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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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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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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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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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DUMMY

"이 세상은 뭔가 잘못 됐어."


야우라가 말했다.


한참이나 골 앓는 소리 내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더니 기껏 생각해낸 말이 그거였다.


눈썹이 바짝 설 정도로 눈에 힘도 가득 주고 손등의 마디뼈가 도드라질 만큼 주먹을 꽉 쥐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갑자기 사람 어깨를 마구 때리고 무시하니까 옷 잡고 흔들어서 강제로 집중하게 만들더니 기껏 준비한 말이 그거였다.


...그거였다.


"이 세상이 잘못 됐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냐고, 그 긴 시간 고민해서 내놓은 답은 정녕 그것이냐고, 할 말이라는 게 그것뿐이었냐고.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그걸 동조하는 것이라 여기기라도 한 것인지 야우라는 오히려 반색을 보였다.


"그래! 이 세상이 잘못된 거야!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신 들고 있던 감자의 눈의 수를 세어보았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찾아낸 눈의 수가 무려 아홉 개.


이 감자는 사람을 귀찮게 하려는 걸까. 아니라면 독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자와 야우라.

지금 저 야우라의 눈은 날 죽이기 위해 반짝이고 있는 것인가. 그래도 둘 중에 고르라면 역시 감자의 독에 죽고 싶었다. 한 백 개쯤 먹으면 죽겠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그랬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어?!"


"지금이 뭐 어때서."


물론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아홉 개의 눈이 나있는 감자를 도로 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잘 생각해봐?! 마법사를 상대로 그만큼 열심히 했잖아. 그럼 된 거 아냐?! 그만큼 했으면 돌아오는 게 있어야지! 기껏 열심히 해서 돌아온 보상이 이깟 구질구질하고 어두침침한 방이야?!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아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뭔가 했으면! 뭔가 돌아오는 게 인지상정 아니야?!"


나는 우선 얼굴에 튄 야우라의 침부터 닦아냈다. 이 정도면 말하면서 튀는 게 아니라 뱉는 김에 말도 하는 거였다.


"야우라가 말한 대로 세상은 사람이 아니니까 비정할 수도 있는 거죠."


잠자코 듣고 있던 레샤가 툭 던지듯 대신 대답했다.


"...비정해. 레샤는 사람인데도 비정해!"


그게 그렇게 서운한가 보다.


"그럼 야우라는 이거 안 줄 거예요? 비정하게?"


레샤는 손에 든 감자를 눈에 띄도록 흔들었다. 스태프는 빼앗겼기에 셀라임이 아닌 화덕을 이용해 푹 쪄낸 감자. 김이 솔솔 나는 그런 감자.

그걸 못 먹게 된다니, 야우라에게는 그게 더 충격인 것 같았다.


그 애는 눈을 크게 떠서는 눈동자까지 떨어가며 조심조심 말을 골랐다. 지금 말 잘못 했다가는 못 얻어먹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난 알고 있어... 레샤는... 레샤는 작지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한참 만에 야우라가 찾아낸 답은 그거였다.


"...안 줄 겁니다."


당연히 못 얻어먹었다.



결과적으로.

온갖 불쌍한 척을 다 해서 찐감자를 얻어먹은 야우라는 일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마저 가지기로 했다.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마음을 정리해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방에 갇혀있었고 가진 거라곤 에반젤린이 손질하고 있던 감자와 그 때 쓰는 작은 칼밖에 없었다. 그나마 배라도 채울 수 있으니까 다행이었다.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나중에 요리 재료로 쓸 것들이니까요."


에반젤린은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는 각자 원하는 만큼을 먹었다. 그깟 놈들 도와줄까 보냐. 그리고 속아서 여기 갇혀있었던 거라는 걸 알려줬으니까 이제 그런 건 상관없다.

대체 감자로 얼마나 맛있는 걸 해주기로 한 걸까. 그거 해주기는 하는 걸까.


시답잖은 한탄에 모아둔 한 숨을 쉰 난 고개를 들다가 문득 에반젤린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


친절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에반젤린은 싱긋이 웃었다.


"왜 그러겠어요, 제가."


말투에서 약간은 따지는 투가 묻어나와 버렸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도 그런 것인지 에반젤린의 미소는 곧 쓴웃음 비슷하게 변했다.


"레이크 님 말씀이 맞아요.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겠죠? 긴장하지 않으려고 해도 긴장이 되네요. 저도 감자 깎으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여긴 조금 이상한 거 같아요."


그걸 이제 알면 어떡해요, 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에반젤린에겐 아직 할 말이 더 남아있는 것 같았다.


"우선은... 부조화한 기운이 많이 느껴져요."


"부조화? 뭐..."


나는 내 직감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사악한, 그런 거야?"


"아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음... 뭐랄까. 나쁘다기보단 섞이지 않은 느낌이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거요."


난 에반젤린이 말한 그 느낌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사악해 보인다고 하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그런 감정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단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 와닿는 단순한 분위기의 문제인 것 같았다.


"어떻게 나갈 방법은 있어 보여?"


내가 물었다.

여기 제일 오래있었던 건 에반젤린이니 그나마 관찰이라는 것도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해서 그런 거였다.


에반젤린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음... 글쎄요. 저는 그런 재주는 없나봐요. 죄송해요. 그래도! 감자 깎는 주머니칼은 있는데 이게 도움이 될까요?"


에반젤린은 손가락보다 조금 더 길뿐인 작은 칼을 보여주었다.


"일단 챙겨두자. 또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잖아."


"네.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에반젤린은 주머니칼을 가죽집에 집어넣고선 품에 숨겼다.

무기랄까, 저건 도구에 가까웠다. 오히려 검 같은 것보다 쓰임새가 다양하다고 할 수도 있으니 아주 귀중한 물건이었다.


"레이크 님은... 나가면 어쩌실 생각이세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어쩌긴, 집에 가야지."


나는 당연하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런 곳에 더 있어서 뭐하게.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요상한 돌멩이 같은 거 줍는 게 아니었어. 그걸 왜 가져왔지. 아오...!"


왜긴, 가치가 있어 보이니까 주워왔지.

그러게 옛말에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난 지금 지난 날에 대한 후회로 머리카락이 몽땅 빠져버릴 기분이었다.


"아... 제가 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정말 죄송해요..."


이야기는 또 그렇게 흘러 에반젤린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나중에 돈 받아낼 거야."


전후관계고 인과관계고 간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나는 나름의 농담으로 반전을 꾀했다.


"네... 꼭 말씀하신만큼 맞춰서 준비할게요..."


문제는 에반젤린이 농담이 잘 안 먹히는 유형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누가 들어도 농담이잖아!"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다.

약간의 사소한 오해를 푸는 동안, 옆에서 얼쩡얼쩡 대던 레샤가 마침내 결심이 선듯 에반젤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제 님... 저 사람 언제 일어나요...?"


그 애가 말하는 저 사람이란, 반 랜드레이를 말하는 거였다. 녀석은 쓰러져서 옮겨진 이후로 쭉 벽에 기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 있었다.

잠들게 아니라 기절한 것이지.


주먹을 맞고 날아갈 만큼의 충격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쓰러져버릴 것이다.

설령 상인을 빙자한 괴한으로부터 정령술사를 구해낸 용사님이더라도.


"글쎄요..."


기절한 사람이 언제 일어나는지, 제 아무리 사제라도 그건 알기 힘들었다.


"그치만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크게 다치지는 않으셨으니까. 분명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에반젤린의 소견에 레샤는 입술을 꽉 다물고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한테는 그게 꽤나 신선하게 보였다.


"걱정이 되긴 하나보다 네가 다른 사람 안부도 다 묻고."


내가 말하자 레샤는 금방 화내는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뭔가요,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잖아요...! 저도 레이크가 길바닥에 넘어지면, 아프겠다, 하는 생각정돈 있다고요...?"


"그게 걱정이냐?! 감상이지!"


내 말이 완전히 틀린 건 또 아닌지 빽 소리친 그 애는 금방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저 사람... 그... 저 때문에 제대로 못 싸운 거 같아서..."


"왜? 무슨 일 있었어?"


"중간 중간 눈 마주칠 때마다 넌 다음에 보면 가만 안 둔다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구해주겠다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았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니라 약 주고 병 주는 그런 건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쨍한 야우라의 목소리가 좁은 방안에 그대로 울렸다.


"나갈 생각을 해야지 뭐냐고!"


"아니 아무리 반 랜드레이가 싫대도 그건 좀."


아까 인지상정 운운하던 건 뭐였는지 이미 까먹어버렸을 만큼 얼굴이 두꺼웠다.


슬슬 찐 감자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갇혀있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느껴지기는 하는 것인지 야우라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질머리의 촉끝은 반 랜드레이를 향했다.


화라도 난 것처럼 씩씩대며 반 랜드레이에게 간 야우라는.


"언제까지 잘 거야! 일어나, 이 더벅머리!"


대뜸 축 늘어진 뒤통수를 후려쳤다.


"가만히 자는 애를 왜 때려?!"


안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방금 한 방으로 정말 덜컥하고 어떤 끈이 끊어져버리기라도 하면 어쩔 거란 말인가?


난 아니었다. 난 손대지 않았다. 하라고 한 적도 없었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야우라가 손을 들기 전에 막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선처해주시길...


그런 것과는 별개로 야우라는 자신의 행동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부끄러움이라기보다도 죄책감이라는 게 없었다.


"이런 건 원래 때리면 나아!"


그게 정말이기라도 했던 걸까. 연이어 반 랜드레이를 때리려던 손이 턱, 막혔다.

반 랜드레이가 일어났다.


"엇, 어..."


막상 일어나자 후일이 두렵기는 한 것인지 야우라는 슬그머니 발을 뒤로 물렀다.

그걸 놔둘 반 랜드레이가 아니었다.


"너 먼저 죽고 싶냐...!"


녀석은 벌떡 일어나 야우라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우왁! 얘 죽인데! 죽인다고 했어! 얘 방금 죽인다고 그랬다고!"


"어어. 그렇게 들렸어."


나는 성심성의껏 야우라를 응원해주었다. 네 귀가 틀린 게 아니다, 하고 말이다.


"때리면 낫는다는 게 정말인지 확인해볼까...? 어때! 네 머리도 한 대 맞으면 지금보단 훨씬 낫겠지."


반 랜드레이의 목소리는 그 검붉은 눈보다도 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너도 나 깨울 때 이렇게 깨웠잖아악...!"


야우라는 아등바등 매달려서도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건 네가 밤에 챠라한테 허접한 이야기나 하다가 아침에 자려고 하니까 그런 거지!"


"해도 안 뜨고 안개 껴있으면 그건 새벽이지! 어떻게 아침이냐!"


"선택해라. 앞통수냐, 아니면 뒤통수냐."


그건, 주먹으로 맞을래 벽으로 맞을래, 하고 묻는 거 같았다.


"으아악! 진짜 하려고! 진짜 하려고!"


"난 농담은 안 해."


야우라가 세차게 저항하고 에반젤린도 나서봤지만 반 랜드레이는 그 단죄를 접을 마음이 없어보였다.


이제 정말 야우라가 고쳐지는가 악화되는가 결정되려는 찰나, 그 집행을 막은 건 소리였다.

바깥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 같은 게 아니었다. 좀 더 거칠고 우악스러운, 말 그대로 두들기는 거였다.


반 랜드레이는 야우라를 놓아주고선 문을 노려봤다. 나도 불구경은 그만두고 바깥의 동태에 집중했다. 그러나 소리가 난 것은 단 한 번뿐.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아, 그걸까.

그 왜 가끔 있지 않던가. 아무 것도 없는데 괜히 한 번 소리가 나는 그런 거. 흔히 정령의 장난이라고 부르는 거였다.

정령의 장난이라.


나는 웅크려 있는 레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야, 네가 가봐."


정령의 장난이라면 정령술사가 가장 잘 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였다.

당연히 레샤는 질색부터 했다.


"예에...? 레이크... 드디어 인지상정마저 져버리기로 한 거예요...?"


"아니 그 놈의 인지상정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왜 제가 가서 봐야하는 건데요...! 그거죠...! 또 정령일지도 모른다, 그런 얘기 하려는 거죠, 그쵸...!"


잘 아네.

내가 그런 이유로 레샤를 그렇게 많이 시켜먹었던가. 어쩌면 반성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성은 반성이었고 확인은 확인이었다.


어깨를 밀자 그 애는 죽어라고 안 가겠다 버텼다.


"같이 가준다고오, 같이 가준다니까."


"아니라니까요...! 정령술사가 아니라는데 왜 그러는 거냐고요, 진짜...!"


황급하고 다급하고 화급하고 레샤의 말은 사실이었다. 문은 우리가 손대기도 전에 저 스스로 열렸다.


끼이익...


천천히 경첩이 접힐 때 특유의 소리가 우리 모두를 멈추게 만들었다.


불안한 발소리가 들렸다. 불규칙하고 매우 느린데다가 발을 딛는 소리가, 털썩, 이라고 느껴질 만큼 힘이 없었다.


모습을 보인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슬리체가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봤겠나.


"아! 너!"


가장 먼저 야우라가 슬리체에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여긴 뭐 하러 왔어! 놀리러 왔냐?!"


"놀리러 왔다면 문을 열진 않았겠지?"


그렇게 말한 슬리체는 문틀에 몸을 기댔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야우라는 더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대신 진정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왔는데?"


"약속을... 지키러."


"약속? 무슨 약속?"


야우라가 묻자 슬리체는 대답대신 주먹을 앞으로 들었다. 손바닥을 펴자 그 안에는 작은 동전이 한닢 있었다.


야우라는 겁도 없이 그걸 집어 손가락 끝으로 잡았다.


"이게 뭐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야우라에게서 그 동전을 가져갔다.


이 사태가 일어나게 된 원흉인 토큰이었다. 용사토큰. 지원단에 가져가면 돈으로 바꿔주는 아주 단순한 물건. 그저 굶거나 얼어 죽지는 말라는 왕국의 사소한 배려.


"뭐야, 줘봐. 나도 함 보자."


나는 다시 토큰을 가져가려고 엉겨 붙는 야우라를 막아냈다.


"이걸 지금 돌려주겠다고?"


그러면서 슬리체와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하도 겪다보니 슬프게도 이 정도는 이제 거뜬해졌다.


"너희가 미력의 돌을 가져왔으니 말한 대로 용사 토큰을 돌려주는 것뿐이야."


거 참, 엄청나게 친절한 얘기였다.

좋아. 나쁘지 않았다. 빼앗긴 물건도 되찾았으니 여기서의 볼일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한 가지 걸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면 그건.


"글리 캐스트는."


가져간 녀석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다른 녀석이 와서 전해주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리는... 그 여자랑 같이 있을 걸."


그 여자라면.


"프리실라?"


내가 되묻자 슬리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아까 글리의 얼굴이나 분위기를 생각하면 할 얘기가 꽤 많아 보이긴 했다.


"그 문은 다시 닫을 거냐?"


혹시나,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 문이 어떻게 되든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


놀랍게도 슬리체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야, 레이크. 쟤 좀 수상하지...?"


토큰을 가져가기는 포기한 야우라가 슬쩍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대로였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태도가 변할 수 있을까.


"무슨 꿍꿍이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반 랜드레이가 말했다. 녀석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난 글리만큼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프리실라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뿐이야."


슬리체가 말했다.

그걸 들은 야우라가 갑자기 내 어깨를 내리 누르며 위로 나섰다.


"아 그럼! 내 칼! 내 칼 어디 있는지 알아? 그 왕덩치가 가져갔는데?"


웬만하면 앞으로 나서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구부러지는 등허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용무는 그게 다니까 난 갈 거야. 글리가 기다리고 있거든."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해!"


야우라가 벌컥 성을 내었다.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났는데!"


"너희들이 미력의 돌을 가져갔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


말문이 막혀버린 야우라는 바보 같이 입을 벌린 채 정지했다.

할 말이 없다는 건 말싸움의 패배를 의미했다. 이미 패배했지만 그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야우라는 한참이나 더 굳어있었다.


"레이크 너 때문이래."


하여,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음... 이게 갑자기 내 잘못이 된다고?


뭔가 받아치고는 싶었지만 나 역시 할 말이 없었기에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저 자식 말이 맞아. 그런 건 알아서 찾으면 돼."


반 랜드레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도 항상 들고다니던 긴 검을 빼앗겼다.


"너와의 결판은 나중으로 미루지. 지금은 더 신경 쓰이는 게 있거든."


반 랜드레이는 거침없이 슬리체 가까이로 갔다. 슬리체도 별달리 경계하거나 막아서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반 랜드레이가 다가오자 이제 나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먼저 복도로 나갔다.


우리는 잠자코 녀석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대체 어쩌겠다는 생각인지, 반 랜드레이 녀석의 머릿속을 도통 모르겠다.


"레이크... 제 스태프... 찾을 수 있겠죠...?


에반젤린에게 붙어있던 레샤가 이번엔 나에게 와서 스태프 대신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모르지. 딱 봐도 일반적인 물건은 아닌데 금고 같은 방에 넣어놨으면 뭐... 새 인연을 찾아 봐야하지 않을까?"


이 넓은 탑 어딘가에 있을 건 확실하지만 그뿐이었다.


"예에...? 안 되요...! 진짜 안 되는데...?"


하긴 얘는 스태프가 없으면 정령도 못 불러내는 특이한 정령술사였다.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원래 스태프란 도움을 주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닐 텐데.


"걱정 마세요.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레이크 님도 같이 찾아주실 거죠?"


에반젤린이 말했다.

도와주는 거야 당연히 해줄 수 있었다.

다만 이 탑을 샅샅이 뒤지는 건 또 다른 문제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였다. 하지만 난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말 한 마디로 부정 타는 건 이제 딱 질색이었다.


"그래! 내가 찾아줄게! 대신 레샤 너는 내 검을 찾아줘!"


힘이라도 주려는 것인지 야우라가 탁 치듯 레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꿔서 찾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요...?"


"네잎클로버 같은 거야. 가끔 찾으려고 하면 없는데. 길 가다 보면 뜬금없이 보이잖아. 필요 없는 사람한테 더 잘 보이는 거지."


와 그것 참 수색의 새로운 지평을 열 획기적인 이론이었다.


"지금이 그런 헛소리 할 때냐...!"


반 랜드레이였다.

우리가 이런 얘기하는 게 새삼 별 일인가 싶지만, 녀석의 용태가 심상치 않았다.


"앞을 봐라."


우리는 나름대로 앞 사람의 몸을 피해서 시야를 확보해 앞을 보았다.

어두운 복도, 그 그늘의 끝에서 딱, 딱, 딱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 지금 화가 났나...?"


슬리체가 말했다.


발소리가 들릴 정도의 커다란 거미가 복도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지금 괴성을 흘리고 있는 레샤의 머리보다 최소 두 배는 더 큰 것들이었다.


화가 나면 거미가 나온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도대체. 난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에오옹."


당연히, 고양이 소리를 내는 거미 같은 것도 들어본 적 없었다.


작가의말

오늘 오후 10시까지는 한 편 더 올라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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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0 6 19쪽
206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1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4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5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2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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