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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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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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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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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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DUMMY

원이 그려지면, 그 자리의 벽돌이 전부 떠올랐다가 일시에 떨어졌다.

이불에서 먼지를 터는 것 마냥 가볍게 일어났지만 그건 분명 내 머리보다도 큰 벽돌이었다.


바닥에 새겨지면 바닥을, 벽에 새겨지면 벽을, 문에 새겨지면 그 문조차도. 슬리체가 그리는 원은 그려진 자리의 모든 것을 들어내버렸다.

벽돌은 마른 진흙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고 나무는 빵이 불어터지듯 안에서부터 구멍이 났다.


녀석은 단언한대로 원 안의 것을 부수지는 않았다. 그저 공중에 떠오르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사람 괴롭히는 취미가 있느냐고 물어봐야 할까.


어쨌거나 허공에서 뒤집어져 뒤통수 박고 싶지 않으면 원을 조심해야 했다. 테두리가 완전히 그려질 때까지 그 땅을 밟고 있으면 천장과 바닥이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날 따라 그려지는 원을 피해 달아났다. 원이 그려지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완성되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낙관적인 일이 아니라는 건 우리가 점점 글리 캐스트와 반 랜드레이가 맞붙은 자리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칼날.

쇠와 쇠가 직접 부딪치며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쇠가 울리는 높은 소리는 복도의 벽을 따라 찢어졌다.


잠깐 보기엔 반 랜드레이의 일방적인 공세처럼 보였다. 녀석 특유의 저돌적인 싸움방식은 한 번 한 번이 겁 없이 치명적이었고 글리는 그걸 피해내는 것이 전부였다.

늘 여유 만만했던 얼굴에도 분명 균열이 있었다.


"다른 델 볼 여유가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지루하게 했나봐?"


내가 잠깐 한 눈을 판 것이 슬리체에겐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딴 데 보고 싶어서 본 것도 아니고 뒤에서 칼부림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돌아보지 않느냐고, 나는 물을 시간도 없었다.


발밑의 원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기왕이면 이렇게 되기 전에 이렇게 되기 전에 좀 알려주지.

슬리체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레샤나 야우라에게도.....


"으앗!"


발이 훅 꺼짐과 동시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팔을 뻗어 바닥을 짚어도 붙잡은 벽돌은 맥없이 허물어졌다.

발이 훅 꺼져버렸고 나는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그 짧은 시간동안 바닥에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생각했다기보단 떠올랐다.

떨어져 부서진 벽돌의 잔해들, 날카롭게 깨져 그 날을 이빨처럼 세워서는 내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실 기다리고 있긴 않겠지 돌멩이가 뭘 안다고. 그런데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적어도 돌멩이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면 자비심을 발휘해 좀 살살 찔러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 저런 그런....


한심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 한심한 생각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허공에서 빙글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착지라고 하기엔 조금 뭣했다. 뒤구르기를 해서 넘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 마술.


나는 원래 내가 떨어졌어야 할 자리를 보았다.

그곳엔 하얀 원과 그 주변으로 말끔하게 밀려나 똑같이 원을 그리고 있는 돌멩이들이 보였다.


조금 지나자 그 위로 슬리체가 떨어져 내렸다. 녀석은 바닥에 닿기 직전에 살짝 떠오르며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래도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질 줄 알았는데."


슬리체가 말했다.

일부러 곱게 떨어뜨려준 건 아니라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뒤로 물러나 녀석의 기색을 살폈다.

글리와는 정반대인 녀석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낯빛이 거의 변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얼핏 어조가 거의 없었다.

스우렌우나랑 비슷한 것도 같았지만 조금 달랐다.

이 녀석은 모든 걸 차갑게만 보고 있었다. 보고 있긴 하지만, 그 보고 있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떨어진 돌조각들을 찬찬히 보던 슬리체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넌 글리에게 갈 수 없어. 글리가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


녀석이 말했다.

뻔뻔한 건지 둔감한 건지 아니면 그저 나를 약 올리려는 것인지, 역시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딱히 가려고 한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밀어낸 것도 너거든? 알고는 있냐?"


"...모르겠네."


농담이라고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슬리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설 때, 나는 그걸 따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녀석은 제 발 앞에 원을 그리는 것으로 거슬리는 돌무더기를 전부 치워냈다.


저런 유익한 능력을 왜 나 같은 놈 잡을 때 쓰려는 걸까. 가능하다면 좀 더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설득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말이지.


어떻게 할까.

이제는 슬슬 고민할 때였다. 실은 지금도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닥에 원을 그리는 것만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마법사를 상대로 대책을 세워두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약간 더 줬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슬리체는 또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 때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위를 보자 이제는 천장이 된 구멍난 바닥에서 검 한 자루가 뚝 떨어졌다.


검은 그대로 구멍 바로 밑에 있던 슬리체의 등 위에 떨어졌다.


"윽!"


슬리체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면서 검은 녀석의 등과 어깨에 걸려 빙글빙글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 그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슬리체 녀석은 아직 바닥에 엎어져서 어깨를 붙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도 없었다.

그 속꿍꿍이가 어떤지 모르기에 나는 물러나서 정황을 지켜봤다.


하늘에서 무기가 떨어졌다.


갑자기 신이 날 도운 건 아니겠지. 세상천지 그렇게 불공평한 신이라는 건 들어본 적 없었다. 새하얀 검. 이건 야우라의 것이다.


엎드려있던 슬리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위에 다시 야우라가 떨어졌다.


"으잇...!"


슬리체의 어깨를 밟은 야우라는 지지할 녀석이 다시 넘어지려하자 위태롭게 제비를 돌아 착지했다.


"저리 비켜!"


엎어진 슬리체가 고성을 지르며 팔을 젓자 야우라가 있는 자리에도 원이 그려졌다. 야우라는 잽싸게 벗어나 내 옆으로 날아왔다.

그리곤 속닥였다.


"쟤 겉만 그럴듯하지 사실 속은 완전 바보 아니야?"


파바박!


그 직후 원은 완성되어 다시 바닥을 뒤엎었다.


글쎄, 저렇게 벽돌을 뒤집는 걸 보면 바보라고 하기엔 그 능력이 너무 출중했다.


"그럼 너도 저런 것 좀 해봐."


그러면 사는 게 얼마나 편했겠느냔 말이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야우라의 말이 맞았다.

누구나 저럴 수 있다면 놀랄 필요도 없었다.


슬리체는 아직도 아프다며 끙끙대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쇳덩이를 맞았으면 아파하는 게 당연하지만 지금이 저렇게 오래 아파할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아프더라도 참아야할 때였다.

그게 아니라면 우릴 전부 우습게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잘은 몰라도 마법사는 대개 그런 느낌이었다.


"어쨌든 조심해."


"일단 내 칼 줘."


야우라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약간 고민이 되었다. 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주느냐하는 고민이었다.

고심 끝에 난 검을 뽑아 그 중 검집을 야우라에게 주었다.


"이게 뭐야."


당연히 군말이 나왔다.


"나한테 본체를 줘야지. 내 거잖아."


야우라는 슬리체를 주시하면서도 힐끔힐끔 날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본체야."


"뭐어?"


"진짜로. 검보단 검집이지. 검집이 있어야 검도 그 날카로움을 유지하는 거고. 그런 거라니까."


능청스럽게 넘어가보려 했지만 야우라 역시 꼬꼬마 어린애는 아닌지라 팔꿈치를 내 옆구리를 팍 찔렀다.


"너어. 다음에 네 거 쓸 때 보자?"


"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쟤부터 어떻게 해보자고."


나는 그럭저럭 수긍하게 된 야우라의 등을 밀어 서로 떨어졌다.


적어도 지금까지 슬리체는 한 번에 하나의 원밖에 그리지 않았다. 여러 개를 그리지 못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그 속내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으로선 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 원 하나에 몰아서 붙잡힌다.


"아! 그러고 보니까 네 건 검집 없잖아!"


저만치 가던 야우라가 뒤늦게 깨닫고 소리쳤다.

나는 못들은 채 했다. 하여간에 이럴 땐 기억력도 좋아.

다행히 성을 내던 야우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은 아닌지라 이가 드러내도록 내던 성화를 가라앉히고 정면의 마법사에게 집중했다.


슬리체는 숨을 죽이고 우리 모두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꼭 누구를 먼저 처리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희들에게 돌은 없잖아. 그렇지?"


녀석이 말했다.


"그러면 이러고 싸울 이유도 없을 텐데. 위에 글리가 기다리고 있어."


"이쯤에서 그만하면 난 좋고."


나는 진심을 담아 소망을 내보였다.


"하지만 너희가 글리에게 가게 둘 수도 없어."


"그럼 우리 말로 해결할까."


슬쩍 농담을 건네 보았지만 슬리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좌우로 눈동자를 굴려가며 우릴 살피고 있었다.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가 끝난 듯 녀석이 입을 열었다.


"못 움직이게 만들면 괜찮겠지."


평범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슬리체는 손을 저어 내 발 아래에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어차피!

안 들어줄 거면서! 왜!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냐고!


불평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원이 완성되기 전에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물러난 자리의 돌가루와 먼지가 물에 뜬 것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날 놓친 걸 확인한 슬리체가 원의 빛을 꺼뜨리자 그것은 순리대로 돌아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져 그려지는 원을 피해 계속, 계속 달렸다.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떠오른 게 없지만 어쨌든 슬리체에게 다가가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손대기 어려운데 멀어지면 정말 손 쓸 바가 없었다.


"야! 비겁하게! 마법 같은 거 쓰는 게 어디 있냐!"


야우라가 슬리체의 주의를 끌었다.


아니, 주의를 끌은 게 아니라 진짜 답답하고 화가 나서 그런 건가.


그게 어느 쪽이든 슬리체는 내게 그리던 원을 거두고 때려잡을 듯이 검집을 쥐고 있는 야우라를 주시했다.


"이게 왜 비겁하다는 거지?"


슬리체가 물었다.


"아, 그거야. 그. 그.... 그러니까.... 어...."


막상 캐물어지자 야우라는 달리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슬리체의 말이 맞기도 했다. 비겁하다고 할 건 없지. 오히려 두 명인 쪽이 더 비겁하다고 할 수 있었다.


"너희들이 검을 배우는 동안 난 이걸 배웠어. 그 차이일 뿐인데."


어라. 그렇다면.


"그럼 비겁한 거 맞네. 쟨 검도 안 배웠거든."


실력에서 밀릴지언정 기세에선 밀리지 말라고 배운 나는 돕는 셈 치고 우스갯소리를 던져보았다.


"야!"


빽 소리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효과는 야우라에게 더 강했던 것 같다.


"배웠거든? 배웠어! 왜 내가 하는 거에 대해서 그렇게 다 아무 의미 없다는 것처럼 말해?"


야우라는 목청껏 고래고래 소리쳤다.


배우기야 했다. 배우기야 했지. 하지만 지금은 야우라가 진정성 있게 스렌의 훈련을 따랐는지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야우라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슬리체는 손을 들었다.


"야! 온다!"


나는 경고했다.


"뭐어?"


야우라가 발밑을 보았을 때 원은 이미 거의 다 완성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 애가 재빠르대도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원이 완성되어 빛을 뿜자 야우라는 올무함정에 걸린 것처럼, 걸쳐진 오른발부터 끌려 올라갔다.


"오와! 오와! 오와아!"


지지할 곳을 잃은 야우라가 괴성을 지르며 팔과 다리를 허우적댔다. 아둥바둥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무력해보였다.


나도 아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움직여도 움직이는 것 같지 않고 몸 닿는 곳 없이 허전한 감각은 침착함을 잃게 만들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 허둥대는 야우라의 옷을 잡아 바깥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원 밖으로 끌어내지자 야우라의 몸은 곧장 바닥에 뚝 떨어져 내게 부딪쳤다.

다시 만난 땅이 반갑겠지만 지금은 재회를 감미할 시간조차 없었다.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양심이란 게 있냐고!"


그 불합리함에 야우라가 분개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슬리체는 멈추지 않았다.


"저기다가 물어봐!"


나는 야우라의 몸을 세게 밀쳤다. 야우라도 내 어깨를 밀어냈다. 우리는 자연스레 원도 피하면서 서로 멀어지는데 성공했다. 답지 않게 제법 호흡이 잘 맞았다.


다시 목표가 두 개로 갈라지자 슬리체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우리를 살폈다. 확실히, 원을 두 개 이상 그려내지는 못하는 거 같았다.

시선이 빠르게 움직인다는 건, 동요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아니면 시야가 넓을 만큼 노련하던가.


"둘을 한꺼번에 잡아야 의미가 있겠어."


둘 중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방법을, 난 아직 몰랐다.

슬리체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너! 무슨 토끼몰이라도 하는 양 말하는데. 그러다가 큰 코 다친다? 할 줄 아는 건 낙서밖에 없는 게?"


어디서 본 건 있는 야우라가 지지 않고 팔을 뻗어 검집을 겨누었다.


"낙서 같은 하찮은 게 아니야."


슬리체는 주먹을 들어 자기 등 뒤의 벽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 곳을 중심으로 작은 원이 그려지더니 완성과 동시에 벽돌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우왁!"


화들짝 놀란 야우라가 머리를 감싸 쥐며 쪼그려 앉았다.


벽돌은 그 위를 지나 다른 벽에 부딪쳐 부서졌다.


"그건 진짜 반칙이지!"


이번엔 내가 따졌다.

저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나. 벽과 벽돌이 부딪치니까 벽돌이 부서지는 거지 다른 거랑 부딪치면 그게 어디 가서 꿀리겠냐고.


"너희도 배우면 되잖아."


슬리체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까닥였다.

이래서 된 놈들은 안 되는 것이다.


"해봤는데. 안 됐어!"


자기밖에 모른다니까.


"그건 유감이군."


슬리체는 이번엔 반대쪽 손으로 벽을 두드렸다. 당연하게도 그 벽돌은 이번엔 나에게 날아왔다.

나는 완전히 피하지도 못하고 기울어진 표지판마냥 한 쪽 발만 겨우 디뎌 그걸 피할 수 있었다.

예상 했으니까 망정이지 벌어진 다리뼈가 삐걱삐걱 대는 게 몇 번 더 이런 일이 있었다가는 혼자서 서지도 못하고 나자빠질 상이었다.


"이게 까불고 있어!"


그 틈을 노린 야우라가 검집을 높이 들고 돌진했다. 슬리체는 단순히 그 앞에 원을 그리는 것만으로 야우라를 막았다.


기세 좋게 달려 나가던 야우라가 원의 금을 밟고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힉. 이익! 힉!"


한 발이라도 더 나가면 얄짤없이 붙잡히는 거였다.


"진짜! 너어....! 잡히면...! 가만 안둬잇...!"


빙빙 팔을 돌리고 몸을 배배꼬고 난리를 치던 야우라는 끝내 원의 바깥쪽, 뒤로 넘어지며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저것만 보더라도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건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백년은 더 늙을 거 같은 한숨을 내쉬던 야우라는 낮은 자세로 달려 다시 나에게 왔다. 그리고선 대뜸 타박부터 했다.


"넌 뭘 보고만 있어!"


"그럼 어떡해. 내가 뭐 어떻게 해줄까."


"뭐라도 해봐."


"그러니까 뭘."


"와 얘 진짜 대책 없네."


"그럼 처음에 넘어뜨렸을 때 어떻게 했어야지."


"아니이.... 그러고 그냥 누워있을 줄 알았냐. 뭐라도 할 줄 알았지. 어쨌든 이젠 지난 일이잖아! 사람은 앞을 보고 나아가야한다고!"


"말은 잘해요. 그럼 네가 한 번 생각해봐."


나는 다투면서도 슬리체를 힐끔힐끔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우라도 오른쪽 눈은 슬리체를 보고 왼쪽 눈으론 날 보는 것처럼 바쁘게 시선을 움직였다.


"일단. 마법을 못 쓰게 하자."


밑도 끝도 없이 야우라가 말했다.

이런 말을 진지하게 하니까. 얘가 야우라인 거겠지.


"어떻게 할 거냐고 그걸!"


그걸 알면 이 고생을 하고 있겠느냔 말이다.


"이거라도 던져볼까?"


야우라는 제 손에 쥔 검집을 내보였다.


"안 될 거 같은데."


검집을 정확히 던져 슬리체의 팔을 부러뜨리지 않는 이상 그걸로는 힘들어 보였다.


"다른 건 없어?"


내가 묻자 야우라는 아래쪽을 향해 슬쩍 눈길을 주었다.


"그거."


내가 쥐고 있는 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건 안 돼. 이거 없으면 어떡하려고. 다른 거, 뭐 또 없어?"


"다른 거? 어... 어! 철꽃핀."


철꽃핀. 그게 뭐였더라.

그걸 떠올리는 데에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꽃모양으로 펼쳐지는 기능이 있는 머리핀 따위를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걸 잊어선 안 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철꽃핀을 자랑하는 야우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아차 싶었는지 야우라는 재빨리 몸을 수그려 자기 머리핀을 지켰다.


"아앗! 싫어! 또 내다 판다고 그럴 거잖아."


"어차피 쓰지도 않는 거 헐값에라도 팔아버리는 게 낫지. 어차피 내 돈으로 산거잖아!"


"가끔 쓰거든?"


"난 못 봤거든?"


"그건 네가 섬세하지 못한 남자라서 그런 거야."


"하지만 채무관계에는 섬세할 거니까 이제 달라고."


제법 세게 나가자, 야우라는 말문이 막힌 것인지 조용해졌다. 그렇다고 핀을 준 건 아니기 때문에 난 잠자코 그 다음을 기다렸다.

약간의 뜸을 지나 야우라가 한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근데 레이크. 나 궁금한 게 있어."


"말 그만 돌리고 달라니까."


말려들지 않으려 해봐도 야우라는 막무가내로 하고 싶은 말부터 했다.


"쟤, 왜 가만히 있지?"


하고 말이다.


쟤라는 건 슬리체를 가리키는 거였다. 시선의 방향이 그랬다.

그러고 나서야 나도 웃기지도 않는 실랑이를 벌이는 지금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게?"


왜 슬리체 녀석이 가만히 있는 걸까.


단순히 우리를 글리에게 보내지 않기만 하면 되니까 한심한 내분이나 계속하라고?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공세적으로 나올 이유도 없었다.


정신과 육체는 연결되어 있다.

비록 몸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지치는 법이라고 비셔스 경은 말했다.

하물며 마법 같은 건 어떨까.

저 녀석도 결국은 내 또래였다. 한계가 있을 것이다.


"힘이 빠졌나?"


야우라가 말했다.


"그건 아닐 걸?"


그렇대도 벌써 지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상황이 더 이어졌을 때, 지칠 수도 있다는 걸 의식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래도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되는 거 아니야?"


야우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슬금슬금 발을 끌어 서로 떨어져나갔다.

이상적인 상황에서, 그러니까 나랑 야우라가 슬리체에게 붙잡히지 않고 힘을 모두 빼는데 성공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승산은 있었다.


여태까지도 피했으니 앞으로도 할 수 있어.

분명히.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작가의말

음 두서를 뭘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취직할 일이 생겨서 이래저래 일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원상복귀지만요. 소식도 없이 죄송합니다. 연중은 정말 기분 나쁜 일이죠. 죄송합니다. 어떻게 질질 끌리게 되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얼마가 걸려도 결말을 낼겁니다. 안그러면 다시는 이런 글쓰기 같은 걸 못하게 될것 같거든요.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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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19.05.09 115 6 20쪽
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1 6 19쪽
»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2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5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1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6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5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5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8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5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2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3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6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1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5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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