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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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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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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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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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해의 그림자 139

DUMMY

땅거미가 동촌 거리를 드리우자마자, 허견은 민종도와 조현기 등은 물론 그들 휘하의 나장들까지 줄줄이 거느리고 최석정의 집앞에 당도했다.


헌데 대문 앞으로 다가드니 솔가지를 끼운 왼새끼줄, 즉 금줄이 걸려 있었다. 허견은 잔뜩 주름이 잡히도록 콧잔등을 실룩였다.


"웬 금줄?"

"솔가지를 보니 딸인데."


민종도도 눈앞의 뾰족한 솔가지를 살피면서 한마디 하였다. 허견은 어리둥절하여 또 콧잔등을 실룩였다.


"애를...낳았다고?"

"보면 모르나. 하필 처자식을 두고 혼자 도성을 뜨게 생겼군."

"..."


최석정이 소리 소문 없이 딸을 낳았다. 그 사실이 놀라웠다. 옆에서 민종도가 떠드는 소리가 더이상 허견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두손을 펴서 열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달수를 계산해 보았다. 오월, 사월, 윤삼월, 삼월, 이월, 일월, 십이월, 십일월, 시월, 구월...열손가락이 다 접혔다.


"중전이 회임을 한 게 요맘 때인데."


빈주먹을 다시 한손가락씩 펴면서 달수를 또 계산해보았다. 구월, 시월, 십일월, 십이월, 일월, 이월, 삼월, 윤삼월, 사월, 오월...열손가락이 다 펴졌다.


"왜 그러는가?"


조현기가 묻자, 허견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니."


긴말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입가가 뒤틀린 채로 금줄을 쳐다볼 뿐이었다. 뱃속 창자들도 모조리 뒤틀리는 참이었다.


저 금줄이 걸렸다는 것은, 최석정의 처가 아이를 낳은 지 채 삼칠일도 되지 않았다는 의미면서, 그간 조용히 임신 중이었다는 의미였고, 또한 중궁과 거의 동시에 임신한 몸이라는 의미였다. 역시나.


"아이 낳기를 기다려...문외출송을 하신 건가?"


왕비와 최석정의 처가 동시에 임신을 하였다. 그리고 왕비는 태아를 잃었다. 심지어는 또 하나의 딸도 잃었다. 그런데도 최석정의 처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왕은 무려 석달을 계속 물밀듯이 밀려오는 상소들을 반려했다. 눈물겨운 배려였다. 최석정이 쥐도 새도 모르게 딸을 낳았는데도 왕은 알았던 게 분명했다.


헌데 왕이란 자리가, 누구를 배려하는 자리던가? 태생부터 고귀하여 한번도 남을 배려하며 살아오지 않은 왕이, 설마하니 알고 기다리고, 또 버텨준 것인가? 그래도 딸의 출생은 보고 가란 의미로. 그게 말이 되나? 아니 최석정에 관한 한 모든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왕은 송시열에 대해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발언을 하는 자들은 모조리 온몸에서 털을 뽑아서 혹한의 북방에 보내고, 혹은 온몸에 가시를 박아서 폭염의 남쪽으로 보낼 기세였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그렇게 지독하게 벌하였다.


그런 왕이, 최석정 만큼은 처음부터 원찬도 문외출송도 논외로 두었다. 그리고, 최석정의 집앞에 금줄이 걸린 다음에야, 또 이민철이 모친상으로 사직단자를 올린 뒤에야 문외출송을 명하였다.


"하..."


무려 석달 가까이 시달리면서도 왕이 끝내, 최석정이 딸을 낳을 때까지 기다려주다니. 이제 보니 자신이 교서관에 있을 적에도 왕이 이일 저일 시키면서 괴롭힌 것도 최석정에게 각별한 탓이었나 싶었다.


허견이 이를 악무는데 이때 조현기가 담장 쪽으로 돌아가더니 담장너머로 사랑채 앞 섬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섬돌에 최석정의 목화, 태사혜 둘다 있네.."

"아직 안 나갔다?"


허견은 안면근육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나장들에게 명하였다.


"당장 끌어내라 당장."

"..."

"나으리, 저 금줄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기는 좀..."


나장 한명이 어물어물 말하자, 허견이 대뜸 짜증부터 내었다.


"그럼 나오게 해야지!"

"네? 어떻게요?"

"왜 이래? 머리 안 돌아가? 소리를 지르든, 불을 지르든, 저 꺽정이놈이 나오게 하란 말야!"

"하지만..."

"이게 진짜...!"


버럭 성질을 내며 허견이 나장을 걷어찰 기세를 보이자, 조현기는 한발 앞서 나장들에게 차갑게 명하였다.


"이웃들에게 징과 꽹과리를 빌려와서 두드려라. 그러면 아내와 딸을 생각해서라도 최석정이 얼른 행장을 꾸려서 길을 떠날 것이다."

"예..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나장들이 떨떠름히 대답하고 궁시렁거리며 최석정의 이웃집으로 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꽹과리나 징을 잠시만 빌려달라고 말하는 그들의 음성을 들으면서 조현기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나..."

"뭐?"


허견이 조현기를 힐끔 노려보자 민종도도 비웃음 어린 얼굴로 조현기에게 비아냥거렸다.


"하긴 자네도 좀 그럴 거야. 처남은 김석주, 매형은 복선군? 나도 누이가 있으면 서인한테 한다리 걸칠 것을."

"무슨 말을 그렇게..."


조현기가 얼굴이 벌개져서 민종도에게 따지고 들려는데 허견이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비웃었다.


"나는 있지. 그것도 아직 시집 못간 이쁜 누이가. "

"..."


갱 개갱 개갱!


간난여아를 품에 안아보던 최석정은 갑자기 고막을 때리는 꽹과리 소리에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기를 더욱 품에 꼬옥 끌어안은 채로 자신의 양쪽 어깨를 귀에 밀착시켜 고막을 보호했다.


"귀청 떨어지겠네."


오뉴월에도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던 아내 경주이씨가 몸을 뒤치락거렸다. 해산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온몸 뼈마디가 다 벌어져서 손끝 발끝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이런 자신을 놔두고서 지아비가 도성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따라갈 여력도 없었다.


한시라도 더 붙잡아두려고 아기를 품에 안겼더니, 지아비는 품에 안은 아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꾸물대다 졸지에 날벼락을 맞았다.


"얼른 떠나라고 독촉하는 소리 같소."

"아니...어련히 알아서 안 나갈까...참으로 야박합니다."

"그나마 전하께 감사한 노릇이지. 이렇게 태어나는 것도 보고, 또 안아도 보고..."


최석정은 아내의 어깨 옆에 놓인 면수건에 조심조심 아이의 머리를 괴어놓고 눕혀두었다. 이제는 집을 나서야 했다. 자신이 나올 때까지 이 꽹과리 소리는 도무지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기를 눕혀두자마자, 꽹과리 소리에 놀랐는지 얼굴이 벌개져서 응애응애 울어대기 시작했다. 지친 아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최석정은 난처한 얼굴로 다시금 아기를 품에 안아들었다.


"자 착하지..."


아기는 좀처럼 울음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최석정은 난처한 얼굴로 아내를 돌아보았지만, 아내는 그렇게라도 최석정을 좀더 잡아두고 싶었는지, 아니면 몸이 힘들어서 아기를 안을 여력도 없는지, 그저 고개를 돌린 채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웃들의 짜증섞인 고함에 최석정의 등줄기만 화끈거릴 뿐이었다.


"아 왜 이렇게 시끄러!"

"조용히 좀 하지!"

"잠 좀 자자 잠 좀!"

"저 관군들이 내는 소리잖아!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꽹과리 칠 거래!"

"아 빨리 좀 가지! 왜 안나와!"

"우리 애 깼잖아! 아오!"


꽹과리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상황을 파악한 남인계열 선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꽹과리를 들고 나와 최석정의 집앞에서 꽹과리를 요란스레 두들겼다.


하다 못해 귀양의 명이 떨어져도 자유롭게 행장을 꾸려서 성문 근처에서 금부도사나 나장과 조우하는 법인데, 문외출송의 영이 떨어지자마자, 이렇게 집앞에 들이닥쳐 어서 떠나라고 꽹과리를 울려대는 일은 지나치게 야비하고 야멸찬 일이었다.


"아니 어련히 알아서 나갈 일을..."


마침 최석정의 집에 들러본 홍만종이 혀를 찼다. 벌써 최석정의 집앞에 남인들이 여덟명이나 모여들어 꽹과리를 두들겨대는 참이었다. 숫적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 탓에 홍만종 혼자서는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야속한 눈빛으로 소심하게 눈을 흘길 뿐이었다.


그러자 허견은 품속에서 오징어를 하나 꺼내들어 다리를 좍좍 뜯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홍만종에게 툭 내밀었다.


"먹을텐가?"

"..."


홍만종은 허견이 내민 오징어다리를 내려다보곤 입에 고인 침도 삼키지 않고 단박에 거절했다.


"됐소!"

"싫음 말고."


허견은 씹던 오징어다리를 삼키지도 않고 길가에 탁 뱉아버렸다. 홍만종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남의 눈은 신경도 안쓰는지 허견은 나머지 오징어다리를 입안에 넣었다.


홍만종은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가 없었다. 그저 힐끔힐끔 사내의 외양을 쳐다보기만 하고 참을 뿐이었다. 반짝이는 밀화갓끈을 달고, 귀하디 귀한 오징어를 주전부리로 삼아 씹다 버릴 정도의 신분이라면 범상치가 않았다.


불만 있으면 따져보라는 듯이 허견은 코웃음을 치고 더욱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집안의 최석정을 도발했다.


"흥. 꺽정이! 이만 나오라고! 마누라 꺽정일랑 하덜 말고!"

"..."

"이 허견이가 한번씩 들여다볼테니 이만 나가시게나!"

"..."

"뭐야 당신들? 이게 무슨 짓이야?"


소식을 듣고 최석정의 집앞으로 달려온 김지남이 눈을 부랴렸다. 그는 즉시 허견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두눈을 부릅떴다.


"무슨 짓이긴. 남겨질 친구의 식솔을 걱정해서 잘 챙겨줄 터이니 걱정 말고 먼길 떠나라는 손짓이지."

"남의 아내 걱정하지 말고, 댁의 아내나 걱정하시오."

"뭐야? 너 뭐야?"


허견이 눈을 부랴리자 지남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받아쳤다.


"나? 막중이."

"뭐?"

"기억 안나시오? 언젠가도 광통교에서 한번 만났는데. 그때 댁이 도둑으로 몰았던 그 전모, 그 여인의 일행이었는데 말이오."

"..."


허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여인이라면 필시 중전일 터였다. 이놈이 최석정 편을 들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런 놈과 함부로 말을 섞어선 곤란했다. 차라리 자신한테 찍 소리도 못하고 끙끙대는 저 유약하고 병약한 서생 놈이면 모를까.


마침 끼이이 문 열리는 소리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간단한 봇짐을 든 최석정이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허견은 입이 헤벌쭉 벌어져선, 씹던 오징어다리를 뱉고 새로 다리 하나를 입에 물었다. 사실 이런 마른 오징어보다는 말랑말랑한 물오징어가 더 좋았다. 특히나 자신의 별채에서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오징어가.



최석정은 봇짐을 들고 처량히 숭례문 앞에 당도했다. 적막한 밤중에 뒤따르는 사람도 없이, 그나마 김지남과 홍만종이 뒤따르는 참이었다. 이들마저 와주지 않았더라면, 더욱 초라할 뻔하였다. 최석정은 숭례문까지 따라와준 김지남과 홍만종이 고마워서 손으로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이만들 들어가보게나. 이러다 인정人定이 울리겠으이."

"봐주겠지요. 여기 인정人情만 울리면 됩니다."


김지남이 곧바로 호기롭게 받아치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하루에 다섯푼만 가지고 다닌다는 놈이, 그래도 마음씀씀이는 후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최석정은 빙그레 웃었다.


"알았으니 들어가 보시게."

"그냥 내일 새벽에 가시지..."

"당장 나가라고 남인들이 몰려와서 행패 부리는 거 못 봤나?"

"그래도..."

"됐네. 얼른 비워주는 게 마음 편하이."


최석정이 숭례문 앞으로 다가서는데 홍만종이 또 아쉬워서 입을 열었다.


"만정이도 상중만 아니었으면 같이 배웅했을텐데..."

"서종태 그 친구? 뭐, 그 대신 마중은 해주겠지..."

"..."


그때 문앞에 있던 수문장들이 최석정 일행을 향해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더니 마침내 그중 눈이 부리부리한 수문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안나갈 거유?"

"..."


최석정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웃음이 가셨다. 홍만종과 김지남은 기가 차서 그 수문장을 쳐다보았다. 당장 혼쭐을 내고 싶었지만, 늘 왕의 곁을 지키는 두광보다도 더 눈이 튀어나올 것 처럼 생겨서는, 험악하게 노려보니 살짝 무섭기도 했다.


더욱 겁을 줄 요량인지, 수문장은 괜히 등허리에서 칼을 빼어 손끝으로 쓰다듬는 시늉까지 하였다.


"내 칼에 녹이 슬었나..."

"아 팔이야...난 팔에 녹이 슨 것 같으이. 찌뿌둥한 게...어으으!"


한술 더떠, 또 다른 수문장은 아예 옆의 횃불을 들어 기지개를 켜는 척 하면서 최석정과 김지남, 홍만종을 향해 차례로 휘둘렀다.


"성문 닫아야 하니까 얼른 비키시우!"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지남이 욱해서 달려들려 하자, 홍만종이 황급히 팔을 잡았다.


"이보게! 참게나!"


홍만종은 수문장들을 가리켜 지남에게 눈짓했다. 무릇 도성 안팎에서 칼을 차고 다니는 자들은 관군이든 왈짜든 난폭하고 흉폭한 종자들이었다. 조금만 수틀리면 왕실 종친이라도 상관않고 패대기를 치거나 배때기를 쑤시는 자들인데, 괜히 저자들한테 따져봤자 오히려 제 무덤을 파는 격이었다.


"어후 진짜!"


김지남이 욱하는 심정에 수문장을 쏘아보았지만, 말단역관인 자신이나 성균관 유생인 홍만종이나 품계가 바닥이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최석정은 삭탈관직까지 당하여 품계조차 없었다. 그러니 양반도 아닌 것이 자신들에게 함부로 구는 것이 괘씸해도 어찌할 명분도 도리도 없었다.


"들어들 가게나."


최석정은 지남과 만종의 양 어깨에 얹은 손을 내리고 가만히 돌아섰다. 그리고 수문장 앞으로 가서 허리춤의 호패를 내밀었다. 이미 호패는 새로 발급되어 아무런 품계도 벼슬도 없이, 그저 대과 급제기록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최석정이란 이름 석자를 알아보았는지, 수문장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이름을 보여주며 낄낄 웃었다.


"자, 나가시오!"


눈이 왕방울 같은 자가 거친 손길로 최석정의 손등에 탁 호패를 내밀었다. 순간 손등에 이는 고통에 최석정은 살짝 눈밑을 실룩였지만, 이내 꾹 참고 나머지 손으로 호패를 움켜쥐었다.


"..."


순간 최석정은 뒷골에 전율이 일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남인들이든, 병판 김석주든, 얼씨구나 수문장들에게 손을 써둔 느낌이었다. 자신이 오늘 안으로 도성을 나가는지, 나가지 않는지, 호패를 제시할 때 최석정崔錫鼎이란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보고하란 식으로 언질을 넣어둔 모양이었다.


"이봐. 이번에 새 판윤대감, 누군지 모르지? 남가 용자 익자라고, 여기 나으리와 좀 친한 사이인데...지금 개성에서 부지런히 내려오고 계시거든?"


참다 못한 홍만종이 어르듯이 꺼낸 말에 수문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필이면 신임 판윤대감과 친하다니..?


"조심해. 알았어?"


홍만종이 손가락으로 수문장들에게 삿대질을 하였다. 수문장들도 믿는 바가 있어 최석정을 갈구었지만, 새 판윤대감과 친한 사이라면 자신들도 곧 똑같이 당할 판이었다. 이런저런 치안 문제를 빌미로 들들 볶아댈테니.


"설마..."

"여기 나으리 은사님이 남가 구자 만자로 그분 족형이시거든? 알아들었어?"

"..."

"정말...이시우?"


수문장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곤 한풀 꺾인 기세로 최석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믿는 바가 있는지 그다지 공손하진 않았다. 역시 저들에게 바람을 넣은 이는 정2품 판윤보디도 방귀가 대단한 실력자일 터였다. 최석정은 쓴웃음으로 답하였다.


"..."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미 해는 떨어졌고, 그 대신 북극성이 머리 위를 비추었다. 자신이 도성으로 다시 못돌아올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송시열이 조부 최명길을 위해 비문을 고쳐주긴 할까,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자신도 모르게 내심 바랐던가. 쓴웃음도 나왔다.


걸음을 내딛어 숭례문 홍예석 아래로 들어선 순간,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용의 비늘 같은 것이 언뜻 최석정의 시야를 스쳤다. 하지만 환한 대낮이 아니어서인지, 그 실체를 제대로 확인하긴 어려웠다. 나중에 다시 돌아올 때 느긋하게 살펴보면 되겠거니...그렇게 그는 태평하게 생각하고 성문을 빠져나갔다.


못내 아쉬워하는 김지남과 홍만종의 음성이 그 등뒤로 들려왔다.


"건강 잘 챙기세요 나으리!"

"일간 찾아뵙겠습니다!"

"..."


최석정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엔 바깥쪽에서 성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최석정을 향해 눈을 부랴렸다. 얼른 나오지 않고 뭐하냐는 눈짓이었다.


"판윤대감이 스승의 친척이면 단가. 임금 스승이라도 하나도 안 무섭구만!"


어쩐지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이었지만 최석정은 빙그레 웃었다.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려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며칠만 있으면 유월이고, 친우들이 귀양에서 풀려나올 터였고, 스승도 부호군으로 대기 중이었다. 왕이 탕평에 뜻을 두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추錘가 되어줄 든든한 원군들이 있으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할 만큼 하였으니, 그들에게 뒤를 맡기고 느긋하게 도성 밖에 나가서 봉안역에서 이민철과 합류하여 천문이든 뭐든 연구하면 그만이었다.


"기다렸습니다."


최석정이 숭례문을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하필이면 등뒤에서 갑작스런 음성이 최석정을 반겼다.


서종태? 하지만 그 음성보다도 훨씬 앳띤 음성이었다. 최석정은 목소리의 정체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최석정의 눈앞에서, 김석하가 자신이 만든 문제를 풀어내어 완성한 구궁진을 제 가슴팍에 대고 달랑달랑 들어보이고서 씨익 웃었다.


"가시지요."

"역시나...풀었군."


최석정은 입맛이 썼다. 문제를 내면서도 몇몇은 오늘 내로 풀겠거니 하였다. 윤휴와 허목, 그리고 이놈이면 풀어내지 않을까 했더니, 정말로 풀어왔다.


"역시나는 아니지만...운이 좋았습니다."

"..."

"어서 가시지요."


김석하의 독촉에, 최석정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소 뒷발에 쥐 밟았다 이건가?


"어떻게 풀었나."

"맹귀우목盲龜遇木이지요."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났다...최석정은 기가 차서 김석하의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누가 훈수를 두었다는 건지. 아니면 헤매다가 우연히 실마리를 얻었다는 건지. 최석정의 입가가 실룩였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지만, 이제라도 말을 바꿔버려?


어차피 자신은 구궁진을 풀면, 천문연구에 합류시키겠다고 직접 약속한 적이 없었다. 그저 왕이 속단하여 김석하를 받아들여준 거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미 왕이 이놈을 자신에게 붙였으니, 이제와서 물릴 수도 없었다.


"..."


말없이 자신을 쏘아보는 최석정의 눈초리에, 김석하는 빙그레 웃었다. 숭례문 곳곳에 세워진 횃불 탓인지, 그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반짝였다.



"이런 미친 놈을 봤나...이 좋은 머리로 한우물을 파면 송시열을 뛰어넘을 놈이, 삼천포로 빠져 헛물을 켜다니?"


인달방 갑제에서, 허적은 밤늦도록 서안 위 등잔에 불을 밝히고서 최석정의 문제를 들여다보며 붓을 놀리는 참이었다. 헌데 아무리 풀고 또 풀어도 자꾸만 막혀서 짜증이 샘솟더니, 손에 먹물만 덕지덕지 묻어버렸다. 이제는 눈이 뻑뻑하고 침침하여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벌써 이게 몇시진 째인지.


조선이 아무리 오로지 주자학만 인정하는 나라였어도, 주역의 상수학象數學 같은 숫자놀음에 빠진 학자들은 은근히 많았다. 자기네 남인은 물론 서인들 중에도 허다했다. 애초에 화담선생 서경덕이 상수학의 토대를 만들고, 토정 이지함이 그 상수학을 이어받아 발전시킨데다, 주역에 빠진 이들은 서인이건 남인이건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숫자놀음에 몰두하였으니.


하지만 나대용羅大用처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그 유명한 귀선龜船(거북선), 귀갑에 창을 빽빽하게 꽂은 창선錚船, 빠르게 바다를 질주하는 해추선海鰌船 등 나라에 크게 쓰임이 있는 군함을 만들어낼 것도 아니고. 제갈공명처럼 팔진도 등 신기묘산의 진법을 궁리해낼 것도 아니고. 도대체 쓸 데 없는 숫자놀음이나 과시하다니.


그런데 그렇게 최석정을 비웃고 욕해도,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자신은 누구보다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전전대의 효종이 김육의 열의에 힙입어, 광해군에 이어 대동법을 재개하고, 또 김육이 죽은 이후로도 전대의 현종이 또 확장시키고, 지금의 주상이 대동법을 영남지방까지 확장시킨 데엔 자신의 공로가 혁혁했다. 자신이 없었으면, 가능하기나 하였을까.


"대동법...씨는 광해가 뿌리고, 줄기는 김육이 키웠지만, 결실을 맺은 것은 바로 나..."


비록 당저 앞에서는 모든 걸 왕의 공덕으로 돌렸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해낸 일이었다. 지금 장희재가 음으로, 김석주가 양으로 추진하는 상평통보 또한 산전수전 다 겪고 실무에 훤한 자신의 안목으로 전체적인 설계를 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순풍에 돛달고서 질주할 수나 있을까.


"상평통보...그 돛을 달아준 것도 바로 나..."


하지만, 어쩐지 속은 개운해지질 않았다. 괜히 아까운 인재를 내쫓았다는 자책감이, 이제 와서 자신의 뇌리를 잠식해서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아들놈 견이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더라면, 하다 못해 후야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더라면...그는 괜한 불안과 회한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안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결국 방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어젖히고선, 이미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어느덧 장마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여봐..."


목청을 돋우어 하인들을 부르려는 순간, 맹렬한 속도로 별채 쪽으로 달려가는 검붉은 그림자가 비껴갔다. 그쪽은...아들 견이가 곧잘 이용하는 별채와 대장간 방향이었다.


고기도 매일 먹으면 질린다며, 곧잘 견이가 남의 눈을 피해 마음이 맞는 계집들을 데려와서 따로 정분을 나누는 곳이기도 했다. 친압으로, 혹은 강압으로.


그리하여 별채가 있는 쪽은 유난히 담장도 높게 축조해 두었다. 그런데, 그 별채 쪽으로 내달리는 검붉은 그림자는...어쩐지 빛깔 만으로는 자신이 숨겨둔 아들, 허후 같았다.


"후야?"


혹시나 싶어 불러보았지만, 이미 그림자는 들짐승처럼 날래게 별채 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허적은 혹시나 싶어서 조용히 신을 신고 사랑채 섬돌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신도 저벅저벅 사랑채로 향하였다. 경황이 없다 보니 우산이든 갈모든 챙길 틈도 없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서 비 좀 맞는 게 대수도 아니어서, 그는 검붉은 그림자를 뒤쫓는 데에 전념했다.


그런데 별채에 이르자, 검붉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어린 계집의 비명 섞인 울음이 허적의 귀에 먼저 들어왔다. 스물? 스물은 되나? 앳띤 음성의 계집이 사내의 품에 안겨 밀어내려 애를 쓰는 그림자가 장지문에 비쳤다.


"시, 싫어!"

"으흐...또냐?"

"싫어, 싫단 말이야...집에...보내줘요...!"

"흐흥...싫다면서 네 절구는 왜 이리 촉촉하냐? 이젠 내 방망이가 기다려지나?"

"아니, 아니 나는.."

"흐응...이쯤인가?"

"어, 어무니!"


숨넘어갈 듯한 계집의 비명이 다시금 터져나왔다. 문 옆에 바짝 달라붙은 검붉은 그림자는 두손을 불끈 움켜쥐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는 당장 뛰쳐들어가서 계집을 구해낼 심산인지, 문고리를 힘껏 비틀어 잡았다.


"후야..."


허적이 나직하게 부르자, 검붉은 그림자는 움찔해서 동작을 멈추었다. 공주가 죽고 진홍이 통명전 연못으로 숨어들어 홀로 울던 그날, 중전은 결코 통명전을 빠져나가지 않았을 거라고, 목을 내어놓겠다고 장담했던 그 금군이었다.


그는, 울분으로 심장과 두손을 덜덜 떨면서, 하필이면 이때 뜨락으로 모습을 드러낸 허적을 보았다.


"나으리..."

"따라오너라."


어린 계집을 구하는 일보다도, 당장 허후가 이곳 별채로 숨어들어 형의 엽색행각을 염탐한 사실에 허적은 더 관심이 있었다. 견이가 중궁전 애기나인한테 개차반으로 각인된 내막을 알아오라 이른 지가 언젠데, 여태 소식이 없더니 여기서 제 형을 염탐하는 꼬락서니라니.


게다가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대화를 들어봐도, 이미 계집은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아들에게 더럽혀진 몸이었다. 한번 지나간 배를 두번 지나간들 누가 알까. 허적은 냉소적인 생각으로, 더는 아들 허견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저 허후를 문간에서 떼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따라오래도!"

"..."


허후는 갈팡질팡하여 문고리를 꼬물거리다가 힘없이 손을 놓았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낀 듯이 문에 비친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어린 계집이 발버둥을 치는 그림자 위로, 사내의 그림자가 포개지는 참이었다.


새된 비명이 흘러나오다가, 점차 사내의 달뜬 숨소리와 뒤섞이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결국 허둥지둥 발걸음을 떼어 걸음발이 미끌어질 듯 휘청이며 허적의 뒤를 따랐다.


"말해보거라. 네가 왜 숨어서 견이를 지켜본 게냐?"

"..."


허적은 으슥한 우물가로 허후를 데려와서 추궁했다. 그 눈빛이 몹시도 매서웠다. 허후는 어쩐지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고 대답을 망설였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도저히 진실을 내뱉을 자신이 없었다.


"어서! 어서 말하지 못할까!"


온몸이 요동칠 정도로 허적이 온힘을 다해 다그치자, 허후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아랫입술과 잇몸사이로 부스럼이라도 난 것처럼, 그 상태로 매운 산초열매를 한입 가득 베어문 것처럼,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후야!"

"도련님이, 중전마마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허후는 채 눈을 뜨기도 전에 입을 열어 단숨에 말해치웠다. 허적이 눈시울과 콧잔등이 꿈틀거렸다. 도대체 이놈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중전마마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 하였다니?


허적은 별채에 잡혀온 어린 계집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 아이가 중전의 나인이라도 되나? 아니다. 저 상황이라면 나인은 어미와 할미를 찾지 않고 중궁을 찾았을 터였다. 하지만 저 계집은 너무도 순박하게 덜덜 떨기만 하였다. 그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


허적의 두눈에 경악이 어렸다. 중궁이 한때 몰래 궁을 빠져나간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천한 계집이 별채에 갇혀 성노리개로 능욕을 당하는 현실...허적의 동공이 무참하게 흔들렸다.


"너 설마...별채의 저 계집처럼, 견이놈이 중전마마를 납치해서 욕보이려 했다는...얘길 하는 거냐? 그날...중전마마께서 사라진 그날?"

"미수로 그쳤지만요."


허후의 쓴웃음에 허적은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에 동공이 하얗게 비었다. 심장이 쿵하니 내려앉았다. 도저히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심장이 후들거리고, 온몸을 휘도는 핏줄이 거덜난 느낌이었다. 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산송장처럼 허후를 쳐다보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말도 안돼...지놈이 미쳤다고..."

"당시 전모를 쓰고 계시어, 천것인 줄 아신 모양입니다."

"..."


허적은 끔찍한 공포가 목청을 꽉 막아버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이러할까.


"그나마 다행인 건, 중전께서도, 전하께서도...무슨 일이 생길 뻔한 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허후의 말은 분명히 희망적인데도, 허적은 더 들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허적은 무릎이 꺾인 듯이 뒷걸음을 치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는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도 않는 그를, 허후가 황급히 달려들어 양쪽 팔꿈치를 들어올려 부축하며 부지런히 설명했다.


"정말로 두분은 모르십니다. 그저 도둑이라 의심하고, 행패를 부린 걸로만 생각하십니다. 둘중 하나라도 아셨으면, 지금쯤 도련님은 목이 붙어있지 못했을 겁니다."

"..."


견이 이놈! 이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허적은 피라도 토할 것처럼 속으로 아들의 이름을 목이 찢어져라 소리쳐 불렀다. 아무리 짐승 같은 짓을 하고 다녀도, 아들이라는 이유로 감싸안았다. 아니, 아들이 필요한 건 뮛이든 다 해주었다. 심지어는 어느 양가의 귀한 처자가 미색이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저 미천한 아들의 첩으로 삼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삼백리 밖까지 찾아가서 혼담을 넣어 구슬렸을 정도로.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 미친 놈이, 양천허씨 문중에 멸문지화를 안길 놈이라니.


그는 다 썩고 삭은 윗니로, 입술에 피가 나도록 힘껏 깨물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빗물이 온통 흥건하게 고여버린 땅바닥에 젖어서 축축한 기운이 엉덩이를, 허벅지를, 그리고 무릎까지 침투해서 온몸이 시리도록 기어오르는데도, 그는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어둠 속의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정신없이 흔들렸다.


모른다고? 모를 리가 없었다.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허적은 허후를 계속해서 다그쳤다.


"자세히, 자세히 말해보거라. 하나도 빠짐 없이."

"..."


허후는 다시금 입안 가득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입안이 괜히 매웠다. 불이라도 지른 것만 같았다. 눈시울도 홧홧하니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차가운 비를 맞아도 도저히 식지가 않았다.


당장 별채에서 허견이 벌이는 현장을 목도하자마자, 그의 머릿속은 하마터면 중궁이 겪을 뻔한 참변으로, 그리고 자신의 가문이 당할 뻔한 참화로 가득찼다.


저놈은...살려둬선 안될 놈이었다. 아무리 같은 핏줄이라고, 형이라고 지금껏 백번 양보하고 떠받들었는데도, 이젠 아니었다.


"맙소사..."


허적은 다시금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사납게 후들거렸다.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직은 왕과 왕비가 철 모르고 물정 몰라서, 그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 보질 못한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뒤늦게야 깨단할 것이었다. 그날 그 사건의 끔찍한 이면을.


그날이 오면, 그때가 되면, 과연 그들이 용서할까? 왕은 둘째치더라도, 왕비는 용납할까? 같은 하늘 아래 기필코, 기어코, 아들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들 터였다. 아들 뿐만이 아니라 허적 자신도, 양천허씨의 '허'자 조차 궐안에 들이지 않을 터였다.


그럴 수는 없어. 그래서는 안돼. 허적은 속으로 치를 떨며 생각했다. 한순간에 뒤엉킨 머릿속을 그는 재빠르게 한가닥한가닥 풀어나갔다.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할 줄 아는 그였다. 중궁이 자신들의 존재를 지우기 전에, 자신들이 중궁의 존재를 지워야만 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할까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재우쳐 묻는 후의 음성이 떨렸다. 허적은 허공을 가로질러 어딘가를 찌르는 듯한 눈길로, 음산하고 스산하게 답하였다.


"지워지기 전에, 먼저 지워야겠지."

"네?"


당황해서 되묻는 후의 음성을 듣고, 허적은 웃음조차 지운 얼굴로 후를 돌아보았다.


"너부터, 중전에게 품은 연모의 정을 지우거라."

"...."


허후는 흠칫 놀라 허적을 돌아보았다. 허적의 눈엔 질책과 연민의 빛이 은근히 숨어 있었다.


핏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꽃밭의 꽃도 꺾어주고 진흙 속의 진주도 캐다 줄 수 있을 만큼 유별난 자식사랑의 소유자였지만, 절벽의 꽃은 건드리지 않는 주의였다. 그래서 더 허후가 딱하였고 짠하였다.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

"계집에겐 관심도 없던 놈이..."

"..."

"참! 인간사 참 우습지. 내 피를 이어받은 두 아들이, 한 계집에게 차례로 홀리다니."

"..."

"지워야 한다. 지워지기 전에, 우리가 지워야 한다."

"나으리..."


허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비가 자신의 심장을 쥐어뜯으려 하는 것만 같았다. 지워야 한다니. 지워지기 전에 지워야 한다니. 지워진다니. 아비의 결정은 사실 당연했다. 너무도 당연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아들들을 둘다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비는 차라리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의 존재를 야금야금 지워나갈 것이었다.


"네 손에 피를 묻히진 않을 게야. 이 애비는 그리 모질지 못해서 말이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지만, 속엔 피를 묻히셨지요. 허후는 속엣말을 힘겹게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워지기 전에 지워야 한다니...아비는 결코 어수룩하게도, 허술하게도 손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운다는 표현을 썼을 터였다. 살금살금, 야금야금, 중궁의 피를 말려 지울 것만 같았다.


"가서 계집이나 끌어내서, 말 나오지 않게 잘 달래어 돌려보내거라."


허적의 음성은 마냥 부드러웠다. 그렇지만 허후는 어깨를 흠칫했다. 이미 형이 데리고 놀던 계집이었다. 신세를 망쳐 놓았으니 책임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잘 달래어 보내라니.


"어차피 저놈은 씹던 오징어도 뱉아버리는 놈이다. 계집이 맛을 알았으니 저놈은, 이미 맛을 잃었을 게야."

"..."


허후는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가는지.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절망적으로 사람을 망쳐놓을 수가 있는 건지. 같은 서자인데, 다른 종자인 건가. 아니면 자신도 이렇게 망가질 수 있는 건가. 타고 나길 이렇게 썩어빠진 건가. 이 짐승이 자신의 미래인 건가. 형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죽고 말지.


"..."


제 목젖을 손으로 꾹꾹 문지르는 허후를 보면서, 허적의 두눈에 남아있던 한가닥 의심도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강한 경멸, 환멸을 내비치다니. 이 정도로 심한 거부반응이라면, 정말로 허견 그놈이 중궁을 감히 납치해서 겁간하려 한 것이 맞았다. 다행히도 그 불장난은, 불씨도 지피기 전에 일찌감치 꺼진 모양이지만.


이제 아무도 모르게 아들 허견을 족쳐서 그날의 전모를 실날 하나도 남기지 말고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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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0.26 16:27
    No. 1

    작가의 말이 없으니 많이 섭섭합니다 =)
    찾아보니 허견이 숙종때 탈이 많았던 인물이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30 17:51
    No. 2

    쓸 말을 생각해두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나더군요. 건망증 주의보...(쿨럭) 예, 허견은 정말 문제 많았던 인물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0.27 09:54
    No. 3

    진홍이의 불행은 이 허씨로부터 시작된건가?
    참... 왕이든 왕비든 해먹기 어려운 자리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30 17:52
    No. 4

    일단은 실록에선 허견이 중궁을 밀어내려는 온갖 음모의 주동자로 적혀 있는데, 제 상상을 좀 더한 것이라서요. 인경왕후 일생을 보면 마음 고생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0.31 13:02
    No. 5

    그래도 허적 아들이란 게 대단하네요. 서자인데도 자그마치 중궁에 관련한 음모인데 주동자로 적힐 정도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06 16:26
    No. 6

    그러게요. 위세도 대단했구요. 높은 벼슬엔 오르지도 못했는데 허적이 워낙 지극정성이어서.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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