씨앗이다. 씨가 맛이 없는 것에 비해 열매가 굉장히 단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씨앗을 잘 보존해 재료로 사용하면 그 효능이..."


읽으면 읽을 수록 느껴지는 감상은 정말 재미없다는 거였다. 이런 걸 읽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읽어달라고 하시는 건지, 점점 하품을 참기 힘들어졌다.

잘 먹어서 그런지 졸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점점 눈이 감겼다.


"아. 오직... 역리의 것으로, 그 반대의 경우는..."


그러니까...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 하다고... 여겨진다..."


여겨지고... 그리고...

나는 절로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했다. 레샤의 말에 따르면 짖궂은 면도 분명 있는 사람이니 불성실하게 읽었다가는 괜히 꼬투리 잡혀서 약초를 안 줄 수도 있었다.


"불가능... 한 것인지 아니면 거부 당하는 것인지..."


나는 이 책에게 거부 당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중... 아, 이중성을 띈 것도... 분명 존재한다... 물리의 존재이면서 역리에 친화...? 친화적인... 것들은 우리보다 더 경계에 가까운 것인가... 그렇다면 경계에 가깝다는 것은 존재가 불분명하다는 의미인가..."


책의 내용은 점점 이해가 가능하긴 커녕 생소한 단어 탓에 읽기도 힘들어졌다. 아니면 졸려서 그런 걸수도 있고.

속도는 아까보다 더 느려졌고 내 자세는 더 늘어졌다.

한 문장만. 딱 한 문장만 더 읽자. 그리고 잠깐 쉬자고 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 실마리는 경계의 나무로..."


그리곤 깜깜한 어둠이 날 덮었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다. 졸린데로 눈을 감고 편한대로 몸을 누인다는 건 그런 것이지. 덩달아 시원한 바람도 느껴졌다.


고오오 하고 울리는 바람소리는 더 시원하게 더더 시원하게 차갑게 불어닥쳤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 때부터였다. 바람은 불어오다 못해 거세졌고 몸은 편안하다 못해 의지할 데 없이 자유로웠다. 진짜 진짜 자유. 꼭 떨어지는 것처럼.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하늘이었다. 화창한 태양빛에서 위화감이 들었다.

바깥은 흐렸는데.

나는 추락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비명부터 튀어나왔다.

이건 꿈인가? 꿈일 거야! 그렇지 않고선 설명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잔잔하고 조용하게 작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이나 읽고 있었는데!


나는 공중에서 빙글돌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팔을 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나마 내가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으아아악!"


거꾸로 돌아 땅을 보게 되자 그 아래엔 노랗고 붉은 황색 땅이 아른 거리는 게 보였다.


"하! 허! 헉! 헛! 흐!"


사람이 많이 놀라면 비명도 제대로 안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추락은 멈추지 않았고 지면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쯤되면 깨어날 때도 되었건만 깨어나는 건 꿈이 아니라 내 감각이었다.


눈앞이 핑돌고 주황색만 가득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 충돌했다.


퍼엉, 하고 속이 빈 소리가 났다. 괄괄괄괄하는 거품소리가 귓전을 긁었고 콧속에서 쓰리고 매운 맛이 났다.

맛이 났다고?

온 몸은 거꾸로 오르는 것처럼 가벼웠지만 반대로 무겁게 짓누르기도 했다. 꼭 물 속에 들어온 것처럼.


어? 잘은 모르겠고 난 팔과 다리를 흔들어 위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헤엄쳤다.


수 십 번은 팔과 다리를 흔들고나서야 나는 목부터 빠져나왔다.


"허억! 켁! 헉!"


숨을 들이키면 물이 목을 찔렀지만 그래도 계속 숨부터 쉬었다. 눈을 뜨자 아무것도 없이 주황색 물만 보였다.

애초에 주황색 물이라니 그게 대체 뭔데!


갑자기 물이 넘실 떠올랐다. 파도친 물결이 날 덮쳤고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딘가로 떠밀렸다.


정신없이 떠다니는 와중에 무언가 거칠고 딱딱한 것이 내 얼굴을 쳤다. 나무판자였다. 나는 일단 그 나무 판자부터 잡고 봤다. 의지할 곳이 생기자 그제야 주변도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 물. 그것뿐이었다. 땅도 나무도 건물도 사람도 아무것도 없이 물뿐이었다. 위에는 파란 하늘 붉은 태양 하얀 구름이 다 있었는데 밑에는 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떠다니다가는 영락없이 죽게 생겼다. 뭐라도 해야했다. 그런 데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장구를 치더라도 목적지가 보여야 할텐데 이대로는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의욕이 나지 않는 게 아닌 것이다. 난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살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고 하는데 죽으려니 별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해서 죽게 생겼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막 나가보는 거였는데. 나 하고 싶은대로 남 신경쓰지 않고 마음 껏!


...


그런 게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젖은 생쥐였다. 나무 상자에 들어갔다가 아무도 모르게 상자가 강에 빠져버린 생쥐처럼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이 판자 위에서 죽어갈 것이다. 아마 굶어죽겠지.


그 무렵 진한 그늘이 내 머리위에 드리워졌다. 그래 햇빛 마저 없다면 추워서 죽을 수도 있겠지. 신도 날 어떻게 죽일지 골라보는 듯 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꼭 그래야 했던거야? 반드시,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박수를 치면 소리가 나듯, 그렇게 되었어야하는 거냐고! 어?!"


나는 허공에 하소연했다.


"어어이!"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저건 이제 하늘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인가.


"이거 잡아!"


"아니... 사람을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걸 자꾸 잡으라고 하네. 당신이 나한테 뭘 해줬어! 어?! 뭘 해줬다고 이렇게엨켁!"


이왕 끝난 거 푸념이라도 있는대로 늘어놓자 싶었는데 갑자기 뭔가 내 따귀를 때렸다.

아주 자기욕 듣기는 싫다는 거지.

이렇게 된 거 어디 만져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이리저리 손을 뻗어 내 뺨을 때린 것을 붙잡았다.


"허어?!"


그건 밧줄이었다.

나는 얼른 줄이 뻗어 올라가는 위를 보았다. 커다란 배가 한 척 있었다. 그늘은 그 배가 만든 것이었다.

갑판 위에선 선원 한 명이 내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꽉 잡고 있어!"


아직도 어리둥절해서 사태 파악이 안 된터라 대꾸를 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나는 밧줄을 손목에 휘감아 꽉 잡았고 꾸역꾸역 끌려올라갔다.

머지 않아 나는 위까지 닿아 갑판에 거꾸로 고꾸라졌다.


"허억!"


진빠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물 밖에 놓은 생선처럼 늘어져버렸다.

또 다시 앞이 깜깜해졌다.


내가 눈을 뜬 건 아마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던 것 같다. 그곳은 실내였고 아마도 선실 같았다. 푹 젖었을 몸도 다 말라있었다. 무심결에 몸을 일으킨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여기엔 바닥이 있었다.


그 물로 만든 침대라니 도대체 뭐하는데 써먹는 거야 이거. 아픈 몸을 문지르며 겨우겨우 밖으로 나가자 넓은 갑판이 보였다. 기억이 났다. 그래 여기서 날 건져 올려줬었지.


"아하! 깨어났구만!"


"으흐어!"


하늘에서부터 들려오는 걸걸하고 큰 목소리에 나는 기겁부터 했다. 배만큼이나 커다란 돛 위에 만들어진 전망대에 털보 아저씨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 배의 선원으로 보였다. 그 사람은 날 보고선 밧줄을 잡고 재주좋게 갑판까지 한 번에 내려왔다.


"이봐! 오늘 아주 큰 일 날 뻔 했어!"


꾀죄죄하고 헤진 옷이었지만 덩치도 크고 아주 쾌활하고 건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난 이 쌍봉낙타호의 선장 쿠쿨이야! 자네는?!"


쿠쿨 씨는 내게 손을 뻗었다.

코앞에다가도 귀가 울리도록 쩌렁쩌렁 큰 목소리를 내는 게 습관인 듯 했다. 그렇대도 생명의 은인이니 나는 그 아저씨의 손을 맞잡았다.


"레이크라고 해요...!"


"아아! 반가워! 반가워! 이젠 걱정하지마! 빠져 죽을 일은 없을테니까 레에이이크으! 하! 하! 하! 하!"


쿠쿨 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그 뒤를 얼른 따라붙었다.

아저씨가 향한 곳은 다른 게 아니라 키가 있는 곳이었다.


"쌍봉낙타 호요?"


걸음이 멈추길 기다렸던 나는 얼른 물었다.


"그래. 쌍봉낙타 호, 멋지지?"


글쎄, 쌍봉낙타가 뭔지 모르겠어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여긴... 어디에요?"


"응? 무슨 소리야. 여긴 사막이잖아! 왜 그래, 모르는 것처럼?!"


"사막이요?"


이해할 수 없어 되물어봤지만 쿠쿨 씨는 틀린 거 하나 없다며 껄껄 웃어댔다.

사막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막은 모래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런 노란색 물이 아니라!


"이건 물이잖아요!"


"물이 아니야! 이리 와봐라"


"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쿨 씨는 옆의 갑판 끝으로 가서 밧줄을 당겼다. 여러번 쭉쭉 밧줄을 당기자 곧 나무통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아저씨는 내게 그걸 내밀었다.


"마셔봐!"


"예?!"


"아, 얼르은!"


"아, 예. 예..."


적극적인 권유에 못 이겨 나는 결국 방금 떠낸 주황색 물을 마셨다. 달짝지근하고 시큼한 그건... 오랜지 쥬스였다. 아니 레몬인가? 뭐든 간에.


"이거 쥬스잖아요?!"


이 사람이 날 놀리는 건가, 나는 추궁부터 해봤다.


"그래! 사막은 쥬스로 이루어진 거지."


"모래는요?"


"난 평생을 사막에서 살았지만 모래 같은 건 한 줌도 본 적이 없어!"


"아니...!"


아니.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난 사막을 본적이 없으니까 이 곳을 사막이라 부르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여기가 사막이라는데 고작해야 시골과 근방 도시 하나 가본 녀석이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그래도 오렌지 쥬스는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 이상할 거 없다! 네가 전에 어디서 살았는지는 몰라도 여기선 이게 상식이야!"


"예에...?!"


"아! 혹시 네가 말하는 모래라는 게 저걸 말하는 거냐?"


쿠쿨 씨는 아래의 사막을 가리켰다. 쥬스 사막 말이다.


넘실 거리는 주황빛 쥬스 안에는 뭔가 작은 알갱이들이 파도에 따라 움직였다.


"저게 뭔데요?!"


"오렌지 알갱이!"


"모래는 그런 게 아니라고요...!"


이제는 목마저 쉬어서 목소리가 이리저리 삐져나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럼 저거?"


아저씨가 이번엔 또 다른 걸 가리켰다. 또 그쪽에 시선을 돌리자 뭔가 수면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공같은 주황색 몸뚱어리에 날개가 달린 이상한 거였다.


"저건 또 뭐에요...?!"


"너 오렌지도 처음보나 보구나?!"


아니!


"오렌지가 왜 헤엄을 치고 다녀!"


"너 레몬 보면 아주 기겁을 하겠구나?!"


그건 레몬도 저렇게 날개가 달려서 쥬스 속을 헤엄친다는 말로 들렸다.


"아니! 오렌지든 레몬이든 다 나무에서 나는 거잖아요!"


"난 당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저야말로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이쯤되니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세상이 잘못된 건지 내가 잘못 된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너무 걱정할 거 없다! 젊은이란 원래 다 고민하는 거야!"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다 잘될 거다!"


"지금 문제가 많다니까요!"


쿠구궁...!


내가 들고있던 나무통을 던져버릴까 고민하는 동안 커다란 울림이 아래에서 부터 들려왔다. 흔들림도 금방 이어졌다. 그 커다란 배가 한 쪽 다리가 짧은 테이블처럼 마구 흔들렸다.


나와 쿠쿨 씨는 되는 대로 갑판의 난간을 잡고 쓰러지지 않도록 버텼다.


"또 뭐에요?!"


"이건...! 레몬인 것 같다!"


아저씨는 더 없이 진지하게 소리쳤다.


"레몬이 대체 뭔데요?!"


"꽉 잡아라 레이크! 아주 위험한 녀석이야!"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레몬이?!


이어서 배는 계속 흔들렸다.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졌고 평온하던 쥬스의 사막도 요동쳤다. 파도는 높아져 갑판 안까지 들이쳤다. 비도 쏟아지고 새콤한 향이 진동했다.

비도 쥬스냐!

쿠쿨 씨는 그 역경을 모두 견뎌내며 키를 꽉 잡고 소리쳤다.


"레몬 폭풍이다!"


그러니까 폭풍 앞에 이름으로 붙는 레몬이라는 게 대체 뭐냐고!


아 알겠다! 입에 튀어 들어가는 비의 맛이 셨다.

그래서 어쩌자고!


"왔다!"


쿠쿨 씨의 외침.

난간을 잡고 엎드려 버티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아저씨가 보고 있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쥬스의 사막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솟구쳐 오르듯 물이 역류했고 거대한 산처럼 솟아올랐다. 쥬스가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지고 베일을 벗기 듯 그 산의 정체가 드러났다.


배보다도 훨씬 컸다. 녀석의 눈만해도 이미 배보다 컸으니 전체 모습은 가늠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선명한 노란색을 띈 꺼글한 껍데기, 톡 튀어나온 꼬다리는 작은 입처럼 벌어졌다. 이빨이 가득한 녀석은 땡그란 눈을 가진 레몬이었다. 암만 봐도 레몬이었다.


레몬에 눈 달아 놓으면 딱 저거였다. 다만 크기가 엄청 컸을 뿐이었다. 이빨이 무시무시했을 뿐이고.

어쨌든 내가 아는 한 저런 레몬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는 줄 알았으면 레모네이드 같은 건 입에도 안 댔지!


"꽉 잡아라아아!"


레몬은 지느러미를 흔들어 크게 자맥질 쳤다. 높은 물결이 배를 밀어냈고 배는 물을 타고 옆으로 뒤집어지려는 듯 옆으로 서다가 겨우 견뎌냈다. 이만큼 큰 배니까 가능한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하늘의 쥬스가 떨어져 갑판을 덮쳤다.


상상 이상의 압력에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손가락의 빠졌고 파도에 휩쓸려 바깥으로 밀려났다가 아예 난간을 놓쳐버렸다.

나는 사막에 빠져버렸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몸을 비틀었고 코와 입, 귀에 쥬스가 들어가 혼을 빼놓았다.


사막에 빠져버렸다니, 이렇게 죽는 사람이 또 있을까.

무슨 헛소리냐 싶어도 나는 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작가의말

짜잔! 이게 대체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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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1) 19.06.27 128 6 15쪽
219 38. 물주지 않아도 돼(5) 19.06.23 114 6 19쪽
218 38. 물주지 않아도 돼(4) +4 19.06.17 103 5 17쪽
217 38. 물주지 않아도 돼(3) 19.06.15 97 5 14쪽
216 38. 물주지 않아도 돼(2) 19.06.08 88 6 19쪽
215 38. 물주지 않아도 돼(1) 19.06.05 87 5 16쪽
21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1) 19.06.02 103 6 18쪽
213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0) 19.05.30 87 5 20쪽
212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9) 19.05.25 102 5 17쪽
211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8) 19.05.20 93 5 19쪽
210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7) +1 19.05.10 113 5 16쪽
209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19.05.09 115 6 20쪽
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0 6 19쪽
206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1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4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5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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