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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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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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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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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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8)

DUMMY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거야... 함부로 생각해서도 안 되는 거고... 잘 보존해야 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시랄까, 노래랄까. 프리실라는 스스로의 감정에 젖어 읊조렸다.


매우 소중한 것을 쓰다듬는 것처럼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던 프리실라는 문득 날 보며 미소지었다.


미인의 미소는 가슴이 찔끔할만큼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그건 다른 의미의 찔끔도 포함되어 있는 거 같았다.


"레이크구나?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


프리실라는 우아하게 자신의 두 손을 마주잡았다.

슬리체가 말했던 것처럼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아... 누나가 걱정되서 온 모양이구나...? 그래... 이런 곳까지 찾아오게 만들어서 미안해... 근데 이젠 괜찮아. 바빴던 용무는 거의 다 끝났으니까 금방 올라갈 거야. 텐더가 위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니?"


이 사람은 기다리라는 말을 방에 가두는 방식으로 하나보구나. 난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예법을 알게 되었다.


"프리실라, 글리는 어디에 있죠?"


슬리체는 그런 이야기는 더 듣고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 슬리체? 다시 말해주지 않겠니? 다시."


"글리는 어디에 있어요? 프리실라."


"하아..."


끝내 슬리체가 누나라고 불러주지 않자 프리실라는 한 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테이블 위의 무언가를 만지기 시작했다. 워낙 책상 위에 쌓여있는 게 많아 나는 그게 무엇을 하는 것인지 볼 수가 없었다.


쌓여있는 물건들로 봐선... 만들다가 만 옷이려나.

커다란 실타래라던가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는 형형색색의 천들을 보고서 떠오르는 건 그 정도밖에 없었다.


"남자 아이들이란 참 빠르게 자라는 거 같아. 조금만 지나도 키가 훌쩍 커져서는 전부 다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거 있지? 혼자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야... 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도움이 필요한데 그렇게 말하지 않는거지. 누나는 알고 있어. 아아... 남자아이란 정말 가여운 동물이야."


프리실라는 고개를 들고선 싱긋 웃었다. 누구에게 말하고 누구를 보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그런 생각하지 않니? 언제까지나 그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말이야. 아니... 뭘 물어볼 필요가 있겠어. 다들 그렇게 생각할 텐데."


잘 모르겠다.


나는 몰라도 적어도 내 동생들은 빨리 컸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어른이 되면 아무튼 뭔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런게 아니라는 건 나도 미크로셀에 와서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프리실라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닌 거 같았다.


아무도 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프리실라의 얼굴이 실망의 그림자로 푹 가라앉았다.


"글리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금방 나올테니까."


"나온... 다고요?"


슬리체가 되묻기 무섭게 방 끝의 쪽문이 열렸다.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을만큼, 아니 오히려 잔뜩 화가 났음을 숨기지 않는 쪽에 가까운 거 같았다.

글리 캐스트는 저가 열고 나온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


"어우.... 프리실라... 글리는 이런 건 필요없어요...!"


그 애는 웃고는 있었지만 전혀 웃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그것도 모자라 들고있던 걸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주먹한 작은 물체는 테이블을 때리고 튕겨나와 우리 옆을 지나 떨어졌다. 그건 나무팽이였다.


"글리."


슬리체가 부르자 글리는 조금은 놀란듯 바쁘게 슬리체에게 왔다. 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내 생각에 우리는 지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마, 슐리체. 글리가 해결할 수 있어. 글리가 해결할 거야. 할 수! 있어...!"


글리가 말하자. 슐리체는 그에 수긍하듯 눈을 감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 글리는 초조했던 표정을 감추고 다시 프리실라에게 말했다.


"얘기가 다르잖아요. 글리는... 미력의 돌을 가져왔다고요? 그러면 프리실라도 약속을 지켜야죠... 그건 약속이니까!"


"그거론 부족한거니? 돈이라도 괜찮다면... 그건 더 줄 수 있는데, 괜찮겠니?"


"돈!"


크게 외쳤던 글리는 갑자기 혼자 끅끅대기 시작했다. 너무 웃기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어깨가 들썩이도록 키득거리는 글리는 웃는 입이 보이지 않도록 손바닥을 크게 펼쳐 얼굴을 가렸다.


"흐! 흐흣....! 흐흐흐흣! 돈!"


한 동안 그렇게 웃기만 하던 글리는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더니 말했다.


"어우... 프리실라. 상인들에게 전해지는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게 뭔지 알아요?"


그렇게 물은 글리는 프리실라가 대답도 하기 전에 유연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가장 가치있는 건...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다... 라고. 그런 얘기가 있죠. 글리는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낭만적이잖아요. 글리는... 낭만적인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글리는 서너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게 단순히 걷는 게 아니라 위협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항상 행복한 결말로 끝나죠. 프리실라? 글리가 낭만적으로 일을 끝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네?"


프리실라는 묵묵부답으로 책상 위의 무언가 집중했다.


"글리가 계약을 완수하면, 슐리체를 자유롭게 해주기로 했잖아요!"


글리가 소리쳤다. 그러자 프리실라도 고개를 들어 글리를 보았다.


"너무 걱정하지마.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언니가 슬리체를 자유롭게 해줄 거야."


"아니!"


글리가 소리쳤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다른 건 필요없어. 슐리체의 머리카락을 내놔! 글리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낭만엔 항상 비극이 따르니까."


잔뜩 흥분한 글리와는 반대로 프리실라는 오히려 그 얘기를 듣고 더 좋아하는 거 같았다.


"맞아. 비극이야! 드디어 글리도 언니의 말을 이해해주는구나?"


프리실라가 말했다.


"아이들의 영혼이란, 참 불안정해. 너무너무 불안정해서 완벽하지 않으면 망가지기 십상이야. 완벽한 환경, 완벽한 사람들, 완벽한 신체, 완벽한 나날들..."


그 사람은 호소하듯 읊조렸다.


"돈도, 시간도, 친구도, 따뜻한 봄바람조차 영혼을 망가뜨려. 한 번 금이 가면 그 균열이 또 흠을 만들고 그 흠집은 점점 커져서 흉터를 남기지. 그건 비극이야. 너무나도 끔찍한 비극..."


호소한다고는 했지만 그게 무엇을 호소하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글리도. 슬리체가 항상 그대로였으면 좋겠지?"


"슐리체는 언제까지나 슐리체일 거야.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그럴 거야."


반항적인 기세의 글리를, 프리실라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거 같았다. 오히려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웃으며 글리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은 이번 작업은 꽤 어려웠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처음 시도 해보는 것도 몇가지 있었고. 여태까지는 실패했던 걸 다시 해보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거든. 아주 예전에 정리해놨던 걸 다시 찾느라 힘들었어. 이것도 다 글리가 필요한 재료를 구해다준 덕분이야. 특히 그 돌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줬어.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완성도 높게 만들 수 없었을 거야. 질감이나 촉감에도 전혀 어색함이 없어. 아주 완벽해."


완벽한... 뭐라는 걸까.


"자, 인사해볼래?"


프리실라는 테이블의 것을 들어올렸다. 아니 들올렸다기보단 접는 것 같았다. 완전히 접는 것도 아니었다. 반만 접어 앉혀놓은 것 같은, 그래 프리실라는 누워있던 그것을 앉혀놓고선 우리가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정면을 돌려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했다.


"이 애 이름은 아르센이야. 아르센 핸드메인."


창백한 얼굴.

그것은 잠든 소년처럼 평안히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 모습은 뭔가 위화감있게 다가왔다. 아마 다들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저건 잠들어 있다기보단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어깨며 양팔을 비롯해 고개조차 프리실라가 지탱해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머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뒤집어질 거 같았다. 아니면 앞으로 고꾸라지던가.


하지만 역시 봉제인형이나 조각상 같은 것하곤 달랐다.


"예쁘다..."


무심코 중얼거린 레샤의 말대로였다.


남자아이 같이 꾸며놓긴 했지만 프리실라와 같은 흑발을 가진 그 인형에겐 소녀 같은 청초함이 있었다. 아름답다고 할까, 그런 말을 쓰는 건 익숙치 못했지만 그건 그랬다.

그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아직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이제 금방이니까 미리 보여줘도 괜찮을 거 같아서... 참 귀여운 아이지?"


프리실라의 팔불출 같은 자랑이 이어졌다.


"백날 그렇게 만들어도 반쪽짜리잖아. 고작해야 바보천치나 동물소리를 내는 괴물일뿐이지. 이번엔 뭐야. 고양이? 아니면 쥐? 어우... 글리는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지저분하잖아."


글리가 매몰차게 빈정거리는데도 프리실라는 눈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형에게서 뭔가 발견한 듯 글리보다는 그쪽에 신경을 썼다.


"어쩜 그렇게 징그러운 것들과 비교할 수 있는지. 너무 상심하지마, 아르센. 글리 누나가 하는 말의 절반은 항상 농담이니까."


그러면서도 인형의 팔을 잡고 움직여 인사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봐, 글리. 아르센도 아니라잖니."


아, 인사하는 게 아니라 사양하는 시늉이었구나.


상황은 제멋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에르센이고 뭐고간에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듣기보단 다른 곳에 더 집중해야했다.


예를 들면 레샤의 스태프가 어디에 있을까 같은 것. 아까 글리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았을 때 이 곳에도 창고 같은 방이 또 하나 있는 것 같았다. 역시 그 쪽을 확인해봐야하는 할까. 하지만 지금은 거길 들어가 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 어떡하지. 모르겠다.


"보여?"


나는 다른 애들에게도 속닥여봤지만 좋은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없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스태프를 가져다 놓을 이유나 그럴만한 장소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상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서로 주먹다짐만 안하고 있을 뿐이지 번갯불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이 공기 속에서 그런 거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어쩌면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될 수도 있었다. 글리와 프리실라의 대화는 신경전을 넘어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되기 전에 묻는 게 나았으리라는 것이다.


"어우...!"


글리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눈 앞에 벌어진 것처럼 크게 탄식했다. 듣고있자면 아까 전의 프리실라를 흉내내며 놀리는 것도 같았다.


"프리실라! 아이가 언젠가 어른이 된다는 게 얼마나 낭만적인 법칙인데? 글리도 언젠간 그 누구라도 한 눈에 반해버리는 멋진 여자가 될거야. 물론..."


한 순간 고개를 숙였던 글리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프리실라한텐 안 보여줄테지만!"


글리는 펄쩍 뛰어올라 책상을 밟고 프리실라에게 달려들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발에 채여 어질러지고 놀란 프리실라가 자지러졌다.

그 누구도 글리가 그렇게 돌발적인 행동을 할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프리실라가 넘어진 탓에 책상 위에서 뻗은 글리의 손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테, 텐더!"


프리실라가 소리쳤다. 텐더는 없다. 그 사람은 반 랜드레이와 한바탕 하고 있었다. 이어져 다가오는 글리를 막아줄 이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사용인들이 흔히 그렇듯, 벽 뒤 보이지 않는 곳에 그 덩치를 숨기고 있던 텐더가 나타나 글리를 막아섰다.


책상을 밟고 서있는 자기만큼이나 되는 큰 덩치가 앞을 가로막자 그 글리도 주춤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프리실라는 책상 위의 아르센을 안아 들고는 곧장 텐더에게 손짓했다.


"글리가 진정할 수 있게 도와요."


말은 고상했지만 그 의미 또한 고상한 것은 아니었는지 텐더는 곧장 주먹을 번쩍 들었다.


바윗덩이이 같은 주먹이 나무판 위를 내려치자 푸확!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이 그대로 부숴지며 잡동사니가 일시에 퍼져 튀어나갔다.


우리는 그걸 맞지 않겠다고 저마다 엎드려 선반 뒤나 또 다른 책상의 밑에 숨었다.


"텐더가 어떻게 여기있지?"


나는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아무데나 보고 물었다.


"반, 얘. 또 진 거 아니야?"


야우라가 말했다.

오늘 전적이 좋지 않으니 벌써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설마요. 만약 그랬으면 저희가 들어왔던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에반젤린의 말대로였다. 텐더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히이...! 그럼 쌍둥이 아니에요...?! 허억 쌍둥이 거인...!"


어느새 사람 많은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 온 레샤도 한 마디 보탰다. 쌍둥이라, 그것도 그럴듯했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일들을 미루어본다면 저건.


"차라리 인형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결론을 내릴즈음 또 한 번 물건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우리는 얼른 고개를 내밀어 바깥쪽을 보았다. 슬리체가 텐더를 들어올려 공중에 띄워놓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책상이 들어내지고 텐더가 붙잡았던 서랍장마저 뜯어지며 함께 공중에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를 띄웠을 때하고는 달랐다. 훨씬 높이 올려보내진 텐더는 단순히 떠오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을 비틀리고 있었다. 붙잡고 있던 서랍장은 벌써 부숴져 널빤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슬리체의 마법은 끝났고 텐더와 나무조각들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글리가 냉큼 돌아서 슬리체에게 갔다.


"슐리체!"


슬리체는 이마와 눈두덩이를 부여잡고 쓰러질 듯 벽에 기대서있었다. 글리는 얼른 달려가 그런 슬리체를 바닥에 뉘였다.


"이제 그만해. 오늘 마법을 너무 많이 썼어. 나머진 글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슐리체는... 쉬고 있어. 알았지? 글리가... 할 수... 있으니까."


그즈음, 텐더도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고 있었다. 프리실라는 텐더가 일어났다는 것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움직일 수 있나요, 텐더?"


"예. 프리실라 님..."


굼뜨게 말한 텐더는 일어나기는 했지만 좀처럼 자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삐딱하게 절뚝였다.


"아아... 걱정말아요. 내가 나중에 말끔히 고쳐줄테니까. 지금은 글리를 막도록 해요. 난 아르센을 깨울테니."


"예, 알겠습니다."


"오그리! 아르센을 데리고 따라와요! 이 방은 아르센에게 보여주긴... 조금..."


"....예! 예...! 프, 프리실라님...!"


프리실라의 명령에 책상 밑에서 한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마르고 키가 큰 대머리. 야우라가 말했던 생김새 그대로였다.


그 사람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조심히 아르센을 안아 방의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는 프리실라를 뒤따랐다.


"저...! 잠깐만요, 레이크...!"


잠자코 숨어있던 와중에 레샤가 소리쳤다.


"저기 있어요....! 저기! 스태프!"


레샤가 가리키는 것 오그리였다. 그제야 나도 오그리가 등에 기다란 막대를 매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게 평소에 레샤가 들고다니니까 커보이는 거지 저런 사람이 잡으니까 그냥 새 쫓아낼 때 쓰는 작대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무도 모르게 이 방을 가로질러 프리실라를 쫓아가는 거였다.


근데 어떻게 하면 아무도 모르게 방을 가로질러 나갈 수 있을까.

적어도 내 머리속에선 절대 불가능했다.


"레이크 님."


에반젤린이 날 불렀다.


"어?"


뭔가 생각이 있는 걸까.


"제가 저 슬리체라는 분을 도와드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 지금? 회복하고 나면 저 자식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나 쟤는 좀 무섭거든."


실은 조금이 아니라 꽤 많이 무서운데.


"맞아요...! 저 사람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레샤도 거들었다.

근데 나한테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니 쟤한테도 이상한 사람이라고하면 나도 동급이라는 건가.

그건 그렇고 시끄러울 법한 야우라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니. 난 꽤 괜찮은 생각인거 같아."


왜 그런가 했더니 기막힌 말씀을 준비하고 계셨던 거다.


"그러니까. 에반젤린이 시선을 끄는 사이에 나가자는 거잖아?"


"음... 비슷... 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에반젤린의 대답은 영 시원찮았다. 어쨌거나 결심이 선 것인지 그 애는 벌떡 일어나 슬리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손대지 마!"


텐더를 경계하던 글리가 단박에 그 움직임을 포착했다.


"슐리체에게 손 대지 말아요. 아무리 사제 님이라고 해도... 용서 못하니까... 사제 님이라면 글리의 이런 마음을 이해해 주실수 있죠?"


"아뇨. 손 댈 거예요. 전 사제니까."


에반젤린은 단호히 대꾸했다.


"슐리체는... 아프지 않아요. 조금 쉬는 것뿐이라고요."


"그래도 상태는 봐야죠."


드물게도 글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리저리 에반젤린을 노려보던 녀석은 별안간 씨익 웃었다.


"어머나. 이렇게 상냥할 수가. 슐리체를 잘 부탁드릴게요... 사제님."


"적어도 지금만큼은 우리는 한 편이에요. 그렇죠?"


슬리체의 옆에 자리잡고 앉은 에반젤린이 물었다.


"어우...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누가 미워할 수 있겠어요. 글리는...? 레이크만큼 사제 님도 아주 좋아해요."


그건 동의의 뜻으로 들렸다.


교섭을 끝낸 에반젤린이 우리쪽을 보고선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확실히, 야우라가 말했던 것하고는 다른 방법이었다. 이건 훨씬 세련되고 멋졌다.


"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건만 야우라가 날 보며 아니꼽다는 듯 굴었다.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에반젤린이 골칫덩이 글리를 회유해주었는데 우리끼리 다투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저 텐더를 어떻게 하느냐인데.


저렇게 반대쪽 문을 막고서 딱 버티고 서 있으니 도무지 틈을 발견할 수 가 없었다. 먼저 다가오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반대로 막으라고 했던 프리실라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번엔 또 뭐냐 싶어 얼른 돌아보니 온통 헝클어져 엉망인 반 랜드레이가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이 자식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잖아! 이딴 거에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안 풀려!"


그 자식은 흉흉하게 외치며 들고 온 걸 휙 던졌다.

어깨에서부터 내려온 커다란 사람 팔이 퍽 부딪쳐 구석 진 곳의 잡동사니들을 넘어뜨렸다.


적절한 시기에 돌아와줬다.

게다가 아직 분이 덜 풀렸다니.


"야 잘 됐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반짝 말했다.


"뭐어?"


반 랜드레이는 그것조차 짜증이 나는지 날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 지금은 그 정도는 당연지사 이해해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열심히 일해 줄 우리 용사 님 아닌가.


"하나 더 있거든."


나는 얼른 반대쪽 문의 텐더를 가리켰다.


작가의말

반 랜드레이는 분명한 용사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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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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