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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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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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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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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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8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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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물주지 않아도 돼(2)

DUMMY

흔들흔들 걷는 것은 레샤의 버릇이었다. 사실 흔들흔들 걷는 것은 아니다 흔들흔들 걷는다고 하면 어린 아이가 나비라도 보고서 쫓아가는 것처럼 따뜻하게 들리지만 레샤의 걸음 걸이는 엄밀히 말해 가끔씩 멈칫대는 거였다.

흔들흔들, 멈칫멈칫.


눈을 내리깔고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가 발치에 뭔가 있다고 착각하면 깜짝 놀라서 저 혼자 발을 헛디딛는 것이다.

앞을 안 보고 걸으면 그런 일이 있곤 하지.


자주 저러는데도 넘어지지 않고 곧잘 걸음을 이어나가는 거 보면 숙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잘하게 되어서 어쩌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느릿느릿 걷는 것도 레샤의 특징이었다. 보폭이 작은 탓이다. 키가 작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애는 다리 길이를 감안 하고도 보폭이 좁은 편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느릴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따라가고 있는 우리가 답답해서 업어다 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같이 걸을 때는 몰랐는데 뒤따라가는 입장이 되니 죽을 맛이다.


왜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달팽이와 거북이가 시합을 하면 가장 먼저 쓰러지는 건 지켜보던 사람이라고.

가만히 숨만 죽이고 있다간 정말 숨이 죽는 수가 있었다.


우리와 같이 있을 때, 레샤는 의식해서 빨리 걸었던 걸까.

아니, 지금도 레샤의 걸음걸이가 갑자기 빨라졌다. 통상의 세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속도.

갑자기 왜 그리 바쁘게 가나 했더니 레샤가 한 일은 그냥 길 가생이까지 가서 슬그머니 벽과 하나가 되는 거였다.

벽에 착 달라붙어서는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가아마아아안히이이이...


"뭐야? 저기에 뭐가 있나?"


그 눈 좋은 야우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는데도 짚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글쎄?"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였다.


레샤가 어째서 벽에 바짝 붙어 꼼짝않게 되었는지, 얼마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저건 몸을 숨긴 거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한 것이다.


전부 세 사람이었다. 신기하게도 모두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후줄근한 옷차림이나 검과 몽둥이, 가죽으로 두껍게 챙긴 무구들로 봐서는 이제 막 마을로 들어온 용병처럼 보였는데 특히나 가운데 선 사람은 덩치가 산만했다.

레샤는 그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애의 머리 속에서 무슨 미래가 펼쳐졌었는지는 몰라도 우락부락한 세 남자는 자기들끼리 허허 웃으며 별 탈 없이 길을 지나갔다.


그야 그렇겠지. 지나가는 길 지나가는 것뿐인데 무슨 사건이 터지겠어.


어쨌거나 용병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완전히 지나가고 나자 레샤는 잠행 중인 첩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스윽 벽에서 떨어져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제 갈길을 계속 이어나갔다.


속도가 빨라질 때는 그렇다치고 거꾸려 느려질 때도 있었는데 그건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였다.

아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레샤는 걸음이 느려졌다. 그게 왜 그러는 것인지 본인에게 이유는 물은 적이 없었다. 괜히 맞을까봐이기도 했지만 대강 추측되는 것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마 아는 사람을 먼저 발견했을 때 어떻게 아는 체를 해야할지 고민되어 마주치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더 늘리려는 속셈일 것이다.


지금만해도 레샤에게서 약 스무걸음 남짓 앞에 에반젤린이 보였다. 스무걸음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겠나.


결국 레샤는 금방 에반젤린과 맞닥뜨렸다. 항상 눈에 띄지 않으려는 레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기는 하는 것인지 에반젤린은 약간 놀란 것처럼 먼저 레샤에게 다가갔다.


그 후로는 잠시 멈춰서서 대화를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유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에반젤린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다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의 이야기는 곧 끝났다. 레샤와 에반젤린은 서로 엇갈려 지나쳤다. 그건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벽에 바짝 붙었다. 내가 뭔 짓을 하는 건가 의아하게 쳐다보던 야우라도 알아챈 것인지 날 따라 벽에 붙어섰다. 우리는 서로 고개를 돌리고 가까운 땅이나 먼 벽의 흠집을 보았다.


"두 분, 여기서 뭐하세요?"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반젤린은 우리를 발견하고선 가까이 와 말을 걸었다.


야 레샤. 우리가 해봤는데 이거 안 된다. 다음부터는 다른 방법을 써라.


어쩌면 우리의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서 너무 오래 지켜봤던 게 패착이었다.


음. 뭐라고 할까.

나는 야우라를 보았다.

야우라는 딱히 숨길 것도 없지 않느냐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있지, 에반젤린! 에반젤린은 레샤가 안 이상해?"


"어... 음... 뭐가요?"


워낙 두서 없는 이야기에 의도를 넘겨짚던 에반젤린이 솔직하게 되물었다.


"잘 생각해봐. 뭔가 이상하지 않아?"


"글쎄요? 방금도 얘기를 해보니까 그냥 극장에 가는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런 거 말고. 뭔가 좀, 평소에 말야!"


야우라가 거듭 묻자 에반젤린은 하는 수 없이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거슬러 올라갔을까 에반젤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음... 그러고보면 요 며칠새에 식사량이 좀 줄으신 것 같아요."


식사량이 줄었다라, 나는 그 말이 섬뜩하게 들렸다.


"거기서 더 줄으면 그냥 안 먹는 거 아니야?"


원래도 조금 먹는 애가 거기서 더 줄면 그냥 굶어 죽겠다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더 마르실까봐 걱정이에요."


"몸매관리라도 하나?"


야우라는 손바닥으로 자기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아니 그니까 거기서 더 빠지면 죽는 거 아니냐고."


일단 살아서 숨을 쉬어야 맵시고 뭐고 의미가 있는 이야기였다.


"아아."


문득 에반젤린이 탄성을 내었다.


"그래서 두 분이 레샤 자매 님을 몰래 쫓고 있는 거군요. 뭔가, 큰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요."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지 에반젤린은 우리가 하는 '짓'을 아주 좋게 생각해주고 있었다.


뭐...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순 있겠지.


그냥 궁금해서라고 말하는 것보단 친구가 걱정되서라고 하는 게 흔히 말하는 대의명분으로도 훨씬 나았다.

또 물어봐봤자 레샤가 저가 숨기고 싶은 것은 절대 말해주지 않을 거란 것도 에반젤린은 어느정도 수긍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셋이서 레샤의 뒤를 밟게된 것이다.


반은 재미삼아 마냥 따라다닐 생각뿐이었던 차에 에반젤린이 가세하면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주제는 역시나 레샤가 왜 달라졌는가 하는 거였다.


예를들면.


"혹시... 무슨 병이라도 걸리신 게 아닐까요?"


에반젤린의 곧 죽을 병 설이나.


"아냐. 그런 거 말고 뭔가 엄청나게 좋은 일이 생겼나봐. 엄청난 돈이라던가 엄청난 정령이라던가."


야우라의 복권당첨 설 같은 게 있었다.


죽을 병이라는 건 동 떨어진 느낌이있었지만 그래도 대성한 레샤만큼은 아니었다.


뭣보다.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는거지 우리한텐 왜 그러는데?"


하고 되묻자, 야우라는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을 슥 보더니 손으로 입까지 가려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를 점점 모르는 체 하려는 거지."


그건 참신한 결론이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할 말이 없었다.


"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지! 응! 그렇고 말고."


야우라는 그 모든 이기적이고 정없는 행동들을 이미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에이 설마 그러시려고요."


"아냐, 내가 예전에 들었는데 큰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했어. 가야한다면 어쩔 수 없지. 보내주는 수밖에."


에반젤린이 말해봐도 야우라는 벌써 마음에서부터 레샤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보내주는 모습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그런게 아닐까 싶었다.


멋진 것에 대해서 사족을 못 쓰는 건 알겠는데 그런만큼 평소에도 좀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나는 야우라가 레샤를 보내는 마음을 한 편의 시구처럼 읊조리는 걸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뭐!"


고작 그것뿐이었는데도 내 머리속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야우라가 대번 주먹부터 들었다.


"어야! 저기 레샤 가버린다!"


나는 레샤가 있던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잠깐 딴소리 했다고 금방 모퉁이를 돌아 놓칠뻔 했다. 야우라가 한 눈을 판 사이, 주먹을 피해 도망쳤다.

다행히 레샤가 굼뜬 덕에 놓치지는 않았다. 헌데 에반젤린은 그걸 더 기이하게 여겼다.


"제가 지금 느낀건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글쎄 뭔가 다른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는데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이 길이... 음, 극장에 가시는 게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러고보면 그랬다. 처음 얼마까지는 극장을 가는 길이 맞았다.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으니 그건 분명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레샤의 경로가 바뀌어 어디 다른 곳으로 가고 있던 것이다.


더 빠른 길을 발견했다던가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레샤는 한 번 익숙해지면 계속 그것만 고집하는 편이었다.

전용 방패나 다름 없는 사람이 느낀 바이니 맞을 것이다.


그런 레샤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그건 다른 곳을 간다는 뜻이었다.


극장에 간다고 해놓고서 극장에 가지 않다니, 어디를 가려는 거지.

어쩜 저리 의심스러울까. 하하.

내가 웃었을 때 어째서인지 야우라도 똑같이 웃었다.


그 미묘한 기대심은 금방 푹 꺼져버렸다. 레샤가 간 곳이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레샤가 가는 몇 안 되는 곳 중에 제일 유력한 곳이긴 했지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올 필요는 없는 곳이었다.


제법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레샤를 따라 우리는 조용히 도서관 안에 들어갔다.


발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자세로 들어서는 세 명을 사서가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저 사람은 내가 예전에 여기서 반 랜드레이와 말다툼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멈춰서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는 것뿐이었다.


이쪽을 향해 긴가민가한 눈빛을 보내던 사서는 한참을 더 그렇게 보고 있다가 이내 자기 할 일을 하기 위해 책장 사이로 들어가버렸다.


우리는 허락 맡은 셈 치고 책장 사이사이를 보며 레샤를 찾았다. 무슨 책을 보러 온 건지 알면 어디 있는지 알기도 쉬울 텐데.


걔가 좋아하는 책을 모르겠다. 점성술에 관한 걸 많이 본다 싶다가도 가끔은 식물에 관한 책을 보기도 하고 그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책을 볼 때도 있었다. 내 방에서 본 소설의 후편을 찾을 때도 있었다.


책장을 하나하나 건너가며 사이사이를 살펴봐도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얘 어디갔어?"


나는 허탈함을 내뱉었다.


"혹시 걸려서 숨어버렸나?"


야우라도 바로 앞에서 유령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왜 거짓말을 하신걸까요...?"


에반젤린은 당장 레샤가 없는 것보다도 거짓말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혹시 짤린 거 아니야?"


야우라가 말했다.

본의 아니게 극장 일을 그만두게 되는 바람에 비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말을 해가며 도서관에 왔다, 라는 것이다.


"더 대단한 마법사가 극장에 온 거야. 그래서 레샤는 그만두게 된거지. 얼마나 분하겠어? 그래서 이 도서관에서 금지된 마법을 배워서 복수해주려는 거야."


"왜 그딴 게 도서관에 있어."


금지된 거면 불사르던가 어디 자물쇠 일곱개 달린 창고 안에 봉해져 있어야지.


"그게 더 재밌잖아."


내 의문에 대해 야우라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레샤는 마법사가 아니라 정령술사고."


내가 말했다.

얘는 수시로 그걸 까먹는 거 같았다.


"정령술사는 마법 못 배워?"


야우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줄은 몰랐다, 하는 것이 퍽 순진한 물음이었다.

하긴 못 배울 것이야 없지. 다만 배울 이유도 없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비켜."


돌연 끼어드는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한 발치 물러날만큼 놀랐다.

반 랜드레이가 그 야생동물 같은 눈을 번뜩이며 길을 터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 랜드레이 형제 님. 안녕하셨어요?"


길 터달라고 저따구로 말하는 녀석에게 인사를 해줄 용의를 가진 건 에반젤린밖에 없었다.


"뭐야. 너 아직도 여기 있었냐?"


나는 인사보단 그걸 묻고 싶었고.


"그러게. 나한텐 뭐라고 하더니 지는 맨날 놀러 다녀."


그건 야우라도 마찬가지였다.


클립핸즈에서 돌아온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여기 있는 걸 보면 이 자식은 맨날 말로만 바쁘고 실은 놀고먹는 게 분명했다.


"프리실라 핸드메인의 처분 때문에 그런 거다. 너희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마...!"


놀러 다닌다는 오명이 꽤나 기분 나쁜 것인지 반 랜드레이가 어금니를 물었다.

저런 얼굴로 사람을 처분한다고 하니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나와 무관한 일은 아니었기에 난 얼핏 지나가듯이 물었다. 무관하지 않다고 해도 딱히 더 관련되고 싶지도 않았다.

반 랜드레이에게 연행되는 동안 프리실라는 단 한 마디도 내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고 그건 다른 애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센이 부숴지고 난 후부턴 어딘가 고장난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이고 말을 하더라도 단답같이 매우 짧은 것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신경쓰인다고 하면, 내가 너무 바보 같잖아.


"우선, 이곳 경비대에서 지내면서 뮤리엘 비셔스의 감시를 받을 거다."


"감옥에 갇힌다는 거야?"


"비슷하지. 하지만 대우는 더 나을거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건 없거든. 다만..."


다만?


"그 인형을 만드는 기술이 아주 특별한 거라더군. 특별하다기보다도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게 위험한가? 골렘하고 똑같은 거잖아."


"골렘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라. 애초에 골렘의 신체는 마법으로 이루어졌고 마법으로 지탱하잖아. 명령을 따르는 그 지능조차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지. 난 잘 모르겠지만... 시키면 시키는대로 한다, 그게 마법이잖아? 하지만 네가 봤다던 아르센은 다르다더군."


반 랜드레이가 아르센의 잔해를 챙겼던 것도 확실히 기억났다. 왜 그런 걸 가져가려고하나 했더니 여러가지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르센을 본 기사단 마법사가 그러던데, 이건 엄청난 낭비라고."


"낭비?"


"고작 인형을 움직이기 위해서 이런 구조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핵으로 사용한 건 사람의 머리카락. 근데 왜 그렇게 큰 그릇이 필요한지 자기는 이해 못 하겠다고 하던데."


거기까지 말한 반 랜드레이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위험하다고 해놓고서 다시 만들어보라고 할 수도 없을 테니, 알 턱이 있나. 프리실라 본인도 자기는 그 탑에 살면서 인형을 만들고 옷을 짰던 것 외의 다른 기억은 하나도 없다고 하니 끝난거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레이크 아이힐데른."


그래 그렇구나.

특별히 해소된 것도 없고 보상을 받은 것도 없으며 뭔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난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야 그래서 말인데, 너 레샤 어디있는지 봤냐?"


나는 지난 일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쩌다보니 이 녀석의 이야기에 말려들어 레샤는 한참이나 놓치고 있었다.


"정령술사? 한참 전에 갔잖아. 사서한테 뭐 물어보기만 하고 그냥 나가던데."


반 랜드레이는 그렇게 대놓고 나가는 걸 어떻게 모르고 있느냐는 것처럼 한심스레 우릴 보았다.


"뭐어어?!"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린 또 다시 도서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사제인 에반젤린이 양해를 구하고 사과하지 않았다면 또 대문 앞에 이런이런 사람이 저런저런 소란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하고 공문이 붙을 뻔 했다.

동네 창피를 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레샤를 놓친 건 불행이었다.


"어쩌면 저희가 처음부터 잘못한 생각한 걸 수도 있어요."


에반젤린이 축 쳐진 분위기를 살살 달래보듯 미소지었다.


"레샤 자매 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먼저 도서관에 잠깐 들르고 나서 극장에 가려고 한 게 아닐까요?"


"걔가 굳이 그럴까?"


항상 말했던 대로라면 일을 끝내고 도서관에 가는 게 일반적인 레샤의 일과였다.

게다가 레샤가 사서에게 질문을 했다니, 왠지 뒤바뀐 일과의 순서보다도 그게 더 신경 쓰였다.


혼란스런 머리속에 얼굴 표정에 다 드러나기라도 했던 것인지 에반젤린은 양 손으로 내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럼요. 별 일 아닐 거예요. 한 번 가봐요, 우리."


에반젤린의 다독임과 함께 우리는 레샤가 일하는 소극장으로 가보았다.


소극장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좋은 게 없었다. 엄청나게 소란스럽고 바쁘고 정신없는 곳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날은 특히 더 심했다. 대체 극단장인 에리히 머스 무슨 이야기를 썼길래 물이 담긴 양동이 수 십 개를 커다란 판자 위에 올려 옮기고 있는 걸까.


본래 그런 현장에서 부외자가 얼쩡거리면 욕이나 한 바가지 얻어먹고 내쫓기기 마련이었지만 우리는 레샤의 지인이라는 지위 덕분에 오히려 안내까지 받아가며 에리히 머스의 사무실까지 갈 수 있었다.

소극장에 한해서지만 여전히 어마어마한 권위였다. 그리고 에리히 머스의 사무실도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그 방 주인인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에리히 머스는 여전히 갈색 곱슬머리가 부스스해 산만해 보였고 셔츠의 단추도 잘못 꿰여 있었다.

사실 전에 본 것보다 사람이 더 피폐해 보였다.


"어... 괜찮으세요?"


보자마자 에반젤린이 건강부터 물을 정도였다.


"정말... 잘 와주셨어요... 지금 레샤 양이 없어서..."


에리히 머스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격스럽게 말했다. 마치 우리가 있으면 레샤도 있는 거나 다름 없다는 투였다.


"아뇨. 딱히 저희 셋을 합친다고 해서 레샤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나는 그런 에리히 머스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도 어떤 망상적인 의미에서 그런 말은 한 건 아닌 거 같았다.


"레샤 양이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혹시 세 분이서 어떻게 한 번이라도 레샤 양을 불러주실 수 없나..."


"어? 레샤가 그만둔다고 했어?"


짤렸으면 짤렸지 레샤가 먼저 그만둔다는 갈래길은 머리속에 없었던 것인지 야우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네? 아, 네... 이제 곧 여길 떠날거라고 그러고 그만뒀는데요?"


충격적인 에리히 머스의 말에 야우라가 또 크게 놀랐다.


"뭐어어?!"


작가의말

본래 시점의 변경이나 외전은 딱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한 레이크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레이크가 알고 있는 정보와 독자님들이 알고있는 정보가 일치하도록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그건 객관적으로 맞는 정보일수도 아니면 틀린 정보일수도 있죠! 근데 하다보니까 장단점이 분명한 방법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제 실력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물론 여태까지 시점을 고정해왔기 때문에 갑자기 남발하지는 않겠지만 레이크가 없거나, 아니면 레이크가 주요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서 짧은 외전을 써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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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8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3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2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5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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