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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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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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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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5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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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4. 헛것이야(6)

DUMMY

"허억...! 허억...! 억, 큭, 켁...!"


숨을 쉬다가 사레가 들렸다. 기침을 먼저 해야할지 숨을 먼저 쉬어야할지, 아니면 집체만한 사마귀가 아직도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해야하는 건지 무얼 먼저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집체만한 사마귀... 아니 그런게 세상에 존재할리가 없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던 수풀의 숲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던 수컷 사마귀도 그것보다 더 큰 암컷 사마귀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내 착각이었고 그 착각이 만든 환상이었으며 사실은 자고 있는 내 얼굴 위로 사마귀가 걸어가서 생긴 꿈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건 또 그것대로 몸을 떨만큼 끔찍했다. 이래도 깨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이상 여길 꿈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 의지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휙 돌아서자 뒤따라 오던 레샤가 움찔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원래대로 딛었다.


"저런 게 있으면 저런 게 있다고 설명을 해줬어야지. 그럼 냅다 뛰었을 거 아냐."


나는 한심스러운 소릴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한 번쯤 화를 내도 될텐데 레샤는 그렇다기보단 손목을 구부려 사마귀의 앞발을 흉내내 흔들더니 저 뒤의 숲을 한 번 가리키고 고개를 흔들었다.

위험하다는 것만 알지 저게 나올줄 은 몰랐다는 거 같았다.


뭐 그럴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을의 어른들에게 위험하다 말로만 듣고서 그 실체는 오늘 처음 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돌아서 갔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까 싶었던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암만 사람이 염치가 없고 얼굴이 두껍데도 더 묻는 건 실례였다.


"뭐 그런 것보단... 아까... 지팡이 고마워."


지금 레샤가 빗자루처럼 곧게 쥐고 있는 저 스태프, 저거 덕에 살 수 있었다.

내가 나름대로의 인사를 건내자 레샤는 웃으며 고개를 약간 까닥였다.


이제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였으니 우리는 남은 길을 재촉하기로 했다. 기이하게도 조금 걸어나가자 언덕아래로 작은 길이 있었다. 그건 숲까지 이어지던 길이 뚝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은 평탄했고 주변엔 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쓸쓸하다는 기분이 들정도로 휑했다. 이 세상 전체가 발목높이에 지나지 않는 풀로 이루어지고 이 길만 다른 존재의 것처럼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 위에서 우리는 두 갈래 길과 그 사이에 서있는 표지판을 만나게 되었다.


잠시 멈춰서서 길 양쪽을 다 보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표지판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그건 내가 알고 있는 글자가 아니었다. 지금 저기에 적혀있는 것이 실제로 글자이긴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구불구불한 무언가였다.


내가 힐끗 쳐다보자 레샤는 그 중 스태프를 뻗어 그 중 왼쪽 표지판을 가리켰다. 나는 군말없이 그 방향으로 따라 걸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길은 변했다. 나무가 조금씩 늘어난다 싶더니 곧 숲처럼 변했다. 아까처럼 음산한 곳이 아니라 햇빛이 스며들어오는 아주 옅은 숲이었다. 그리고 길은 끝이 났다. 한 오두막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낮은 지붕 위에 올려진 짧은 굴뚝에선 희뿌연 연기가 김처럼 솟고 있었고 둥글고 작은 창문이 달려있는데다 꼭 뭉개놓은 것처럼 대칭이 맞지 않았다. 어쩐지 둥지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집이었다.


"너희 집이야?"


나는 레샤에게 물었다.

그 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고?


어쨌거나 레샤가 안내하려고 했던 곳은 그 집이었고 우리는 길의 진짜 마지막 끝까지 걸었다.


찌그러진 것 같은, 반듯하지 않은 모양새의 나무문을 두드리자 꼭 속이 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안에서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내가 묻자, 레샤는 옆으로 달려가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집이나 그렇듯 값싼 유리는 희뿌얘 속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먼지까지 잔뜩 묻어있는 여긴 더 심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인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던 레샤는 또 다시 달려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아무런 잠금장치도 되어있지 않은 것인지 문은 가볍게 열렸고 그 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에라모르겠다, 그냥 따라 들어갔다.


후줄근한 바깥과 달리 내부는 의외로 청결했다. 가구는 변변찮았지만 공기가 따뜻했고 매캐한 먼지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요했다.


덜그럭.


아니 그건 아니었다. 뭔가 물건이 걸리는 소리. 이어져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누군가 있는 걸까. 레샤는 쏜살같이 소리가 난 벽모퉁이 너머로 넘어갔고 출발이 늦었던 나는 놓칠세라 뒤따랐다.


벽 뒤편엔 벽장이 있었고 그 앞엔 레샤가 쓰러져 있었다. 꼬꼬마애도 아니고 급하게 가다가 혼자 넘어졌나 싶어 일어나는 걸 도와주려다보니 나는 뭔가 위화감을 느껴 다가가는 것을 멈추었다.


누워있던 레샤는 눈을 크게 뜨고선 날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뭔가, 뭔가 달랐다. 난 그렇게 느꼈다.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그런 분위기의 차이가 느껴졌다.

그래 그 애는 붉은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그 때 벽장문을 닫고 또 하나의 레샤가 나타났다. 이 쪽이 파란색을 눈을 가진, 내가 원래 만났던 레샤였다. 스태프도 그 애만 등에 매고 있었다.

파란 레샤는 빨간 레샤를 일으키고선 등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눈을 비볐다가 다시 떠봤다. 아무리 봐도 둘이 똑같이 생겼다. 눈색만 다른 두 명의 레샤가 날 보고 있었다.


"너희... 쌍둥이니?"


마지막 희망삼아 나는 그렇게 물었다.

두 명의 레샤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빨간 녀석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내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그리고는 뭔가 묻는 듯 파란 레샤에게 말했다.

그제야 나는 그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아챈 것이다. 으레 들렸어야할 목소리가 하나도 없이 너무나도 조용하다는 걸.


눈동자가 빨갛다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레샤와 판박이인 이 애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우연히 벙어리인 아이가 둘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두 레샤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며 있었다. 다만 내게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둘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게 그저 입술을 이리저리 오물거리며 장난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난 바보처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내 목소리는 들렸다. 그건 저 둘에게도 들리는 듯 그 애들은 날 보았다. 그리고는 빨간 쪽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먹으로 벽을 살짝 쳐보았다. 쿵, 하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 애들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내 귀가 어딘가 망가진 걸까. 하지만 다른 소리는 옷끼리 스치는 소리까지 전부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저 애들의 대화는 광대가 장난하는 것처럼 조용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더 고민해서 무얼하겠는가.


문득 앞의 레샤가 내 옆구리를 두드렸다. 나는 바닥을 내려보던 고개를 들었다. 붉은 빛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불이었다.


"으아!"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이던 빨간 레샤는 놀란 날 지긋이 보고선 이내 손가락 끝의 불꽃을 불어 껐다.


이 애, 마법사였나? 하긴 왠지 그럴 거 같은 곳에 살긴 했다. 왠지 그럴 거 같은 곳 말이다.


"왯, 왜...?"


내가 묻자, 빨간 레샤는 아주 천천히 움직여 자기 입에서 그 바깥으로 손을 내젓고는 다시 귀를 가리키더니 고개를 저으며 날 보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냐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이 애들 입장에선 자기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 그런데?"


내가 수긍하자 빨간 레샤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아버렸다. 얼핏 봐선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었다.


파란 레샤가 또 다시 빨간 레샤를 불렀다. 그 애는 무어라고 말했고 빨간 레샤는 가만히 듣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뜻대로 되가지 않는 걸까.

빨간 레샤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파란 레샤는 난처한 표정을 보이더니 나를 두드리고선 설명을 시작했다.


지팡이를 짚고 허리가 굽은 사람의 흉내였다.


"할아버지가...?"


내가 되묻자 파란 레샤는 고개를 털었다.

아, 그렇다면.


"할머니가?"


이번엔 맞춘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 이라기보단 집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이 집은 원래 할머니 거라고?"


그래서 한참만에 알게된 사실은, 이 집에는 원래 한 할머니가 사는 곳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오늘은 어떤 곳에 가기 위해 빨간 레샤에게 집을 맡겨놓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행선지는 빨간 아이쪽이 알고 있는 거 같았다. 더군다나 직접 데려다주겠다고까지 하니 보기엔 뚱해도 나름대로 친절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저기. 나는 레이크라고 해. 진짜 고맙다."


하며, 나는 성의를 보여 손을 내밀었다. 빨간 레샤는 내 손과 얼굴을, 특히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렸다.


나는 갈곳 잃은 무안한 손을 조용히 거두어들였다.

음... 그래도 데려다주겠다니까.

뭐... 그래.


빨간 눈동자의 레샤는 걸음이 느렸다. 키도 다른 레샤하고 똑같아 보이는데도 특히 그랬다. 데려다 주겠다며 나서기는 했지만 어딘가 피곤하고 나른해보였다. 파란 레샤가 보채가면서 가도 나아질 기미는 없어서 그냥 그대로 가게 되었다.


오솔길을 따라 얕은 숲을 빠져나와 거슬러 오르자 곧 아까보았던 표지판을 만나게 되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번엔 아까 가지 않은 길로 갔다.


길을 따라가면서 알게된 것인데 그 할머니가 사는 집은 매우 외진 곳이었던 것 같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록 오솔길엔 갈림길과 표지판이 더 자주 나타났고 더 많은 갈래의 길이 나타나기도 했다. 혹여나 길을 헷갈리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걱정과는 관계없이 레샤는 고민 하나 없이 갈 곳을 정했다.

빨간 쪽 말이다.


점점 늘어져가는 빨간 레샤를 파란 레샤가 어르고 달래서라도 겨우겨우 이어진 여정을 막은 건 기막히게도 장벽이었다. 누가 칠하기라도 한 건지 장벽의 벽돌들은 모두 샛노란색이었고 솜씨좋게 반듯한 직선으로 잘려있었다.

길은 그 장벽의 문앞에서 뚝 끊겨 있었다. 아마도 이 문너머로 이어져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빨간 레샤를 보며 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는 것이 맞느냐.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열어서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앞에 가까이 서서 큼지막한 고리 손잡이를 잡았던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해?


내 의도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빨간 레샤는 지루한 건지 졸린지 약간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문고리를 당겼다. 문은 잠겨있었다. 걸쇠와 문의 틈사이 정도, 정말 딱 그정도라고 생각되는만큼만 움직일뿐 열리지는 않았다.


"안 되잖아."


정해진 것처럼, 나는 빨간 레샤를 보고선 말했다. 그 애는 아주 뻔뻔스럽게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선 문앞에 서서 고리를 잡고 노크했다.

쾅쾅쾅, 그것도 매우 세차게.

생긴 것만 레샤지 걔는 절대 하지도 않을 짓을 당연한 것처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문을 힘껐 때렸는데도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지금쯤이 한 번더 째려봐줄 시기인가 고민할즈음 문에 달려있던 아주 작은 창이 옆으로 열렸다. 아주 거칠게 열어 재끼는 것이 문을 세게 때린 게 꽤나 마음에 안 든듯 했다.


눈만 겨우 보일정도의 창너머엔 벽돌의 색과 같이 노란눈이 우릴 보고 있었다.

날카롭기 그지 없는 눈으로 우릴 살펴보던 그 사람은 내가 정신차리고 말을 붙여보기도 전에 매몰차게 창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제야 나는 빨간 레샤를 쳐다보았다. 일종의 눈치를 준 셈이다. 그 애는 아주 당당하게 자기를 가리키고선 고개를 끄덕이고 날 가리킨 다음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이라고?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시니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무슨 수가 있다고.

차라리 차선을 묻는 게 나았다.


"그래서 이젠 어떡하면 되는데?"


다른 길이 있느냐, 나는 그렇게 물었다.

빨간 레샤는 한 숨을 푹 쉬더니 꽁지머리가 흔들려라 고개를 저었다.


"꼭 여길 지나가야 하는 거야?"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밖에 길이 없다고 하니 한 번 더 문을 두드려볼까 싶을 때에 누가 내 소맷자락을 당겼다. 이번엔 파란 레샤였다. 그 애는 내 팔을 잡아 끌어 벽 한쪽을 보게 해주었다. 그곳엔 꽃까지 필 정도로 왕성하게 자란 덩굴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이어서 줄을 오르는 시늉까지 하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한 그게 맞는 듯 했다.


"그래! 저거야, 저거! 진짜 잘했어! 어... 그... 너도 레샤고 얘도 레샤면 좀 이상한데...?"


뭔가 적당한 별칭이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대충 그 애의 머리를 막 헤집듯 쓰다듬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정말 잘했어. 진짜 최고다."


여러모로 힘이 되어주는 좋은 아이였다.

파란 레샤는 내 손길이 못내 쑥쓰러운 듯 풋풋히 웃으며 제 머리를 감쌌다.

간만에 마음 편해지는 장난을 하고 있으려니 또 누가 내 등을 팍 밀쳤다.

빨간 레샤였다. 그 애는 못마땅한 눈으로 날 째려보고는 얼른 가라고 휘휘 손짓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게으른듯 하면서도 활동적이고 무덤덤한 거 같으면서도 까다로웠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각기 적당한 덩굴을 잡고 벽앞에 섰다. 벽의 높이가 내 키의 세배쯤 되어서 조금 걱정이었지만 네모 반듯한 벽돌에 비해 쌓는 솜씨는 형편없어서 의외로 디딜 곳도 많고 할만해 보였다.


먼저 빨간 레샤가 오르기 시작했고 파란 쪽도 조심스레 발을 딛고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늦으면 안 되었으니 나도 튀어나온 벽돌에 발끝을 올렸다. 한 다섯 걸음쯤 올랐을 때였나 파란 레샤가 갑자기 미끄러져 떨어졌다. 아래를 보니 그 애는 아예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져 마냥 괜찮지는 않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덩굴을 놓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일 수록 서로 도와야하지 않겠나.


"도와줄게. 업혀."


쪼그려 앉아 어깨를 두드려 가리키자 파란 레샤는 난색을 표했다.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거 같은데. 애들업고 어디 오르는 것쯤이야 많이 해봤다.

...그 자식들은 왜 그런데가 올라가보고 싶다는 걸까.

나는 고향 생각을 애써 지워내고 한 번더 말했다.


"괜찮아. 도와줄게."


그제야 레샤는 조심스레 어깨를 붙잡고 업혔다.


"잡아주진 못하니까 꽉 잡아."


대답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덩굴을 잡고 한 칸 한 칸 벽을 올랐다.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것보다는 약간, 정말 아주 조금 약간 더 힘들었다. 벽은 괜히 더 높아진 거 같았고 튀어나온 벽돌의 간격이 세 칸 이상일 때는 조금 더 많이 힘들었다. 그렇대도 헛으로 단련해왔던 건 아니었기에 나는 떨어지지도, 미끄러지지도 않고 끝까지 벽을 올랐다.

남몰래 꿀 같은 한 숨을 몰아쉰 나는 파란 레샤를 내려주고 곧장 빨간 애는 잘 하고 있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애는 아직도 저 아래에서 덩굴을 잡고선 매달려 있었다. 못 올라오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거 같았다.


물끄러미 날 올려다보단 빨간 레샤는 갑자기 덩굴을 놓고는 바닥에 내려섰다.


"뭐해에?"


나는 저 아래로 물었다. 그러자 그 애는 양팔을 쭉 뻗어 내게 향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그게 나에게 도와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무심코 소리쳤던 나는 아래쪽의 문지기에게 들킬까 헛숨을 삼켰다. 잠시 몸을 수그리고 진정하는 시간을 가지고 난 후에 다시 아래를 보자 그 애는 여전히 팔 벌려 기다리고 있었다.


"너 아까까지 잘 오르고 있었잖아...!"


나는 숨죽여 성을 내었다.

그쯤하면 고집을 꺾을만도하건만 그 애는 고개를 저으며 팔을 한 번 흔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려가면서 얼마나 불만을 중얼댔는지 모르겠다.

내가 완전히 저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자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던 빨간 레샤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내게 다가와 당연한 것처럼 팔을 벌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애까지 업고서 벽을 올랐다.


나는 벽 안쪽의 도시를 보게 되었다. 거긴 노란 벽돌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건물들도 내가 알고 있는 모양하고는 조금 달랐다. 재료는 노란 벽돌이 전부였고 창문으로 보아 대부분 삼층까지 만들어져 있었으며 한 층의 높이가 낮고 각 층 간의 면적이 크게 달라 경계가 분명했다. 형태는 네모 각진 게 전부였으며 각 건물 사이로 무수히 많은 밧줄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참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다행히 오르는 것만으로 만족했는지 빨간 레샤는 나에게 내려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파란 레샤도 스스로 잘 내려갔고 나도 오르는 것보다도 더 쉽게 벽을 내려갔다. 가까이에서 본 건물들은 더 볼품없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노란 벽돌뿐인 건 색과는 달리 전혀 따뜻해보이지 않았다.


별달리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기에 우리는 마치 원래 그 안에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조용한 거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곳이었다. 목소리가 없는 두 아이들과 할머니 집에 있을 때도 이것보다 조용하지는 않았다. 거리엔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고 창은 전부 나무로 만든 문으로 막혀 있었다.

아니 우연히 눈길이 간 곳 한 군데, 어떤 건물의 삼층 창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빛이 반짝였다. 빛이라기보다 꼭 문지기의 눈동자 같았다. 내부가 어두워 까맣게밖에 보이지 않던 그림자는 창가로 나와 창문을 닫았다.

그 사람은 아주 새까맣고 윤기나는 털로 감싸여 있었으며 입이 툭 튀어 나오고 길쭉한 수염이 몇가닥 나있었다.


고양이...?


그 때였다.

하늘에서 무언가 우리 앞에 떨어졌다. 물건들은 무참히 바닥에 부딪쳤고 와장창하는 소리를 내며 부숴지고 깨져나갔다.

주방에서 쓰는 넓적한 그릇과 국자와 스푼 같은 것들이었다. 이어 몇 개의 그림자가 쏜살같이 우리의 눈 위를 스쳐지나갔다.


작가의말

추석특집 폐관수련을 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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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 34. 헛것이야(6) +2 18.09.25 182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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