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판타지

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최근연재일 :
2023.06.27 01:06
연재수 :
327 회
조회수 :
102,785
추천수 :
2,395
글자수 :
2,515,552

작성
18.10.15 23:06
조회
193
추천
6
글자
19쪽

34. 헛것이야(10)

DUMMY

옛날 이야기 중엔 그런 게 있었다. 숲에 들어갔던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걱정이 된 사람들이 샅샅히 뒤져도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결국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어느덧 모두 그 사람을 잊어버린다는 것.


어떤 뚜렷하고 명확한 배경이 있는 건 아니었다. 굳이 숲이 아니어도 되었다. 장소는 안개 가득한 호수가 될 수도 있었고 음침한 늪이 될 수도 있었으며 고기를 잡으러 떠난 어선의 위일 수도 있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남자가 있었다더라, 그런 여자가 있었다더라. 소년이, 처녀가 혹은 노인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 모두가 정령을 만났다고 떠벌리며 다녔다.


하아, 어릴 땐 그런 이야기 하나도 안 무서워했는데.


만약 정말 그랬다면, 정령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라면, 이 세상에 정령술사 같은 직업이 있다는 게 이상했으니까. 그러니까 세상이란 참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술래잡기에서 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한다고? 언제까지. 계속?


레샤는 더 생각해볼 것이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시작하면 질릴 때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정령이랑 사람이 가지는 그... 생각이라던가... 그런 게 많이 달라서... 네. 웬만하면... 그...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띄엄띄엄 구멍이 많은 설명이었지만 그런대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시간관념이 다르다는 것도 포함된 이야기겠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럼 난 사막에 빠지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건 진짜 좀, 죽을 거 같은 기분인데? 그거만큼은. 어떻게 좀, 안 되나...?"


떨어지는 꿈은 키가 큰다고 하던데 하루에 한 번이면 됐지 두 번 꿔서 두 번 씩이나 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급하게 더 크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런 의미에서 나보다는 얘가...

나는 레샤와 내 키 차이를 새삼 다시 가늠해보았다.


"암만 절 쳐다봐도.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바라보는 내 눈빛의 어떤 차이라도 느껴지는 것인지 레샤는 삐딱하게 날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간다곤 해도, 세계 자체가 똑같이 만들어질진 저도 몰라요. 레이크가 겪어보면 그 때 알게 되겠죠."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하네 정말.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쌀쌀맞게 들리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고 이건 날붙이와 불꽃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이야기와 비슷했다.


"적어도 떨어지는 거랑 어디 빠지는 거랑 괴물 사마귀를 만나는 건 빼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제가 어떻게 못한다니까요...!"


"알았어."


나는 살살 웃으며 물러났다. 농담은 그만할 때도 되었다. 심볼을 빼앗고 제단을 만들어 종을 울리면 여왕이 이긴다.


"그런데 종을 울린다는 건 뭐야?"


시간이 남아도는 녀석들이니 종을 만들기라도 한다는 건가?


"표현이 그럴 뿐이지 그런 건 그냥 그 때 그 때 정하는 거예요. 아마 지금은... 뭐... 음..."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인지 레샤는 시선을 피했다.


"...보면 알겠죠."


"너 진짜 여기 와서 아무 생각없이 놀기만 했구나."


"저도 정신이 없었다고요...!"


그래, 노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나는 민망함에 몸을 떠는 레샤를 더 괴롭히진 않았다. 그럴 생각이 없기도 했고 안겨있는 회색 레샤가 또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 날 불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왜왜, 왜 또."


회색 레샤는 엄청난 속도로 뭔가 말하기 시작했다. 입술이 엄청나게 빠르고 또 많이 움직이고는 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답답했다. 답답하기는 이 녀석도 마찬가지일 건지라 회색 레샤는 날 넘어뜨릴 기세로 제가 팔을 걸고 있는 내 목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갈거녜요."


레샤가 말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인고.


"더 안 놀고 갈거녜요. 좀 더 놀다 가래요."


"얘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묻자 레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 혹시 야우라 같은 애냐?"


"약간은요...? 약간은."


약간은 커녕 더한 부분도 있었다. 이쯤되면 안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서 내려올 때도 되지 않았냐고.


"야, 너희들 식으로 조금만 더 놀다가는 난 늙어 죽어."


그러자 회색 레샤는 심통이 난 얼굴로 더 난리를 피웠다. 어린애 같은 고집에 떼쓰기라니 그렇게도 같이 노는게 좋은 걸까.

글쎄, 놀면 재미야 있겠지만 늙어죽을 때까지 그러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가만히 좀 있어라, 레샤! 응? 늙어 죽기 전에 목 뽑아서 죽이려고 그래?"


소리쳤던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예에...? 제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가만히 있다가 돌을 얻어맞은 진짜 레샤가 맹하니 되물었다.


"아니. 너 말고 얘. 그 누구야, 그래! 실프! 얘가 날 잡고선 놔주질 않으니까!"


"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래요...? 거기가 좋다는데 그냥 놔두면 되지...?"


"아니 너한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내 입장에선 네가 나한테 안겨가지고선 부비적 대고, 뺨에 뽀뽀하고, 난리도 아니라니까! 정령이 무슨 개도 아니고!"


그러니 이해좀 해달라는데, 정작 레샤는 이해는 커녕 무슨 망측한 꼴을 보기라도 한 것인지 홍당무 같은 얼굴로 왈칵 소리쳤다.


"지금 즐기고 있는 거죠...! 이 변태...!"


"넌 또 무슨 소리야!"


"내려놔요, 얼른...!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겁니까...!"


결국 레샤는 힘과 말로 실프를 얼러 나에게서 때어내었다. 여기서는 정령에게도 완력이 통하긴 하는 구나. 하긴, 알기 전에도 위화감 없이 지내고 있었으니 당연하게 당연한 거였다.


강제로 두 발을 땅에 딛게된 회색 레샤... 아니 실프는 뾰루퉁한 얼굴로 다른 두 녀석에게 가서는 또 자기들끼리 들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내 욕이라도 하는 걸까. 알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졸린 눈을 하고 있는 셀라임이 관심 없다는 건 확실했다.


짐덩이가 떨어져 나가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비교적 전보다 의욕적이게 되었다. 그래, 나도 그렇고 레샤도 그렇고 지금은 꽁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레샤가 왜 기분 나빠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도 여자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에...?!"


"여자, 애, 겠지."


나는 귀찮은 날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말했다가 레샤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그럭저럭 선은 넘지 않은 듯 보였다.


"뭐든간에요...!"


"내가 너한테 개같다고 한 건 아니잖아."


"됐어요. 가서 제 스태프나 가져와요...!"


레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저 아래의 지어지고 있는 제단을 가리켰다.

뭐 그거야 예정되어있던 일이기도 하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중요한 건 방법이었다. 여왕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양이 병사가 저렇게 많이 지키고 있는데, 그걸 쏙 빼내어 가져오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우리가 항상 하는 거 있잖아요."


그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레샤가 말했다.

항상하는 거라.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취하는 거죠."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취한다. 그 말인 즉슨 무언가를 내주고 스태프를 가져온다. 우리가 내줄 수 있는 건 옷가지와 몸뚱아리밖에 없었다. 하물며 옷을 벗어준데도 받지 않을테니 남은 건 몸 뿐이라는 거다.


"우리는 미끼 쓰는 거 밖에 작전이 없냐? 달리 다른 건 없는 거야?"


사실 그 미끼 작전이라는 것도 제대로 계획하고, 또 계획대로 된 적이 없었다. 아마 우리는 계획과 거리가 먼 것일수도 있었다.

뭐 어쩌겠는가, 달리 생각나는 방법도 없고 시간을 끌어봐야 우리에게 좋을 것도 없었다. 나는 약속된 것처럼 주먹을 들어 레샤에게 보였다.


"뭔가요...?"


뭐냐니, 그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사람에게 말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한 마디 한 마디가 천금 같고, 후에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였다.

나는 당당히 들판 앞에 섰다.

당당함, 처음부터 이렇게 당당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떻게 어떤식으로 하느냐에 이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가위바위보 하자고 하지말고 처음부터 내가 미끼를 하겠다고 했으면 결과는 똑같지만 폼이라도 나지 않았겠느냐, 그런 얘기였다.


고양이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나는 이내 숫자 세기를 그만두었다.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숫자를 세면 뭐할거냐고. 어차피 도망갈 건데.


갈 수 있겠지?

그래 갈 수 있을 거야.


나는 돌도마뱀에게서도 도망친 전력이 있는 어마무시한 동네 청년이었다. 단점이라면 꿈을 꿀 때 칼 같은 건 매고 오지 않는다는 것 정도? 나쁘지 않았다. 만약 깨어나서 하늘그림으로 돌아가면 그거부터 팔아버려야지. 삶에 도움이 안 되었다.


"야아!"


나는 그 울분을 담아 크게 소리쳤다. 저만치 떨어져있던 검은 고양이 병사들이 행진을 멈추고 일제히 날 보았다.

와.

그건 제법 짜릿한 경험이었다. 이내 날 발견한 녀석들은 이쪽을 창을 겨누고 경계했다. 개 중 깃털 달린 모자를 쓴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살펴보았다.

그러고선 소리쳤다.


"그웨에엥!"


물론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저 녀석들은 어느 급이 되면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슬금슬금 도망갈 시기를 재고 있는 와중에 대뜸 그 모자 쓴 녀석이 혼자 앞으로 나섰다.


"우웽, 그웨엥!"


그리고는 무어라 막 울기 시작했다. 나에게 뭔가 바라는 거 같긴한데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내가 적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그 다음은 오리무중이었다. 내가 계속 알아듣질 못하자 녀석은 화가나는 건지 꼬리와 털을 세우고 더 격하게 울어대다가 대뜸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이쪽으로 던졌다. 녹여서 다시 쓸 수 있는 물건을 쓰레기라며 버린 건 아닐테고. 품질이야 어쨌든 주긴 했다는 것이니 나는 바라는 대로 검을 주워 들었다.

고양이 손이라는게 이런 걸 뜻했던 것인지 조악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집도 불안하게 흔들거렸고, 어깨나 허리에 걸수 있도록 고리에 묶은 끈도 헐거웠다.


"그웽! 이웨엥!"


우렁찬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모자 쓴 녀석이 어디선가 또 검 하나를 가져와서는 내게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서서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큰소리 내면 그게 으름장이지.

흐름으로 봤을 때, 즉 내가 책을 통해 쌓은 간접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저건 한 판 뜨자는 것 같았다. 일 키우지 말고 자기 선에서 정리하겠다, 이건가.

으름장에 이어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은 표정을 보자니 늠름함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젠 하다하다 고양이까지 나한테 결투를 신청하네.


이건 뭔가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였다.

헬레나 아줌마라도 찾아가서 얼굴이 잘못된 거냐고 묻기라도 해야 만족할 건가.


"암만 못해도 내가 고양이정돈 이겨!"


나는 검의 옆구리를 잡고 녀석의 이마를 겨냥해 던졌다. 뽑을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다. 그런 건 뽑으면 이미 지는 거라고!

투창처럼 곧게 날아간 검은 정확히 노렸던 부분에 꽂혀 들어갔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모자를 떨어뜨리며 쓰러졌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으!"


녀석은 뒤로 고꾸라져서 정신을 잃었다. 검도 뽑기 전에 어디 감히 고양이 따위가 인간에게 덤빈단 말인가. 안 되지. 그럴 순 없는 거였다. 성공의 감격도 잠시. 생각해보면 아직 고양이 병사들이 한참 남아있었다, 한참.


아, 그냥 일대 일을 할 걸 그랬나?


동료가 당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간 것인지 앞다리에 흰 손수건을 묶고있는 고양이 두마리도 더 추가되어 쓰러진 녀석을 들고 갔다. 이윽고 다른 검은 고양이들도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작전대로라면, 그 놈의 작전대로라면 이제 녀석들이 나에게 정신이 팔려서 마구 달려들어야하는데, 고양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찔끔찔끔, 한 걸음도 아니고 반걸음씩 전진해오는 모습이 누굴 닮아서 그런진 몰라도 너무 소심했다.


그러는데 도망쳐버리기도 뭣해서 준비만 하고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누가 내 등을 마구 두드렸다. 돌아보니 회색 레샤였다. 아니지. 아니, 뭐. 뭐라고 부르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쨌든 걔가 와 있었다. 고양이와 날 가리키며 뭐라뭐라하는 걸 보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끼 주제에 지지부진하고 있는 게 맞긴한데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거듭 나무라던 회색 레샤는 대뜸 자기만 믿으라는 듯 제 가슴을 팡팡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고양이들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물론 들리지는 않았다. 다만 얼굴 표정을 통해 그 의미를 대강 가늠할 수 있었는데 누가 봐도 놀리고 있는 거였다. 혓바닥 내밀고 고개를 마구 터는가 하면 조잘조잘 입이 움직이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곧 화가 난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회색 레샤는 어떠냐! 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대뜸 내 허리춤을 끌어안으려 했다. 나는 그런 회색 레샤의 이마를 밀어 막았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다.


누구 하나가 첫 발을 떼자 고양이 병사들은 물밀듯이 밀여오기 시작했다. 개 중에는 창까지 버리고 네 발로 뛰어오는 녀석도 있었다.


"야, 너넨 적당히라는 걸 모르냐?!"


회색 레샤는 소리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나보다도 앞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도 뒤늦게 그 뒤를 따랐다. 뒤를 볼 수는 없었지만 고양이 발소리도 수가 많으니까 천둥이 치는 것처럼 쿵쾅대었다.


생긴 것만 레샤지 레샤답지 않게 날으는 깃털마냥 빠르게 달리던 회색 레샤는 대뜸 공중에서 빙글 돌아 고양이들을 마주보고 멈춰섰다. 무심코 지나쳤던 나는 얼른 따라 멈춰섰다.


"아니 왜 멈춰!?"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상황파악이 덜된 건지. 회색 레샤는 달려오는 고양이 무리를 보고 있었다. 네발로 뛰어오던 녀석들이 앞섰고 창을 든 쪽은 뒤편에 밀려나 있었다.

이대로 부딪치기만 해도 큰일인데 회색 레샤는 여유를 부렸다. 더 안 부추겨도 되는데. 아니 부추기는 게 아니었다. 그런거라고 하기엔 아까처럼 아니꼬운 표정을 짓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허공을 쓸었다. 동시에 비정상적으로 강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그리고 불꽃이 번쩍였다. 화염은 말라비틀어진 밧줄을 태우는 것처럼 일정한 길을 따라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강렬한 열기에 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깜짝 놀란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불길이 흘러지나간 자리엔 새카맣던 털이 더 새까맣게 그을린 고양이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창을 든 녀석들은 앞에서 벌어진 일에 놀라 더 다가오지 못하고 대치했다. 녀석들이 경계하고 있는 방향엔 다른 두명의 레샤가 있었다. 특히 바닥에 눌러 앉아 무심한 눈으로 불꽃 트림을 하는 빨간 레샤가 주 대상이었다.


'꺼억.'


그런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들린 것처럼 착각하게 할만큼 시원스레 작은 불꽃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아주 건방지게 날 올려다보았다.

꿈 속이라 그런건진 몰라도 바깥 세계에서보다 훨씬 화력이 강했다.

빨간 레샤는 주저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내가 양팔만 벌려 뻗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챈 난 기꺼이 그 애를 일으켜 세워드렸다. 내가 감히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었기에 옷을 털 때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말끔히 흙을 털어냈다.


아직도 쓰러져서 신음하는 고양이들. 파란 레샤가 손을 휘젓자 그 녀석들의 위에서부터 물이 쏟아져내렸다. 물벼락을 한 번 얻어 맞은 녀석들은 멀쩡하게 일어나 부리나케 뒤로 도망갔다.


빨간 레샤가 앞으로 한 걸음 나가자 고양이 녀석들이 전부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더 나가자 뒤가 막혀있는데도 자기들끼리 밀고 부대끼며 더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가는 척 세게 발을 구르자 고양이들은 혼비백산 해 울음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고 펄쩍 뛰어오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전부 살펴보던 빨간 레샤는 피식 웃더니, 날 보며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잘은 몰라도 얘는 정말 건방... 아니 도도한 분이었다.


고양이들의 아우성은 계속 됐다. 그게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건 아우성이 뒤에서부터 더 커지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였다. 아우성은 점차 아우성이라기보다 비명처럼 들렸고 원인 모를 굉음도 함께 들리기 시작했다. 지면이 들썩이고 고양이들이 튀어올랐다. 그건 튀어오른 게 아니었다. 튕겨져 나온 거였다.땅이 솟아올라 퍽 터지고. 부풀어터지고 날카롭게 일어났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며 거대한 뱀처럼 고양이들을 휩쓸며 쇄도했다. 쇄도라는 건 그럴 때 쓰는 말이었다. 튀어나가는 바위의 파편과 고양이들을 헤치고 날아온 건 녀석들의 여왕이었다.


여왕은 처음에 본 것과는 달리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레샤와 비슷한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차이라면 조금 짧았다. 역시 이 녀석도 레샤가 가진 정령 중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녀석. 흙과 모래의 정령. 이름이 뭐였더라. 그리트랬던가.


"감히 여왕의 부하를 괴롭히다니 무엄하다!"


그리트는 타고 온 바위의 벽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말했다.


"아니, 네가 더 심하게 했거든!?"


암만봐도 우리보다는 저 녀석이 이쪽으로 오면서 날려버린 고양이가 훨씬 많았다. 그야말로 날려버렸다.


그리트는 내 말은 듣고 싶지도 않다는 것처럼 팔을 저었다.


"약속한 거보다 힘을 더 쓰는 게 어딨어. 너희들 마음대로 하지마. 여왕은 나야!"


다른 레샤 셋은 저마다 뭐라뭐라 대꾸했다.


"레샤가 돌아간다고 했다고? 왜? 좀 더 놀다가지.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 줄 알고."


흘러가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눈살을 찌푸리던 그리트는 희번뜩 날 보았다.


"이 인간, 때문에? 우리랑 노는 것보다 더 중요하데?"


대화를 하는데 한쪽의 소리만 들리니 도무지 맥락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결론은 언제 나는 거야.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안 끝났는데? 이번 판을 내가 이기면 다시 하자고 할거야. 그리고 또 내가 여왕을 할거고. 그럼 계속 놀 수 있어. 너희도 그런 생각으로 날 여왕으로 만든 거였잖아? 뭐? 꼭 그럴 필욘 없다고? 그건 너희들은 바깥에 나갈 수 있으니까 하는 얘기겠지! 가끔은 나도 펑펑 놀고 싶단 말이야!"


화가난 걸 전혀 감추지 않고 얼굴에 드러내던 그리트는 곧 그 결론을 내주었다.


"됐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내가 여왕이니까! 먼저 규칙을 어긴 건 너희들이야. 이제부터 안 봐줘? 나중에 불공평하녜 마녜 그런 얘기 하지마아?!"


그리트가 손을 올려뻗어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쾅! 하고 지면이 솟구쳐 올랐다. 솟아올랐던 바위는 순식간에 모래가 되어 공중에 흩뿌려졌다.

아주 잠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 무엇도 날 구속하지 않은 감각이란 정말이지 가슴이 허할만큼 신선했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이제 남은 건 추락뿐이었다.


작가의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7 40. 연꽃이 자라는 곳(1) +7 19.07.28 128 4 20쪽
226 P.S 몽롱하고 선명해 19.07.22 94 4 12쪽
225 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6) +1 19.07.20 101 5 21쪽
224 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5) +2 19.07.19 95 5 14쪽
223 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4) 19.07.15 99 4 20쪽
222 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3) +2 19.07.02 110 6 14쪽
221 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2) 19.06.30 92 6 17쪽
220 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1) 19.06.27 128 6 15쪽
219 38. 물주지 않아도 돼(5) 19.06.23 114 6 19쪽
218 38. 물주지 않아도 돼(4) +4 19.06.17 103 5 17쪽
217 38. 물주지 않아도 돼(3) 19.06.15 97 5 14쪽
216 38. 물주지 않아도 돼(2) 19.06.08 88 6 19쪽
215 38. 물주지 않아도 돼(1) 19.06.05 87 5 16쪽
21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1) 19.06.02 103 6 18쪽
213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0) 19.05.30 87 5 20쪽
212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9) 19.05.25 102 5 17쪽
211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8) 19.05.20 93 5 19쪽
210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7) +1 19.05.10 113 5 16쪽
209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19.05.09 114 6 20쪽
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0 6 19쪽
206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1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4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5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2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