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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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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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9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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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DUMMY

글리는 날 벽 구석까지 밀쳐 몰아넣었다. 내가 벗어나려고 하자 그것보다도 더 먼저 손바닥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꾸욱 눌렀다.


"뭇..."


내가 말 한 번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입 속에 글리의 손가락이 훅 들어왔다. 글리는 검지로 내 혀를 누르고 엄지로는 턱을 받쳐 올리는 아주 기이한 방법으로 말문을 막았다.

이게 특별히 기분 나쁘다고 말하진 않겠다.


"조용히."


은밀히 속삭인 글리가 아예 몸으로 막듯이 내 가슴에 어깨를 바짝 밀착하는 것이.

꼭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얄밉게 웃는 모습이.

그 모든 것들이 음흉해, 뭐든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내가 반발할 여지는 곧 발소리가 들리면서 사라졌다.


저 바깥의 멀리서부터 들려온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우리가 있는 방 앞에서 멈추었다.

글리는 절대 꼼짝 말라 말로 하진 않았지만 내 가슴을 더 세게 누르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문이 열리자 바깥의 빛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텐더였다.


"텐더잖아."


혹시나 저지르고나면 다시 주워담을 수 없으므로 나는 조용히 말했다.


"글리도... 알아."


글리는 나보다도 더 조용히 말하며 검지를 세워 입술 앞에 데었다.


텐더는 문을 활짝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랑 글리는 자연히 그 뒤에 가려지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온 텐더는 우뚝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왜 열려 있지?"


글리가 뒤집었던 상자를 본 텐더는 굼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단서를 흘린 글리를 째려보았다.

녀석은 알고 있던 것처럼 날 올려다보더니 장난스레 혀끝을 내밀어 깨물었다.


상자의 내용물을 전부 주워담아 뚜껑을 덮은 텐더는 다시 그걸 다른 상자 위에 올려놓고선 밖으로 나갔다. 그걸로도 모자라 문을 닫고선 열쇠로 걸어잠그는 소리까지 났다.

발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나는 가장 먼저 미약한 재주로 어둠을 밝혔다.


"와. 글리가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나는 말같지도 않은 소릴하는 글리를 밀어내었다.


"정말인데."


그 정말이라는 녀석에게선 태연자약한 미소가 떠난적이 없었다.


"왜 숨은 거야?"


내가 물었다.


"몰랐어? 글리에게 맞춰주길래 레이크도 아는 줄 알았는데?"


글리는 되려 의외라는 것처럼 굴었다.


"사실 글리는 이 탑에서 레이크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어. 이 문도 잠겨있던 걸 연거야. 어쨌든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네. 텐더는 저래보여도 좀 모자른 친구거든."


글리는 제 옆통수를 톡톡 두드렸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고?"


내가 되물었지만 글리는 대답을 하는 게 아니라 광구를 만들어낸 내 손의 손목을 잡아서는 문쪽을 향해 들이밀었다.


"프리실라가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던데."


"아아...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야, 레이크. 여자에겐 비밀이 아주 많거든. 글리도 아직 말 안하게 하나 있는데."


"뭐? 또 뭘."


"문. 열었다고."


하며 문을 연 글리는 문을 자랑스레 바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밖에 나가고 나서도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동행을 계속했다.

글리는 거리낌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났다. 적어도 마음대로 다니면 안된다는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레이크."


원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글리는 불쑥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아주 긴박하기도 해. 글리는 그런 걸 아주 싫어해. 아주... 아주... 아주!"


나는 묵묵히 따라 걷기만 했다. 대답을 할래도 뭘 알아 들어야하지. 그럼에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지 글리는 저 혼자 떠들기를 계속했다.


"조금 더 천천히 했으면 좋았을텐데. 조금 더 서로에 대해 알아갈 시간을 가졌다면 이러지 않아도 되었을거야. 그래서..."


글리는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그래서 글리는 레이크를 아주 좋아해. 지금도 가만히 듣고만 있잖아?"


"할 말이 있어야 하겠지."


"아하... 그렇게 겸손하지 않아도 되는데."


글리는 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레이크는 여기에서 뭔가 신경 쓰인적 없어? 요상한 거 말이야, 요상한 거."


"글쎄. 지금은 너."


"어우. 너무 밀기만 하면 안되는거야, 레이크. 가끔은 당기기도 해야지. 글리는...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라구?"


"너만큼 이상한게 여기 있을지 모르겠다."


"왜 없겠어? 아까 그 방 같은 것도 있잖아. 그런 방이 여기 왜 있을까? 레이크는 생각해봤어?"


"그냥 창고 같은 거 아니야?"


"창고? 아니야, 레이크. 책상이 있었잖아. 책상 위에 뭐가 올려져 있었지?"


뭐가 올려져 있었냐고?

잘 기억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론 떠오르지도 않는 잡동사니나 좀 있었던 것 같고 상자 같은 게 조금 있었던 것 같다.


"필요한 것만 올려져 있었어. 바닥엔 상자가 그렇게 많은데. 책상 위엔 없었다고."


"쓰는 방이라는거야?"


"그래, 맞아. 그런데 누가 봐도 쓰는 방이 아니었잖아?"


"뭔 소리야. 쓰는 거라는 거야, 안 쓰는 거라는 거야?"


"쓰는 사람이 있는데, 없는 거야. 와! 불가사의. 글리가 정말 좋아하는 건데."


쓰는 사람이 있는데 없는 방이라.

주인이 있는데 없는 방이라.

쓴 적 있는데 잠겨있는 방이라.


물어본 내가 잘못이었다.


"그래에서어? 레이크는 뭐 없었어?"


글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날 추궁했다.

이상한 점이라. 따지고보면 이 탑의 모든 게 이상해서 할 말이 없었던 것일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 중에 하나 특별한 걸 찝어본다면.


"털."


그게 있었다.


"털?"


이해가 안된 것인지 글리는 눈가를 찡그렸다.


"털로 만든 요리가 있다 그러더라고. 요롷게 작은 유리병에 무슨 동물의 털이 들어있던데?"


나는 내 손가락의 첫마디를 잡고 보여주었다.


"아... 그랬어?"


짐짓 이해가 된 듯 탄성을 질렀던 글리는 어째서인지 씨익 웃었다.


"맛있었어?"


"먹어보진 못했어."


"아직 요리하기 전이겠네? 어디로 갔어? 가지고 있어? 글리도 한 번 보고 싶은데?"


"텐더가 가져갔어."


"어우... 그런 진귀한 걸 그냥 줘버렸단 말이야?"


그 특유의 알 수 없는 장사꾼 기질이 발동한건지 몰라도 글리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텐더... 텐더란 말이지... 알았어. 고마워, 레이크."


"혹시나 하는 말인데, 훔칠 생각하지마. 공범된 기분들 거 같으니까."


"그런 걱정은 붙들어매라고? 글리는 친구를 팔지 않아.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입에서 레이크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을거야. 설령, 눈꺼풀이 도려내지더라도 말이야."


"그쯤되면 그냥 말해잇..."


되는 않는 끔찍한 소리에, 나는 치를 떨었다.


"아, 정말 감동이야. 글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레이크는 글리를 꼭 보러와줘. 그럼 글리는 눈물 한 방울만 남기고 미련없이 떠날테니까."


글리는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곱게 훔치며 처연한 여자를 연기했다.

물론 나는 글리가 위대한 대부호가 되어 온갖 환영을 받으며 돌아온데도 안 갈 것이다.


"근데 레이크는 그걸 어디서 찾았어?"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인지 글리가 질문을 바꾸었다.


"비밀이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더 이상 글리의 공범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우... 정말 짖궃다니까."


그게 우리끼리 항상 하던 장난이라도 되는양 글리가 내 팔을 툭 건드렸다.


"그렇게 글리가 부탁을 했는데 미력의 돌도 안 가져오고... 정말 짖궃어."


글리는 안 그런척 하면서도 목소리에 가시를 잔뜩 세웠다.


"그건 그렇고."


하며 글리는 또 여유로운 체를 했다.


"레이크는 그 털로 만든 요리라는 게 궁금하지 않아? 글리는, 궁금한데. 가서 물어보지 않을래?"


"아무데나 가면 안된다면서."


"어우, 레이크는 뭘 모르는구나. 맘대로 가면 안된다는 건. 누가 같이 있으면 괜찮다는 거라구."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


내가 같이 있으니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에 자신을 감시할 사람이 있으니 괜찮다는 거였다.


글리는 날 데리고선, 사실 나 또한 글리를 감시하고자 따라간 것이었으니데리고 갔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데려가고자 했던 곳은 주방이었다.


처음에 나이프 쓰는 법을 배워야했던 식당으로 돌아가 반대쪽 문으로 나가, 벽 옆에 작은 문을 열면 나오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는 곳인데, 여길 주방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음침한 곳이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만큼 조심스럽게 안 쪽을 들여다본 글리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날 보고선 씩 웃었다.


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딜가도 괜찮다고한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오그리는... 옥상에 올라가 있으려나?"


글리는 쿠쿡 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엔 화덕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던 털이 든 병을 찾고 있는 것이다.

왠지 녀석 마음대로 하게 두는 것은 퍽 배알이 꼴리는 일이었으나 내가 말한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었으므로 난 별달리 딴죽을 걸지도 않았다.


그보다도 내가 더 궁금한 건, 여길 정말 주방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하는 거였다.

구성물은 완벽했다. 주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곳엔 있었다. 냄비를 올릴 수 있는 화덕과, 직접 넣어서 찌거나 훈제를 할 수 있는 화덕이 또 따로 있었고, 식기며 조미료가 든 병들이 줄지어 선반에 놓여있었다.


다만 그 외의 것들이 주방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예를들면 저기 벽에 걸려있는 식칼 같은 것들이 괜히 신경쓰였다. 고기 통째로 걸 때나 쓰는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도 왜 여기 있는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런 건 대체로 다른 방에 빼두는 편이었다.


글리를 힐끗 보자 선반이며 장을 뒤지느라 여념이 없는 얼굴이 보였다. 당분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엔 그 반대편을 보았다. 주방 끝엔 작은 문이 있었다. 나는 홀로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긴 밀가루 포대같은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물건들이 쌓여있는 곳이었다. 관리되고 있긴 한 것인지 이상한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별 것 아니었다. 글리도 그렇고 야우라도 그렇고, 아까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자꾸 하다보니 덩달아 내 신경도 날카로워진 모양이었다.


들어온 김에 남은 찜찜함마저 전부 치우고자 했던 나는 더 안쪽으로 들어가 선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벽 구석까지도 보려고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발치에 무언가 걸렸다.


멍청하게 넘어질뻔 했던 나는 새삼 바닥을 다시 보았다. 바닥에 나무 판자 같은 것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건 판자 같은게 떨어져 놓여있는게 아니라 튀어 나와있는 것이었다.

지하와 이곳을 잇는 문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반쯤 문을 가리고 있던 밀가루 포대를 치워내었다. 그리고 고리를 잡고 문을 위로 들어열었다.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 같은 문은 조금은 힘들게 들어올려졌다. 틈사이로 순식간에 악취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엄습하듯 검은 물체가 지하로부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으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검은 물체는 순식간에 위로 올라 섰다.


"허억... 허억..."


그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축축하게 젖었으며 코를 찌르는 악취는 그것에서 나는 거였다.

가죽은 뭘 뒤집어 쓴건지 거무죽죽했다.


"레이크 아이힐데른..."


그건 내 이름을 말했다.


아니 암만 내 이름이 그렇게 팔리고 다녔다지만 여기 다른 지역인데다가 저건 사람 말을 알아들을 것 같이 생기지도 않은 거였다.


그런 것에게 대답을 하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한 나는 뭔가 휘두를만한 게 없는지 주변을 보았다.


"레이크 아이힐데른!"


그 때 그 거무스름한 것이 팔을 저어 얼굴을 훔쳐냈다. 오물 같은 것이 떨어져나가고 제대로된 형체가 보이자 나는 어렴풋이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그 목소리도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반... 랜드레이?"


나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


녀석은 팔을 털어내고 다시 그 손과 팔의 옷자락으로 얼굴을 훔쳐냈다. 몇 번 그걸 반복하자 그나마 사람처럼 생기게 되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던 거야?"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말했다.


"시궁창에서 뭘 했겠어..."


반 랜드레이는 입에도 뭐가 들어갔던건지 침을 뱉었다.


그런 꼴을 보고 있자니 온갖 대책은 다 마련한 것처럼 떠들고선 정작 필요할 때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기도 뭣했다.


"그 자식 어딨어..."


반 랜드레이가 어금니를 물고 말했다.


"뭐? 누구."


"글리 캐스트말이야! 어딨는지 알아?"


글리라면...


"지금, 이 밖에 있는데?"


"하!"


그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짧게 웃음을 내뱉은 반 랜드레이는 질척대는 신발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글리 캐스트!"


따라나가자 순식간에 헤집어져 난장판이 된 주방이 보였다.

화덕 위에 올라가 앉아서 조미료 병을 보고 있던 글리는 눈을 땡그랗게 떠서는 그 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병은 산산조각나 유리조각이 온 바닥에 쫙 퍼졌다. 안에 들어있던 검갈색 조미료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아주 잠깐 굳어있던 글리는 화덕에서 내려오더니 보란듯이 코를 쥐어막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글리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었다.


"냄새 괴물이잖아? 어우... 좀 씻고 오지 그랬어. 글리는... 청결한 걸 더 좋아하는데. 사람들도 더러운 정의의 사도보다는 깨끗한 정의의 사도에게 도움받고 싶지 않을까?"


"그렇게 여유롭게 떠들 시간이 있나 모르겠군."


반 랜드레이는 옷 속에 묻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어우, 왜 그런 무서운 걸 들이미는 거야? 글리가 뭘 잘못했다고."


"남의 동료를 쑤셔놓고서 별 일 없을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묻은 오물을 털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검을 휘두른 반 랜드레이는 빠르고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다.

동료라는 건 챠라 얘기겠지. 챠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우 그치만. 글리는 겁이 많아서 놀라면 무슨 짓을 할지 글리도 모른단 말야."


글리는 능청을 떨었지만 그걸 부정하지는 않았다.


"네 악행도 여기까지다. 글리 캐스트!"


반 랜드레이가 먼저 달려나갔다. 그 때까지도 글리는 완벽히 무방비 상태였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멈춰서있던 글리는 화덕의 냄비를 집어 반 랜드레이에게 던졌다.

무쇠 냄비를 검으로 쳐낸 반 랜드레이는 약간의 틈도 없이 돌격을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검을 내질러 찔렀다.


반 랜드레이의 검이 벽 틈사이를 파고들었다. 가까스로 꿰뚫리지 않고 검격을 피한 글리는 이어서 벽에 대고 칼을 긁어버린 반 랜드레이의 공격마저 굴러 피했다.

볼품없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글리는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반 랜드레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전에 그것과 비슷한 것을 분명히 본 바 있었다. 주머니가 터지고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정말 반 랜드레이의 코 앞에서 주머니가 터져 탁한 연기가 퍼져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소매로 훔쳐내며 달려나가려는 반 랜드레이의 옷깃을 뒤에서 낚아채 당겼다.


"윽!"


목을 졸리게 된 반 랜드레이가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엎어지며 당겨졌다.


그 사이 글리가 문틀 사이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뭐야. 너도 한 패 하기로 한거냐!?"


반 랜드레이가 우악스럽게 팔을 휘둘렀다.


나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가며 어찌어찌 그 주먹을 피해냈다. 그러는 중에도 절대 옷깃은 놓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 제대로 한 대 맞거나, 녀석이 검을 휘두를 것 같았다.


"내가 도와준 줄 알아!"


내가 소리쳤다.


"뭐라고!"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변명정돈 한 번 들어주겠다는 것인지 반 랜드레이는 저항을 멈추고 날 노려보았다.


"저 가루! 마시면 잠드는 걸거야. 잠드는 건지 기절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번에 본적 있어."


제대로 맞으면 덩치 큰 개도 한 번에 재우는 그런 묘약이었다.


그제야 머리가 식어 좀 회전이 되긴 하는 건지 반 랜드레이는 분을 삭이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화가 전부 풀리지는 않은 것인지 거칠게 어깨를 흔드는 통에 나는 녀석의 옷깃을 놓쳐버렸다.


나는 내 손바닥을 보았다. 검녹색 이물이 잔뜩 묻은 손가락과 손바닥에서 역한 악취가 났다.


"방심했어..."


반 랜드레이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넌 그 밑에서 뭘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물었다.


"글리 캐스트의 꾐에 빠졌다. 정신없는 녀석이야."


꾐에 빠진 것인지 똥통에 빠진 것인지, 나는 손에 묻은 오물을 벽에 치데 닦았다.


"챠라는?"


"챠라는 숨겨놨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네 말을 듣고보니 챠라도 상처보단 약에 당해서 쓰러진거 같군."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이 없던 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우린 서로 가늠하고 있던 것이다.


"어디서든 도울 수 있게 날 주시한다면서?"


내가 먼저 물꼬를 트었다.


"네가 이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랬지. 글리 캐스트 녀석, 처음부터 챠라가 따라다닌다는 걸 알았던 거 같은데. 그 정도의 주의력이라면 보통내기가 아닐거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완전히 놓쳐버렸군. 어디로 갔을지 알겠어?"


"글쎄, 털 찾으러 갔나?"


"털?"


"그런 걸 좋아하는 거 같더라고."


신기하고 진귀한 물건들 말이다.

나는 눈을 찡그린 반 랜드레이에게 그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취향 한 번... 더럽네..."


"어쨌거나 여기서 완전히 도망가진 못했을 거야."


"무슨 소리냐."


"걔도 동료가 여기 붙잡혀 있거든."


"동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리 캐스트 하나뿐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자 머리속이 복잡해진 것인지 얼굴을 구기던 반 랜드레이는 문득 검을 바로 잡아 원래대로 등에 걸어맺다.


저거 대체 어떻게 고정되는 걸까, 하고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반 랜드레이가 대뜸 말했다.


"가자."


"어딜가."


"어디긴 지하로 가야지."


"아, 뭐? 지하?"


"그래."


반 랜드레이는 담담히 말하며 안쪽의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가자고?"


나는 뒤따르며 따져물었다.


"그럼?"


행동이 빠른 반 랜드레이는 이미 지하로 통하는 문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몰래 다녀야지."


아니, 난 초대 받았는데...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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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8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5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2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6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1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5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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