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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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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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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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6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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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4. 헛것이야(3)

DUMMY

몰라 몰라 그러더니 세상 일과 사람 일은 정말 하나도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늘의 일이야 두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비를 쏟아내고도 아직 남은 것이 있었는지 흐리멍텅하게 껴있던 구름들은 비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레샤랑 나는 누가 사는지 모를 집 지붕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로 했다.

비는 부슬부슬 내려 지붕 위에 떨어졌고 기와의 틈사이를 지나 미끄러졌고 아래로 흘러내린 물은 그 위에 만들어둔 나무 관을 타고 한 곳에 모였다. 그 물길은 지붕의 끝자락, 나무관이 잘려나간 곳에서 끝났다.


애들 오줌발처럼 떨어진 물줄기는 비를 받아놓기 위한 나무통 안으로 떨어졌다. 만물이 돌아가는 일에 의문을 가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이 있지만 개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 중 하나 있었는데. 도대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보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소리가 더 큰 이유가 뭔지 나는 참 궁금했다. 연속으로 우다다다 떨어져서 그런걸까.


나는 내 옆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는 레샤를 보았다. 그 애는 쪼그려 앉아 물이 흐르는 도랑을 보고 있었다. 트리마켓엔 도로마다 그런 도랑이 양 옆에 하나씩 있었다.


"야, 레샤."


"왜요?"


레샤는 고개를 바짝 들었다가 다시 도랑을 보았다. 그러다가 스태프 끝을 그 안에 담가보기도 했다.


"왜 빗소리보다 통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더 클까?"


내가 개의치않고 묻기로 생각했던 걸 묻자 레샤는 또 한 번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빤한 시선 사이로 들리는 건 대답이 아니라 빗소리 뿐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슬슬 이 빗소리가 불편해질 무렵 레샤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레이크는 그런 게 궁금해요...?"


혹시나 이유를 고민하고 있는 걸까 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 비는 훨씬 높은데서 떨어지잖아. 근데 왜 통 속에 떨어지는 물 소리가 더 시끄럽냐구."


"...차라리 이 낙엽들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레샤는 스태프 끝으로 도랑에서 떠내려온 낙엽을 하나 건져올려 보여주었다. 나는 스태프에 걸려 늘어진 나뭇잎을 집어들어 보았다. 절반이 쭉 찢어지고 구멍이 송송 뚫린 완전 죽은 잎이었다.


"아니 좀... 신기하지 않나?"


나는 잎사귀를 다시 도랑에 던져 넣었다. 잎사귀는 순식간에 물줄기를 타고 가버렸다.

그만큼 의미가 없게 들렸다니 나름대로 아직 아무도 인지 못한 매우 충격적인 반전인 줄 알았는데...


"...전혀요."


위대한 발견이라는 말에 괜히 위대한이 붙는 게 아니듯 학자란 아무나 되는 게 아닌 것이다.


도랑은 점점 물이 불었고 떠내려오는 낙엽도 점점 많아졌다. 저렇게 떠내려가다간 어딘가에선 나뭇잎들이 걸리고 고여 도랑이 막혀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건 누가 치우는 걸까.

이번엔 그걸 레샤에게 묻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 애가 그걸 알 것 같지도 않았고 한가한 사색을 남에게 떠들어대는 것도 생각해보면 참 볼썽 사나웠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빗줄기는 길어졌다 거세지진 않았더라도 거리의 사람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한 노부인은 잠깐이라도 말려보고자 한 옷가지들을 서둘러 걷었고 새 모자를 산듯한 남자는 저보다도 모자를 아깝게 여겨 머리 위를 손으로 가리고 달렸다. 혹여 긴 종류의 외투를 덮어 입은 사람들도 자기거 젖을 걱정은 없을지라도 다른 뭔가가 있는지 걸음을 재촉했다.


그 중 한 부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아래 입은 속바지가 설핏 보일 정도로 미묘한 균형의 길이를 가진 스커트를 입었고 그 위에 후줄근한 셔츠와 커다란 외투를 덮고 있어 얼굴로 보이는 인상보다 더 후덕해보였다.


"동생이 추워보이는데. 혹시 갈 곳이 없어서 그러니?"


부인은 내 옆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동생이란 레샤를 말하는 거였다. 애가 계속 쪼그려 앉아있으니 추워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네? 아아, 아니에요. 잠깐 비좀 피하고 있던 거예요. 얘도 추우면 알아서 할 녀석이고요."


나는 오해 때문에 아줌마가 괜한 걱정하지 않도록 해명했다.


"알아서 한다니?"


"저래뵈도 정령술사거든요. 옷을 보세요."


저 찬란한 표식을 보라, 나는 레샤의 옷에 새겨진 정령술사의 표시를 가리켰다. 형형색색의 자수를 본 아줌마의 눈이 휘둥그래 커졌다.


"어머 진짜네?!"


그리고는 두세걸음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뛰다시피 달려가 레샤의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저희 집에 안녕이 가득하길... 불씨의 장난이 없게 해주시고... 또 바람의 이로부터 기둥을 지켜주시고 또..."


그건 기도라기 보단 기원이었다. 정령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건 사람에 따라 달랐지만 정령을 경외하는 사람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따지고 보면 꽤 많았다. 내 고향에서의 일들을 쭉 생각해보면 나이가 많을 수록 그랬다.


레샤가 아닌 그 주변에 있을 정령들에게 평화를 빌던 아줌마는 레샤에게 고맙다고 말하기도 하고 대견하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레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줌마는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하며 저 갈길로 떠났다.


그 때까지도 레샤는 한 마디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뭔가 얼떨떨하기도 하고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던 레샤는 힐끗 날 보더니 얼른 평소처럼 얼굴을 가라앉혔다.


"저는 레이크 동생이 아닌데요...?"


그리고는 말을 돌리 듯 중얼거렸다.

아까 왜 그걸 지적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 같았다.


"거기서 너랑 내가 무슨 관계인지까지굳이 설명할 필욘 없었잖아."


그건 편이함의 문제였다.


"축복 같은 것도 할 줄 모르고..."


"어차피 너한테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


그 아줌마는 레샤가 아니라 레샤의 정령들에게 평화를 빈 것이었다. 그렇다고 레샤와 계약한 녀석들이 뭘 할 수 있겠냐만은 저번에 듣기로 정령들도 사람과 비슷하게 소문내고 다니는 것을 종한다고 했다. 정령 하나가 계약자를 통해 물리 세계의 일을 보고 들으면 그걸 다른 정령에게 자랑한다는 것이다. 보이는대로 한가한 존재들이었다.


"그래도 저럴 때면 뭐라도 해줘야 하나 싶어서 무섭다고요..."


"뭘 무서울 것까지야."


걱정이랄지 불안이랄지 그 애 다운 소리에 나는 피식 웃으며 지붕 밖의 하늘을 보았다. 비는 아까보다 줄어들어 비라기보다 누가 높은데서 물 묻은 손을 털어내는 거 같았다.


"슬슬 비도 그쳤는데 우리도 얼른 가자. 이러다 야우라 죽겠다."


"예에...? 재수없는 소리좀 하지마요...!"


"아유 걔가 감기 가지고 죽겠어?"


어림 없는 소리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란 거였다.


우리는 클로에가 알려준 대로 트리 마켓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원래 장사꾼이라면 좀 더 열린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물건을 보이길 희망하지만 그 집은 조금 다르다고 했다. 아는 사람만 안다고 해야하나, 성당에 물건을 대는 것도 자기 내킬 때만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괴팍한 사람인데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는 마법의 보증 같은 이야기가 따라붙은 거 보면 모르긴 몰라도 그 사람의 약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트리마켓은 네 개의 대로가 있었다. 어떤 가게든 모드 그 대로를 따라 이어졌고 그 대로를 보고 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게들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가보면 얼마지나지 않아 금방 후미지게 되었다. 아래 쪽과 왕복하기 힘든 지형 구조상 대부분은 창고였고 또 어느 부분은 이 곳의 원래 모습, 민둥산이었다. 그 돌이 잔뜩 박힌 흙모래 불모지 또한 어딘가에 쓰였을 상자이 넓은 보에 덮혀 모여 있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싼값에 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여기에도 가게가 있었다. 그곳들은 우리를 위한 가게는 아니었다.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는 건 그 사람들의 주 고객이 트리마켓을 찾아온 손님이 아니라 트리마켓의 상인들이라는 것이었다.


"거기, 꼬맹이들아. 혹시라도 상자에 손 대지마라. 복잡해진다."


저기 비에 젖은 보 위의 물을 털어내는 대머리 아저씨처럼 창고지기를 하는 사람이거나.


"이봐, 기일 못봤어?"


저어기 얼굴의 반이 시커먼 반점으로 얼룩진 할아버지처럼...


"글쎄요. 기일이라면 아까 무지막지하게 달려가던데요."


"음... 걸어둔 새 천막을 보러 갔나보군. 그 녀석도 이제야 좀 쓸만하구만."


보통 사람들은 쓸 일이 없는 커다란 크기의 대형 천막을 취급하는, 장사꾼들을 위한 장사꾼들이었다.


"거기 너희들."


영감님이 우릴 불러 세웠다.


"히익...!"


그 한 마디에 내 오른쪽에 서있던 레샤가 순식간에 내 왼쪽으로 돌아갔다. 이럴 때마다 누누히 했던 얘기지만 방패가 되는 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우릴 알아챘잖아요...! 빨리 도망가요...!"


레샤가 긴박히 속삭였다.


"뭔 소리야 우리가 숨어있던 것도 아니고 알아채긴 뭘 알아채."


되도않는 소리였다.


"그럼 어떡할 건데요...!"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부르면 대답해야지.


"왜 그러세요?"


나는 영감님을 향해 되물었다.


"혹시 길을 잃은 거라면 이 할아버지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영감님은 사람좋게 씩 웃어보였다. 특이하게도 그 할아버지의 앞니 중 하나는 빠져있었고 그 위의 것은 금색이었다.


"히이...! 저거 봐요, 완전 수상한 사람이잖아요...!"


그걸 본 레샤가 온 몸이 흔들리도록 내 윗도리를 잡아 흔들었다.


"하하하! 하하 핰 하!"


그 말은 앞선 대머리 아저씨에게도 들린 듯 했다. 그 사람은 박장대소를 하더니 영감님은 가리키며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수상한 사람이래엨헼헼..."


"아이, 죄송합니다."


괜스레 사과는 내가하게 되었다.

다소 불쾌하게, 그래도 화가 나지는 않은 듯 헛기침으로 대머리 아저씨의 웃음을 적당히 끊은 영감님은 점잖게 분위기를 잡았다.


"혹시 길을 잃은 거라면 저 쪽으로 쭉 가면 나갈 수 있다."


영감님은 건물 사이의 길을 가리켰다. 우리가 길을 잃어 여기에 왔을거라는 생각은 여전한 듯 했다.


"길을 잃은 건 아니고요. 혹시 카밀이라는 곳 아세요?"


나는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을 영감님에게 물었다. 대충 여기 언저지라는 건 알지만 정확한 곳으 여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카밀? 카밀이라면 저 위로 조금 더 올라가야한다. 젊은 애들이 거길 찾다니, 별 일이네."


영감님은 더 위쪽을 가리켰다.

아 거참 깊숙한 곳에도 있네.


"고맙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는 레샤의 옆구리도 툭 쳤다. 어떨떨해 하던 그 애는 쭈뼛쭈뼛 고개를 숙이고는 후드를 더 깊게 눌러썼다.


어쨌거나 최종 목적지의 위치를 알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 위에 있던 카밀에 도착했다.


사실 카밀에 도착한 것인지는 그 때까지도 잘 몰랐다. 그저 마른 지푸라기가 진열되어있고 알싸한 향기가 코를 마구 찔러대니 여기가 그곳이겠거니 짐작한 것뿐이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나는 안쪽에 대고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맞이하는 사람은 커녕 쥐 한마리 살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있는 건 오로지 약초로 보이는 풀. 선반이며 심지어 낮은 천장에도 밧줄로 묶여 매달려 있었다. 그 외에는 먼지뿐이었다.


"이거..."


레샤의 목소리였다.


"응?"


나를 부른 건가 싶어 대꾸하자 레샤는 도리어 놀라 자기 입을 막았다. 아무래도 소리를 내고 싶어서 낸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아까부터 뭔가 굉장히 관찰적이었다. 평소라면 경계부터 할 애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가게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거기가 맞긴 한 거야?"


그럼에도 답이 나오질 않자 한탄스레 중얼거렸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오래 있다가는 그 향이 영원히 콧 속에 묻어 있을 것 같았다. 뭔가에 계속 집중하고 있던 레샤는 대꾸도 없이 계속 가게를 살폈다. 특별히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저렇게 있으니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어 나는 혼자 가게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폈다.


그러다 문득 입구 옆에 밧줄로 매달려있는 커다란 나무판자를 보았다. 아무래도 요상한 것이다. 거기에 왜 그런 게 묶여있을까, 궁금해졌던 나는 판자를 뒤집어 보았다. 거기엔 아주 오래된 글씨가 적혀있었다.

카밀.

그건 간판이었다. 대충 묶어 고정해놨던 밧줄이 한쪽만 삭아 끊어져 이러고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장사할 마음이 없나.


"야, 레샤. 이거 봐. 여기가 맞네."


나는 안쪽의 레샤를 불러 간판을 보여... 주기도 전에 그 애가 후다닥 달려나와 그걸 보았다.

너무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어? 뭐라고?"


"레이크!"


레샤가 답지않게 큰 소리로 날 불렀다.


"얼른 가요!"


"어?"


그리고는 영문 모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빨리요, 빨리...!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요...!"


"왜? 여기가 맞잖아. 카밀, 이라고 적혀있네."


"그런 건 됬으니까 빨리요...!"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조금 버티고 있자 가게 안 쪽에서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카밀이 아니야."


힘이 빠지는 듯 하면서도 뒷배가 있는 것 같은 미묘한, 예의없게 말하자면 영악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건 까뮤라고 읽는거다."


"카뮬이요?"


"까아뮤우."


몇 번을 들어도 헷갈리는 애매한 발음이었다.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인 할머니는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작은 사람이었다. 등이 굽어도 그렇지 레샤보다도 더 작아서 다른 인종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분명 인간이었다.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이목구비에서 차이가 나는 느낌이 있지 않은가.


"좀 더 혀를 잘써봐. 그래가지고 어디가서 이쁨이나 받겠어?"


할머니가 말했다.


"네?"


그게 뭔 소리인가 알기도 전에 할머니날 보며 대뜸 딴 소릴 말했다.


"음, 너는 르시아 아니니?"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


"...아닌데요."


어느샌가 내 뒤로 모습을 숨기고 있던 레샤에게 한 말이었다.


"저는 레샤입니다..."


"아아, 참... 그랬지. 레샤. 오랜만에 보는데 나와서 인사해주지 않으련?"


할머니가 얼르자 레샤는 쭈뼛쭈뼛 옆으로 걸어나와 후드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할머니는 정말 기쁜 얼굴로 홀홀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어떻게 할머니는 잘 지내시고?"


"할머니는..."


나는 레샤가 이토록 머뭇거리며 말을 하는 걸 본적이 없었다.


"연꽃이... 되셨는데요..."


이 할머니가 그렇게 불편한 걸까. 아니 이건 불편하다기보단 다른 거였다. 나는 알 수 없는 그런 복잡한 감정 말이다.


"아.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긴 내가 너를 본지도 꽤 되었으니까. 연꽃이라, 아 좋겠다."


아까부터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할머니가 식물이셨어? 너도 혹시 발바닥에서 뿌리가 자라고 그래?"


설마 그러겠노라고 나는 레샤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예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역시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님 말고."


내가 체념하자 날 이상한 사람 보듯 보던 레샤는 다시 할머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까뮤 할머니가... 여기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어, 왜 그렇게 말하고 그러니. 예전처럼 좀 더 귀엽게 말해주렴. 할머니이, 할머니이 하고 말이야."


까뮤, 라던 그 할머니는 어린 아이의 말투를 흉내내며 서운해했다.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어어! 그건 좀 비슷하구나. 르시아가 아니고 레샤예요 할머니이! 하던 거."


자기 과거가 까발려지는 게 심히도 부끄러운 것인지 레샤는 물러터진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을 숙여 가렸다.


"참 귀여웠지. 레샤 너는 네 할머니의 손녀가 아니라 마을의 손녀였단다."


까뮤 할머니는 또 옛 기억을 떠올리듯 홀홀 웃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니. 이렇게 어엿하게 남자까지 데려오고 네 어미는? 없어서 할머니한테 온 게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도 여기 계신지 몰랐다고 했잖아요..."


레샤는 어려워하면서도 바득바득 성을 내었다.


"에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할미한테도 알려주렴. 어디서 만났어?"


"...이래서 가자고 했던 겁니다."


레샤는 도리어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왠지 억울한데 차마 지금은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동시에 까뮤 할머니도 날 보았다.


"자네는 우리 르시아가 어디서 좋아서 쫓아다니나?"


"아니요, 할머니.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요..."


저 할머니 머리 속에서 지금 무슨 상황이 그려지고 있는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음? 그럼 레샤 네가 쫓아다니는 거야? 오 이런! 레샤. 이 할머니가 여자라면 남자가 쫓아오게 해야하는 거라고 누누히 말했잖니."


"까뮤 할머니... 자꾸 그러시면 저 갈거예요."


레샤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아유, 알았어. 우리 귀여운 레샤. 이 할미가 그만 하마."


홀홀 웃던 할머니는 대뜸 나에게도 너스레를 떨었다.


"하긴, 이 애가 어릴 때부터 이런 얘길 하면 귀 막고 도망치고 그랬어. 수줍음이 많아. 그래서 여긴 뭣하러 왔다고?"


까뮤 할머니는 매우 자연스럽게 화두를 돌렸다.


"네? 어? 아! 약초를 사려고요."


가만히 있던 내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하긴. 그것밖에 없지. 그래서 여긴 재미가 없다니까. 남자라곤 해도 다 늙어빠진 녀석들 뿐이고."


왠지 모르게 날 보는 까뮤 할머니의 눈빛이 그윽하다고 느낀 건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다.


"무슨 약이 필요한걸까. 큰 비가 내린 적이 있으니... 감기에 드는 약일까?"


"어떻게 아셨어요?"


"몰라. 내가 어떻게 알겠니. 그래서 필요한 게 감기에 필요한 약이야?"


"아, 예, 뭐... 네."


"좋아. 어렵지 않지. 마침 좋은 걸 하나 얻은 참이다."


그렇게 말한 까뮤 할머니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얇은 밧줄로 묶인 풀 한포기를 가지고 나왔다.


"여기 있다."


와, 아는 사람만 안다는 집은 역시 이런 거구나.

뜻밖의 쾌속 진행에 나는 얼른 가격부터 묻기로 했다.


"얼마에요?"


"천만 쳬니만 다오."


"아아, 천만이요? 잠시만요..."


천만이라.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던 내게서 튀어나온 건 돈 대신 괴성이었다.


"무슨 이까짓 풀쪼가리가 천만 쳬니나 해요!"


코앞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는대도 까뮤 할머니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 얼래주듯 뺨을 살살 두드렸다.


"감기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섭단다. 하나의 이름으로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모습에 따라 행동도 다 다르고 말이야. 그런 녀석들을 한 방에 퇴치하는 약초를 찾는다는 게 어디 쉬울까."


어렵지 않았다.

트리샤를 봐라. 돈으로 산 지도로 뭘 구했는지 말이다.


"돈이면 다 돼요."


"그러니까 천 만."


"와! 진짜! 그러네!? 할머니 천재세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장 수긍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낼 돈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우리 귀여운 레샤를 봐서 구백 구십 구만."


우와. 레샤를 보기만 한 것으로 일 만 쳬니가 깎이다니, 그렇다면.


"지금 레샤를 드리면요?"


"레이끄으...!"


내 철없는 소리에 레샤는 스태프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 다음에는 까뮤 할머니였다. 스태프로 찔렀다는 건 아니고 말을 하는 거였다.


"할머니...!"


"오, 왜 부르니 아가야, 이 할미가 과자라도 꺼내줄까? 약초를 갈아 넣어서 몸에도 좋단다. 좀 단단해서 할머니는 못 먹는단다."


"장난 그만치세요... 저 갈 거예요...?"


"아아아, 아아, 알았다. 알았어. 그러면 돈 대신에 이 청년한테 부탁 하나만 하자."


"할머니..."


"뭐 어떠니. 별 일도 아니란다."


천 만 쳬니 대신 별 일도 아닌 부탁이라고? 당연히 환영하는 바였다. 일단 들어보기만 해도 손해는 아니지 않은가.


"뭔데요?"


내가 반색하자 오히려 레샤가 날 잡아끌었다.


"하지마요...!"


"왜? 별 일 아니라잖아요."


"별 일 아니란다. 책 하나만 읽어줬으면 좋겠구나."


"책이요?"


"책이요...?"


레샤도 그런 시시한 조건이 나올 줄은 몰랐던 건지 나와 같이 의아해했다.


"그래에. 따라오렴. 너도 우리 르시아도."


차 한 잔하며 얘기하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까뮤 할머니는 우릴 안으로 초대했다.


작가의말

개강... 나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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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0) 19.05.30 87 5 20쪽
212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9) 19.05.25 102 5 17쪽
211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8) 19.05.20 93 5 19쪽
210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7) +1 19.05.10 113 5 16쪽
209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6) 19.05.09 114 6 20쪽
208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5) +6 19.04.30 110 5 16쪽
207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4) 19.04.27 100 6 19쪽
206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3) +3 19.04.15 121 6 19쪽
205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2) +1 19.02.12 144 6 20쪽
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5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9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3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8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2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2 4 21쪽
» 34. 헛것이야(3) +2 18.09.06 186 6 20쪽
183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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