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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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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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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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3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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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4. 헛것이야(2)

DUMMY

"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어...! 아픈 사람 괴롭히니까 좋냐아...?!"


야우라가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똑같이 오른손으로 그 손을 막아내고 나머지 왼손으로 야우라의 뜨끈한 얼굴을 쭉 밀어냈다.


평소와 달리 맥아리 없이 고개가 밀려났음에도 야우라는 포기하지 않고 남은 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 아! 아아아! 야! 내가 더 아파! 내가!"


"이그우구...! 으그급...!"


야우라가 무어라 항변했지만 나에게 턱주가리를 밀린 탓에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이 뭉개졌다. 어린 아기의 웅얼이보다도 더 했다.


"얌전히 조옴! 누워어! 있으라고오!"


나는 야우라를 어떻게든 침대 위에 앉혀놓았다. 어렵지 않았다. 내 머리를 잡고 버티고 있으니 아예 내가 침대까지 야우라를 밀고 가서 머리를 들이밀어 앉혀놓은 것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얼굴을 제압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았다.


내가 이마를 꾹 누르고 있음에도 야우라는 팔을 휘휘 저으며 일어나려고 발악했다. 정말 발악일 뿐이었다. 휘젓는 팔도 갈피를 못잡고 흐느적댔다. 아파서 기력이 없다는 게 사실이긴 했다.


"아 진짜 하지마라...!"


"그러게 얌전하랄 때 얌전했어야지."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 야우라를 이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다니 이런 기회가 또 없었다.


"놔...! 놓으라니까, 나 화낸다아...!"


"화내면 어쩔건데. 어? 어쩔건데!"


"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어쩌실거냐고요오!"


물론 야우라는 이도저도 하지 못했다. 무력하게 밀려났고 무력하게 제압되었다. 나는 내 얼굴 밀어내는 야우라의 손을 잡아 구부려 몸에 붙여 누르고 나머지 손도 똑같이 한다음 이불을 덮어버리고 야우라의 어께 좌우에 손을 짚어 옴짝달싹 못하게했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예 침대 위로 올라가 엎드린 자세로 이불을 봉쇄했다.


이긴 것이다.


"레이크 너...! 진짜 가만 안 둬...!"


야우라가 이불속에서 꼼지락대는 모습은 꼭 이불이 바람에 날려 넘실넘실 대는 것처럼 보였다. 춤추는 이불 위에 머리만 쏙 내밀고 있으니 그게 참 우스웠다.


"가만히 있으면 어디 덧나냐?"


"나중에 사제님한테 다 이른다?!"


"아니 넌 그런 말 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냐?!"


"놔...! 안 놔...?"


아프다는 녀석이, 아픈 것도 확실한 녀석이 뭐 이렇게 쌩쌩한지 모르겠다. 이후로는 괜한 체력 소모가 이어졌다.

야우라는 내내 몸부리치며 놔달라고 소리쳤다. 얼마나 억울하면 얼굴에 오른 열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때 만큼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그만뒀어야하는 것이다.


야우라와 내가 접전을 벌이는 소란스러운 소리는 고스란히 밖으로 새어나갔고 얼마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너희 왜 그래?"


클로에였다.

클로에가 이 꼴을 봤다간 또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몰랐다.

나는 허겁지겁 야우라에게서 비켜섰고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것마저 시간낭비였다. 헛디딘 김에 바닥을 한 바퀴 굴러 손을 집고 착지하자 제법 자연스럽게, 떨어져나올 수 있었다.


"뭐해?"


그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실은 멋지게 착지한 건 잠시뿐이었고 뼈마디가 부딪힌 무릎이 너무 아파서 바닥을 뒹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야우라는 그 사이 시간을 잘 이용했다.


"클로에에에에....!"


저 녀석이 아프다는 건 역시 다 거짓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재빠르게 클로에게 가서 들러붙는단 말인가. 말도 안 되었다.

말도 안 돼!


"레이크가아...! 흐으윽, 레이크가아...!"


야우라는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레이크가 왜! 무슨 짓을 했는데?"


걱정스레 허리에 매달린 야우라를 내려다보던 클로에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싸늘하게 날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과 고개를 엄청 빠르게 흔드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라고 말이다.


"흐으, 레이크가아아...! 나 막 때리고...!"


"때렸다고?"


뭐... 그건 사실이었다.


"억지로 침대에 눕혀서어....!"


"억지로 침대에 눕혀?!"


그것도 사실이었고...


"막 묶어두고오...!"


"묶었다고? 그래서!"


묶었다는 것도...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고선...! 그러고서는...!"


"이젠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


"그 다음은 말 못해에에...! 흐으...!"


이어지는 건 클로에의 싸늘한 눈이었다. 그건 경멸을 넘어선 어떤 그 무언가였다. 나 따위는 가볍게 찌그러트릴 혐오와 경멸의 감정이 물씬 묻어나왔다. 그건 억울할 것이었다.


"그 다음엔 아무 일도 없었으면서 그건 왜 말을 못 하겠다는 거야!"


듣자듣자하니 사람 오해 불러 일으킬 소리만 잔뜩하고 뒷수습은 하나도 안 하고 있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저것 봐...! 어허엉...!"


야우라는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거짓말이다. 너무나도 거짓인 티가 났는데 아픈애라고 하니 그게 모두 용서가 되고 있었다.


"너는 아픈 애를 상대로..."


클로에는 아직까지도 메달려 있는 야우라를 보듬으며 나를 책망했다. 이미 완전히 야우라 편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그리고 애도 아니잖아!"


내가 억울함을 토로해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래!"


도무지 통할 기미가 안 보였다.

하여 원래대로라면 금방 끝났을 이야기가 구구절절 빙빙돌아 닿게 되었다. 한참을 설명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오늘같은 날이라도 좀 친하게 지낼 수 없니? 어어?"


지난 이야기들을 사실에 기반해 양쪽 모두의 말을 들은 클로에는 어께가 쳐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건 권유보다도 한탄이었다.


"없어. 저 자식이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없다."


나는 단호히 선언했다.


"아휴. 그래 난 내려가서 가게 볼거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갈거야?"


뭘 놀랄 일이라고, 야우라는 깜짝 놀라 클로에를 잡았다.


"그럼 가야지, 안 가?"


"너무해..."


그런 때에도 클로에는 단호했다.

내게는 따박따박 할 말이 많았던 야우라도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걸 보니 그 단호함이란 징수관도 혀를 내두를 단호함이었다.


클로에에가 가고나자 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어색하다기보단 서로의 수를 읽으려는 시간이었다. 눈치싸움하고도 비슷했다. 공격과 수비가 명백히 갈라져 있고 어떤 행동을 할지도 서로 알고 있었다. 쟁점은 언제 행동을 취하느냐이다.

먼저 움직인 건 나였다.

나는 아직 열려있는 문밖으로 한걸음 먼저 나갔다. 오른발이 문의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즉시 목을 당겨오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잽싸기는 엄청 잽싸다.


"가지 말라고오...!"


야우라가 내 목과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벽을 잡고 버티면서도 참 사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너는 아까 그 짓을 해놓고 나한테 가지 말란 말이 나오냐...!"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레이크 어엄청 친절했어!"


"그걸 이제 말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


"아아! 레이크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러니까 가지말고 여기 있어어!"


때늦은 사과 따위 받아주고 싶은 마음 털끝만큼도 없었다. 온갖 밉상은 다 부려놓고 마지막에 한 번 잘해주면 뭐가 될거라고 생각하는 그 심보가 아주 못되먹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야우라의 힘이 먼저 빠질테고 그러면 나는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지금도 시시각각 야우라는 지쳐갔고 뒤에서 아주 무서운 숨소리가 들렸다.


"으흐하! 으흐흐하하! 얼마나 안 남았어! 야우라! 얼마 안 남았다고!"


나는 크게 웃으며 모가지까지 복도 밖으로 빼냈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마침 에반젤린이 오고 있었다.


"어! 에반젤린! 으잇....!"


잠깐 방심한 탓에 나는 다시 끌려들어갔다. 하지만 고지가 코앞,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날 보는 에반젤린의 눈이 상당히 혼란해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나 같아도 아는 사람이 문 앞에서 고개 내밀어 핏대 세우고 있으면, 당신 뭐야 난 당신같은 사람 몰라, 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문 앞에서 볼일 보는 것도 아니고 뭔 짓이냐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헐레벌떡 달려온 에반젤린은 방 안을 보았다. 그리고는...


"헛! 레이크 님... 저는... 레이크 님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이런 건 도울 수도 없어요...!"


"아니이이! 지금 누가 봐도 내가 당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내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옆으로 보나 제자리에서 스무바퀴 빙글빙글 돈 다음 봐도!



그리하여-


야우라는 침대에 다시 누웠고 사제님의 제대로 된 간호를 받았다. 누우라면 눕고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어찌나 말을 잘 듣는지 아주 부뚜막 고양이었다.


"아래에서 야우라 자매님이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설마 레이크 님이 환자하고 싸워서 지고 계신 줄은 몰랐죠..."


제 착각이 부끄러울 에반젤린은 베시시 웃으며 야우라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이거 환자 아니라니까?"


"이거라고 하지마라...?"


한껏 걸걸해진 목소리로 투덜대던 야우라는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아까보다 훨씬 악화되었다. 그러게 누가 그 난리를 피우랬냐고.


"근데, 이제 에반젤린도 있으니까 난 가도 되지 않을까?"


나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싫어. 가지마..."


하이고 참나 꼭 누구를 연상케하는 단호함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답잖은 시간을 좀 더 흘려보내게 되었다. 그 동안 레샤도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건 좋은 것이다. 에반젤린 말고도 나 대신 야우라의 헛소리를 받아줄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니까 나쁠 것 없었다. 한 가지 약간 의심가는 부분이 있다면 너무 일찍왔다는 점이었다.


레샤는 극장 무대장치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공중을 부유시킨다던가 무대의 밝기는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기후나 마법 같은 걸 표현할 때는 꼭 레샤가 끼어들었다.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만 봐도 지금은 소극장의 일이 다 끝날 때가 아니었다. 레샤가 모든 공연에 손을 대는 건 아니니 일찍 끝나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래도 경험상 이건 너무 빨랐다.


"너 되게 일찍 왔다?"


나는 인삿말처럼 그렇게 물었다.


"오늘 몇몇 주연 배우들이 감기에 걸려서 결국 공연 취소했습니다."


등어깨에 걸고 있던 스태프를 벽에 기대놓으면 자연스레 대꾸하던 레샤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래, 그 떨림이 난 뭔지 알고 있었다. 레샤는 지금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었다. 훨씬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중간에 샌 것이다.

갑자기 밖에서 놀고 싶어져서 그런 걸 절대 아닐테고...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스태프를 놓고 허리를 펴는 레샤의 모습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애를 보고 있었고 그 애는 날 보았으므로 우리는 머지 않아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뭔가요, 갑자기...?"


레샤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뭐. 내가 방금 뭐라고 했나?"


나는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었다.

지레 발저리고 있는 건 오히려 쟤였다.


"왔으면 된 거 아닙니까...?"


"누가 뭐래?"


"뭐라고 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래서 뭐 하다 왔는데."


하여 무엇을 하다 오셨는가 함은 약간 쭈뼜쭈뼜,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도서관 갔다왔는데요...?"


도서관이라, 실제로 레샤가 땡땡이 친 곳이 어딘지 듣고나자 이상하게도 나는 시큰둥해졌다. 이게 듣기 전에는 일부러라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막상 듣고나니 밍밍해져버렸다. 그냥 다녀왔나 보구나 싶은 그런 기분.


"그래? 재밌었겠네. 나는 이상한 오해나 받으면서 힘들었는데."


뭐, 대단찮은 기분이었다.


"하긴, 이런 건 한가한 놈이 해야지. 바쁜 사람 잡으면 쓰겠어?"


그냥 뭐...


"없으면 극장이 안 돌아간다잖아. 오늘은... 공연도 없었다지만, 그래도 가긴 가야하는 거니까..."


그런...


"레이크..."


나름대로 미안해하던 레샤의 음영 가득한 눈이 어느샌가 싸하게 변해있었다.


"그냥 사과해달라고 해요. 뭔가요, 그게...? 째째하게."


째째?


"아니... 째째하진 않지. 일단 하긴 했잖아!"


"그래놓고 나중에 생색내는 걸 째째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레샤에게 말문이 막혀버린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내뱉으면서 외면해버렸다.

째째하든 말든 알게 뭐람.


"야우라, 너 때문이라잖아."


대신 야우라를 탓하기로 했다.


"콜록, 켁.... 왜 나한테 그래에...!"


목에 가래가 잔뜩 낀 야우라는 나름대로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 그런거지 뭐.


"그래서 이제 뭐해?"


"가지마...!"


간다는 말은 비슷한 것도 한 마디 안 했건만 야우라는 오뚝이처럼 반응했다. 그건 이제 와 개미가 땅을 기어다니는구나 하는 정도의 일이었으므로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말에 딴지 걸지 않았고 구태여 동의해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자꾸 가지말라고 하시는 걸 보면 감기가 생각보다 꽤 심하신 거 같아요. 원래 아플수록 어리광이 심해진다고 하잖아요."


어리광이라. 그렇게 말하면 귀엽게만 들리는데 말이다.


"에반젤린은 사제 님이니까... 무슨 한 방에 낫는 약 같은 거 없어...?"


야우라의 헛소리를 들어보니 어리광은 어리광인 모양이었다.


"어... 제가 알고 온 건 아니라서 약 같은 건 안 가지고 왔는데요...?"


에반젤린은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달라고 살짝 웃어보였다.


그 때였다.


"저기, 에반젤린."


클로에가 방문을 벌컥 열고 고개만 슥 들이밀었다.


"좀 내려와줄 수 있겠어? 밑에서 갬즈 씨가 자기가 만든 물약 같은 걸 먹고 쓰러져버렸든?"


"네?!"


깜짝 놀란 에반젤린이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아,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닐 거야. 전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거든."


"그래도 조심해야죠. 어디 계시는데요?"


"밑에. 일단은 다른 사람들이랑 바로 눕혀놓기는 했는데..."


"지금 내려갈게요."


내려갈 채비를 하던 에반젤린은 잊지 않고 야우라의 이마도 한 번 쓸어 쓰다듬었다.


"야우라 자매님, 주무시고 계세요. 전 내려가봐야 할 거 같아요."


"나보다 급한 환자가 있어...?"


"더 급한 환자라는 건 없어요."


에반젤린은 능숙하게 달랬다.


"알았어..."


그렇게 에반젤린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클로에도 그 뒤를 따라 내려가려다가 문득 시선이 야우라게 닿았다. 그 애는 문을 닫으려던 손을 멈추고 대뜸 안부를 물었다.


"많이 아파?"


"열나...! 추워...! 기침 나와...!"


야우라는 꼭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그 모습이 측은한건지 마땅찮은 건지 정수리를 긁적이던 클로에는 옆에 앉아있는 나랑 레샤에게 손을 까닥였다.


우리가 조용히 가까이가자 클로에는 몸을 가까이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아는 곳 중에 약초집이 하나 있거든? 거기 가면 뭐가 있긴 할거야. 되게 용하다고 소문난 곳이거든. 성당에도 약초를 대주고 말이야."


"어? 어..."


영문 모를 소리에 나는 맹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니까. 거기 가서 약 하나만 받아와봐 대금은 내가 치뤄줄게. 야우라한테는 성당에서 얻어왔다고 하고."


아니 잠깐만 그 말인즉슨.


"나보고 갔다오라고?"


"그럼 아픈 애가 갈 수는 없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인데.

나는 슬며시 레샤 내려다보았다. 공교롭게도 그 애도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그랬듯 우리는 우연찮게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요...?'


레샤가 먼저 가시를 세웠다.


"왜."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보는 겁니까...?"


"그냥."


"그냥 맞아요...?"


"그럼 넌 날 왜 봤는데."


"...그냥요."


"사람을 그냥 왜 봐."


"레이크는 왜 봤는데요....?"


"오래 앉아있다보니 몸이 뻐근해서."


"저도 연극 준비를 하느라 고개가 굳어서 그런 건데요...?"


"너 도서관에서 놀다왔다메!"


"레이크도 여기서 책 봤으니까 저랑 똑같은 거잖아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서로를 마주봤을 때, 클로에가 쿵! 하고 주먹으로 벽을 쳤다.


"너희들. 애도 아니고 왜 그래 진짜."


"엇, 저는...!"


뭔가 할 말이 있었던 레샤는 슬쩍 손을 들었다가 클로에의 눈빛을 보고선 얌전히 내려놓았다.


"아닙니다..."


한 숨을 내쉬며 속을 삭히던 클로에는 다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한테 이렇게 부탁할게, 응?"


그 미소가 그 미소가 아닌 것을 사람을 어떻게 알아채는 걸까. 그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 알았어..."


"알겠습니다..."


우리의 대답을 들은 클로에는 이번에야 말로 진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했다. 너희들에게도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할테니 나쁠게 없을 거라고 그렇게 당부하며 클로에는 급하게 밑으로 내려갔다.


"하..."


내 한 숨소리에 겹쳐 레샤의 탄식도 들린 거 같았다.


"야. 야우라."


일정에 변경이 생겼으니 나는 야우라부터 불렀다.


"왜...?"


야우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만 짧게 했다.


"나랑 레샤랑 잠깐 나갔다 올게."


"응..."


야우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게 문득 궁금했다.


"가지 말라고 안 하냐?"


"가는 게 아니라 갔다 오는 거잖아..."


기묘하게도 그 말이 맞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샤도 말했다.


"빨리와..."



그리하여 우리는 클로에게 대강의 위치를 듣고 하늘그림을 나와 그 약초상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트리마켓 그 언저리였으므로 그렇게 어려운 길은 아니었다.


길은 문제거리도 아니다. 다만 먼저 결착지을 것이 있을 뿐이었다.

옆에 환자도 없고 중재할 누군가도 없으니 나랑 레샤는 아까 못다한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했다.


"난 이해를 못 하겠어. 너는 혼자서 심부름을 못 가냐? 왜 맨날 내가 같이 가야 돼?"


나는 레샤에게 따져물었다. 대체 몇 번째인지 이 비슷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닌 것이다.


"저야말로 피해잡니다...! 레이크는 왜 항상 절 걸고 넘어지는 거예요, 예에...?! 왜 저냐고요...!"


어쭈, 얘도 쌓인 감정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네가 잘못했잖아! 접시, 네가 깼잖아!"


"스태로 씨를 옮긴 날에 야우라한테 붙잡힌 건 레이크였잖아요...!"


"그럼 나 이제부터 나한테 뭐 물어봐달라고 하지마."


"예에...?! 째째하다 째째하다 하니까 진짜 쪼잔해졌어요...?"


"아 몰라몰라, 몰라몰라! 이제부턴 너 알아서 해!"


"그럼 저도 전에 레이크가 방에다가 물 흘려서 바닥에 얼룩진 거 다 말 할 겁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아무래도 이 이야기가 끝나려면 한참은 걸릴 거 같았다.


작가의말

가끔 예전 글부터 쭉 추천을 눌러주시면서 달려오시는 분이 계세요.

그런 때면 정말 즐거운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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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37. 담는다는 건 닮는다는 거야(1) +1 19.02.05 170 7 19쪽
203 36. 아니래도 소용없어(5) +1 19.01.29 135 6 19쪽
202 36. 아니래도 소용없어(4) 19.01.24 129 5 18쪽
201 36. 아니래도 소용없어(3) 19.01.19 144 7 17쪽
200 36. 아니래도 소용없어(2) +6 19.01.14 178 7 15쪽
199 36. 아니래도 소용없어(1) 19.01.07 154 7 17쪽
198 35. 기대는 기대게 돼(5) 19.01.04 149 6 18쪽
197 35. 기대는 기대게 돼(4) +4 18.12.31 158 8 18쪽
196 35. 기대는 기대게 돼(3) +2 18.11.25 155 6 19쪽
195 35. 기대는 기대게 돼(2) +2 18.11.19 147 6 15쪽
194 35. 기대는 기대게 돼(1) 18.11.06 174 7 16쪽
193 34. 헛것이야(12) +2 18.10.22 153 7 24쪽
192 34. 헛것이야(11) 18.10.22 147 6 16쪽
191 34. 헛것이야(10) +4 18.10.15 193 6 19쪽
190 34. 헛것이야(9) +1 18.10.10 204 4 16쪽
189 34. 헛것이야(8) +1 18.10.02 167 6 20쪽
188 34. 헛것이야(7) +2 18.09.29 177 4 19쪽
187 34. 헛것이야(6) +2 18.09.25 181 5 19쪽
186 34. 헛것이야(5) +1 18.09.18 171 5 20쪽
185 34. 헛것이야(4) +2 18.09.09 182 4 21쪽
184 34. 헛것이야(3) +2 18.09.06 185 6 20쪽
» 34. 헛것이야(2) +1 18.09.03 178 9 19쪽
182 34. 헛것이야(1) +2 18.08.30 194 7 15쪽
181 33. 헛것이 아니야(5) 18.08.28 202 8 20쪽
180 33. 헛것이 아니야(4) 18.08.27 145 9 13쪽
179 33. 헛것이 아니야(3) +1 18.08.21 180 7 17쪽
178 33. 헛것이 아니야(2) +1 18.08.18 19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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