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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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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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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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28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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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3. 헛것이 아니야(5)

DUMMY

그 검은 물체의 정체는 바로...


"라벤이잖아."


괜히 마음 졸이고 있었던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안녕. 레이크. 안녕하세요, 사제님."


라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평탄하게 인사를 건냈다. 울림없이 건조하게 들리는 특이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아, 안녕하세요. 라벤 형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래. 네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다고."


에반젤린의 인사에 업혀 나는 삐딱하게 투덜댔다.


"애들이... 궁금하다고 해서. 여기서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했거든."


"...그걸 네가 왜?"


"나는 흑마법사니까."


"애들이라는 게 진짜 애들 얘기하는 거였구나."


라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인 스스로도 약간은 궁금했었다며 겸양을 떨었다.


전에 열 두살 아래 아이들이 묘지기의 아들인 라벤에게 지래 겁먹어 묻지도 않고 흑마법사 취급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걔들은?"


"지금 방에서 불을 쬐고 있어. 애들한텐 조금 추울 날씨잖아."


꼬꼬마 애들을 위해서 이 날씨에 여기까지 오다니 참 속도 좋은 애였다.


"그래서 그 여자 웃음소리의 정체는 찾았어?"


"아니. 아직 듣지를 못 해서 찾을 수가 없었어."


"그래? 그럼 우리 같이 찾자. 우리도 그거 때문에 여기 있는 거거든."


이왕 이렇게 된거 동료가 늘으면 뒤도 덜 신경 쓰이고 찾기도 금방 찾을 것 아닌가. 이런 건 원래 같이 해야 재미있는 것이다. 어떤 아줌마처럼 숨막히게 할 것이 아니었다.


"맞아요! 그렇게 해요. 라벤 형제님."


에반젤린도 권유했지만 라벤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고맙지만 저는 조금 있다가 아이들하고 같이 찾을게요."


라벤은 정중히 사양했다.


"아아, 네. 그렇군요. 그게 더 좋겠어요."


이후로 굉장히 훈훈하게 들리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서로 볼 일 없고 할 말도 없는데 이러고 있는 것도 매우 어색한 형국이었다. 가만 보면 둘이 서로 대화를 그만하고 싶은데 그 시기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여튼 배려심 넘친다는 건 항상 좋은 게 아니었다.


"거기 잠까아안!"


물론 이 세상엔 배려심 넘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 건 헬레나였다.

기어코 갈라져서 찾으러가더니 찾은건가 싶었는데 그 아줌마가 와서 하는 얘기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건... 엄청난 기운이야...!"


"무슨 엄청난 기운이요..."


웬 자다가 발뒤꿈치 부딪치는 소리였다.

요즘들어 이상하게 엄청난이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졌다. 이것도 분명 병이다. 아주 깊은 병.


"죽음이 아주 가까운... 그런 기분이야...!"


헬레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까 달려올 때도 그랬지만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죽음, 귀신과 언데드, 는 이 쪽이 더 가까웠다.


"죽음?"


나는 라벤을 슬쩍 봤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예의가 아니었다. 라벤이 묘지기의 아들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음과 가깝다고 말해버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흐이이익! 그래 이 녀석이야! 이 녀석!"


남은 눈치껏 피하고 있는데 헬레나는 대놓고 라벤을 가리켰다.


"이 녀석에게서 한기가 느껴져!"


"아 그건 밖에 비가 쏟아지니까 좀 추운거겠죠!"


"이 노오옴! 그렇다고 내가 질 것 같아!"


아무 일도 없었건만 헬레나는 라벤에게 저항했다.


"뭘 했다고 갑자기 행패에요! 야! 너도 가만히만 있지말고 뭐라고 좀 해!"


듣다 못한 내가 한 소리 하자 라벤은 눈을 기다렸다. 고심 끝에 라벤이 입을 열었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건 사실인데."


"널 믿은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야!"


나는 벽을 치고 후회했다.

이 와중에 헬레나는 라벤의 목소리가 여자 같지 않다는 데에 놀라고 있었다.

그럼 저 외모에 여자 목소리가 나오겠냐고. 너무 여자 웃음소리라는 수수께끼에만 집중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난 너 같은 녀석을 잘 알아.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하지. 여태까진 그런 방법으로 여럿 놀래켰겠지만 나에겐 안 통한다아아!"


"이 아주머니 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시는데?"


라벤은 신기한 듯 나에게 물었다.


"오늘이야 말로 네 두 번째 기일이다. 내가 퇴치해주마!"


헬레나는 황급히 품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떤 퇴마 용품이라도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물건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고 묵묵히 기다리던 라벤은 슬슬 애들이 걱정되는지 갈 채비를 보였다.


"...그럼 다음에 보자, 레이크. 사제 님도 건강하세요. 아주머니도 혈색이 안 좋으신거 같은데 조심하시고요."


품을 뒤지느라 듣지도 못 할 헬레나에게까지 작별을 고한 라벤은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만보니 랜턴도 없이 잘도 이 어두운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받아라으아!"


드디어 물건을 찾은 헬레나가 품 안에서 숟가락 모양의 막대를 들이밀었다. 자세히보니 숟가락이라고 하기엔 모양이 좀 달랐다. 넓적한 부분은 가운데에 구멍이난 고리였고 막대 부분은 그냥 통으로 둥근 형태였다.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뜻이다.


"아니 어디갔어?!"


헬레나는 곧 라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잠시 자신의 승리도 알아챈 헬레나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멋들어지게 막대를 다시 품 안으로 넣었다. 여유부리는 것 치고는 이마에 식은땀도 나고 숨도 헐떡이는 게 꽤 힘들어 보였다.


"내가 무서워서 도망갔나보군...."


"예, 예. 그래보였어요."


나는 그 착각에 기꺼이 맞장구 쳐주었다.


"헛. 헬레나 선생님이 라벤 형제님에게 붙어있던 나쁜 귀신을 쫓아내셨나봐요."


두 말 할 것없이 우리 사제 님의 착각에도 동의했다. 그러고 싶다면 그런 거지 뭐.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귀가 시간 부분에서 말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놈이 나타나다니 역시 예삿 곳이 아니군..."


소매로 이마의 땀을 찍어 닦으며 헬레나가 말했다.


"이런 음기는 정말 오랜만이군..."


"음기는 무슨, 사람인지 귀신인지 구분도 못 해놓고..."


"만약 나 없이 왔다면 정말 큰일이었겠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군..."


"이 아줌마도 진짜 남의 말 신경 안 쓰는 성격이네."


"너도 조심하는 게 좋아. 난 퇴마를 우습게 보다가 사람 구실 못하게 된 녀석을 여럿 봤어. 모두 유령의 저주 때문이었지..."


글쎄 소문 같은 거야 들어봤어도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으니 잘 실감나지 않았다.

그런 알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보다도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났다.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뭐야. 특별히 알려주지."


"유령이랑 귀신이랑 무슨 차이에요?"


"..."


침묵이었다. 그건 눈에 띄는, 명백한, 길고 긴 침묵이었다.

모른다는 것 아닌가. 뭐든 특별히 알려주겠다고 큰 소리치더니 모른다는 거였다.


"아줌마..."


"으어어억!"


내가 추궁할 것이란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것인지 헬레나는 멱따는 소리보다도 더 큰 비명을 지르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진짜 이 아줌마 이럴 때마다 놀라서 가슴이 벌렁댔다. 한 두 번 더 이랬다가는 진빠져서 쓰러져버릴 것이다.

무슨 일이 터졌나 깜짝 놀라 안위를 살피는 에반젤린의 손길까지 거부하고 선 헬레나는 어쩐지 헬쓱한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말을 이었다.


"시선이 느껴져..."


첫 마디는 그거였다.


"이건 뭐지...! 대체 뭐야...!"


헬레나는 비틀비틀 걸어 벽에 기댔다.


"차가워... 너무 차가워! 이건 원망이야...! 원망섞인 눈으로 우릴 보고 있어...! 아주 원한이 강해...!"


원망 섞인 귀신이 미친듯이 웃을까? 그런 의문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내 질문이 먼저였다.


"솔직히 말해봐요! 아줌마 그냥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거죠! 예?!"


내가 따져묻자 도리어 에반젤린이 날 말렸다.


"설마요. 뭔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니까... 그러시는 거겠죠."


"에반젤린 너도 이렇게 무조건 믿어주면 안 된다니까? 시선은 무슨! 그정도로 원한이 사무쳤으면 바보라도 알겠다!"


그 순간, 나는 헬레나의 어께너머로 뭔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흔들리는 랜턴의 빛이 반사되어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창백한 얼굴에 가진 긴 머리칼의 여자처럼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번쩍이는 그 여자에게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야!"


"우아악!"


나는 헬레나 아줌마보다도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제 어떻게되는 걸까. 잡아먹히는 걸까. 아니면 여느 이야기처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고간다거나 미쳐버리게 만든다거나...


차츰 나는 진정되어갔다. 그건 긴 머리 여자귀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건 귀신이 아니었다. 귀신은 그렇게 싱글벙글 웃지 않았다.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랬다.

랜턴의 빛이 조금 더 정확하게 닿자 긴 금발의 여자가 짜증나게 실실대고 있었다.


"야우라..."


"하하, 하하하하! 놀라는 것좀 봐!"


배를 움켜잡고 손가락질까지 하며 웃던 야우라는 갑자기 인상을 팍썼다.


"그러게 누가 나 버리고 가래?"


"뭘 버리고 가! 네가 개구리 찾으러 간다며!"


"좀 같이 찾으러 갈수도 있지 그걸 진짜 혼자 보내냐?! 생각을 해봐. 나 같이 가련한 여자가 빗 속에서 해맸을 모습을!"


야우라는 다 젖은 머리에서 새삼 물을 쭉 짜냈다. 빗 속에서 고생 많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누가 그런 거 하랬냐고.


"검사가 왜 가련해!"


"그럴 수도 있지. 알았으면 너도 개구리 찾는 거나 도와."


"내가 그 빗속을 왜 뒤지냐."


"아니야. 여기서 또 잃어버렸단 말이야."


하는 짓도 참 가지가지였다.


"그러니까 사제님은 이제 그만 놔주고 우리 깨꾸락지나 찾아봐."


깨꾸락지 같은 소리... 어. 근데 뭐라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에반젤린을 껴안듯이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와!"


나는 두 번째로 크게 놀라며 냉큼 떨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내가 당한적은 많은데 한 적은 별로 없어서...


"아니. 그. 저기. 뭐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나는 변명하듯 에반젤린에게 말했다.

암만 사제라지만 사내 녀석이 여자를 덥썩 껴안다니 정상은 아니지.


"어... 아뇨... 무서우시면 더 그러고 계셔도... 아니 흠흠..."


우물우물 내 사과를 받아주던 에반젤린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무서우면 손이라도 잡아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아까 말했듯이 사내 자식이 그럴 순 없었다.


"헛, 저는 괜찮은데?!"


"나도 괜찮다니까요?"


기이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얼굴 사이로 손 하나가 끼어들어 휘휘 저어졌다.

야우라였다.


"웃기는 소리들 그만하시고 개구리 찾아달라니까, 개구리이이!"


또 시작이었다, 또.


"지금 개구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말한대로 개구리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야우라의 손에서 벗어난 그 녀석은 지금 새로이 얻게된 자유와 미래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겠지. 아주 잘 된 것이다.

행복한 개구리는 잠시 미뤄두고 아까 숨 넘어갈 것처럼 보이던 헬레나가 더 걱정이었다.


헬레나는 아까 서있던 자세 그대로 굳은 것처럼 서있었다. 오히려 얼굴에 그늘이 진 게 더 무서워져 있었다.


"아직 있어...!"


헬레나가 중얼거렸다.


"아직 시선이 남아있어...! 허억!"


이번엔 비명마저 질렀다.


"이번엔 내 어께에 손가락을 얹었어...!"


뿐만 아니라 섬뜩한 말을 하며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날 불렀다.


"이봐....! 내 뒤에 누구 있어...?!"


"아, 아뇨..."


나는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감히 내게 덤비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으아아!"


헬레나는 또 다시 품안의 물건을 꺼내려는 듯 마구잡이로 옷 안을 뒤졌다. 그런 헬레나의 어께에 위에 메달려 있는 건 작은 개구리 한 마리였다.


"사람에게 직접 손을 댈 수 있는 걸 보니, 제법 힘이 있는 모양이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아아!"


그 개구리는 마구 흔들리는 지반을 견디지 못하고 폴짝 뛰어올라 헬레나의 목덜미에 앉았다.


"으아악! 내 목을 노리는 것이냐!"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낀 헬레나는 재빠르게 몸을 피해 우선 달아났다. 개구리는 그런 불안정한 땅 따위 포기해버리고 허공에 폴짝 뛰어올랐다.

새로운 자유를 얻고자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은 야우라에게 낚아체졌다.


"뭐야, 저 아줌마가 숨기고 있었네."


야우라는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둥글게 모아 그 안에 개구리를 가두었다.

원한 가득한 시선이란 게 혹시 정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저 멀리서 비명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헬레나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커진 소리만큼이나 빠르게 달려온 헬레나는 무릎을 짚고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긴 너무 위험해... 어서 그 여자 웃음소리의 정체를 밝히고 떠나야겠어..."


아줌마 개구리한테도 지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다가 그 태도가 너무 진지하고 부탁 받은 일을 끝까지 하려는 의지가 너무 고상해서 나 같은 동네 청년은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완전 사기꾼은 아닌 모양이네.


"아 웃음 소리!"


헬레나의 말을 듣고선 뭔가 떠오른 듯 야우라가 소리쳤다.


"나 그거 들었어!"


"뭐? 그걸 들었어? 어디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마리의 등장에 나는 얼른 닥달했다. 야우라는 말없이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다.


위라고?


하여 우리는 기진맥진한 헬레나는 부축하다시피 옮겨 계단을 올랐다. 암만 내가 단련이 됐데도 이 정도 덩치의 아줌마를 위로 옮기는 건 극심한 중노동이었다.


함께 옮긴 다른 애들도 풀이 죽어서는 바닥에 앉아 조금 쉬기로 했다. 것보다 관사가 원래 이렇게 넓었던가 평소에는 그런 감이 있었는데 어둠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유독 넓어보였다.


그래 넓었다. 작은 듯해도 은근히 큰 관사였는데 암만 크데도 이렇게 소리를 질렀댔는데 아무도 안 온다는 게 말이 돼? 이건 뭔가 이상한 거였다.


-"아하하, 아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허억! 웃음소리다...!"


나는 이제 놀라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헬레나는 지치지도 않는 것인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저쪽이야...!"


"아니 잠깐만요. 그 소리는요...!"


뻔히 보이는 미래에 헬레나를 붙잡으려고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발을 헛디딘 나는 그대로 헬레나에게 질질 끌려 갔다.


그래 아줌마야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너희는 왜 안 말리는거니?


나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그 말을 꾹꾹 눌러담았다.

이제와서 싸움을 늘려봐야 좋을 게 없었다.


거칠 것이 없던 헬레나는 문고리를 덥썩 잡았다. 이제 당기기만 하면 열리는 그 문을 나는 얼른 막았다.


"아니 잠깐만요. 우리 조금만 생각해보고 갑시다."


"아니 이 안이야. 이 안을 보면 전부 알 수 있어!"


"이 저택의 음산함이나 그 원망어린 시선도 전부 알 수 있을 거야!"


"아니 진짜 열면 돌이키지 못할 수도 있는데?!"


"검은 무녀가 이정도도 못 이겨낼...!"


실랑이를 벌이던 헬레나의 얼굴이 갑자기 또 새파랗게 질렸다.


"왜요! 또 뭐야! 혹시 그냥 아줌마 등 뒤에 누가 거적대기 같은 거라도 붙여 놓은 거 아니에요? 무슨 뒤에 뭐가 이렇게 많아!"


오늘만 벌써 몇번째인지 이젠 식상하다못해 화가 나서 한 소리했다.


"정말 예의가 없군."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싶다면 노크가 먼저다."


헬레나는 폴짝 뛰어올라 바닥을 튕기고 구르더니 다시 튕겨 올라 자세를 바로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곳엔 카트를 끌고 온 스우렌 우나가 있었다.


"방문 목적은?"


스렌이 물었다.


"귀신을 퇴치하러 왔다...! 썩 물렀거라!"


헬레나는 말로만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퇴치?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평이하게 말한 스렌의 표정이 어쩐지 평소보다 더 살벌해져 있었다.


"무기는 가지고 있나."


아니 하는 말부터 달랐다.


"물론이지!"


헬레나는 예의 그 구멍난 나무 숟가락을 꺼냈다. 저거 대체 뭘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특이한 무기군. 이런 무기로는 피 한 방울도 못 내겠는데. 할 수 있는 건가."


스렌은 친구에게 물건을 건네받은 것처럼 자연스레 헬레나의 숟가락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조용했다.

시끄러워진 건 헬레나였다.


"어떠떠떠떻게! 구리주의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저거 십자가였구나.


"말도 안 돼! 나, 나는 감당할 수 없어! 도망쳐! 다들 저주를 받을 거야!"


그러는 동안 혼자서 뭔가 많은 이야기가 진행된 헬레나는 황급히 도망쳤다.


"어. 진짜 도망갔다."


어찌나 재빨랐는지 야우라가 눈썹을 들썩였다.


"옛날 고향 별명을 알고 있길래 내 손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스렌은 헬레나가 두고 간 십자가를 보다가 그걸 야우라에게 내밀었다.


"야우라,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네가 나중에 돌려줘라."


"에엥. 싫은데..."


야우라는 질색을 하고 싫어하다가 지긋이 노려보는 스렌의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마지못해 그걸 받았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하면! 하여튼 은근히 사람을 심부름꾼으로 안다니까."


투덜투덜 야우라가 나무 숟가락을 주머니에 넣자 스렌은 그제야 그쪽에서 눈길을 거두고 우리에게 물었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아아, 귀신을 잡으려고. 뭐 내가 잡고 싶어서는 아니였지만..."


"미안하지만 이 관사에 귀신 같은 건 없다. 다음에 비슷한 걸 본다면 구해놓도록 하지."


"아니 그럴 필욘 없구요..."


뭘 구해다놓으려는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극구 사양했다.


"그냥. 여기서 여자 웃음소리가 막 들린다는 소문이 생겨나서 보러온 거야."


"그거라면 마을 아이들도 찾아온 적이 있지. 지금 방 안에서 비셔스 경과 있을 거다."


스렌은 카트에 담긴 간식거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어쩐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싶더라니 라벤이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거였구나.


"아 뭐야 진짜..."


김이 팍 새버린 나는 한탄스레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다니. 조금 실망이네요. 그렇죠?"


그게 풀죽은 것으로 보였던 것인지 에반젤린이 심심한 위로를 건냈다.


"가끔 들린다던 여자 웃음소리가 궁금한 건가."


스렌이 물었다.


"에이, 뭐 비셔스 경이 크게 웃은 걸 다른 사람들이 잘못 들었겠지."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얼른 손사래부터 쳤다.


"비셔스 경이 호쾌하긴 해도 그렇게 소문이 날 정도로 웃진 않지."


그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럼 뭐 다른 게 또 있다는 거야?"


"저 안의 아이들에겐 비밀이다."


그 말을 끝으로 스렌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직 끝이 아닌가봐.

거봐 뭔가 있다니까. 하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며 우린 얼른 그 뒤를 쫓았다.


길은 아래로 내려갔고 아예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어두두었어도 어느덧 빗발은 약해져 있어 거니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건가 궁금해질 때즈음 스렌은 관사 옆에 붙어있는 작은 헛간 앞에 멈춰섰다.


"이 안이다."


그 안에 여자 웃음소리의 정체가 있었다.

스렌은 문을 열었다.

내부는 낡고 좁은 헛간 그대로였고 초가 주홍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바닥에 등을 대고 다리를 벽에 기댄 기이한 자세로 앉은 여자가 앉아... 아니 누워있었다.


"아?"


우리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는 밝은 빛을 갈색머리를 단발로 잘랐고 뭉실뭉실한 표정을 짓는 상이었다. 웃음소리도 특이하다는 걸 듣지도 않고 알았다.


"어머, 나스 경?"


에반젤린이 말했다.


"쿠키 먹을래...?"


나스 경은 조심스레 우리에게 쿠키를 하나 건냈다.

그건 분명 뇌물이었다.


"경비대에 일러야지."


그것과 관계없이 난 가차없이 선언했다.


"아이, 야! 레이크 너랑 나 사이에 이러기야?"


화들짝 놀란 나스 경이 자세를 고쳐 앉아 설득을 시도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굳어져있었다.

나랑 나스 경이랑 무슨 관계라고. 그런 거 없었다.


"무조건 일러야지. 특히 기옌 경한텐 세 번 이를 거야."


그게 바로 사회의 정의였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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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38. 물주지 않아도 돼(3) 19.06.15 97 5 14쪽
216 38. 물주지 않아도 돼(2) 19.06.08 88 6 19쪽
215 38. 물주지 않아도 돼(1) 19.06.05 87 5 16쪽
21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1) 19.06.02 103 6 18쪽
213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0) 19.05.30 87 5 20쪽
212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9) 19.05.25 102 5 17쪽
211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8) 19.05.20 94 5 19쪽
210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7) +1 19.05.10 113 5 16쪽
209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19.05.09 115 6 20쪽
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1 6 19쪽
206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1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5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6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5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5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8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5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2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3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6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1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5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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