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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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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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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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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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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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8. 물주지 않아도 돼(5)

DUMMY

대비는 하고 있었다. 귀 꽉 막고 안 들을 준비를 아주 단단히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시도하는 척이라도 해보는 게 레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하루만에 박살나버렸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내면 세계에 빠져들어 만물과 하나가 되면 남이 무어라 하든 전혀 개의치 않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어디에서 읽은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아도 정말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같은 초심자에게 그런 경지는 역시 무리였다.


언젠가 스태로 아저씨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듣기 싫은 안 듣는 비결이 대체 뭐냐고.

그랬더니 아저씨가 그랬다. '무슨 소리냐. 이 아저씨는 아직 팔팔해. 귀 잘 들린다?' 라고.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짜증나.


차라리 소리가 눈에 보여서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막아보겠다고 허우적대기라도 할텐데 이건 뭐 속수무책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거지!"


야우라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내 뒤통수에 부딪쳤다.


"아무것도 없이 레샤가 혼자 갈 수 있겠냐고! 어?! 어어?! 어어어어?!"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어 대는데, 정말 나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날 흔든다고 해서 열매 떨어지는 거 아니다. 정해진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칭찬을 해주지도 않는다.

차라리 그랬다면 덜 짜증났겠지. 얘는 지금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을 그냥 하고 있는거다, 그냥.


"그럼 레샤가 너무 불쌍하잖아!"


흔드는 걸로는 모잘랐는지 야우라는 아예 내 어깨를 잡고 펄쩍 뛰어올라 등 뒤에 메달렸다.


나는 갑자기 얹어지는 무게를 견디기 위해 눈 앞의 난간을 집고 버텼다.


"걔가 불쌍한 거랑 내가 힘들어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잇!"


"이건 큰 상관은 없지. 헤헤."


야우라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상관은 없다고 말했으면 내려와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녀석은 내 어깨에 턱을 편하게 얹고선 싱글벙글이었다.


"그래도 난 이게 엄청 큰 일이라고 생각해. 그... 맞아! 중대사안! 중대사안이라고!"


야우라의 목소리는 귀 바로 옆에서 듣기엔 너무 컸다.

나는 귓구멍이 따끔거리는 걸 참아가며 꿋꿋히 계단을 올랐다.


"내 말 듣고 있는거야? 중대사안이라니까!"


"중대고 자시고 일단 네가 좀 내려왔으면 좋겠어."


"에이, 이왕 업은 거 끝까지 가면 안 돼?"


"이게 업은 거냐 매달린 거지! 그리고 끝났어!"


다 끝난 건 아니고 열 계단 정도 남아 있었다. 그거면 다 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지. 그거 조금 제 발로 걸어달라는 건데 야우라는 검보다도 자주 사용하는 제 무기인 웃는 낯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쉴새 없이 떠들어댔다.

대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새 스태프를 찾아보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라던가.


"여태까지는 좀 밋밋한 걸 썼으니까 이번에는 화려한 게 좋지 않을까? 그 왜 수정 보석 같은 것도 달려있고 그런거."


같은 것들.


"그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레샤한테 물어보던가."


"너한테 물어볼 수도 있지. 넌 아무것도 안 할거야? 뭐라도 해야할 거 아니야!"


"아 그러니까 가고 있잖아!"


복도를 지나온 나는 도망치듯 문을 열었다.

그쯤되자 야우라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박정! 냉혈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레샤는 널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걔가 무슨 노력을 했는데!"


내가 내 욕은 다 참아도 지들이 잘했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인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근거 삼을만한 것은 없는지 이리저리 말을 돌렸다. 아무튼 있다던가. 너는 모르는 거라던가.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면 되지 시끄러웠다.


그 노력, 해보자고 아침 일찍이 일도 끝내고 못 볼 이유는 없지만 딱히 보고 싶지도 않은 비셔스 경을 보러 관사까지 올라온 게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면 벌써 문도 열었고 발도 들인 상태였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비셔스 경이 이미 보인다는 거다. 비셔스 경도 책에서 눈을 떼고선 '세상 참 별 일 다 있네.' 하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사람 괴롭히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대체 뭐라고 할까. 난 비셔스 경이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비셔스 경! 저 휴가 좀 보내주세요!"


조금 뜬금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기야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그런 말을 하면 당황스럽... 지는 않은 것 같았다.


비셔스 경은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접었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레이크."


비셔스 경이 말했다.


"네?"


"너 그래가지고 일은 언제 하는 거니?"


"네?"



조금은 화살 같은 말인지라-


오래간만에 비셔스 경과 대면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별 다른 건 아니었다. 왜? 하는 것이다.


비셔스 경은 남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고 하는 걸 좋아했고 전하는 걸 좋아했다. 딱히 그걸 흠 잡으려는 것은 아니다. 비셔스 경이 남의 이야기를 할 지언정 그건 소식을 나누는다는 거지 헐뜯거나 모함을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내가 요새 뭔 짓을 하고다니는가 하는 것도 궁금해하는 것뿐이었다.


이번에 클리팬즈에 갔을 때도 그렇고 며칠 자리를 비울 때면 필연적으로 말해야 했으니 내가 멀리 갈 때면 비셔스 경은 그 사실을 전부 알고 있는 셈이었다.


비셔스 경의 의문은 그거였다, 클리팬즈에 갔다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어디를 가느냐. 생각해보면 돈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선 민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휴가라..."


비셔스 경은 향취라도 느끼듯 그 단어를 음미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레이크. 좋은 날이다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저 연무장이 깔끔해지는 걸 볼 수 있나 모르겠구나."


"아이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답지않은 과장된 소리에 나는 절로 질색이 나왔다. 심지어 창밖을 보니 아직 커다란 쓰레기 산이 두 덩, 창 밖은 보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렇게 화창하다니 눈이 아프잖아.


"이번엔 어디로 가는 거니? 타락한 사령술사를 막기 위해 금지된 땅으로 가서 되살아난 해골들이라도 해치우러 가니?"


"그런 모험 한 번 해봤으면 좋겠네요."


터무니 없는 소리였기에 나도 농담으로 받아쳤다.


"원한다면 소개해줄 수 있다."


"아는 분이 있어요?"


타락한 사령술사랑 친구 사이인 사람이랑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데.


"아하하, 그런 막강한 친구가 있다면 나쁘진 않겠구나. 그래서 어딜 간다고?"


"레샤네 고향이요. 스태프가 고장나서 고치러 가는 거거든요. 못 고칠 수도 있다곤 하는데 그래도 가봐야죠, 뭐."


"아. 네가 아니라 레샤 레스트레이드의?"


"그 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정령 없는 정령술사라고 하면 거의..."


"망치 없는 대장장이나 다름없지."


내가 비유를 고르는 사이, 비셔스 경이 먼저 적절한 것을 달아주었다.


"네, 그렇더라고요."


실제로 레샤는 정령을 소환할 수 없게된 탓에 직장을 잃지 않았던가? 그건 재앙이었다.


"아하하, 호위병도 하러다니고. 굳이 시키지 않아도 어디가서 손해 많이 보고 다닌다니까. 야우라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뭐 잘난 것이라고 비셔스 경은 야우라에게도 물었다. 어째서인지 조용했던 야우라는 그새 작은 테이블로 가서는 작은 바구니에 담긴 과자를 먹고 있었다.

쟤는 스렌이 가져다 놓으면 다 자기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움? 괜찮지 않나? 난 좋은 거 같은데."


야우라는 과자를 입에 물고선 헛소리를 했다.

손해보고 사는 성격이라는 게 대체 누구한테 좋은 거냐고!


"좋긴 뭐가 좋아!"


난 그 기분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뭐가 또! 칭찬해줘도 뭐래. 칫, 완전 웃겨?"


퍽 기분이 상한 것인지 야우라는 이쪽엔 신경 끄고 다시 과자에 집중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탐탁치 않은 듯 했던 비셔스 경은 내가 레샤를 따라가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말미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기간이라. 그러고보면 기간에 대해서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지명조차 모르고 위치도 알지 못하니 아주 대충 가늠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레샤 따라가면 되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고민을 꽤 오래했던 걸까.


"아하하!"


비셔스 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렌지 빛깔에 가까운 머리를 가진 나스 경과는 달리 검붉은 색이 가까운 머리칼을 가져 도무지 자매라고 느끼기 힘든 비셔스 경은

팔걸이에 올려둔 책을 쳐서 떨어뜨리는 것도 모를만큼 크게 끅끅대던 우리 고용주님은 웃는 것도 힘든지 짧게 신음하다가 이내 숨을 돌렸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걸리는지도 모르고,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정리해서 들어보니 진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기는 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터진 일이라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한 몫한게 아닐까 싶다.

무모하다고 하기엔 초라했고 복잡하다고 하기엔 얄팍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핑계를 대보자면 역시.


"일단 급한 일이 먼저니까요."


정령을 불러낼 수 없는 정령술사란 위독한 환자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고, 난 그렇게 말했다.


"아하하, 그래.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청소따위야 언제든지 할 수 있겠지. 그러니 그런 것보다는 말이다."


비셔스 경은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고는 다리를 꼬았다.


"여비는 생각해봤니?"


편한 자세에서 나온 것 치고는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방법은?"


그것도 가시 같았다.


"뭐... 나름 생각이 있긴 한데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면 힘들어서 그렇지 나도 나름대로 생각해둔 게 있었다. 여비야 토큰을 돈으로 바꾸거나 수집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도 생각을 해보았고 방법이야 우리 같은 사람에겐 선택지 자체가 얼마 없었다. 걷는 것밖에 더 있나.


"후후."


가소롭다, 라는 의미일지 비셔스 경은 작게 웃었다.


"그래. 휴가는 레이크 네가 원하는만큼 다녀와라. 다녀오면 와서 쓰레기 치우는 거 잊지 말고."


"안 까먹어요."


사람을 얌체로 아시나.


"아, 기념품도 잊지 말고."


"제가 어디 놀러가요?"


"여비를 주지는 않을 거다."


"달라고도 안 했잖아요."


"후후, 그래. 그랬지. 하지만 토나르는 꼭 가져가도록 해라."


"그건 왜요?"


그건 뜻밖의 충고였기에 나는 얼른 되물었다. 저런 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유용할테니까. 마침 나스도 고향에 내려간다고 하니 어떻게 써먹으면 될지 가서 물어봐라."


"나스 경도 휴가에요? 그럼 비셔스 경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물어보려 했던 나는 아차 싶었다.


"아니. 그 저기 뭐야. 나스 경은 어디로 가는데요?"


내막은 몰라도 내 스스로 묻지 않기로 한거였다.


"센티아."


비셔스 경이 말했다.

세상에 센티아라니.


"와, 저 센티아가 고향이라는 사람 처음봐요."


"아하하,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그야 그렇겠지만 그건 그거고 신기한 건 신기한거였다.


"어쨌든 휴가는 주시는 거죠?"


"그래. 레샤에게 안부 전해주고. 만약 안 되면 고용해줄테니 돌아오라고 해라."


"예?"


정령 없는 정령술사를 어디다 쓰신다고?


"부하 모으는 게 취미거든."


"아... 예. 뭐... 알았어요."


그다지 좋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비셔스 경과 협상을 끝낸 다음 나는 불러도 대꾸없는 야우라에게 갔다. 그 애는 기다란 손님용 소파에 누워서는 뭔지도 모를 콧노래를 혼자 부르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과자는 먹고싶은만큼 다 먹었어?"


내가 묻자 야우라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끝났어? 되게 지루하네."


"그러게 왜 따라오냐고. 이제 가자."


"과자 남았는데 좀 먹을래?"


남았다는 표현을 써도 될건지는 모르겠지만 야우라는 언제 챙겨와서 담아넣은 건지 과자가 들은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뭐 들었는데?"


"그냥. 설탕버터."


그것도 좋지.



그리하여-


내가 해결되고나니 채비에 대한 나머지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문제라고 할 것도 없다. 플라나는 영외로 나가 사람들을 돕는 일이 흔했고 에반젤린이 성당에 말만 한다면 장기 파견도 얼마든지 허가 받을 수 있었다.


클로에도 야우라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곤란할 것은 없어보였다. 어쩌면 기뻐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지. 야우라가 삐지지 않게 하기 위해 특별한 내색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레샤의 소식을 듣고난 후부터는 가장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클로에는 혼자서 해나가는 것에 대해 가장 큰 이해자이기도 할 것이다.


정작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샤는 지금은 쓸모 없는 멋지게 생긴 나무막대를 쥐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댓명이라고는 해도 막상 저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있자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레샤에게 클로에가 다가갔다.


"몸 조심하고. 이건 오늘 가다가 먹어. 간식이야."


클로에가 내민 건 헝겊뭉치였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유가 있을 때 준비한 것 같았다.


"아, 그, 고맙습니다..."


멋쩍은듯 레샤는 조심스레 헝겊뭉치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나는?"


그새를 못 참고 야우라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게. 나도."


왠지 레샤만 주길래 나도 거기에 동참했다.


"그래, 아빠는?"


거기에 동참할 필요 없는 이상한 아저씨도 동참했다.


"나눠먹으면 되잖아."


그에 대해 클로에는 우리의 유치함을 모조리 박살내는 성숙함으로 물리쳤다.

스태로 아저씨는 아예 염두하지도, 할 것 같지도 않는 대답이었다.


"헛. 그럼 제가 지금이라도 성당에 가서 좀 챙겨 올까요?"


그 와중에 에반젤린은 진지하게 간식 좀 가져오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요, 사제님. 거기서 뭘 더 챙겨가려고."


내가 보기에 에반젤린은 이미 지나치게 많은 짐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 바리바리 싸들고 있다는 건 아니지만 먼 길을 가지고 다니려면 짐은 적을수록 좋았다.


나도 야우라도 검 말고는 정말 기본적인 것만을 챙겼다. 긴 외투라던가, 노잣돈이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 검도 야우라가 열불내지 않았으면 가져갈까말까 한참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 놈의 쇳덩어리, 얼마나 무거운데. 그래도 명색이 안전을 위해 함께 가는 것이니 자기 몸을 지킬 도구 정도는 챙기는 게 당연했다.


"에반젤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제 님을 불렀다.


"네? 왜 그러세요?"


에반젤린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기꺼이 답해주었다. 암만 그래도.


"그 가방은 두고 가야하지 않을까?"


나는 에반젤린 옆에 놓여있는 몹시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가리켰다.

그 안에 뭐가 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저만큼을 들고 갈 수는 없었다.


"아뇨. 걱정마세요. 제가 들고 갈게요. 거뜬해요!"


"...대체 뭐가 들었는데?"


"음... 이것저것이요."


딱히 내용물을 밝힐 마음은 없는 듯 했다. 알려주면 이것저것 이유를 들어 따질 것 같으니 무조건 자기가 책임지고 가지고 가겠다는 거 같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안 돼요. 가지고 갈 거예요."


에반젤린은 그만큼 단호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야기할 여지도 없애버리려는 듯 힘겹게 가방을 맸다.


"것보다...! 나스 경이 저희를 도와주기로 하셨다면서요. 얼른 가야죠...!"


하고는 먼저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생각에 저 안에 든 것 중 반은 여행길 중엔 사치나 다름 없는 것들이 들어있을 테지만 저래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별 수 없이 아저씨와 클로에의 배웅을 받으며 조금은 갑작스럽게 하늘그림에서 나왔다.


가벼운 짐을 챙긴 우리와 달리 무겁게 발걸음을 딛는 에반젤린 덕에 우리는 왠지 불편한 여행길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 길은 여행은 경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첫번째 도착지는 아주 가까웠다. 경비대. 나스 경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아하하, 아하하하! 아하하!"


우릴 보자마자 뭐가 그렇게 웃긴지 나스 경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고향에 간다고 들었는데, 나스 경은 아직 제복차림이었다.


"유비무환! 사제 님 답네요."


그리 말하며 나스 경은 에반젤린이 낑낑대며 옮기던 가방을 번쩍 들어 대신 매었다.


"언니가 말하기로는 꽤 멀리 갈거라면서?"


나스 경은 레샤에게 물었다.


"네... 그런데요..."


레샤는 쥐꼬리만하게 대답했다.


"아하하. 레이크. 토나르 가져왔지?"


이어서 나스 경은 나에게도 물었다.

토나르, 비셔스 경에게 받은 아주 작은 시계. 까먹지 않았다. 더군다나 손바닥보다도 좀 작은 거라 짐거리도 안 되었다.

나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끈에 매달은 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다.


"가지고 따라와. 나머지 분들은 여기 계십쇼! 이 나스 나이시가 시원하게 해결하고 올테니."


나스 경은 큼직한 가방을 메고 성큼성큼 걸어나갔고 나는 그것보다 늦을세라 얼른 뒤쫓았다.


나스 경이 간 곳은 경비대 뒤편의 마굿간이었다.


"역마 두 마리만 데려와주겠어요?"


도착하자마자 나스 경은 거길 지키고 있는 관리인에게 말했다. 아마도 위병인데 마굿간의 관리도 함께 하는 것 같았다.


"두 마리요?"


그 사람은 조금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나스 경은 휴가라서 특별대우라 해도. 왜 두 마립니까?"


"레이크 것도 필요하거든요."


"레이크? 아, 이... 얘요...?"


나에 대해서 딱 특징 잡아 말하기 어려운 것인지 뭉뚱그려 말했다.


"네, 증표가 있거든요. 레이크?"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손목에 감아둔 비셔스 경의 시계를 보여주자 위병은 더 혼란에 빠진 눈을 하고서는 별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위병이 말 두마리와 함께 돌아오자 나스 경은 그 중 한마리의 등에 요령껏 우리의 짐을 얹었다. 균형을 맞춘 뒤 끈을 이용해 묶고나자 나스 경은 내 등을 한 대 촥 때렸다.


"잘 됐다. 잘 됐어. 그렇지? 다른 곳에 가서도 똑같이 하면 돼. 그럼 말 한 마리 정도는 의심없이 쉽게 빌릴 수 있을 거야. 원래 경비대 내에선 그런 용도기도 하고."


"끝내주네요."


아무 조건 없이 말을 빌리다니.

세상 참 살고 볼 일이었다.


"그치?"


"근데 나스 경은 고향에 가는 거라면서 제복차림으로 가세요?"


뒤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그걸 물었다.


"아하하, 당연하지. 경비대 기사가 된 딸의 모습. 확실히 보여줘야지."


"아아..."


참 별난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다면 그런 거겠지.

그 후 나스 경은 능숙하게 말에 올라 먼저 가버렸다.


혼자가 되고나자 나는 내 손에 쥐여있는 고삐를 보았다. 그리고 뒤에 있는 짐마를 보았다. 평범한 갈색 말 한 마리도 큰 눈을 껌뻑이며 날 보고 있었다.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라니까.


"...가자."


고삐를 끌자 녀석은 얌전히 따라왔다.


흠, 항상 출발은 좋은데 말야.


나는 손목에 감겨있던 토나르를 목에 걸어 품안에 넣었다.


작가의말

요즘 크롬이 이상한건가요

문서 편집이 이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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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5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4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3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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