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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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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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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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30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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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0)

DUMMY

"뭐...? 그게... 무슨 뜻이니, 아르센?"


프리실라가 조심스레 되묻고 있었다.


"어? 제가 뭔가 이상하게 말했나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누구도 아르센 핸드메인을 다치게 할 순 없어요. 그 말엔 당연히 당신도 포함되어있죠. 누나."


어린 꼬맹이는 방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뭔가 기대대되는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함박미소를 짓고는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즐거울 일은 없을 것이다. 기대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지금의 아르센에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는 건 나도 알만했다.


"우리, 뭐 할까요?"


아르센이 말했다.

모두에게 묻는 것도 같았다. 적어도 놀자고 하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뭘 하는 게 좋을까요?"


대꾸가 없자 다시 물었다. 몇 번씩이나 물어도 대답해주는 이가 없자 아르센은 눈썹을 들썩였다.

저런 표정 변화들도 누가 알려줘서 하는 걸까.


"저는 누나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좋아해요. 근데 지금은 누나가 그림을 그리지 않네요. 실은 그다지 하고 싶지도 않지만. 거짓말은 하면 안 되니까."


아르센은 침묵 속에서 홀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조용히 계시네요? 왜죠? 아하, 그래요. 저랑 같은 거군요. 다행이에요. 전 저만 그런 줄 알았거든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뭘 할지 다 같이 고민해볼까요?"


거기까지만 해도 아르센은 명랑한 소년처럼 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왜... 왜 다들 아르센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죠? 아르센은... 영특하고 예의바른 아이라서 누구도 사랑해마다하지 않는데. 왜... 아!"


뭔가 떠오르기라도 한 걸까, 아르센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굴려 우리 모두를 한 번 슥 둘러보았다.


"그래요. 당신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르센에게 냉담한 거죠. 이제 알겠어요. 그리고 뭘 해야할지도 알겠네요."


비로소 궁금증이 해소된 듯 아르센은 환히 웃었다.


"여러분들을 전부 내쫓으면 되겠군요. 저는 아르센 핸드메인이니까. 누나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해요."


아르센이 막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아르센! 잠깐만...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러지 말고. 이리와서 누워보겠니."


프리실라의 목소리에 아주 잠깐 멈칫했던 아르센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아뇨. 누나. 이건 누나를 위해서기도 해요. 전 지금 멈추어선 안 돼요. 그건 아주 위험하죠. 알고 있어요. 영특하니까."


도리어 녀석은 프리실라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리 오세요. 누나."


아르센의 주의가 프리실라 쪽을 향해 있는 동안 나는 얼른 레샤에게 물었다.


"야, 아직도 못 찾았어?"


그까짓 나무 막대기 뭐 얼마나 꽁꽁 숨겨져 있을 거라고 아직도 못 찾는 것인지 나는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으... 그러니까..."


레샤는 재촉에 힘입어 더 눈을 부릅뜨고 둘러보았다.

나도 같이 찾아보고자 쭉 둘러보니 확실히 눈에 확 띄지는 않았다.


그래 그런 잡동사니와 구분되지 않는, 쉽게 말해 그냥 잡동사니처럼 생긴 막대기니까 찾기가 더 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기요!"


레샤가 내 등자락을 당기며 한 쪽을 가리켰다. 책상 위에 뉘어져 있는 짧은 작대기. 나에겐 그게 레샤의 스태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프리실라가 급작스럽게 그쪽으로 달려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실라보다 그쪽에 더 가까웠던 아르센이 먼저 그 자리를 점거했다. 녀석은 손을 뻗어 레샤가 가리켰던 작대기를 잡았다.


"그럴 순 없죠."


가려져서 그렇지 들고보니 그 전모가 기다란 검푸른색 막대기, 레샤의 스태프가 맞았다.


"누나는 이걸로 절 깨웠죠?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위험한 물건은 이제 필요없어요. 아르센이 있으니까."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럼 우리한테 줘."


나는 슬쩍 끼어들었다.

빼앗아가 놓고 필요없다니. 얼마나 고마운가. 세상 이만큼 고마운 게 없었다.


아르센은 빙글 돌아 이쪽을 마주보고 섰다.


"당신들. 아직 있었군요. 지금 누나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상대해드려도 될까요?"


"웃기고 있네...! 당장 스태프 내놔 이 도둑놈들아앗...!"


내가 말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역시 내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샤는 적대해 마다하지 않는 눈으로 아르센과 프리실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저녁 잔치를 위해 달궈놓은 찜기를 한 입에 삼킨 것처럼 열화를 토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왜 내 뒤에서 하냐고.


조금 지나자 시선을 느낀 것인지 레샤가 고개를 슬쩍 들어 날 보았다.

저 믿음 가득한 눈빛. 쟤는 이럴 때만 그랬다.

나는 레샤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당겨 밀었다.


"아! 뭔가요, 갑자기...? 방금 전까지 괜찮았잖요...! 근데 갑자기 왜 그러냐고요...! 잠깐만요, 레이크. 잠깐만요....! 레이끄으...!"


깜짝 놀란 레샤가 아득바득 버텼다.


"앞에서 하라고, 앞에서!"


결국 힘에 못 이겨 앞으로 나서게되자 레샤는 아예 내 몸을 뒤로 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 걸음 차이면서...!"


그러고는 잠깐 손을 놓은 틈사이에 도로 뒤로 도망쳤다.


방패 앞에선 한없이 강해지는 애인데 왜 기사 같은 거 안 하고 정령술사를 하겠다는 거야.

하기사 저 체구에 맞는 갑옷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나는 다시 날 앞으로 밀어내는 레샤의 손아구를 억지를 버텨내며 생각했다.


그런 실랑이를 하는 사이 아르센은 조용히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난 스스로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그 순간 감쪽같던 아르센이 소년이 아니라 인형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녀석은 이내 다시 활짝 웃었다.


"역시 당신들은 나중에 보죠. 지금은 누나가 먼저니까."


아르센은 레샤의 스태프를 지팡이처럼 짚어가며 프리실라에게 다가갔다.

어디까지나 모양새는 걷는 것 같았지만 뒷걸음질 치는 것보다도 더 빨리 다가가 그 팔을 덥썩 잡았다.


"아, 아르센!"


"왜 불러요. 누나?"


프리실라가 뿌리치려 했지만 아르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도 나는 내가 뭘 해야할지 생각했다. 우습게도 아르센과 같은 고민을 한 셈이다. 아르센이 가지고 있는 스태프를 되돌려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프리실라를 도와 뿌리치게 해줘야 할까, 아니면 반대로 아르센을 도와줘야 할까.


"레이크...! 저 사람 괜찮은 거예요...?"


아르센이 프리실라를 붙잡은 모습이 꽤나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인지 레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얘는 보고 싶지 않은 걸 볼 때 자주 그랬다.


"뭐... 괜찮지 않을까?"


모양새를 보자면 불쌍하긴 하지만 자업자득이었다. 잘은 몰라도 아르센은 프리실라가 계획했던 대로 만들어지고 움직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


때마침 도와줄 녀석도 나타났다.

토토 란드가 나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으니 나타났다고는 할 순 없어도 나쁘지 않은 시기에 튀어나왔다.


"야! 프리실라 양이 놓으라고 하잖....!"


아르센의 팔을 붙잡고 말하던 토토 란드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르센이 팔을 떨쳐내자 녀석은 맥없이 뒤로 밀려났다.


고꾸라져 넘어졌던 토토는 벌떡 일어나선 크게 웃었다. 글쎄 본인은 지금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건 무안해서 괜찮은 채 하는거였다.


"좋아, 너 큰 실수를 한 거야! 널 내 새로운 무기의 제물로 삼아주마!"


기세등등하게 외친 토토는 입고 있던 겉 외투를 벗었다. 제대로 한 판 붙어보려고 그러는 것인가 싶더니 녀석이 내미는 건 어깨였다.


이제보니까 어깨에 가죽 끈 같은게 묶여있었다. 가죽과 버클을 이용해 어깨를 얽어 고정되는 물건이었는데 그게 녀석이 말했던 무기인 모양이었다.


"이 견대를 쓰면 순간적으로 몇 배나 되는 힘을 쓸 수 있지. 잘 봐라!"


토토가 아르센의 어깨를 덥썩 잡아당겼다.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인지 큰 나무처럼 꿈쩍도 않던 아르센이 이번엔 당겨져 비틀댔다.

그 기세에 이어 토토가 아르센을 양손으로 잡았다.


훅!


그리고 힘껏 이곳까지 날아왔다.

아니 날아왔다고 하기엔 좀 뭣했다. 그렇게 말하기엔 이건 너무 모양이 빠졌으니까.

녀석은 거꾸로 뒤집어져서는 이곳까지 날아와, 쳐박혔다.


"몇 배의 힘을 낼 수 있다며?"


나는 엎어져선 끙끙 앓는 토토에게 말했다.


"그래 너 같은 놈은 평생 볼 수도 없는 그런 물건이지...!"


토토는 자빠져서도 밉살스러운 소리를 했다.

못 보긴 뭘 못 봐. 지금도 실컷 보고 있고만.


"아아! 레이크, 레이크, 레이크으...!"


레샤가 날 엄청나게 때려댔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아르센이 토토 란드를 상대하는 사이 손아귀에서 풀려났던 프리실라가 아르센에게서 벗어나 스태프를 챙겨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쫓아야했다. 하지만 쫓는다 해도 문제였다. 아르센은 겉으로 보기엔 어린 소년 같은 인형이었지만 토토 란드를 훌쩍 날릴만큼 강한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 완력.


"아이윽... 그 자식...!"


당한 토토 란드는 여전히 못 일어나고 있었다.

강한 완력.

나는 녀석의 어깨에 눈이 갔다.

역시 맨손으로 가는 것보단 뭐라도 있는게 낫겠지.

난 녀석의 어깨 보호대 아래에 손을 넣어 잡아당겼다.


"야, 너, 너! 뭐하는 거야...!"


토토 란드 녀석이 무어라 하든 일단 당기고 봤다.


"좀 빌려줘봐. 많이 아파보이는데 대신 누워서 쉬고 있어. 알겠지?"


저항하는 토토의 팔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견대의 버클을 열어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가슴팍을 살짝 밀어쳐주자 토토는 켁 소리를 내며 도로 바닥에 엎어졌다.

하여간에 뭔가 요령이 부족한 녀석이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보는 레샤의 표정이 범상찮았다.

얇게 뜬 눈 보고 싶지 않은 걸 본 그런 눈.


"왜? 빌린 거야."


변명. 아니 변명도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레샤는 말없이 문을 보았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자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르센을 발견하는 것은 쉬웠다. 녀석은 산책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차분히 복도를 걷고 있었다.


좋았다. 저 녀석이 저기 있다는 건 프리실라가 저 방향으로 갔다는 의미였다. 그건 좋았다.


하지만 좋지 않았다. 저 녀석이 저러고 복도 한 가운데에서 벋대고 있으면 들키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없었다.


거꾸로 따지고 봐도 대체 왜, 만들어 준 프리실라의 말도 듣지 않고 프리실라 본인도 무서워하는 것 같을까. 대체 왜.


"왜 저러냐고, 저거."


나는 함께 걷던 레샤에게 말했다.


"너무 똑똑해서 그런 거야."


하지만 대답을 한 건 레샤가 아니었다.

나는 그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팔을 휘둘렀다.

파리나 내쫓는 것 같은 움직임을 글리 캐스트는 가볍게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어우... 너무해. 글리가 뭘 잘못했다고?"


글리는 실실 웃는 얼굴로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히익...! 다닫다다...!"


숨죽여 말을 더듬던 레샤는 글리를 피해 내 반대편으로 숨었다. 하고 싶었던 말은 아무래도 당신! 같았다.


"넌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물었다.


"으음.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용사 님들의 노고 덕분이라고나 할까. 글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도 항상 감사하라고 배웠거든."


반 랜드레이는 두고왔다는 건가.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거기엔 슬리체도 있었다.


"그럼 아까 얘기는 무슨 뜻이야?"


"응? 무슨 얘기?"


"똑똑하다던가 뭐라던가 그런 얘길 했잖아."


"아아. 그거어?"


글리는 쿡쿡 웃으며 다시 내게 다가왔다.


"저거 말하는 거야, 저거."


저거, 글리는 아르센을 가리켰다.


"참 대단한 마법이지?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다니. 저런 걸 팔면 글리는 완전 부자가 될 거야."


"그런 건 얼마든지 있잖아."


"어우! 레이크는 뭘 모르는 구나. 프리실라의 인형은 다른 것들하곤 달라. 특히 담겨있는 게 다르지. 움직이는 인형은 얼마든지 있어. 시키면 하는 인형도 얼마든지 있어. 그치마안? 물어보는 인형은 없지. 레이크는 들어본 적 있어? 물어보는 인형. 혹시 있더라도 물어보라고 시켜서 묻는 인형일 걸?"


뭘 할까요? 라고 아르센은 분명 우리에게 물었었다.


"묻는다는 건 생각한다는 거야. 생각한다는 건? 스스로 할 일을 정한다는 거지. 흐후훗?"


글리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이야기한 것처럼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댔다.


"참 멍청한 짓이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인형은 그냥 고장나버린 거에 불과해, 레이크? 어디에도 쓸모가 없지. 그건 참 슬픈 일이야. 주인에게도... 그리고 인형에게도... 그래서 글리가 부숴줄까 해. 프리실라에겐 그간 신세진 것도 있고."


아니. 글리가 그렇게 말하는데에는 그런 고귀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알 수 있었다. 바보라도 어렴풋이는 상상해볼 법 했다.


"저 인형. 슬리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거지? 그래서 부수려는 거고."


내가 거꾸로 묻자 글리는 입을 다물고선 물끄러미 날 보았다. 할 말을 궁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관찰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날 뚫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 눈을 또렷히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녀석은 또 씨익 웃었다.


"레이크는 얘기가 정말 잘 통해서 좋아해."


그런 의미에서, 라고 덧붙이며 글리는 내게 바싹 붙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한 건하지 않을래? 글리는...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친구랑 같이 하면 정말 즐거울 거 같은데."


턱도 없는 소리였다.


"됐어. 우리가 필요한 건 스태프뿐이야."


"그치만 이대로는 프리실라를 찾기도 벅찰 텐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저건 프리실라를 지킬 거야. 뭐... 그 과정에서 벌레 몇 마리 정돈 밟아죽일 수 있지 않을까? 글리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글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라고 해서 토토 란드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지.

하지만 뭔가 못 미더웠다. 그런 내 기색이 여과없이 느껴지는 것인지 글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왔다.


"어우 정말 안 할 거야? 글리가 레이크를 위해서 이렇게 무기도 가져왔는데?"


어디서 꺼낸 것인지 글리는 내게 검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반 강제로 내 손에 쥐어넘겼다.


"그리고. 사제 님도 그랬잖아. 글리와 레이크는... 한 편이라고."


"에반젤린이 슬리체를 돌봐주는 동안, 이겠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 빠른 발소리. 그 순간 그게 왜 그렇게 또렷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그냥 글리의 말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모르겠다. 그냥 그 발소리가 매우 위협적인 느낌이라는 것만 기억났다.


콱!


서너 걸음 물러났던 자리에서 굉음과 함께 돌가루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 레샤는?


뜨끔했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놔, 놔, 놔, 놧, 놔줘요...!"


"어우... 그 땐 미안했다니까. 정말 아무 짓도 안 하려고 했어, 정말로. 말로만 그런 거야. 글리는... 가끔 말을 과격하게 하게 되거든. 본의가 아니라구."


다행히 레샤는 글리 캐스트가 데리고 있었다. 자길 인질로 삼았던 사람의 품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게 가루가 되는 것보단 나았다.


자기가 때렸던 벽을 한 참 보고 있던 아르센은 그 안에 박혀있던 팔을 푹 꺼냈다. 그리고는 한 박자 늦게 우릴 보았다.


"당신들. 아직도 있었군요."


"아니. 나가는 길이 어딘지 몰라서..."


구멍이 뚫린 벽을 보고 있자면 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무기라던가, 인형이라던가, 누나에 대한 얘기를 하던데요. 부순다는 건 뭘 말하는 거죠?"


아르센은 미소짓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글리는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사람은 싫더라!"


얘기가 채 끝나기 전에 글리가 아르센에게 달려들었다.

글리가 찔러 넣은 단검은 아르센에게 박히지 못하고 녀석의 팔에 막혔다. 글리는 약삭빠르게도 붙잡히기 전에 물러났다.


"굳이 당신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르센은 찢어진 소매를 살펴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우... 어떡하지, 레이크? 슐리체의 목소리로 저렇게 말하니까 진짜...! 짜증나는데."


글리는 서늘한 눈으로 날 노려봤다.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런게 아닌데, 라고. 하지만 소용없겠지.


실제로도 아르센은 레샤랑 내가 글리와 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해보는 수밖에.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 놈의 세상이 날 그렇게 만든다니까.


나는 글리가 줬던 검을 뽑았다. 검집은 아무데나 대충 던졌다. 내 것도 아닌데 알 바 아니었다.


"와! 글리랑 같이 할 마음이 생긴거야? 정말... 기쁜 거얼?"


그렇게 속 편한 소리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르센은 자기 자신과 자기 누나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텐더보다는 낫지 않은가. 덩치도 훨씬 작고 겉으로 보기엔 예의바른 애였다.


아, 근데 텐더도 겉으로 보기엔 정중했지.


나는 옆의 글리를 보았다.


"부숴버릴 거야... 부숴버릴 거야... 부숴버릴 거야...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릴 거야..."


녀석은 아르센을 흉흉히 노려보며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먼저 아르센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그 웃음이 무슨 신호였나?

전혀 모르겠는데!


아르센은 팔을 들어 내려찍히는 글리의 단검을 막아냈다. 아르센의 팔은 칼날을 그대로 미끄러져 튕겨냈다.


글리는 빗겨나간 검을 바로 잡아 이번엔 녀석의 옆구리를 베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옷만 잘려나갈 뿐 아르센의 몸에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검을 무서워할 리 없는 아르센이 팔을 휘두르자 글리는 몸을 무르며 자연스럽게 회전해 아르센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다시 뛰어들어 그대로 칼날을 아르센의 팔에 부딪쳤다가 아르센이 밀어내는 힘에 업혀 뒤로 물러났다.


나는 완전히 돌아서려는 아르센에게 있는 힘껏 검을 내질렀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아르센의 어깨에 부딪쳤다. 쇠가 울린다고 해야할까 쥔 손이 아파서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야! 이럴거면 망치를 가져왔어야지!"


나는 다시 돌아서려는 아르센의 등을 힘껏 밀어찼다.


"어우, 어디 용사 님은 거뜬 하길래 글리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글리는 용서해달라는 듯 씨익 웃었다.


"당신들은 예의라는 걸 모르는군요? 누나가 만들어준 옷이 전부 망가져버렸어요."


아르센은 슬리체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뭐 어때? 진짜 누나도 아니면서!"


글리가 아르센의 가슴에 단검을 찔렀다. 콰각, 하는 사람에게선 들릴 수 없는 타음이 들렸다.


아르센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외려 녀석은 글리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검을 치워냈다. 마치 저가 스스로 팔을 치우듯 자연스럽게 글리의 팔꿈치가 접혀들어갔다. 저대로 뒀다간 제 칼에 어디든 찔릴 판이었다.


어차피 내가 어지간히 건드려서는 꿈쩍도 않는 녀석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어떡해야 할까.

무지막지한 힘을 내는 인형을... 인형을... 인형은 인형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본 떠 만든 장난감.


어쨌거나 사람을 본 떠 만들었다면 필연적으로 사람과 비슷한 약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별 것 아니었다. 그저 녀석의 오금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결정한 순간 나는 아르센의 무릎이 접힐 부분을 꽉 눌러 밟았다.

예상대로! 라고 하기엔 반대로 내 무릎이 튀어나오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힘겨웠지만 아르센의 왼쪽 다리는 분명히 접혀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글리도 잡힌 손목의 검을 떨어뜨리고 그걸 반대 손으로 잡아 크게 그었다.


바닥을 짚고 업드린 아르센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다.


이번엔 제대로 타격이 들어갔나?

아주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나는 뒤로 물러났다. 글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센이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어우. 그래. 인형에겐 그게 훨씬 보기 좋네."


글리가 말했다.

그 정체는 나도 곧 볼 수 있었다. 뒤돌아 보는 아르센의 얼굴은 눈밑에 실금 같은 틈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다고 제가 화라도 낼 것 같나요?"


아르센은 여태까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아니? 글리는... 글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야."


작가의말

분량이 애매해져서 이후 부분을 완성한 후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에피소드 10편이라 숫자를 맞추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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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38. 물주지 않아도 돼(2) 19.06.08 87 6 19쪽
215 38. 물주지 않아도 돼(1) 19.06.05 87 5 16쪽
21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1) 19.06.02 103 6 18쪽
»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0) 19.05.30 87 5 20쪽
212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9) 19.05.25 102 5 17쪽
211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8) 19.05.20 93 5 19쪽
210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7) +1 19.05.10 113 5 16쪽
209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19.05.09 114 6 20쪽
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0 6 19쪽
206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1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4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5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8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3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7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1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2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5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7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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