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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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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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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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5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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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고리 안에 넣고 당겨(4)

DUMMY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관계도 아니다.

저 사람과 나는 가족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며 친구도 아니고 어떤 약속이나 사업에 의한 의무적인 연조차 없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케이라와 세이라는 그게 어떤 관계인지 본인들이 여실히 보여주었다. 말로만 떠들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게 안 좋게 굴러갈 수도 있을 줄이야.

요새 참 배우는 게 많다.


야우라랑 레샤가 어딘가 가버려서 다행이었다. 움막이란 어엿한 집 한 체였지만 또 어떤 의미로는 방이 단 한 칸 뿐이라는 것과도 같은지라 역시 다섯명이나 있기엔 조금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감님은 아까 하던 조각을 계속하고 있었고 에반젤린은 별 다른 것 없이 움막 안의 모든 것들을 가끔 살필 뿐이었다.

문제는 케이라와 세이라다. 아니, 문제는 없었다.


아무 문제도, 전혀, 모래 한 줌만큼도. 되려 지금 모래 한 줌이 뿌려진다면 더 큰 일이었다.


그 애들은 그냥 둘이서 놀고 있었다. 매우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주요 놀잇감은 실이라고 하기엔 조금 굵은 줄. 그걸 손가락으로 엮어 여러가지 모양을 만드는 거였다. 실뜨기와는 조금 달랐다. 그건 손가락 사이에 걸어 만들었지만 그건 매듭을 짓는 거였다.


케이라가 먼저 매듭을 지어 동생에게 주면 세이라는 그걸 뚫어져라 노려봤다.

노려보고 노려보고 또 노려보다가 그걸 풀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다음엔 케이라가 풀 차례였다.


최대한 머리를 굴리고 기억을 짜내어 더 예쁘고 더 어려운 매듭을 만들어내서 상대방이 그걸 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 것 같았다.


그걸 지켜보면서 든 생각은, 우리집 애들은 저거 안 해서 다행이다, 였다. 가끔 놀아주는 것도 피곤한데 저런 거 하자고 하면... 난 동생들에게 차가운 오빠와 형으로 기억 되었겠지.

아니면 나는 저런 걸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걸 수도 있고.


정말 그랬을까. 엄살을 좀 보태기는 했지만 그렇게 어려워보이지는 않는데.

고작해야 애들 놀이였다. 애들 놀이.


"저, 케이라. 그거 잠깐 줘볼래."


내가 손을 내밀자 그 애는 자기가 풀어야 했던 매듭을 선뜻 넘겨주었고 나는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매듭은 나비처럼 생겼다. 끈을 빙빙 둘러 만든 뭉치가 가운데에 있고 양 옆에 두 개의 고리로 만든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쯤되니 매듭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는지 재주도 좋다. 그래 정말 영리한 애니까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동생들이 머리가 나쁘다는 건 아니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괜히 칭찬하는 것도 아니다.


"스읍..."


그런 것이 아닐 터인데, 왜 점점 그런 것처럼 되어가는 걸까.


"...예쁘게 잘 만들었네."


나는 원래 그런 칭찬이라도 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하며 케이라에게 매듭을 돌려주었다.


그 때 들렸던 에반젤린의 웃음소리는 갑자기 웃기는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은 거라고 생각하자.


"제가 알려드릴까요?"


그렇게 좀 생각하자고요, 사제님.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혹시 몰라 저런 거 알아뒀다가 써먹을 날이 언젠가는 올 수도 있는 거였다. 아마 오지 않을테지만.


"어떻게 하는 건데?"


아직 케이라가 매듭을 풀지 못 했으니, 나는 혼자만 듣기 위해 에반젤린에게 가까이 갔다.


"저건요. 가운데를 누르고 한 쪽 날개를 잡은 다음 그 반대쪽 날개를 당기면 되요."


"진짜 그거면 돼?"


생김새만 봐서는 가위라도 동원해야할 것 같더니 결말은 허망했다.

실망감이 잔뜩 묻어나오는 대답에 에반젤린은 싱긋 웃었다.


"매듭 풀이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걸요."


복잡해보여도 별 것 아니라는 거였다.


비밀이랍시고 작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움막 안이 워낙 조용한 탓에 다 들렸던 걸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케이라가 갑자기 세이라의 매듭을 풀어냈다. 에반젤린이 말했던 방법을 정확히 따라한 것이다.


예상 외의 곳에서 날아온 훈수에 준비한 무기가 박살나게 된 세이라가 억울하다 못해 거의 울 것 같은 지경이 되었다.


악의는 없었다고 해도 본의 아니게 놀이를 망쳐버린 에반젤린은 화들짝 놀랐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판난 승부를 뒤집을 수는 없으니 에반젤린은 사죄의 미소와 함께 다른 제안을 내밀었다.


"대신 제가 저만 아는 매듭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코끼리도 못 푸는 매듭인데. 아세요?"


"그게 무슨 매듭이야."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나는 넌지시 끼어들었다.


유쾌하지 못한 추억이란 사람을 괴팍하게 만드는 것이다. 절대 내가 화를 잘 낸다거나 깐깐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포박과 매듭이 다르다는 걸 알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물론 애들은 매듭보단 포박을 더 좋아하겠지만.


처음 보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에도 익숙한 에반젤린은 한 번 섞여들게 되자 금방 케이라, 세이라와도 친해지게 되었다.


하여 움막 안의 구도가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세 무리에서 두 무리로 줄어든 것이다.

그쯤 나는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되었다.


나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같은 것.


암만 생각해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갈까 싶다가도 다른 두 녀석도 없고 에반젤린도 이제 막 애들과 놀아주는데 가버린다고 하는 것도 뭣했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타닷! 하고 이 상황을 깨뜨려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러니 이 세상은 아직 즐겁고 행복하고 자비로운 것이었다.


-"세이라! 케이라아!"


멀찍이 움막밖 어딘가에서 날 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케이라와 세이라를 찾고 있었다. 목소리로 듣기에 이 애들의 또래는 아닌거 같은데 엄마가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


너무너무 궁금했던 나는 얼른 움막 밖으로 나갔다.

정말 너무너무 궁금했다.


목소리는 하나였는데 보인 셋이었다. 야우라와 레샤가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처음보는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아직 묻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 사람이 케이라와 세이라의 가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키는 훨씬 컸지만 이목구비의 느낌이 비슷했다. 긴 머리를 뒤로 모아 묶은 것이 생활력 있게 보이는 그 여자는 왜인지 화가 나있었다.


움막에서 나온 게 나라는 걸 보자 그 사람은 눈가를 찡그렸다.


"...누구세요?"


그 사람이 말했다.

움막에서 내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눈치였다.


"쟤는 레이크 아이힐데른이야. 있어, 화 많이 내는 애."


대답은 옆에 있던 야우라가 대신 해주었다. 어떻게 되먹은게 질문받은 당사자보다 빨라.


"난 네가 건들기 전에 먼저 화를 낸 적이 없어."


나는 다가오는 야우라에게 톡 쏘았다.


"그럼 지금 하는 건?"


나는 건든적이 없다. 그러니 할 말이 있느냐? 하듯 야우라는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아주 때려볼테면 때려보라는 기세였다.


"먼저 건드렸잖아."


머리를 밀어내자 조금 버티는가 싶던 야우라는 얌전히 물러났다. 그리고는 말했다.


"방금 그게? 기준 선이 너무 낮은 거 아니야?"


"너한테만 특별히."


"허! 그런 특별대우 필요 없거든?"


"그래서 옆에는 누군데."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느냐 묻자 야우라는 깜빡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탄성을 흘리더니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여자를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얼떨떨하게 보고 있던 그 사람은 갑자기 당겨져 비틀거렸다.


"이 쪽은 피리아. 케이라랑 세이라의 언니래."


키가 클 뿐, 엄마라고 하기엔 조금 젊어보인다 싶었더니 언니란다.


"케이라랑 세이라, 이 안에 있죠?"


피리아는 움막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이미 야우라가 다 떠들어놨으니 말 할 필요도 없었고 케이라와 세이라를 찾으러 왔다는 것또한 확실해졌으니 다른 말을 더 할 필요는 없었다.


"걔네들이라면..."


이제 좀 제대로 얘기해보려는 찰나에 이번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언니...!"


움막에서 튀어나온 케이라의 목소리였다.


"케이라!"


피리아는 곧장 날 지나쳐 케이라의 팔을 잡았다. 뒤이어 도망칠세라 잡아당기자 신기하게도 세이라도 엮여 끌려나왔다.


"왜 여기있는 거야? 여기 오지 말라고 했잖아!"


"언니가... 청소 다 하면 놀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마당도 있고 다른 곳도 많은데 왜 여기까지 와서...!"


불같이 화를 내며 야단치던 피리아의 눈초리가 순간 다른 곳을 찔렀다. 갑자기 이 쪽은 왜 노려보나 움찔했던 나는 커프 영감님이 움막 밖으로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감님! 애들이 찾아오면 제가 돌려 보내달라고 말씀 드렸죠."


피리아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다른 두 자매와 마찬가지로 피리아도 커프 영감님과 처음 만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으... 랬지..."


영감님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정말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니까... 하...!"


"어, 언니..."


영감님에게 매몰차게 구는 것이 미안한지 세이라가 나서 제 맏언니의 치마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더 화를 내지도 못하겠는 것인지 피리아가 한 숨을 쉬었다.


"후, 됐어요. 애들이 다 영감님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닐테고. 할아버지도 이런데서 지내지 말고 다른 데로 가세요. 네? 제가 부탁드릴게요."


"언니!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응?"


케이라마저 콕 달라붙자 피리아는 못마땅하게 입을 다물고는 화를 삭였다.


"...저희는 가볼게요. 우리애들이 미안한 짓을 했어요."


"아니. 아니야..."


영감님이 말하자 피리아는 우리에게도 대충 고맙다는 몇 마디 더 남기고선 케이라와 세이라를 데리고 가버렸다.


정말 뭔지 모르겠네.

하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모를 때는 물어보는 게 제일 빨랐다.


"무슨 약점 잡혔어요?"


나는 영감님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어릴 때 이불에 오줌 싼 걸 들킨 수준이었다. 그런데 피리아가 영감님의 어린 시절을 봤을 리는 없을테고 이건 뭔가 있는게 분명했다.


"아니... 그런 것 없다."


커프 영감님은 별 일 없었던 것처럼 덤덤해보였다.


"그럼 아는 사이에요?"


"아니.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던가..."


"그럼 뭔데요?"


"뭐... 특별히 뭔가 있는 건 아니다만."


"그럼 애들은 왜 움막에서 놀게 하셨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렇게 안 좋은 소리 들을 것 없이 애들을 돌려보냈으면 되었다.


"그야 그러고 싶다니까... 크게 나쁠 것도 없고 좋지 않니, 아이들이 논다는 게. 움막만 좋아하는 건지 이 노인내는 끼기가 힘들지만 말이다."


본인이 무시 당했다는 거 같은데 그게 뭐가 그리 우스운지 커프 영감님은 껄껄 웃었다.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참 맹탕 같은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던데요?"


"음?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걔들은 할아버지가 자기들을 귀찮아 하는 줄 알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할아버지를 괴팍한 예술인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작업 중에는 함부로 말걸거나 들어가지 않고 필요한 재료인 전서래 나무로 환심을 사려고 했던 행동들로 미루어보면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 스스로는 짐작가는 것이 없는지 커프 영감님은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부터 그랬어. 생각대로 잘 되지 않더라고. 젊은이가 보기에도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영감님은 평범하게 물었다.

그건 대답하기 껄끄러운 질문이었다.

속마음으로 말하자면 커프 영감님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사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홀로 숲 속 움막에서 살고, 다양한 모양으로 깎여진 원통 조각을 모으고 때때로 색칠하며 지내는데다가 셔츠는 허름했고 위에 영문모를 빨간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허옇게 샌 머리는 또 어떤가 산발처럼 길고 지저분했으며 얼굴은 까무잡잡했고 뺨과 이마에 검버섯이 있었다.


게다가 이빨도 앞니가 몇개 남지 않았으니 모험을 쫓는 아이들이라면 좋아할만한 상이긴 했다. 여러 안 좋은 의미로.


쉽게 말해 이상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넌 어떻게 생각해?"


난 잠자코 보고 있던 수상함의 권위자 레샤에게 물었다.


"예에...? 그걸 왜 갑자기 저한테 묻는 겁니까...?"


레샤는 그런 곤란한 질문 하지 말라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냥. 어떠냐고."


가벼운 일인 것처럼 가볍게 다시 묻자 레샤는 조심스럽게 다시 커프 영감님을 위 아래로 관찰했다.


"아... 그... 음.... 네...."


나와 영감님의 눈치를 번갈아가며 살피던 레샤는 끝내 구체적인 답을 내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 정도?"


나는 커프 영감님에게 말했다.


"이 애.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영감님은 혹시 놓치고 못 들었나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라고요."


"으음..."


그제야 이해가 가는 것인지 커프 영감님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 농담삼아 한 얘기였는데 영감님이 수긍해버리니 더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


"그럼... 그... 어떻게 하지? 창피하지만 자식이 없어서 애들은 좀 어려워..."


게다가 어쩐지 상담해주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것에 대해서는 에반젤린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럼 머리라도 먼저 묶어보시는게 어때요? 아,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에반젤린은 짐이 있는 곳으로 다다 달려갔다. 잠시 후 그 애가 들고온 건 머리 묶는데 쓸만한 탄력이 있는 얇은 끈이었다.


"그런 게 왜, 아 아니야..."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 같기에 나는 묻기를 그만두었다.


커프 영감님이 머리끈을 받아 어색하게 감으려고 하자 에반젤린은 그걸 도와 어떻게든 묶었다. 그야말로 어떻게든 묶은 거였다. 말총머리처럼 했다가 더 짧게 말아 묶어보다가 몇 가지를 해보던 에반젤린은 그냥 영감님이 혼자서도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총머리를 선택했다.


묶인 머리를 어색하게 만지작 거리던 커프 영감님은 느지막히 그리고 작게 말했다.


"이거면... 되나?"


"아니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먼저 말을 거셔야죠. 천천히 상냥하게 대해주시면 분명히 잘 될 거예요."


"어떻게...?"


이 할아버지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볼 참인가. 역시 좀 이상한 사람이다 싶음에도 에반젤린은 성심성의 껏 다음 해결책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과자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요."


뭐니뭐니 해도 간식이 제일이다 하는 이야기였지만 안타깝게도 영감님에게 그런 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저런 움막에 애들이 좋아할만한 음식이 있기는 힘들어 보였다. 대신 영감님은 주머니에서 작은 말 모양의 조각품을 두 개 보였다.


"이런 건 어떨까. 만들어보긴 했는데..."


그런 것까지 준비를 했으면 진작에 했어야지!

헛기침이 나오는 건 왜일까.


나는 소리치는 대신 괜히 야우라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내 속을 알리 없는 야우라가 의아한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게 용건은 없었고 나는 괜시리 먼지나 털어주는 체를 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충분해요. 그거면 좋아할 거예요. 그러니까 다음에 보면 꼭 살갑게 대해주세요?"


"그럴까...?"


"물론이죠."


그 요상하게 소심한 영감님에게 용기를 주는 동안 레샤는 나름대로의 분석을 끝마친 것 같았다.


"...레이크."


"응?"


이미 의욕을 많이 상실한 나는 대충 건성건성 답했다.


"답답하다고 자꾸 그렇게 제 머리에 손가락 두드리면 저도 가만 안 있어요? 이 스태프. 스태프의 기능은 안 하지만 막대기의 기능은 아직 합니다...? 튼튼하다고요...?"


그건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 그래. 미안."


무의식 중에 행동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어쨌거나 에반젤린의 상담은 대강 끝난 것 같았고 자신감을 주입받은 영감님은 다음 번에 케이라와 세이라에게 살갑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잘 됐다.

정말 잘됐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슬슬 우리 갈 길 가면 안 될까.


영감님이 고맙다 인사하고 에반젤린에게도 원통형 조각품을 하나 주고나서야 우리는 슬슬 갈 채비를 하게 되었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숲속에서의 날은 금방 떨어졌고 달이 밝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최소한의 잠자리는 찾아놓아야 했다.


영감님이야 움막이 있지만 거기에 네 명이나 더 구겨 들어가 누울 수는 없다.


왜 우리는 피리아 자매가 갈 때 안 따라갔을까.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소용 없는 것이다.


"저희는 이제 가볼게요."


정말 마지막인 기분으로 작별인사를 하자 영감님은 갑자기 우릴 불러 세웠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어. 이 쪽으로 내려가서 작은 개울을 따라가면 금방 나올 거야."


영감님은 움막의 뒤쪽을 가리켜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상하고 수상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우리는 그렇게 영감님이 알려준 방향을 따라갔다.


작은 개울이란 건 계곡에서 삐져나온 아주 작은 줄기를 말하는 거였다. 돌틈 사이에 흐른 물 같은 정도밖에 되어보이지 않았는데 그 비탈이 끝나는 곳은 깎아낸 것처럼 경사가 끊겨 있었고 돌들이 질서정연하게 쌓여있었다.


누가 봐도 물을 긷는 곳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벌써 나무로 지은 집이 보였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해봐야 열 가족 정도나 살까 싶은 곳이다. 숲에서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하고 풀을 채집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사는 곳 같았다.


저마다 평평한 터를 골라 잡은 것인지 다소 울퉁불퉁한 지형들 사이사이에 조금 떨어져 집들이 있다.


경비대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것이 약간 아쉬웠지만 원래도 그런 걸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혹시 빈집이라도 있을까 우리는 가장 가까운 집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필요 없을 것 같은 울타리도 있고 그 안에 작은 텃밭도 만들어져 있는 집.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그 옆에 있는 작은 고봉과 위에 박혀있는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나무 장식이었다.


요상한 장식을 해놨구나 싶었던 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쳐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이런 곳에 손님이 찾아올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기에 의심이 한 껏 묻어나오는 목소리.

뒤이어 문을 열고 나온 것은 피리아였다.


"어!"


그 소리가 아는 체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야우라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아? 당신들은..."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피리아는 적지 않게 놀랐다.

나도 그 자매들이 이곳에 살지 않을까 싶기는 했는데 대충 찝어 고른 집이 그 집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낯선 사람을 경계했었던 피리아는 우리를 보자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여행자들이었죠?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가자 케이라와 세이라가 똑같이 반겨주었다.


우리는 탁자로 안내받았다. 자그마한 집에 걸맞지 않는 커다란 탁자. 세자매와 두 부모님이 넉넉히 사용할 수 있을만큼 큰 탁자였다.


숲 속의 작은 마을에 특별할거라곤 없었고 우리는 케이라와 세이라가 전에 채집해왔다던 산딸기를 대접받았다.


"전설의 나무를 캤다는 게 아직도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줬다면서요. 고마웠어요."


피리아가 말했다.

같은 일로 두 번이나 고맙단 말을 듣다니 수지 맞았다.

이즈음 잘난체를 해야하는 야우라가 케이라, 세이라랑 얘기하느라 못 들은 것도 다행이었다.


"아니에요. 케이라랑 세이라 자매님이 할아버지를 도우려는 걸 저희가 조금 거든 것 뿐인 걸요."


대신 에반젤린이 어른스럽게, 겸손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요? 아, 그 영감님."


커프 영감님의 얘기가 나오자 피리아는 살짝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저희가... 실수한 걸까요?"


에반젤린이 조심스레 묻자 피리아는 되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사제님. 그냥..."


"혹시 커프 영감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희가 여쭤봐도 될까요?"


친해지기를 기원하며 잔뜩 도와주고 온 터라 걱정이 되는지 에반젤린은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아니요. 그 영감님이랑은 아무 일도 없었요. 아무 관계도 아니죠."


아니 그러니까 그 놈의 아무 관계도 아닌 게 대체 뭐냐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혀를 차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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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19.05.09 115 6 20쪽
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1 6 19쪽
206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2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5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1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6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5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5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8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5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2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3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6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1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5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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