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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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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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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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02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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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4. 헛것이야(8)

DUMMY

여기만 겨울인 것처럼 공기가 찼다. 어느 계절에도, 어느 날에도, 어느 시간에도 해가 들지 않도록 만들어진 실내는 그만큼이나 추웠다.


바닥도 차고 어디다 쓰는지 모를 벽 아래의 작은 구멍에서 새어들어오는 통로의 바람은 더 차고. 가만히 있으면 몸이 으슬으슬 떨릴 판이었다. 의자도 없이 앉아 있으려니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세상만사 모든 일에 짜증이 솟았는데 이게 과연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불만인지 아니면 감옥에 들어와서 생긴 것인지 그게 참 궁금했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아예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아직까지도 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짐덩이 같은 것 말이다.


대놓고 고개를 숙이긴 사이가 꽤 가까운지라 부담스러웠기에, 나는 아주 살짝 움직여 아래를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회색 레샤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쿠키를 무제한으로 만들어내는 마법사로 보이기라도 하는 것인지 무지막지한 호의가 눈망울에 반짝거렸다.


저 한쪽에는 파란 레샤와 빨간 레샤도 있었다. 그럼에도 회색 레샤는 나한테 안겨서 반쯤 누워 꼼짝 않는 것이다.


"저기, 넌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고. 이제 네 친구들 있는 데로 좀 가라..."


살살 얼러보아도 회색 레샤는 도리어 나에게 얼굴을 묻고선, 안 갈거라고, 도리질 치며 뺨을 부볐다.


이걸 진짜 어떻게 던져버릴 수도 없고...


"아니... 나는 네가 커지는데 아무 것도 일조한 게 없어. 그냥 그 약 먹고 너 혼자 커진 거라고."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마냥 기분 좋다고 꺄르륵 대는 것이다. 소리는 안 들렸지만.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듣는지 마는지 저 좋을대로하는 회색 레샤를, 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린애가 그러는 걸 억지로 밀어내자니 너무 매정한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하다는 장점도 있긴 했다. 그뿐이라는 게 문제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빨간 레샤가 이따금씩 날 신발코로 쿡쿡 찌른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내가 회색 레샤를 안고 있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별 수 없다. 애보고 가래도 안 가고 쟤더러 받으래도 안 받는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쿡쿡 찔러댈게 아니라 직접 말로 하면...

아니... 그래 어차피 말을 해봐야 들리지도 않는구나..


하여 다시 정리해보자면 나는 귀를 막고서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녀석 두 명과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착한 애 한 명과 함께 어둡고 차갑고 딱딱하고 음침한데다가 축축하고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보안에 자신이 있으면 지키는 간수 하나 안 세워놓느냐고!


이제부터 어떡하지.

차라리 회색 레샤를 떨어뜨릴 방법을 고민할 때가 더 행복했다.

그래 아주 약간만 눈을 돌리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떨쳐낼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잠깐 그 앨 보았을 뿐인데 회색 레샤는 금새 팔을 활짝 펴 또 달려들었다.


"아니아니아니! 너보고 안아달라고 본 거 아니야! 익...!"


누군가 매달린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대체 무슨 애가 경계심이 이렇게 없는 건지, 얘는 '진짜 레샤'에게 조금 배워야했다. 그렇다고 얘가 가짜라는 건 아니지만...


잘그랑... 하고 쇳소리가 났다.

나는 실랑이는 그만두고 냅다 창살 앞으로 달려갔다. 내가 일어나자 방심하고 있던 회색 레샤가 . 갇힌 이래로 계속 방치 상태였는데 이제야 사람을 보낸 것이다.


단단한 나무 막대가 바닥을 쳐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고양이 병사였다. 귀부터 시작해 얼굴 오른쪽이 하얀 녀석, 이름은 모른다. 알아도 구분을 못했을 거고.

녀석은 날 비웃기라도 하는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눈으로 감옥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웨에에엥."


생긴게 퍼지다만 반죽 같으면 울음소리라도 귀엽던가 녀석은 꼭 저 생긴 것처럼 느린 소리로 울었다.


"내가 니네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 우리 말로 해 우리 말로."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내가 말했다.


"이제 곧 여왕님이 행차하시니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뒤늦게 대꾸가 따라왔다.

앞에선 반죽 녀석의 말이 아니었다. 전에 건방지게 굴던 그 검은 고양이었다.

나는 창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녀석을 마주보았다.


"야, 다시는 오래도 안 올테니까 우리 좀 꺼내줘."


"그럴 수는 없다."


검은 고양이는 하늘하늘한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무슨 놈의 땅이 들어오기만 해도 감옥에 갇힐 정도로 중죄라는 거야. 누가 그런 법을 만들었어?"


"여왕님이 만드신 법이다. 아주 오래 전 이 벽을 세우면서 함께 만들어진 불문율이지."


"아주 중요한 거네?"


"당연히, 그 누구도 어겨선 안 되는 것이다."


"한 번만 봐주라."


녀석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멋들어지게 옷가지를 펄럭이며 무릎을 꿇고 크게 외쳤다.


"여왕님께서 행차하신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하자, 옆의 반죽 녀석도 창을 바로 세운체로 무릎을 꿇었다. 이제와 차릴 것도 없는 나는 그대로 있었고 파란 레샤는 눈치를 봤으며 빨간 레샤는 관심이 없었고 회색 레샤는 내 등에 업히듯 고개를 걸쳐 함께 창살 밖을 보았다.


곧 그 고양이들의 여왕이라는 사람이 열댓명의 고양이 신하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 사람은 금색 소매 끝과 깃에 금빛 레이스가 달린 흰 드레스로 자신의 지위를 내보였다.

마찬가지로 목과 팔목에도 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있었고 어깨엔 반짝이는 천으로 만든 붉고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어쩐지 성숙해보였다. 실은 이렇게 말할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넓게 쳐줘도 나와 너댓살 차이밖엔 나지 않아보였다.


여왕은 자신의 긴 검은 머리를 옆으로 꽁지를 묶었는데, 무려 여왕 씩이나 되는 사람이 유행을 따르는지는 몰라도 그 나이 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려보이는 건 그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쩐지 낯이 익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단순히 가장 눈에 띄는 그런 부분들을 떠나서 이목구비의 형태라던가 하는 것들이 미묘하게 레샤를 닮아있었다.


"아니 또...?"


설마하는 생각에 탄식부터 나왔다.


"이 자들이냐?"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여왕은 말을 했다. 아주 또렷하고 확신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건 여왕의 위엄이라기보다, 자신감 덩어리 이상의 무언가였다.


"예, 폐하."


여기 고양이들은 모두 검지만, 특히나 검은 그 녀석이 일어나 대답했다.

여왕은 자신의 신하를 치하하고는 곧 감옥 안을 들여다 보았다. 저 오만하기 그지없는 시선. 분명히 이건 레샤가 아니었다. 우선 레샤는 키가 저렇게 크지 않았고 그 외에 뭐... 아무튼 저렇게 크지는 않았다.


"음 좋아 좋아 잘했어. 수고많았다, 마나. 이제 나의 승리가 머지 않았군."


"전부 폐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 남았어... 음?"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신하를 치하하던 여왕은 문득, 안을 들여다보던 눈길에 이채를 띄었다.


"하하! 하하하하! 나머지 하나를 잡을 필요도 없겠군! 여봐라 저기 저 지팡이를 이리 가져오너라."


명령과 동시에 창이 아닌 검을 든 고양이 네 마리가 철창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놈들은 우리 하나 당 한 명씩 위협하듯 뒤에 섰고, 그 중 파란 레샤에게 간 녀석은 그 애에게서 스태프를 빼앗으려고 했다.


"저기! 잠시만요."


언제 말을 꺼내야할까 고민하던 나는 그 때 불쑥 말해버렸다. 지금의 시기가 좋은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때 튀어나오고 말했다.


"마나. 이 인간은 왜 데려왔지?"


여왕은 내가 아니라 신하에게 물었다.


"함께 있던 것을 붙잡아 온 것입니다."


"그래?"


제 신하에게 물었던 여왕은 이번엔 다시 내게 물었다.


"외부인이 무슨 일이야?"


왠지 전과 달리 조금 말투가 가벼웠다.


"저희가 모르고 그런 건데... 혹시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되지. 그런 게 어디있어. 정한대로 해."


"물론 그... 어... 폐하께서 정하신 법이겠지만은..."


"아니. 이건 우리 모두가 정한 규칙이거든. 예외는 없어."


여왕은 그것으로 전부 일축해버렸다. 그리고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파란 레샤에게 말했다.


"외부인을 들이다니 반칙이야. 그러니 그건 받아도 되겠지?"


여왕의 시선을 피하던 파란 레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고양이에게 스태프를 넘겨주었다.


고양이 녀석들이 나가고 감옥 문은 다시 잠겼다. 스태프를 빼앗은 고양이는 정중히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들어 여왕에게 스태프를 바쳤다. 여왕은 그걸 쥐어 표면을 슥 돌려보더니 다시 감옥 안을 보며 비죽 웃었다.


"약속을 잊지는 않았지? 전부 잡지 않아도 이것만 있으면 조건은 갖춰진다는 걸."


여왕의 물음에 파란 레샤는 그 시선을 피하고선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예, 폐하."


마나라고 불린 그 새까만 고양이가 고개를 숙였다.


"난 이제 제단으로 가겠다."


"알겠습니다."


여왕은 곧 돌아설 채비를 보였다. 일사분란하게 여왕의 길을 터고 다시 뒤로 다시 줄을 서려는 신하들의 소란스러움 사이로 마나가 말했다.


"이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미 겹겹이 줄을 선 신하들 너머에서 여왕이 말했다.


"늘 하던대로 해."


"...알겠습니다."


마나는 보이지도 않는 여왕을 향해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여왕은 떠났고, 이제 또 협상해볼 녀석은 이 마나라는 신하뿐이었다. 보아하니 그리 낮지 않은 지위에 있는 거 같은데 나름의 재량이 있을 법도 했다.


"저기, 하던대로라고 하면 뭘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너희는 내일 개다래 형에 처해질 것이다."


마나가 말했다.


"개다래 형? 그게 뭔데?"


"그건 내일이 되면 알게 되겠지."


콧방귀를 끼며 평이하게 말한 마나는 나머지 부하를 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사람 돌게 만드는 정적이 시작되었다.


아 잠깐만...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뭣도 모르는 곳에 오게 되어서는 하나도 모르겠는 사막에 빠졌다가 둘이나 되는 모르겠는 녀석들을 만나서 셋이나 함께 감옥에 갇힌 다음 내일 개다래 형인지 뭔지 뭣도 모르겠는 처벌을 받게 될거라고?

이건 정말 보통 사태가 아니었다.

정말, 정말, 정말로...

나는 문득 내가 왜 이렇게 힘이 빠지나 생각을 해보았다.


이와중에도.


"아니 이제 좀 내려와! 심각해 죽겠고만...!"


나는 아직도 업혀 있는 회색 레샤를 윽박질렀다.

웬일인지 회색 레샤는 어깨에 감은 팔을 풀고선 내려갔다.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 잠깐 기색을 살피려는데 회색 레샤는 내 앞으로 돌아와서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 내 배를 꽉 껴안았다.


"아니... 그래... 알았어..."


그러니 짜증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 뭔가 아는 사이 같던데."


가장 먼저 품에 얼굴을 부비던 회색 레샤가 멈추는 게 느껴졌다. 빨간 레샤는 아예 상관 없는 일인 척 모르는 체 했고 파란 레샤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니 뭐. 됐어... 이제와 무슨 소용이라고."


나는 땅이 꺼져라 한 숨만 쉬고 말아버렸다.

그 말대로였다. 이제와 무슨 소용이라고, 어디든 데려가달라고 먼저 말한 건 나였다. 이 애들이라고 딱히 나와 다른 처지인 것도 아니었고, 이 이상한 곳에 혼자 있는 것보단 여럿이 있는 게 나았다.


"그래서 그 개다래 형이라는 게 뭐야?"


나는 또 다시 신나서 얼굴을 부비려는 회색 레샤의 머리를 밀어내며 파란 레샤에게 물었다.


아니 이 녀석 힘으로 버티네.


어쨌든, 파란 레샤는 뭔가 손짓과 몸짓으로 설명해보려했다. 그러다가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고 또 몇가지 손짓을 보이다가 또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설명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됐어, 괜찮아. 어차피 내일 알게 되겠지, 뭐."


갑자기 김이 새버렸다.

이상하게도 기운이 빠지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구석가에 앉아 머리를 벽에 기댔다. 이대로 내가 나무가 된다면 좋을텐데, 하다 못해 이끼라도. 그럼 정말 좋을 텐데. 전에 햇빛과 물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적이 있는 거 같은데 잘 생각해보니 나무보다는 역시 이끼였다. 이끼는 햇빛도 없이 물만 있어도 되었다. 그래 그런 가만히만 있어도 모든게 해결되는 궁극의 생명체가 존재하는데 사람이란 왜 살아가는 걸까...


잠시 존재 의의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데 누군가 또 부스럭대는 소릴 내며 방해를 해댔다.


"저기 미안한데, 지금은 좀 놔둬줄래, 조금만 더 고민하면 답을 찾을 거 같거든?"


당연히 회색 레샤겠거니 싶었던 나는 꿈적도 않고 말했다.

그럼에도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런가 싶어 나는 소리가 들린 창살 밖을 보았다.

거기서부터 이상했다. 창살밖에서 소리가 왜 들리지?

촛불의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에 웬 사람 얼굴이 번뜩였다.


"왁 깜짝이야!"


어찌나 놀랐는지 나는 뒤로 한 바퀴 굴러 창살에서 떨어졌다.


"지금 진짜 놀란 게 누군데 그래요...!"


레샤가 말했다.


"아니, 뭐야. 빨간 레샤! 너 어떻게 밖으로 나갔어?!"


나는 황급히 창살 앞으로 기어갔다. 이 감옥에 탈출구가 있었단 말인가.


"뭔가요, 갑자기...? 레이크 어디 고장났어요...?"


레샤는 냉정한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말했다.

레샤가 말했다.


나는 레샤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불이 번뜩이는 통에 어떤 색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럴 게 아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둘, 셋. 감옥 안에는 세 명의 레샤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 창살 밖에 있는 것은 네번째였다.


"드디어 말하는 기능이 생겼네...? 너는 무슨 색이니...?"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예에...? 레이크 진짜 왜 그러는데요... 저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아니, 너 진짜 레샤야? 레샤 레스트 레이드? 하늘그림 끝 방에 사는 애? 겁 많아서 귀신 무서워 하고 은근히 변덕스럽고 까탈스런 애?"


아무렇게나 말했던 나는 금방이라도 한 대 때릴 거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레샤를 보고선 슬쩍 몸을 물렀다.


"기껏 구하러 왔더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진짜였다. 진짜 레샤가 맞았다.


"아! 레샤! 내가 진짜! 너무 반갑다! 어떻게 표현해야되지 이걸...?!"


"쉿, 쉿! 레이크는 바보에요...?!"


"아, 미안."


나는 이제 입도 벙긋 안하겠다는 뜻으로 아예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다시 조용해지자 잠시 눈치를 살피던 레샤는 어디서 난 건지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을 찾아 넣어 돌렸다.

짤각 하는 소리와 함께 철창은 쉽게 열렸다.


"이쪽으로, 빨리요...!"


우리는 레샤를 따라 조용히 그리고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어둡고 긴 복도를 빙글 돌아, 어느샌가 바깥의 빛이 보이는 문에 다다랐다.


레샤는 그 앞에서 우릴 멈추게 했다. 그리곤 깃털이 앉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였다. 보일듯 말듯 고개를 아주 살짝 내밀어 바깥을 확인한 그 애는 우리에게도 손을 까닥이며 속삭였다.


"조용히..."


우리는 그 명령대로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지키고 있어야할 고양이 병사는 날벌레를 쫓느라 정신이 팔려서 우리가 나가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감옥은 마을의 바깥에 만들어져 있었다. 하기야 저 안을 외지인에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처사 같기도 했다. 나가기만 하면 완전히 탈출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곧 조금 떨어진 숲속에 다다르자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탈출과 안전, 두 가지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을 것이다.


"레샤!"


나는 그걸 레샤에게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그 앙증맞게 귀여운 소녀를 번쩍 들어 안아줘 버린 것이다.


반동은 금방 돌아왔다.


"아니...! 뭔가요, 갑자기...!"


당황해서 발버둥치던 레샤의 무릎이 내 배를 걷어찼다.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고통을 참고 레샤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래... 원랜 이랬었지..."


이게 원본의 성격이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또 제 흉을 보는지 안 레샤가 찌릿하게 날 노려봤다.


"아니 얘네들이랑 있다보니까 적응이 안 되서..."


"예에...? 저 없는동안 우리 애들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겁니까...?!"


"아무 짓도 안 했어..."


내가 당하기만 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애들이라고?


두 명의 레샤는 어느샌가 진짜 레샤에게 가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 말도 들리지 않았는데 레샤에겐 들리는 듯 했다. 평범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었다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대강 듣던 레샤는 그렇게 말하며 미심쩍은 눈으로 날 보았다. 그리고는 또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니 재미있었다는데 뭔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대체!"


재미있었으면 좋은 거지 왜 뭔가 잘못한 것처럼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아무짓도 안 했는데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그건 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참 짜증났다.

되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상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재미있는 사람인지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내가 너랑 똑같이 생긴 애들한테 무슨 짓을 했겠냐, 응?"


"저랑 똑같이 생겼다고요...?"


레샤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가 곧 뭔가 수긍이 된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크에게는 그렇게 보이나 보군요..."


"왜, 뭐야. 뭔데. 내가 이상한 거야? 떨어지면서 내 눈이 잘못된 거야?"


"아니 뭐... 그럴 수도 있는 겁니다..."


"아니 뭐냐고!"


좀 더 캐물으려던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지금 궁금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 뭐, 내 눈은 그렇다 쳐. 그 전에 대체 여기가 어디야? 대체 뭐하는 곳이길래 오렌지 쥬스를 사막이라고 부르는 거냐고!"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레샤는 갑자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다른 레샤 애들도 진짜 레샤를 따라 갔다. 회색만 빼고 그 애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나한테 와서 덥썩 안겼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일단 받쳐 안았다.

옮겨달라, 뭐 이런 뜻인가?

지금은 그런데 신경 쓸 게 아니었기에 나는 원하는대로 회색 레샤를 안아든 체로 레샤를 따라갔다.


"착각이라니 무슨 말이야?"


"아주 어릴 때 책을 봤는데, 거기에 사막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땐 글자를 모를 때라 그림만 봤거든요..."


나직히 말하던 레샤는 왠지 내 눈치를 살피면서 덧붙였다.


"그 그림 속에 이어진 모래의 산들이 저한테 폭풍이 치는 날 호수가 넘실대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래서 사막이 호수로 만들어진 건줄로만 알았어요..."


"응? 아니 네가 어릴 때 그런 책을 본 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인데?"


당최 무슨 소리인지, 난 레샤가 좀 더 친절하게 알려주길 바랬다.

한 동안 입술을 뻥긋대던 레샤는 말하기 싫었던 걸 별 수 없이 말하듯 톡 쏘았다.


"이건 꿈이에요, 레이크. 제가 어릴 때 꾸던 꿈이라고요...!"


작가의말

그야말로 헛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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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8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3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 34. 헛것이야(8) +1 18.10.02 167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1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2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5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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