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9,159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3.10.18 16:41
조회
2,101
추천
37
글자
36쪽

해의 그림자 136

DUMMY

"이게 뭐요?"


숙종은 김석주가 김석하를 데리고 통명전 동온돌로 자신을 찾아와서 두개의 목함을 내어놓자 의아히 쳐다보았다. 이미 김석주는 봉위단자를 내었고, 봉위물자도 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또 다른 목함들을 내어놓다니.


"석하 이놈이 재주를 부려 전하께 바치는 선물이옵니다."

"선물?"


숙종은 단정히 앉은 김석하를 쳐다보았다. 한눈에도 비곗살이 뒤룩뒤룩한 김석주 옆에 군살 하나 없이 호리호리한 김석하가 나란히 앉아있으니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나마 둘의 얼굴색만은 거무잡잡하니 같은 청풍김씨 혈통이란 사실은 잊지 않게 해주었다. 두광이 목함들을 왕의 서안에 올려두자 김석주는 옆의 김석하가 마냥 자랑스러운 듯 허리를 툭 쓰다듬으며 설명하려 들었다.


"신료들의 이름이 새겨진 바둑알 겸 장기말로..."

"뭐요? 바둑? 장기?"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숙종은 귀를 의심하고 김석주와 김석하를 쏘아보았다.


"제 정신이요? 지금 상喪중인 나한테 혁기를 두라고? 하!"


숙종은 매운 생강이라도 잘근잘근 씹는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다. 상중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선 안된다. 그런데 버젓이 이런 말도 안되는 장기말 같은 걸 가져와서 선물이랍시고 내밀다니? 매운 불길처럼, 연기처럼 제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성질을 누를 길이 없었다.


"누구 놀리는 건가?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 하나? 상중에 바둑? 장기? 저 장기에서 신선놀음하는 송시열이 얼씨구나 그 잘난 붓을 놀려서 나를 연산, 광해보다 더한 패군悖君으로 만들고도 남을 일을!"


숙종이 화가 나서 쏘아부치는데, 김석주는 유들유들, 또 느물느물하게 웃음지었다.


"바둑이야...노상 편전에서 두시잖습니까?"

"뭐? 편전?"


김석주가 거뭇한 얼굴에 번질번질한 웃음을 지었다.


"예 편전. 조정의 문무백관이 모두 전하의 장기말이옵니다."


왠지 쥐어짜면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웃음이었지만, 숙종은 그 목울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묘하게 수긍이 가는지, 이내 격분을 가라앉히고 입을 다물었다. 왕의 눈길이 두개의 목함에 닿자 김석주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흰돌은 서인, 검은돌은 남인입니다."


숙종은 양손을 뻗어 목함 뚜껑을 잡다가 두눈을 홉뜨고 김석주를 노려보았다.


"누가 서인 아니랄까봐..."


핀잔 한마디와 함께 지체없이 뚜껑을 열어젖히니 안에는 각각 흰돌과 검은돌이 가득했다. 헌데 흰돌엔 검은 글씨, 검은돌엔 흰 글씨가 있었다. 돌의 한쪽면에만 글씨를 새겨 각각 백칠, 흑칠을 입힌 모양이었다.


우선 흰돌을 한웅큼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글자를 살펴보니 김수항金壽恒, 김익훈金益勳, 신여철申汝哲...하나같이 서인 이름이 나오다가 여지 없이 송시열宋時烈이란 이름이 나왔다. 숙종은 벌레라도 만진 듯이 손가락을 움츠리며 도로 목함에 툭 던져넣었다.


숙종은 검은돌도 한웅큼 집어들어 살폈다.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민희閔熙, 윤휴尹鑴...뒤집어진 돌은 똑바로 돌려놔서 이름이 나오도록 하다보니, 숙종의 눈길이 맨송맨송한 검은돌 뒷면에 자꾸 닿았다.


"이 뒷면엔 품계를 새겨두면 좋겠는데."

"품계야 워낙 오르내리는 법이오라..."

"하긴..."


숙종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면서도 아쉬운지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넘어지면 땅을 보지 말고 주위를 살펴야 하는 법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그틈을 노릴 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하오니 전하가 중심이 되시어, 전하의 바둑알을, 장기말을 마음껏 다루소서."


김석주의 간언을 들으면서 숙종은 목함 속에 손을 넣고 휘저어서 달그락거렸다. 그는 편전을 재현하듯 허적, 권대운, 오정위, 홍우원, 김석주, 민희, 민점 순으로 바둑돌을 늘어놓다가 인상을 썼다. 이렇게 바둑돌로 놓고 보니 김석주만 제외하고 검은돌 일색이었다. 숙종의 반짝이던 눈빛이 시들해졌다.


"재미 없소."

"네?"


김석주가 당황해서 되물었지만 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목함에 넣어서 달그락거렸다.



밤이 이슥하여 숙종은 두광에게 바둑알을 챙겨 뒤따르게 하고 소각을 찾았다. 흰 불두화 틈새로 숙종이 손을 넣어 꽃가지를 살짝 제치고 창살 틈새로 안을 보니 이민철과 최석정이 먼저 와서 성혈 탁본들을 갖고 씨름하는 참이었다.


"잘들 되어가오?"

"음마!"

"헉, 전하?"


숙종이 불두화 덤불 틈새로 눈만 한쪽 드러내고 묻는 말에 이민철과 최석정은 화들짝 놀랐다. 특히 이민철은 방금 전까지 성혈 탁본을 장지에 옮겨 그리느라 얼굴과 장지 사이의 간격이 겨우 두치였던 탓에 한순간 삐끗한 것이 장지를 망쳐버렸다. 이민철이 금세 울상이 되어버렸다.


"전하...어음...신이 이걸 얼마나 오래...무려 세시진을...세시진을..."


이민철은 이미 망쳐버린 성혈 모사본을 붙들고 두손을 파르르 떨며 울먹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놀라서..."


숙종은 살짝 미안하여 몸서리를 치며 웃었다. 이미 이민철의 온몸에서 울화통이 줄기줄기 뻗치는 것을 느껴졌다. 숙종은 헛기침을 하며 불두화 가지에서 손을 떼고 돌아서는데, 발치에 웅크린 고양이가 얼핏 두광의 눈에 들어왔다.


"저, 전하?"

"왜?"

"아니...옵니다."


두광이 시고 떫은 금앵자金櫻者를 몰래 집어먹다가 들킨 것처럼 어색하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맙소사! 고양이라니...


싸돌아다니는 쥐를 잡아먹으라고 키우는 고양이지만, 감히 왕의 발치까지 닿도록 방치했다가는 큰일이었다. 고양이 사육담당 내관은 물론이고, 왕을 수행하는 자들까지 모조리 추고를 당할 일이었다.


두광은 얼른 소각 옆 드므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젖먹던 힘까지 한꺼번에 내어 냉큼 쇠고리를 당겨 비밀문을 열었다. 왕이 발치의 고양이를 부디 보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어서 들어가시옵소서."

"..."


숙종은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였지만 이내 비밀통로로 들어갔다.


이민철이 입맛을 쩝 다시고서 그대로 붓을 놓고 자세를 바로하여 부복했다. 그 옆에서 최석정은 입술새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내며 성혈 탁본을 서안에 내려놓았다.


"전하..."

"내 재미있는 걸 보여주려고 왔소."

"그게...뭡니까?"

"바둑돌. 김석하가 만들어준 거요."

"네에?"


최석정과 이민철은 당혹스레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왕도 침전에 두기가 찜찜해서 가져온 것이겠지만, 상중에 바둑알을 만들어바치다니?


"보시오. 여기 최사부 이름도 있소."


숙종이 최석정의 눈앞에 崔錫鼎이라 그 이름이 적힌 흰돌을 바짝 들이대었다. 최석정이 두눈을 깜빡이고, 흰돌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다시 들여다보는데, 마침 소각의 창살을 덮은 흰 불두화 봉오리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뛰어들었다. 그것도 숙종의 팔꿈치를 스쳐서 그 서안 위로 사뿐히 착지해서.


냐옹.


매끈매끈한 털에 싸인 등줄기가 꿈틀거리는 짐승의 형체에 모두들 혼비백산해버렸다.


"고, 고양이?"

"이게 웬 고양이냐!"

"그게..."


고양이는 숙종의 몸에서 나는 생선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대며 숙종의 백포자락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숙종은 화들짝 놀라서 고양이를 향해 위협용으로 두팔을 휘저으면서도 손에 쥔 흰돌을 놓지 않았다. 하필이면 바둑알에 적혀진 이름이 송시열도 아니고, 최석정이라서 더 내동댕이칠 수가 없었다.


"어, 저, 저리 가, 가라!"


숙종은 한밤의 불청객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자신의 무릎에, 팔뚝에, 가슴에 달라붙어 냄새를 맡아대는 꼴이라니.


"저, 전하...!"


두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필이면 아까 그 고양이가 기어이 일을 쳤다. 요즘 왕의 눈앞에 종종 출몰하는 것도 모자라서 하필 왕한테 달라붙은 것이었다.


"아니 정말 이놈이 왜...!"

"원래 고양이가 돌아다녀야 쥐가 안 돌아다니는 법이오니...!"

"그게 아니라 왜...왜 나한테!"

"그야 전하께오서 주야장창 생선만 드시오니..."

"..."


숙종이 할말을 잃은 순간, 고양이는 혀를 내밀어 숙종의 손등에, 그리고 두뺨에 할짝할짝거렸다. 처음엔 좀 놀랍고 당혹스러워서 움찔움찔하더니 숙종은 이내 덤덤히 참아냈다.


냐옹.

냐옹.

냐옹.


어찌나 간절한 눈빛으로 숙종을 보며 낑낑거리는지. 결국 숙종의 턱짓을 읽은 두광이 부리나케 수라간으로 달려가서 생선구이를 가져왔다.


그러자 고양이는 냅다 숙종의 품에서 벗어나서 생선접시로 달려들었다. 야옹. 그런데 어디서 또 생선냄새를 맡은 노란 고양이가 흰 불두화 송이 틈새를 뚫고 소각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고양이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서로 아옹다옹 제 머리로 상대 머리를 밀어내며 생선 한마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싸우는 꼴 보기 싫으니 공평하게 반 갈라주어라."

"예에?"


숙종의 명에 두광은 오른손으로 별 생각 없이 생선을 집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고양이들이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려 들었다.


"으아아!"


두광은 화들짝 놀라 생선을 놓치고 뒤로 나자빠졌다. 고양이들은 그런 두광은 본체만체하고 도로 생선구이로 달려들어 할짝거렸다.


"괜찮으냐?"

"예."


두광은 무사한 오른손 손등을 내려다보곤 본능적으로 왼손으로 손등을 감쌌다. 한번 놀라고 보니 다시 생선을 집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타이르듯 이내 왕의 옥음이 으스스하게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두광아!"

"네 갑니다! 가요오!"


두광은 겁에 질린 얼굴로 살금살금 고양이들에게로 다가들었다. 하지만 한걸음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는 바짝 긴장하여 마른침을 힘겹게 꼴깍 넘겼다. 당장 접시에서 생선을 빼앗았다가는 저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신의 얼굴과 손등을 바둑판으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그러니 자연히 걸음도 느려졌다.


"뭐 하느냐? 빨리 나눠주지 않고?"

"하오나..."


두광이 머뭇대는 사이 고양이 두마리는 생선을 등뼈만 남겨놓고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잔해만 남아버린 생선접시를 보고, 숙종은 한심한 듯 두광을 노려보았다. 두광은 움찔해서 그 눈길을 피하면서 궁시렁거렸다.


"중전마마께오서 내가 싫은 일은 남한테 시키지 말라 하셨는데..."

"그럼 내가 하리?"

"그건 아니오나..."


숙종은 움찔하더니 최석정의 손등에 그 이름이 새겨진 바둑알을 툭 얹고선 목청을 가다듬어 두광에게 대꾸했다.


"흠, 난 못생긴 놈들은 싫다. 잘생긴 놈이라면 내가 직접 먹이도 주고 해보마."

"잘생긴 놈이요?"

"나한테 어울리는 금털은 되어야지. 이왕이면 숫놈으로."


최석정은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전하, 조선팔도를 뒤져도 금털 고양이를, 그것도 숫놈을 찾긴 어렵습니다. 양녕대군도 폐세자가 되기 직전 구하려다 허탕을 쳤었다지요."

"그리 귀하니 귀한 이한테 어울리는 거요. 바로 나한테."


숙종이 최석정에게 오만하게 웃어보였다. 인간들의 대화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고양이들은 배가 부른지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발로 제 배를 대여섯번 긁고서 벌떡 일어나더니 여태껏 자신에게 생선을 나눠준 두광은 물론, 소각 안의 사람들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히려 숙종의 어깨를 딛고 창살 틈새로 빠져나가버렸다.


"하!"


숙종은 고양이한테 밟힌 어깨를 내려다보며 어이없어 했다. 감히 자신의 어깨를 밟았다. 고양이 따위가.


"저 은혜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


숙종이 치를 떨며 욕했지만, 그런다고 고양이들이 돌아오진 않았다. 하찮은 미물 때문에 한참을 속썩을 그들도 아니었기에, 이민철과 최석정은 이내 고양이들을 잊고 성혈 탁본을 장지에 베끼기 시작했다.


"아 또 틀렸다니깐! 보면 모르세요? 이 꼬리가 반치 정도 더 내려와야 한다니깐!"

"그러는 너는? 그게 무슨 39도냐? 37도지!"

"그런가..."

"아...그림 잘 그리는 놈 하나만 데려오면 되는데."


이민철과 최석정이 티격태격 하는 사이 숙종은 한가로이 바둑알을 만지작거렸다. 보고 또 봐도 바둑알에 세공된 글씨가 단아하고 정교하여 마음에 들었다.


"김석하가 참 재주가 많소. 사부만 아니면 당장 소각에 들이고 싶은데."

"전하, 좀더 두고 보시지요. 그리고 아직 상중이니 혁기는 삼가심이..."


최석정이 고개를 돌려서 숙종의 손끝을 예의주시하며 간언했다. 숙종은 시큰둥히 대꾸했다.


"선왕의 국상중에 바둑을 가르쳐준 게 누구였더라?"

"..."

"덕분에 그때는 송시열도 쳐낼 수가 있었는데."

"..."


숙종은 가만히 소각 바닥에 바둑알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허적, 권대운, 김석주, 오정위, 홍우원, 민희, 민점...그렇게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영의정 이하 학유學諭까지 어김없이 순서대로 정렬해 보였다. 심지어 대과에서 갑을병과 삼인을 제외하고 급제하여 관리임용 대기 중인 권지權知들마저 늘어놓는, 괴물같은 암기력을 발휘해서.


하지만 최석정은 감탄하긴 커녕 점점 조금 전 숙종처럼 시들한 눈빛으로 바둑알들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애써 하품을 참는 눈꺼풀로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꺼낸 첫마디도 똑같았다.


"재미없습니다."

"사부도 재미없소?"

"다 똑같은 흑돌이라..."

"..."


최석정의 말마따나 다 똑같은 흑돌이었다. 김석주, 최석정 같은 이름을 빼면 눈에 들어오는 백돌도 없었다. 최석정은 그 자리에서 붓을 잡고 장지에 삼태극을 그려보였다.


"전하, 부디 황극을 유념하시옵소서."

"황극...?"

"예, 무극, 태극, 황극...삼극에서 인주가 중심이 되어 형평을 지키는 법..."

"삼극, 삼재야 익히..."

"익히 아시지만 익히 하시지는 않으시지요."

"..."


언제나 왕이 말할 때는 끝까지 기다렸다가 말하는 최석정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말허리를 감히 자르고 황극을 설파했다.


"홍범구주에서의 황극이란, 무편무당無偏無黨 , 왕도탕탕王道蕩蕩 , 무당무편無黨無偏 , 왕도평평王道平平, 무반무측無反無側, 왕도정직王道正直, 회기유극會其有極, 귀기유극歸其有極...즉, 임금이 표준이 되어 바른 법도를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전하께선...보시다시피..."


최석정은 잠시 말을 쉬고, 소각 바닥 위의 바둑돌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했다. 소각 바닥에 편전을 재현한 국면은 그야말로 검은돌 천지였으니.


"흑돌 일색입니다만."


숙종은 그런 최석정을 가만히 쏘아보더니, 어깨죽지가 들썩할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두광을 시켜 동람도가 그려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도東國圖 같은 지도책들을 가져오게 하였다.


손에 잡히는대로 책장을 훌훌 넘겨서 도성도를 펼쳐보니, 동궐東闕(창덕궁 및 창경궁) 주변으로 어영청이 표시되어 있고, 그 북쪽으로 총융청, 남쪽으로 수어청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숙종은 지도책 속의 동궐을 에워싼 어영청 자리에 김익훈金益勳이란 흰돌을, 그 옆 훈련도감에 유혁연柳赫然이란 검은돌을, 그리고 그 북쪽 총융청에 김만기金萬基란 흰돌을, 그 남쪽 수어청에 또 김석주金錫胄란 흰돌을 올려놓았다.


"전하, 지금 뭐하시는?"

"보면 모르오?"


숙종은 문득 편전에서 뱀처럼 날카로운 혓바닥을 놀리던 홍우원이 생각났다. 남인들이 모조리 김익훈을 어영청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한다. 숙종은 어영청 자리에서 흰돌 김익훈金益勳을 빼놓았다.


"김익훈이 빠지면...이제 누굴 놓아야 하나..."


숙종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지도책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있는 동궐엔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가장 가까웠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그는 이원정李元禎이란 검은돌을 어영청 자리에 놓고는 또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동궐 주변에 검은돌 유혁연과 이원정이 딱 붙어 있는데,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지근거리에 남인들만 바짝 붙여두자니 도무지 내키지가 않았다.


숙종은 손가락을 뻗어 총융청 자리에서 흰돌 김석주金錫胄를 어영청 자리로 올려서 동궐 옆에 바짝 붙여두었다. 그리고 검은돌 민희閔熙와 이원정李元禎을 손에 들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검은돌 민희閔熙를 수어청의 자리에 두었다. 숙종은 만족스럽게 두손을 털며 최석정을 돌아보고 씨익 웃었다.


"사부, 아니 최교리, 이제 교지를 쓰시오."


최석정은 질린 얼굴로 지도책 위를 내려다 보았다. 눈앞에서 지금 왕이 상중에 혁기를 둔 건지. 혹시 이건 김석주, 김석하...그자들이 왕에게 몹쓸 바람을 넣은 건 아닌지.


"이...대로 말입니까?"

"보시는대로."


숙종은 눈짓으로 지도의 어영청 자리에 놓인 김석주金錫胄란 흰돌을 가리켰다. 그 대신 수어청 자리에는 민희閔熙란 이름의 검은돌이 있었다.


수어사 김석주를 어영대장으로 이배하고, 민희를 수어사로 삼는다.


"뭐하는가, 어서 쓰지 않고?"


야속하게도 옆에서 이민철이 시누이처럼 보채었다. 최석정은 씁쓰레히 한숨을 내쉬고 붓을 들어 교지를 각각 써내렸다. 한장은 김석주를 수어사에서 어영대장으로 이배한다는 내용이었고, 또 한장은 민희를 수어사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목을 빼고 기웃기웃 분위기를 살펴보고 두광은 얼른 문가로 달려갔다.


"시명지보施命之寶(왕이 관료를 임명할 때 쓰는 금도장)를 가져오겠나이다."

"음..."


숙종은 제법 눈치껏 제 할 일을 찾아가는 두광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석정은 입안이 영 텁텁했다.


"설마 전하, 신들을 장기말로 생각하시는 건..."

"그럴 리가..."


숙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어쩐지 나른하니 진심이 담기질 않았다. 귀가 밝은 게 탈이었다. 하필이면 통명전 앞에서 신료들이 봉위단자를 들고 떠들어대던 목소리들을 낱낱이 들을 수 있었던 탓에, 숙종은 저들의 속성에 진한 염증을 느끼고 비위가 뒤틀리던 참이었다.


냐옹, 냐옹...


아까부터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에 귀기울이며, 숙종은 입으로도 나직이 고양이 울음을 흉내내었다. 서인이든, 남인이든...신하의 속성이 하나같이 주인 앞에 알량하게 알랑대다 먹이만 넙죽넙죽 받아먹고 등돌리는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며.



그날밤 최석정이 쓴 두장의 교지는 다음날 아침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민희와 김석주는 고신告身(임명교지)을 받기 위해 편전으로 향했다가 동협문 앞에서 딱 마주쳤다. 서로 당파가 다르다 보니 우연히 마주쳐도 반가울 게 없었다.


"..."

"..."


그들은 서로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고개만 끄덕였다. 인사를 하려니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민희가 괜히 오른쪽 겉눈썹을 손톱끝으로 긁으면서 슬그머니 등돌리고 섰다. 다시 인사를 하려니 또 헛기침이 나왔다. 그들은 서로 탐탁지 않은 눈길로 흘끔흘끔 흘겨보았다.


김석주가 어깨를 으쓱해보이면서 먼저 동협문으로 들어서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민희는 고개를 거만하게 끄덕이곤 먼저 안으로 동협문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뒤로 김석주도 그 육중한 거구로 느릿느릿 뒤따랐다.


동협문 안으로 들어서서 행각을 지나면서도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앞장서서 걷는 민희가 힐끔 두눈을 굴려 등뒤의 김석주를 살피려고 하였지만, 햇볕을 가리는 지붕 아래라 시야가 살짝 좁아진 느낌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틀어서 김석주를 돌아보았다.


"이 민희를 수어사로, 수어사 겸 병판은 어영청으로...? 이거 혹시 병판대감의 입김인 게요?"

"제가 입김을 넣었으면 대감을 수어사로 천거하진 않았지요."

"끔!"


민희는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수어사 김석주가 어영대장으로, 김석주가 있던 수어사 자리는 민희 자신이...머릿속으로 돌리고 돌리다, 사모놀이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김석주를 앞질러서 행각을 통과하여 편전에 당도한 민희는 무슨 정신으로 교지를 받는 지도 몰랐다. 정신이 들고 보니 어느 틈에 자신이 두손에 교지를 부여잡고 편전을 나서는 참이었다.


행각의 신도로 발을 내딛어 몇걸음 떼다가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어 허겁지겁 고신을 펼쳐보았다. 붉은 시명지보가 찍힌 종이엔 단아한 서체로 예조판서인 자신을 수어사를 겸하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거...도승지 서체가 아닌데?"

"그러네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김석주의 음성에 민희는 입술을 삐죽이곤 다시 자세히 고신을 들여다 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서체인데?"

"직속 하관의 서체도 몰라보십니까? 평소에 수본手本(상관에게 보고하는 문서)도 안 보셨나?"


여지없이 등뒤에서 또 김석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올 때 처럼 갈 때도 뒤에서 김석주가 걸어오는 모양이었다. 민희는 짜증이 나서 휙 뒤돌아보려다가 두눈을 깜빡이며 다시금 교지를 확인해보곤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런! 꺽정이 글씨잖아!"


김석주가 씨익 웃었다.


"이제 알아보십니까!"

"아 진짜! 자자손손 대를 물려줄 내 귀한 교지를 왜 꺽정이가 썼냐고!"

"최석정이 수찬, 아니 교리니까요."

"그러니까 왜! 승지들을 냅두고 교리한테 시키시냐고!"

"지제교는 교리도 겸하니까요."

"아 내 말은...!"


평소에도 말 한마디 제대로 안 섞는 사이인데다 피차 짜증이 나 있으니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서로 긴말하지 않고 알맹이만 쏙쏙 꼬집어 말하다 보니 오히려 동문서답만 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허적의 냉소적인 음성이 음성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전하께선 승냥이 같은 승지들보다 미자하彌子瑕 같은 교리가 더 편하고 좋은가 보지."

"..."

"인물이 잘난 탓에 위衛왕의 총애를 받으며 무소불위의 특혜를 누리다가, 늙어 인물이 시든 뒤론 오히려 왕의 눈밖에 나서 목이 잘려나간, 그, 미자하."


민희가 놀라서 앞을 쳐다보니 허적, 권대운, 홍우원, 민점과 우부승지가 어느 틈에 줄이어 동협문을 통과하여 이쪽으로 걸어오는 참이었다. 똑같은 행각지붕 아래, 똑같은 우측 신도 위로. 민희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선 허적은 민희의 어깨너머로 시꺼먼 그림자처럼 보이는 김석주의 얼굴을 흘낏 노려보며 말하였다.


"전하께 청대를 하려고."


워낙 용모가 아름다운 덕에 무슨 짓을 해도 위왕에게 용서를 받았다던 그 미소년 미자하. 왕의 총애만 믿고, 왕의 수레를 타고 아픈 모친을 만나러 가도고, 맛있다며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왕에게 건네기까지 한 그 불초한 미자하. 하지만 나이가 들어 그 외모가 시들자, 위왕의 총애도 시들어 참형이 내렸다던 그 불쌍한 미자하.


그 미자하에 최석정을 비유하며, 허적 스스로도 정말로 그리 믿고 싶어졌다. 그리고 듣는 민희도, 홍우원도.


"하긴, 전하께오서 저 최석정을 미자하로 만드실지도..."


민희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위험한 발언인데도, 그들은 최석정을 미자하와 같은 운명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허적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좌중을 둘러보다 이조판서 홍우원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전하께서 자네의 상소는 들어주신 셈인가?"

"끝내 어영청은 김석주에게 맡기셨지만요."


홍우원도 씁쓰레히 입맛을 다시며 답하였다. 이것으로 김익훈을 왕의 옆에 붙여두진 않게 되었으니 절반의 소득인 셈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교지를 쓴 게 최석정이라니. 얼마든지 왕이 서인들을 끌어쓸 때 최석정이 낼름 교지를 받아쓰는 생각만 해도 입맛이 썼다. 최석정이라고 김석주를 어영대장으로 명하는 교지를 받아쓰고 싶었겠냐마는.


"그리고, 최석정도 아직 목이 붙어있고 말입니다."

"..."

"벌써 한달, 두달...이러다 한철이 가겠으이."


허적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덧 목줄기를 휘감는 바람이 뜨뜻해졌다. 행각에 서서 돌아보면, 담장너머로 불긋한 빛깔을 내비치던 복숭아꽃나무들이 어느덧 푸릇해지는 참이었다. 최석정이 감히 그 고약한 상소를 올린 때가 윤3월 초여드레, 그런데 지금은 겨드랑이에 쉽게 땀이 차는 느낌이었다. 윤3월 말엽이니...예년 같았으면 사월 중하순이나 말엽은 되었으리라.


"벌써 사월인가..."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름을 낼름 받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입맛을 다시면서 히죽 웃는 민점의 너스레에 허적이 인상을 쓰며 마뜩치 않은 눈길을 던졌다.


"자넨 머릿속에 월름 생각만 들어찼나?"

"살기 위해 먹는 것이오라...."


민점이 뻘쭘하니 답하였다. 늘 그렇듯이 1월, 4월 ,7월, 10월이면 광흥창에서 품계별로 월름이 나온다. 정1품은 한 분기에 쌀 10석 정도로, 정9품은 겨우 명주 한필이나 살 만한 박봉으로.


하지만 거느린 식솔과 노비가 많은 재상은 재상대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말단은 말단대로, 성에 안 찰 만큼 빠듯했다. 특히나 당장 월름이 나오는 달은 세상을 얻은 것처럼 풍요로운 기분이 되었다가도, 월름이 가까워질 수록 쌀독은 바닥나고 궁핍에 시달려서, 다시 월름을 기다리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을,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었다고 핀잔하는 허적이 민점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백호공도 월름이 빠듯할테니 십시일반으로 좀 보태어..."

"..."

"백호공이 어서 대사헌으로 복귀를 하셔야 광흥창에서 월름도 제대로 받아갈텐데...아니...관리도 사람이고, 정말 월름은 중요한 것이니 만큼...백호공도 도로 대사헌으로 복귀할 것이고..."

"..."


아우가 허적에게 면박을 당하고 버벅이며 둘러대었지만, 오히려 허적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민희는 괜히 자신이 얼굴이 뜨뜻하여 헛기침을 하였다.


"험, 닷새 후면 상평통보가 통행되지요."

"확실히 형이 낫군."

"..."


물론 형 만한 아우 없다는 말도, 형이 낫다는 말도, 민점에겐 듣기 좋은 소린 아니었다. 하지만 민희에겐 거북하긴 하였지만 듣기 싫은 소리도 아니었다.


"상평통보...저자가 좀 걸릴 뿐이지..."


마침 청단령을 입고 이제 막 선정문으로 들어서는 최석정을 보고 허적이 신료들에게 눈짓으로 가리켰다.


행각 기둥 사이를 솔솔 맴도는 바람결이 그의 흰 수염을 간질였다. 하지만 간지러운 건 허적의 머릿속이었다. 여기저기서 어서 최석정을 찍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서인들이 언제고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자이니, 품에 안으면 오히려 그 불이 타버릴 것이라고. 그러니 그 불씨를 젖은 모래로 파묻어야 한다고. 남인들에겐 목엣가시이니, 삼키면 오히려 그 목이 찢어져버릴 것이라고. 그러니 그 가시를 짓이겨서 내다버려야 한다고.



"민희를 우의정에 제수한다."

"목내선을 예조판서로 삼는다."

"행行 부호군 윤휴를 대사헌에 제수한다."


닷새가 눈 깜짝할 새에 흐르더니, 관료들의 보직도 변동했다. 공석인 우의정은 예조판서 민희가, 예조판서는 목내선이, 그리고 오정위가 그만둔 대사헌은 윤휴가 돌아와서 맡았다. 하지만 교지를 받는 윤휴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최석정을 찍어내려다 괜히 자신의 체면만 깎인 셈이었다.


"하하, 거 보십시오. 대감네들, 월름은 중요한 거라니까요."


고신을 받아들고 뻘쭘하니 빈청으로 들어서는 윤휴를 보고 민점이 허적과 홍우원에게 상체를 낮추어 속삭였다.


민점은 자신의 반름기頒廩記(녹봉표)를 들여다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쌀 10석 등의 목록이 적힌 것을 보니 그저 흐뭇했다. 한번 월름을 받으면 사실 자신의 식솔과 노비는 물론 4촌, 8촌 이내의 일가친척에게도 퍼주어야 했다. 광흥창에서 월름을 타오는 즉시, 손에 알곡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손샅으로 흘려보내는 게 많았어도, 당장 뱃속이 두둑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

"..."


허적이 냉랭한 얼굴을 하였지만 사실 빈청에 앉은 민희도, 홍우원도, 권대운도 은근슬쩍 고개가 끄덕여지긴 하였다. 아무리 허적이 민점의 말을 무시해보았자, 허적 역시 사돈, 팔촌, 십육촌은 물론 인근의 지인들까지 챙겨야 하다보니 정작 누구보다 월름 날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빈청 서탁 밑으로 슬그머니 손을 내려서 자신들의 반름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그럭저럭 모든 게 자리를 잡고, 혹은 제자리를 찾고, 그렇게 일단락 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남인들의 눈엣가시인 최석정은 그대로였다. 편전에 들어설 때도, 편전을 나설 때도 최석정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왜 옥좌에 앉은 왕의 뒤에서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는 내관들의 얼굴에 최석정의 얼굴이 겹쳐지는지. .



"김수항金壽恒을 양이量移(변방으로 귀양보낸 죄인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겨줌)하라!"


하필이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에, 왕이 느닷없는 하교를 내렸다. 조정은 또 한번 발칵 뒤집혔다. 당장 승정원의 모든 승지들이 교지를 받아쓰지 않고, 왕에게 간쟁했다. 승지들이 물러간 다음에는, 또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서 환수를 청하였다. 빈청에선 3공 6경과 양사의 수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특히 윤휴로선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최석정을 내치는 문제로 홍역을 치렀는데, 또 갑자기 왕이 김수항을 양이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비방하다가 귀양간 김수항을.


"양이? 양이?"

"누구 좋으라고."


윤휴가 대사헌으로 있는 한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권해의 뒤를 이어 민종도가 대사간으로 있는 한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남인이 사헌부와 사간원을 장악한 지금은 결코 용납되지 않을 일이었다.


"이게 다 최석정 탓입니다."

"..."

"꺽정이 한 마리 아직 잡지 못한 탓이라니까요."

"그 애송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하긴, 전하께서 그 자에게 자꾸 현혹되는 것 같긴 한데..."

"남구만이도 부호군이 되어 녹봉을 받아가지 않소."

"개성유수 남용익을 파직하라고 우리들이 사뢰었을 때도 전하께서 듣지 않으셨지."

"..."

"이게 다 최석정 탓이래도요."


최석정으로 시작해서, 최석정으로 끝나는 대신들의 말을 들으며 윤휴의 얼굴이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신이 대사헌으로 복귀하지 않았으면, 남구만과 똑같이 행 부호군으로서 녹봉을 받을 뻔하였다. 도대체 최석정의 손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이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이 이렇게까지 감쌀 수록, 기필코 찍어내야겠다는 의지만 더욱 시퍼렇게 갈고 닦일 뿐이었다. 정말로, 이게 다 최석정 탓이다.


"양사에서 최석정을 너무 느슨하게 풀어놓은 게 아닌가?"


동벽에서 상석에 앉은 권대운의 핀잔에 윤휴와 민종도가 인상을 쓰고 돌아보았다.


"무슨 소립니까? 우린 계속 최석정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무려 아홉차례나! 벌써 달포가 넘도록!"

"저도 뭐 새로 대사간을 맡아서 결코 좌시하진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북벽에 앉은 허적 역시 차갑게 턱짓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대청이나 가시게나."

"..."

"..."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윤휴와 민종도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빈청을 나갔다. 권대운과 민희는 물론, 홍우원, 민점, 목래선 등이 어느덧 입술이 바짝 말라붙은 것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고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면서 허적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허적은 입을 꾹 다물고 한참을 어두운 기색으로 허공을 보다가, 한참 후에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김수항의 양이는 전하께서 환수하실 걸세..."


민점이 두눈을 뎅그렇게 떴다.


"예? 그럼 굳이..."

"물론 정원(승정원의 준말)과 양사가 모두 들고 일어나야지만."

"예?"

"전하께선 일부러 우리에게 먹이를 던져주신 거네. 한발 물러서시는 척, 김수항까지는 양보한다. 하지만 최석정은 놔둬라..."

"..."

"그래도 전하의 장단에 맞춰는 드려야겠지."


허적은 그자리에서 가만히 일어섰다. 하지만 그 눈빛은 마냥 맥없지는 않았다. 왕이 지키려고 하는 것이 최석정이라는, 그 윤곽이 뚜렷해질 수록 더욱 묵과할 수가 없었다. 될성 부른 떡잎은 싹수부터 밟아놓으랬다. 당연히 김수항의 이배도 막고, 김수흥의 서용도 막고, 최석정의 언로도 막고, 그렇게 원천봉쇄해서 서인들이 발을 디딜 틈새도 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승정원부터, 사헌부, 사간원, 그리고 삼공, 또 육경의 순서대로 차례대로 왕을 청대請對(왕에게 알현을 청하여 만나다)하여 김수항에 대한 환수를 성사시켰다.


물론 허적으로선 이미 예상한 일이라 사실 통쾌하거나 흡족하지도 않았다. 편전을 나서서 행각에 진입하는 그들의 눈빛이 더욱 침울해졌다.


"고작 꺽정이 한 마리 못 잡아서..."


그러는 그들의 눈앞에, 하필이면 또 최석정이 행각 우측 신도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빗발은 더욱 거세져서, 최석정은 입모笠帽(갈모. 비올 때 접었다 폈다 하여 머리에 씌우는 모자)를 접으며 사모와 어깨죽지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참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나마 금천교나 옥천교 신도에서 마주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만. 행각지붕 아래에서 최석정을 딱 마주쳐버린 이상, 그들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최석정은 기껏 비를 피해 행각신도로 걸어들어왔더라도, 자신들을 피해 길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어도를 밟을 수 없는 만큼, 비가 요란하게 퍼붓는 저 뜨락으로.


최석정은 행각지붕 아래 동쪽 신도로 걸어오다 앞길을 가로막은 허적 일파를 목도하고 얼굴이 굳어졌다. 하필이면, 비 오는 날 행각 아래 신도에서 마주치다니. 그는 몇걸음 내딛지 않았기에 그대로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먼저 지나가게 하고 자신은 나중에 지나가면 되었다. 그렇게 최석정은 온화한 얼굴로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일부러 자신을 골탕먹일 심산인지 저들은 그대로 행각지붕 아래에서 꼼짝도 하질 않았다. 오히려 단단히 벼르듯이 또 비웃듯이 그대로 버티는 참이었다.


결국 최석정은 한숨을 조용히 흘리고서 다시 행각 동쪽신도를 곧장 걸어나갔다. 그는 맨 앞 허적의 앞에서 입모를 깊이 눌러쓰며 걸음을 틀어 뜨락으로 내려섰다. 하필이면 그가 아끼는 청단령에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사모의 솔기를 따라 빗물이 눈가로 흘러들어 눈물처럼 보여 더욱 꼴 사나웠지만.


대놓고 성질을 부리는 자신도 아니었지만, 숨겨놓고 기질을 죽이는 자신도 아니었기에, 최석정은 허적의 곁에 스치듯이 귓속말로 지적했다.


"다닐행, 복도랑, 행랑行廊은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만."

"피할회, 복도랑, 회랑回廊이라고도 불리지. 허니 알아서 피해가게나."


괘씸하게도 허적 자신에게 훈계질이라니. 허적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응수했다. 최석정은 한치의 꿇림도 없이 선정전 청기와 지붕에 눈길을 못박고서 답하였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렇게 피해서도 갑니다만. 대감들은 지나가지도, 피해가지도 않았으니, 아쉽습니다."

"..."


고약하게도 한마디도 지지 않는 최석정이었다. 허적은 치를 떨면서도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하였다. 나이를 먹으니 이젠 순발력이 떨어져서, 젊은놈에게도 당해내지 못하나 싶었다. 물론 젊은놈이 하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한 놈이었으니. 그래서 더 밉살스런 놈이었다. 아들 허견이 장희재를 시켜 처치하려고 한 심정이 이해될 정도였다.


"저, 저...시건방진 놈이. 지가 뭐라고."

"전하께서 저놈을 너무 키우셨어."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들어!"

"에라이 송시열 같은 놈아!"


신료들의 손가락질이 등줄기를 후벼파는 것을 느끼면서, 햇살을 가둬버린 빗발 속을 최석정은 막막해진 심정으로 걸어나갔다. 편전까지 겨우 열두걸음이나 남았을까. 하지만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힘껏 허적에게 맞서보았지만, 실컷 피해가는 꼴이라니.


작가의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0.18 17:03
    No. 1

    최석정에게 집중 포화가 쏟아지네요.
    정치판에서 머리 싸움이란게 저 당시에도 저토록 골치아프고 미묘한거 보면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의 숙종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끊임없이 신하들과 마찰을 빚었는데
    지금 작중 상황쯤 되면 보통 사람들은 매너리즘 혹은 허무감에 빠져서
    '포기하면 편해요' 신공을 발휘할 것 같은데...
    정말 의지의 숙종인가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18 18:03
    No. 2

    사실 저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인데, 저 시대를 조명하다보니 숙종실록, 승정원일기를 뒤져보며 머리에 쥐날 지경입니다. 지금 여당 야당 하는 거랑 비슷하게들 하더라구요. =_= 저 상소문 사건에 대한 숙종의 최석정 감싸기는 실록에도 열여섯 차례라고 적혀 있었으니...의지의 숙종도 맞는 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0.19 12:53
    No. 3

    1 품이 쌀 10석이 월름이에요? 분기당 10석. 나쁘진 않네요. 근데 현대 고위직 월급에 비교하면 정말 작은 감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19 14:43
    No. 4

    2품이라서 연간 40석...분기별로 10석 정도로 설정했구요. 콩도 추가로 있는데 그 부분은 퉁쳐서 적어놓느라고. 국조에는 정승급은 연간 쌀 100석이었다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이후로 대폭 삭감되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이 조선 재정을 바닥낸 거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0.20 10:50
    No. 5

    꺽정이로 시작해서 꺽정이로 마무리되네요

    정말 대단한 숙종에다 또한 대단한 신하들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23 16:21
    No. 6

    예, 실제로 저렇게 최석정 하나 갖고 저 난리들이었으니...실록 보면서 기겁을 했네요. 대단한 고집들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10.20 20:18
    No. 7

    민희가 놀라 쳐다보니 허적이 ....우부승지가▶▶ 우부승지와. 가 자연스럽네요^^

    무편무당. 탕평책의 기초를 숙종이 마련하기 시작해서 영정조때 빛을 발하는 거겠지요?^^
    고양이 두마리는 서인과 남인들...적절한 비유였네요^^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23 16:23
    No. 8

    아, 뒤늦게 봐서...수정했습니다. '허적, ~,~, ~과 우부승지가'로 수정했습니다. 비문 지적 고맙습니다. 탕평책은 숙종의 시행착오가 폐단도 많이 낳았지만, 영조, 정조가 거울 삼아서 고칠 건 고치고, 지킬 건 지키고 해서 더 발전시킨 것 같아요. 고양이 두마리 비유 칭찬도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4 해의 그림자 163 +5 14.02.03 2,362 33 38쪽
163 해의 그림자 162 +5 14.01.30 2,159 34 37쪽
162 해의 그림자 161 +4 14.01.26 2,162 26 40쪽
161 해의 그림자 160 +6 14.01.22 2,411 35 38쪽
160 해의 그림자 159 +5 14.01.18 2,205 31 40쪽
159 해의 그림자 158 +7 14.01.14 2,524 33 39쪽
158 해의 그림자 157 +4 14.01.10 2,097 33 38쪽
157 해의 그림자 156 +4 14.01.06 2,460 30 37쪽
156 해의 그림자 155 +7 14.01.02 3,415 32 38쪽
155 해의 그림자 154 +6 13.12.29 2,490 40 38쪽
154 해의 그림자 153 +4 13.12.25 3,129 35 39쪽
153 해의 그림자 152 +4 13.12.22 2,493 43 35쪽
152 해의 그림자 151 +6 13.12.17 3,968 102 37쪽
151 해의 그림자 150 +5 13.12.13 2,123 36 38쪽
150 해의 그림자 149 +6 13.12.09 1,972 30 38쪽
149 해의 그림자 148 +6 13.12.04 2,107 34 36쪽
148 해의 그림자 147 +8 13.11.29 1,968 35 37쪽
147 해의 그림자 146 +10 13.11.25 2,624 30 37쪽
146 해의 그림자 145 +11 13.11.21 2,296 30 33쪽
145 해의 그림자 144 +5 13.11.16 2,288 33 34쪽
144 해의 그림자 143 +5 13.11.12 2,681 32 31쪽
143 해의 그림자 142 +8 13.11.07 3,089 32 24쪽
142 해의 그림자 141 +6 13.11.05 1,872 37 39쪽
141 해의 그림자 140 +6 13.10.30 2,350 61 38쪽
140 해의 그림자 139 +6 13.10.26 1,975 41 33쪽
139 해의 그림자 138 +6 13.10.23 3,545 33 34쪽
138 해의 그림자 137 +6 13.10.20 3,223 41 34쪽
»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2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