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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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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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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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12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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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43

DUMMY

밤새 내린 비가 개이고, 다음날 아침 대궐 안은 비거스렁이가 편전 안 구석구석까지 시원하게 파고 들었다. 숙종은 익선관과 씨름하지 않아서 좋았고, 뒤에 파초선을 든 내관들은 부채질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전하, 상소로 서로 불목하여 조정을 들쑤신 형조판서 남용익과 형조참의 강수학을 체차하시옵소서."


도승지가 정원을 대표하여 간하였다. 숙종은 입술을 꿈틀거리며 도승지부터 허적, 강수학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형조판서에 오르자마자 축출당할 위기에 놓인 남용익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윤허한다."

"..."


남용익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였다. 고작 유생 하나 배소를 잘못 정한 일로 쫓겨나가게 생겼다. 기가 막힐수록 언변이든 달변이든 발휘하여 바로 자신을 방어해내야 하는데, 자신은 답답하게도 대응이 느렸다. 그저 글로 비호하고, 비난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오시면, 신임 형조판서는..."


허적의 질문에 숙종은 피식 웃었다.


"글쎄 좀 고민해보고. 부호군에 남구만이 있던가? 남구만이 그래도 종이품 형조참판에, 대사성 씩이나 했는데, 동지사로 올려야 하나. 아니면..."

"..."


허적이 멈칫했다. 형조참판까지 하였으니 종이품에서 정이품으로 높여서 형조판서에 앉힐 수도 있다는 건지.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며 자신의 속을 휘젓는 왕의 옥음이 밉살스러웠다. 그런데 정말로 형조판서에 앉히기나 할까.


아직은 너무도 어려서 얼굴만 봐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왕이었다. 감히 용안을 함부로 봐선 안되기에 몰래 훔쳐볼 뿐. 그런데 왕의 속을 읽고도 손을 쓰지 못할 때가 문제였다.


"아차차. 그전에, 전 예조판서 이정영을 도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한다."

"이...정영 말이옵니까?"


뜻밖의 이름에 허적이 머뭇머뭇 되물었다. 이정영이라니. 백헌 이경석의 조카로 허적 자신과도, 송시열과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백광현과 은근한 친분이 있다 보니 최석정과 섞이면 모를까.


"과시 때 시제 단속을 못한 죄로 귀양까지 다녀와서 요즘 진천 백곡에 머문다던가...슬슬 복귀할 때도 되었지."

"..."

"생각해보니...이정영은 전임 형조판서였으니 뭘 몰라서 하관들한테 능멸을 당할 일도, 또 뭘 모르고 배소를 잘못 정할 일도 없겠군."

"..."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은 좌중을 둘러보며, 숙종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특히 허적을 노려보며.


"이정영이란 이름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는데 기억나게 도와줘서 고맙소."

"..."

"앞으로 종종 도와주시오."


허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뭘 도왔다고. 그저 형조판서가 공석이 되니 이정영이란 이름이 생각났다는 얘긴데...다음 형조판서는 남구만? 이정영? 아니면 이대로 남용익? 누가 형조판서로 있든 한가지는 확실했다. 그들 셋 모두 하필이면 최석정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 만큼은.



백강白江(백마강)의 하얀 물비늘이 점점 붉어지는 11월 초순의 해 질 녘, 홍만종과 김지남은 자신들이 탄 돛단배가 백강 구드래 나루에 가까워지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강 둔치를 하얗게 뒤덮은 억새풀이 석양에 은금빛으로 반짝이며 강바람에 흔들려 몽환적인 느낌으로 가슴 속을 휘저었다.


물위에 떠 있다 하여 부산浮山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산, 그 자드락을 따라서 다닥다닥 붙은 불빛들도 먼빛으로 에워쌌다.


"다 왔시다. 여기가 낙화암이우."


걸쭉한 사공의 음성에 홍만종과 김지남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배는 하필이면 부산 맞은 편인 낙화암 쪽에 당도한 참이었다.


김지남은 품을 더듬어서 낡은 지도 한장을 꺼내어 펼쳤다. 그는 손가락으로 낙화암 건너편인 浮山부산, 自溫臺자온대, 그 너머 窺岩津규암진이라 적힌 지점을 또박또박 짚어가며 사공에게 말하였다.


"아니, 낙화암이 아니고 그 맞은편이라 했는데요."

"어? 그랬나?"

"저 부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자온대에 대어주시지요."

"어디로 가시게? 저 쉰고개 신녀님 찾아가시우?"


김지남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신녀 소리를 들으니 괜히 무녀 막례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울진으로 떠났다는 막례를 여기서 마주칠 리는 없었다.


"우리를 뭘로 보고."


지남은 일부러 등허리를 더 꼿꼿이 펴고 서생인 척 분위기를 자아내려 애를 썼다. 옆에 진짜 성균관 유생 홍만종도 있겠다, 자신도 글줄깨나 읽어 의관만 갖추면 그럭저럭 분위기가 나겠다 싶었다.


"그러니 일부러 남들 눈을 피해 저녁에 찾아온 게 아니우?"


사공이 입술을 비죽이며 받아치는 말에 홍만종과 김지남은 기가 막혔다.


"아니 남들 눈을 피할 일이 뭐 있다고."

"우린 저 먼 도성에서 백강가문 사람을 찾아왔을 뿐인데."

"잉?"


사공은 두눈을 깜빡이곤 다시금 홍만종과 김지남을 쳐다보았다. 가난한 유생에, 짠돌이 말단역관이다 보니, 둘다 쪽물이 빠진 도포를 입었을 뿐이었다. 헌데 귀하디 귀한 백강가문을 찾아온 손님이라니. 그것도 도성에서 왔다니.


그는 그제서야 유심히 그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몰랐으면 모를까, 백강가문의 손님이라니 조금은 더 귀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딱 거기까지였다. 불그스름한 것도 아니고 푸르스름한, 그것도 허름한 도포라니. 특히나 어린놈은 다 구겨지고 해어져서 갓테가 턱밑까지 달랑거리는 갓을 쓰고, 또 겨드랑이 밑이 쭉 올이 나간 삼베도포를 입은 꼬락서니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보나마나 그댁에 문객으로 가서 밥을 빌어먹으려는 게 뻔하였다.


"뭐 어느쪽이든 저 엿바위 옆에 대어드리면 되겠네."


사공은 껄렁껄렁하게 말하면서 좌측의 거대한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늘이 깎아놓은 솜씨인지, 푸른 이끼로 뒤덮인 바위는 여러 문인들이 백척百尺이니 일천척一千尺이니 묘사할 만큼 거대했다. 그 바위 위로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져서, 수북정이란 정자를 지붕만 남기고 가렸다. 지남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엿바위?"

"아까 댁이 말한 자온대인지 잠온대인지 말이우. 우리네는 엿바위라 부르고, 양반네는 자온대라 부르고. "


사공이 퉁명스레 설명하자 홍만종이 피식 웃으면서 지남에게 덧붙였다.


"옛날에 당나라 군대가 저 바위 위에 올라가서 우리 사비성을 엿보았다고 해서 엿바위, 백제왕이 불공을 드리러 들르다가 한번 누우면 등이 따뜻해져서 못 일어나는 돌이라고 해서 자온대, 등을 덥혀 주는 언덕이라 해서 구들애..."


홍만종은 흥취가 일어서 바로 낭랑하게 홍가신洪可臣이라는 옛문인의 시를 음독을 읊고, 또 그 의역까지 차근차근 덧붙였다.


방초처처옹수근芳草萋萋擁樹根

녹애연로지금존綠崖輦路至今存

군왕일취혼망기君王一醉渾忘起

불시강대자해온不是江臺自解溫


향기로운 풀 우거져 나무뿌리 에워싸고

푸른 벼랑은 가맛길이 지금도 있구나.

임금이 한번 취해 일어나지 아니하니

둔치가 저절로 따뜻해진 게 아닐세.


"선조대왕 때의 만전晩全 홍가신의 시일세."


홍만종이 지남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을 듣고 사공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비죽이며 돌아보았다. 누가 양반 아니랄까봐, 엿바위만 보면 한 수 읊어댄다. 그나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시를 읊은 게 다행이다. 배가 뒤집히면 어쩌려고 양반들은 배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시를 읊어대는지. 게다가 자온대가 저절로 따뜻해지는 충성심 깊은 돌이라는 전설을 무시하는 그따위 시나 읊어대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하였다.


"생긴 건 꼭 쉰고개 넘게 생겨갖고."

"뭐요?"


홍만종이 두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자, 사공은 움찔했다.


"아니...쉰고개 넘을 때 조심하시라구. 요즘 나비가 출몰하거들랑!"

"나비?"

"아니 나비든 소낙비든간에 우린 그쪽으로 갈 일이 없다니까!"


자신보다 서너살 정도 어려보이는 외모여도 귀하디 귀한 양반이다. 밉보였다가는 큰일이었다. 양반들은 사람을 죽여도 유서깊은 삼척법三尺法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였다. 상대가 자신들보다 신분이 낮으면 감등을 받아서 장형이나 유배형 정도로 끝나기 십상이었다. 여차하면 자신을 강물에 밀어넣어도 저들은 목숨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신분일테니, 조금 저어되긴 하였다.


"아니우. 저 엿바위 맡에 대어드릴테니 조심해서들 가시우."


사공은 시침을 뚝 떼고는 엿바위窺岩 옆에 나룻배를 대어주었다.


"동매冬梅를 찾아가시우. 뭐 아시겠지만."

"동매?"

"뭐요? 백강가문 사람을 찾아왔다는 사람이 동매도 모르시우? 그래갖구 문객 노릇 하시겠수?"


사공은 코웃음을 치며 미심쩍은 눈초리로 홍만종과 김지남을 깔아뭉갰다. 대뜸 태도가 돌변한 사공을 보고 홍만종과 김지남이 오히려 황당한 심정이 되었다. 동매를 모른다고 백강가문 사람을 찾아온 거 맞냐고 의심하다니? 게다가 자신들은 동매를 안다는 저 우쭐거리는 눈빛이라니.


"동매冬梅라면 동지매冬至梅 말이오? 동지冬至에 피는 흰매화?"


홍만종이 묻자, 무지렁이 사공은 눈빛이 살짝 변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또 아시네. 음음, 백강선생이 삼십여년 전에 가져와서 심은 나문데, 애동지兒冬至(음력 11월 초순에 드는 이른동지)도 동지라고 벌써 하얗게 꽃이 한송이 피었다우. "

"그깟 삼십년 조금 넘은 매화를 모른다고 사람을 의심하고 무시하다니."


김지남이 가재미눈을 하고 사공을 쏘아보자, 사공이 눈을 부랴렸다.


"그깟이라니! 그깟이라니! 조선팔도 다 뒤져도 동지에 피는 매화 볼 수나 있나? 봤수? 봤냐고?"


홍만종이 살짝 얼굴을 붉히고 지남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말하였다.


"동지매라잖나. 그것도 백매화니 저들의 자랑거리겠지."

"아...그렇군요."

"자네는 이영감님한테 동지매 얘기 안 들었나? 평소에 자랑하셨을 법도 한데."

"글쎄요...하늘에 미친 어르신이라서 동매의 매자도 안 하시던데."

"자네는 땅에 미친 친구라서 동매의 동자도 안 들었겠지..."


홍만종은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최석정을 통해 알게 된 친구인데, 역관이라선지 허구한 날 지도와 지남침指南針(나침반)을 끼고 다녔다. 이름도 지남指南이라 하여 자신은 땅이 정해준 숙명대로 역관이 되었다고 큰소리까지 치는 놈이었다.


"어쨌든 고맙소."


대화를 하는 사이 배가 자온대 옆에 이르렀다. 그나마 물매지지 않고 계단처럼 층이 진 곳이었다. 홍만종이 지남의 소매를 잡아당겨서 배에서 내리는데, 사공이 또 등뒤에 대고 비웃었다.


"신녀님 찾아갈 때 나비 조심하시우!!"

"거참! 우린 무당이나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래도!"


지남은 버럭 성질을 내면서 답하다 말고 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게 기분이 묘하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워낙 차고 드센 강바람을 맞으면서 뱃길을 따라와서인지 코끝이 얼얼했다. 당장 옆에 선 홍만종을 봐도 코가 벌건 것이 보나마나 자신도 지금쯤 코가 술주정뱅이처럼 벌겋게 얼어있을 것 같았다. 몰골이 이러니 더 사공한테 무시당했을까. 지남은 지도에서 눈을 떼어 물끄러미 홍만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왜 그러나?"

"홍형 코말입니다."

"내코? 자네코도 벌겋거든?"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가 꼴이 이래서 저 사공한테 무시당했나 싶어서 말입니다."

"자네가 동매만 알아들었어도 무시 당하진 않았겠지만."

"아니, 저자가 그냥 무시부터 하고 보는 성격이던데요."

"원래 남을 무시하다 보면, 그 업보로 자신도 무시당하는 법이야. 하지만 정작 자신이 왜 무시당하는지를 잊어버리지."


홍만종은 의미심장하게 선문답을 하듯 말하였다. 힐끗 곁눈질로 살피니 어느새 사공의 배는 붉은 물비늘을 가르고 백강을 가로질러 돌아가는 참이었다. 사공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사실 지남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얘기기도 했다.


지남의 성격이 쉽게 남을 무시하는 성품은 아니지만, 무당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도성만 벗어나면 여기저기 산자락을 따라서 성황당이나 솟대가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모두 영험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쭉정이 속에서도 알맹이는 있는 법이어서, 홍만종은 괴질을 앓다가 정말로 대단한 징험을 겪었다. 그런데 왜 이 어린 친구는 거부감부터 앞세우는 걸까. 너무나 어려서?


어쩌면 지남 또한 시덥잖은, 혹은 대단한 징험을 했을 지도 모른다. 단순히 미신이라 치부하는 도리질 이면의 두려움 같은 게 느껴질 정도이니. 애써 허세를 부리듯이 부인하다 보니, 그 신녀인지 무녀인지를 신봉하는 사공의 심기를 긁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순전히 발끈하는 지남을 놀리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두사람이 부산浮山 자드락을 오르내리는데도 웬 방울 흔드는 소리와 함께 놋쇠명두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혼신이 서린 무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천개어자天開於子하니 지벽어축地闢於하고

인생어인人生於寅 허야

물생어묘物生於卯하니

귀출어진鬼出於辰하고

성출어사星出於巳허야

삼십삼천三十三天 도리천忉利天에 십삼왕十三王을 마련할 제

법은 정법이, 국은 백제국이,

도는 잡으시니 부여군 규암편,

앉으신 거화는 엿바위 태자방太子房올십니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일까. 어스름이 짙은데다, 느릅나무, 굴참나무, 녹나무, 삼나무로 빽빽하게 우거진수풀에 가려서 시야가 답답한 탓인지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성황당 비슷하게 생긴 집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이거...사자소학에 나오는 문구인데? 천개어자天開於子, 지벽어축地闢於丑, 인생어인人生於寅, 시위태고是謂太古..."


지남이 고개를 갸웃하자 홍만종이 피식 웃었다.


"12간지로 만들었으니까. 뭐...논어 위령공에도 있지. 천개어자天開於子, 지벽어축地闢於丑, 인생어인人生於寅, 고두병건차삼진지월故斗柄建此三辰之月, 개하이위세수皆可以爲歲首. 이삼대일용지而三代迭用之..."

"하지만 소리는 무당이 굿하는 소린데요."


지남은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막례보다는 노랫소리가 더 굵은데도, 똑같이 온몸에 녹슨 칼을 내리긋는 기분이 들었다.


"가세나."


홍만종은 더는 무당의 굿소리에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지남을 보채었다. 지남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사공이 보던 방향이 왼쪽이었나, 오른쪽이었나...일단 동매를 찾아가라고 하였으니 동매만 찾아가면 되었다.


"헌데 그 대단한 백강가문하고 같은 산자락에 성황당이 있다니...보통 유현들은 무녀들하곤 같이 숨도 안쉬려고 하지 않나요? 웬 일로 내쫓지도 않고 놔두고 있대요?"

"뭐 일단 눈에만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겠지. 진짜 용한 무당이면 내쫓을 건더기도 없는 거고. 광통교의 막례만 봐도 거의 국무國巫로 대접받잖나. 대궐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고."

"..."


지남은 홍만종의 얘기를 들으며 코를 훌쩍였다. 괜히 코끝이 시렸다. 벌써 11월 애동지가 되어 관상감에선 달력을 만들어둔 참이었다.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달력을 선물하러 부여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강바람을 한참이나 쐬었으니 벌써 고뿔이 걸리고도 남았다. 어깨죽지 아래로 오들오들 떨렸다. 막례 이름을 들은 탓인지 더욱 오한이 일었다.


"어으으...추워..."


지남은 자드락을 힘겹게 오르면서 벌개진 손가락으로 나무줄기를 붙잡고 겨우겨우 바위틈새로 발을 디뎠다. 아직 11월 초순이라 초롬초롬 시들어가는 보리수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보름만 일찍 왔더라면 싱싱한 보리똥을 따먹을 수 있었을텐데. 눈에 가맛길을 따라가는데도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힘들었다. 야트막한 산이 왜 경사는 가팔라서 사람을 애먹이는지.


그는 참다 못해서 봇짐을 주섬주섬 풀어서 도포한장을 꺼내어 더욱 껴입었다. 여벌의 옷이라선지, 지금 입은 도포보다도 더 물이 빠져서 얼룩덜룩했다.


"춥나?"


뒤따르던 홍만종이 살짝 눈을 내리뜨고 지남의 도포를 쳐다보았다. 군데군데 해진 데다 등과 겨드랑이쪽이 허여멀겋게 소금꽃이 핀 것이, 지독히도 짠내가 난다 싶었다. 그래도 인동장씨, 우봉변씨 다음으로 사역원을 주름잡는 설성박씨 가문의 사위인데, 하고 다니는 행색은 그 유명한 노랭이 김근행의 사위나 되는 것처럼 다 해져서 턱 밑으로 갓테가 드리워진 갓에, 이 추운 동짓날에 소금꽃이 군데군데 핀 삼베도포까지...


그나마 자신이 상대적으로 멀쩡한 것 같아서 한두군데 기운 자신의 소매와 앞단을 뿌듯하게 내려다보게 되었다.


"에...좀..."

"거 누구처럼 추위를 잘 타는구만."

"누구...라뇨?"

"있어. 귀신들린 놈."

"예? 귀신이 들려요? 헤까닥...?"


지남이 손가락을 빙빙 돌려보이면서 묻는 말에, 홍만종은 피식 웃으며 답하였다.


"겉으로는 멀쩡하이. 아니, 무섭게 똑똑하기까지 하이."


말을 하다 보니 한숨이 나와서 홍만종은 입을 꾹 닫고 코로 흘러내었다. 그는 더는 입에 담지 않고 혼자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비밀스런 웃음에 지남은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자신이 알기로 똑똑한 사람은 최석정 정도였다. 하지만 최석정조차도 가끔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괴퍅한 구석이 있었다. 공부하다가 막히면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빠는 모습은 몸서리가 쳐지기까지 했다.


"어? 이쪽 맞나?"


홍만종은 어쩐지 자신보다 앞서가는 김지남의 뒷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져서 산등성이를 둘러보았다. 먼빛으로라도 동지에 핀다는 동매가 눈에 띄이길 바라면서. 하지만 어쩐지 방금 지나온 붉은 보리똥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이 애동지에 보리수 열매가 흔할 리가 없다는 사실이 찜찜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보리똥 열매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아까 그 자리 같은데."

"예?"

"아까부터 제자리만 맴도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요."


지남은 살짝 켕기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역관치고 제법 학식이 있는 편이지만,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최석정이나 홍만종 같은 이들 앞에서는 얄팍한 상식만 드러낼 뿐이었다. 게다가 역관치고 방향감각이 없는 탓에 노상 지도를 숙지하고, 또 지남침도 소지하고 다녀야했다.


그나마 요즘엔 길을 덜 헤매어 이제는 모르는 길도 다닐 만 하다고 자신하였는데. 홍만종 앞에서 제대로 체면을 구기게 생겼다.


"보라고. 저 느릅나무! 아까 본 그나무 맞다니깐!"

"..."

"자네...솔직히 불게. 길치 아닌가?"

"길치요? 길치라뇨?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안 보이네. 난 시제 내 눈앞만 보고 다닐 걸세."

"..."

"아...동매가 어디야. 벌써 어두워져서 한치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홍만종은 지남의 눈만 믿고 길을 가다가 낭패를 하게 생기자, 두눈에 힘을 팍 주고 동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미 날이 어둑어둑하여 발밑에 돌이 있는지, 풀이 있는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백매화라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기라도 할 텐데.


"아...누가 안 지나가나."


김지남이 입맛을 쩝 다시며 혼잣말을 하였다. 홍만종은 김지남이 어쩐지 미심쩍어서 가재미눈을 하고 째려보았다. 도대체가 지도는 뭐하러 들고 다니는지.


"그 지도 날 주게. 내가 보겠네."

"..."


지남은 입술에 주름이 잔뜩 질 만큼 입을 오므렸다. 여긴 정월대보름이나 사월초파일의 남산도 아니었다. 한밤중에 산속에 등불이 내걸릴 일도 없고, 그저 머리 꼭대기를 비추는 달빛이나 별빛만 내리비출 뿐이었다. 보름도 아니고 아직 초순도 안넘겨서 초승달 정도였다. 이제 와서 그리고 산속까지 자세히 표시한 지도 따위는 없었다.


"소용 없을 텐데."

"자네보단 나을 걸세."


홍만종은 지도를 펼쳐들고 이리저리 비춰보며 걸어갔다. 컴컴한 산속이라 동매니 백매니 하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허여멀건 억새풀도 거의 시들어서 하얗지는 않았다.


"아...이거이거...허여멀건 건 아주 코빼기도 안 보이네."

"동매니 백매니, 그거 찾으십니까?"

"그럼, 저녁에, 아니 이 밤중에 믿을 게 그거 말고 뭐 있겠나."


홍만종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지남도 떨떠름히 입을 비죽이곤 흰 동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홍만종 말대로 흰빛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아...배에서 내릴 때만 해도, 언덕만 넘으면 금방일 것 같더니..."

"그러게...난 자네만 믿었는데..."

"백매야, 어딨니...동매야, 어딨니?"


지남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백매, 동매를 부르짖으면서 걸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똑같은 느릅나무에, 똑같은 녹나무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이제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흰색, 흰색만 눈에 띄면 다행이다 싶었다.


"어, 저기다?"


시야에 흰빛이 비로소 비낀다 싶어서 방금 눈에 들어온 흰빛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허벅지 굵기 만한 나무 세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겨우 애동지라 세 그루 모두 매화가 다 피진 않아서, 백매인지, 홍매인지도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저 한그루만 흰 꽃봉오리가 한 송이 피어 백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긴데."


김지남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백매를 중심으로 수령이 오랜 굴참나무와 큰 집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웬 장한 한명이 백매 앞을 서성이고, 또 한명이 막 백매 쪽으로 걸어오는 참이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백매를 눈으로 보니 지남은 반가운 마음에 정신 없이 헐레벌떡 달려나가다가 순간 발에 밟히는 도토리에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기우뚱했다.


"어! 어어!"


지남이 자신에게로 넘어지려 하자, 장한들이 화들짝 놀라서 얼른 팔꿈치를 잡아 부축했다.


"조심하지 않고!"

"어...예..."


어슴푸레 비추는 달빛 아래, 또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불빛 곁에, 지남은 발치에 나뒹구는 도토리들의 형체를 보았다. 장한들이 친절하게 자신을 부축해줬나 싶은 순간, 그들은 갈길 바쁘게 지나가버렸다.


"가자."

"왜? 여기도 없어?"

"좀전에 도로 올라갔댄다."

"에이씨 괜히 내려왔네."

"하 미친놈. 오밤중에 거기선 뭐하는 거야? 굿이라도 받나?"

"빨리 좀 걸어! 또 놓치기 전에!"


장한들이 지껄이고 가는 소리에 지남은 의아히 뒤를 돌아보았다. 홍만종 역시 미심쩍은 기분에 두눈을 깜빡였다. 굿 얘기가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저 장한들은 대체 누굴 찾아다니는 건지.


"네? 어딜 가요?"


이민철의 셋째형 이민서는 한밤중의 손님들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찾아와선 도성에서 가까이 지낸 사이라는데 그말이 쉽게 믿기질 않았다.


"성황당."

"뭐...라구요? 거긴 왜요?"

"굿하려고."

"예어?"

"일행 중에 귀신 들린 친구가 있어놔서."

"말도 안돼."


지남은 손사레를 쳤지만 홍만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아는 그 친구가 최석정이 아는 그 친구일 수가 있을까. 하지만 지남은 그 순간 자신이 열심히 탐독한 한권의 책을 떠올렸다.


"혹시 거기, 느릅나무나 녹나무, 삼나무 같은 게 있습니까?"

"응...그건 왜?"


이민서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콧소리로 애매하게 답하면서 되물었다. 지남이 피식 웃으면서 봇짐에서 한권의 서책을 꺼내었다.


錦南先生漂海錄

금남선생표해록.


"여기 보면 수거水車를 만들 때 틀은 삼나무, 장골腸骨은 느릅나무, 윤판輪板은 녹나무, 차장車腸은 죽편으로 만든다고 되어있는데...아까 거기 성황당쪽에서 아주 실한 느릅나무를 보았거든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그게 뭔상관이라고."

"아. 이 말을 안했군요. 동생분이 일전에 저한테 수거 얘기를 하셨거든요. 이 책도 같이 읽었는데..."


지남은 표해록을 뒤척여서 수거를 제작하는 방법을 기술한 부분을 펼쳐보였다.


- 소나무는 가벼워서 안 됩니다. 틀은 위아래 다 삼나무를 쓰고, 장골腸骨은 느릅나무를 쓰고, 윤판輪板은 녹나무를 쓰고, 차장車腸은 죽편으로 묶습니다...


지남과 만종을 보는 이민서의 날선 눈빛이 누그러졌다.


"자네는...내 아우의 친인이 맞구먼. 난 또..."

"네?"


지남은 이민서가 적서의 구분도 없이 다정하게 이민철을 지칭하는 것이 너무도 기묘하게 들려서 두눈을 깜빡였다.


"아우요?"


지남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민서가 멋쩍게 웃었다.


"내 아우 맞잖은가. 이번엔 자네들이 날 의심하나?"

"아니...적서 구분을 안 하시기에..."

"우리 백강가문의 피가 똑같이 흐르는 천재잖나. 그놈 어릴 때부터 색목인들 자명종을 혼자서 부수고 만들고 다 했으이. 그래서 선친께서도 아주 아끼고 끼고 다니셨다네."


이젠 아우의 장기를 자랑스레 떠벌리기까지 한다. 지남과 만종은 입이 떡 벌어진 채로 할 말을 잃었다.


"..."

"성황당 근처로 가보게나. 거기서 몰래 나무 몇그루를 벌목하고 있을 걸세."


초면인데도 자못 친근하게 말하는 이민서를 보고 김지남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자신이 중인, 그것도 역관인 걸 알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인사가 늦었..."

"허면 다녀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지남이 자신을 소개하려는 순간 홍만종이 바로 지남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남은 한순간 움찔해서 홍만종을 쳐다보았다. 다짜고짜로 홍만종이 지남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고 자리를 떴다.


끌려가면서도 지남은 홍만종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자신의 소개를 가로막았는지 의아했다. 그간 자신과 잘도 어울려서 다닌 홍만종이, 정작 고귀한 명문의 혈통인 이민서 앞에선 새삼스레 부끄러웠던 걸까. 하지만 이어지는 홍만종의 말에 지남의 오해는 순식간에 풀렸다.


"아까 그놈들, 나으리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네?"

"특히 최교리 나으리."

"아..."


김지남은 바로 수긍이 되어서 고개를 까딱하다가도,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누가 최석정을 찾아다니는 건지, 기세로 봐선 그리 좋은 의도는 아닌 듯하였다. 홍만종의 손에 끌려가는 지남 역시 걸음이 급해졌다.


"이보게들! 이 등롱은 가져가야지!"


그 와중에 이민서가 집앞에 걸린 등롱을 챙겨주었다. 지남은 짧은 순간에도 등롱을 챙겨준 이민서에게 고마움을 느꼈지만, 최석정에 대한 걱정이 앞서다보니 그 고마움은 자신의 눈꼬리 뒤로 스쳐지나가는 굴참나무 만큼이나 더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왔던 길이니 뭐..."


홍만종은 이번엔 헤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번엔 길치인 지남의 눈에 의존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부산浮山 자락을 찾아갈 요량이었다. 비록 어둑어둑한 밤길이긴 해도, 어서 가서 그놈들을 따라잡아야만 했다.


"아까 그 얘기는 두분이서 이 밤중에 거기서 나무를 벤다는 얘긴데. 그놈들이 소나무 벌목伐木으로 신고하면 큰일나지."


기껏 걱정하는 게 소나무 벌목으로 신고 당하는 문제였나. 지남은 샐쭉하게 대꾸했다.


"별걸 다 걱정하시네요. 아까 그놈들 꼭 산적들같이 생겼드만..."

"산적은 무슨. 자네야말로 별 걱정을 다하이. 오히려 상중에 수차를 만들고 벌목을 하는 게 더 위험하대도. "


그렇게 홍만종이 지남을 잡아끌고 도로 엿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고 따로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눈에 익은 느릅나무와 삼나무, 녹나무를 찾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차라리 그 두사람도 이런 등롱을 갖고 나왔으면 불빛을 보고 찾아가기라도 할텐데.


그렇게 홍만종이 불빛을 찾아 두눈을 부릅뜨는 순간 그의 두눈에는 아까 그자들이 산자락을 내려가는 모습이 비쳤다.


"저기! 저기!"


홍만종은 나직하게 소근거리며 지남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남은 만종의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그 장한들이 산자락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


"저자들...그럼 여기 어디에 나으리들이..."


다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지남의 시야로 느릅나무와 녹나무, 삼나무의 꼭대기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저거, 녹나무 맞지요?"

"허면 저기 계시겠구만."


반갑고 다행스런 마음에 홍만종의 걸음이 빨라졌다. 한달음에 느릅나무 앞으로 달려드는데 갑자기 적갈빛과 적록빛으로 뒤섞인 아름드리 느릅나무 한그루가 기우뚱하더니 홍만종의 머리 위를 덮쳤다.


"안돼에!"


귀에 너무도 익숙한 최석정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는 순간, 홍만종은 두눈이 휘둥그레져서 황급히 품속을 더듬었다. 간발의 차로 그는 품에서 붓을 꺼내어 위로 들어올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지남은 멀거니 보기만 하였다. 저 붓을 갖고 떨어지는 나무기둥을 막겠다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니. 맞은 편에서 어이없이 마주보는 최석정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 곁으로 도끼를 든 이민철이 달려드는 모습도.


홍만종은 왼발을 내딛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느릅나무 기둥을 붓을 잡고 힘차게 평대세로 찔렀다. 오른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안면근육이 일그러져서도 계속해서 오른발을 디뎌 나무기둥 한가운데를 찌르려는데, 그 머리 위로 은빛 칼날이 춤을 추며 나무기둥을 가닥가닥 잘게 갈라놓았다.


"어흐!"

"하압!"


나무기둥이 잔가지처럼 부서져내리는 순간 그 사이로 검게 그을린 얼굴이 여릿한 웃음으로 자신을 반겼다.


"자네?"


쿵. 뒤이어 쓰러진 느릅나무 나무기둥 때문에 지축이 흔들렸다. 홍만종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몸의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흐으!"

"기껏 붓으로 거정세擧鼎勢라니. 말이 됩니까?"


반가운 얼굴이 얄밉게 변하였다. 자신을 구해주고 첫마디가 하필 조롱이라니.


"힘껏 했다네. 누구한테 솥도 드는 초식이라 배웠거든."


홍만종이 응수하자마자, 하릴없이 구경만 하던 이민철과 최석정, 김지남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었다.


"이보게! 괜찮은가?"

"무사한가?"

"다치신 데는..."


홍만종은 오른손목이 화끈거려서 왼손으로 감싸주고 고통에 신음하면서 김석하를 홱 노려보았다.


"자네 일부러 그랬지?"

"뭘 말입니까?"

"이거, 이거 말야!"


홍만종은 성질이 나서 발치의 나무때기들을 마구 발로 차며 말하였다. 갑자기 머리 위로 날아든 느릅나무 기둥이라니. 그것도 아름드리 굵은 놈이어서 정통으로 맞으면 골로 갈 놈이라니.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여기 이분이 솜씨 좀 발휘하신다며..."


김석하가 이민철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마침 이민철은 손에 시꺼먼 도끼를 들고 머리를 긁적이는 참이었다.


"미안하이. 저 나무에 눈이 없다보니...그쪽한테 안기지 뭔가?"

"..."

"그러게 저한테 맡기시라니깐."

"그럼 저 녹나무는 자네가 하게"


이내 홍만종은 그들 뇌리에서 버려졌다. 세사람은 녹나무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지남은 만종의 팔을 잡고 부축해서 일으켜세웠다. 지남과 홍만종은 녹나무쪽으로 다가서다가 문득 녹나무 뒤로 넘실거리는 흰빛에 의아히 쳐다보았다.


"저거 뭐지?"


홍만종의 팔을 잡고 녹나무 뒤로 돌아가본 지남은 눈압에서 나풀거리는 흰 옷자락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런데 그의 손에 잡힌 홍만종의 팔도 굳어있었다.


"...."

"저건..."


최석정도, 이민철도, 김석하도 그 자리에서 무덤 앞 문인석처럼 굳어졌다. 희디 흰 소복을 입은 어린 청상과부 하나가 핏빛으로 이파리가 물들어 한잎, 두잎 떨어지는 녹나무에 기대어 앉아 잠들어 있었다. 한눈에도 피부가 백옥처럼 희고 맑은데다, 흰 저고리는 하필이면 앞섶이 세모꼴로 잘린 상태였다.


작가의말

1. 태자방은 저 시대 실존인물이지만, 어디 사는 지는 모릅니다. 자료부족으로...임의로 엿바위골로 정했습니다.


2. 무녀의 노래는 부여 왕굿, 부여 성주굿 등의 굿 가사를 참고했습니다.


3. 실제로 이민철이 저 시기에 수거를 만들 때라서 상상을 가미했습니다. 실록에는 허견이 저중 한 인물에게 누이동생을 첩으로 주었다고 하지만, 저는...당시의 접포 풍습을...


4. 구드래나루는 그 어원의 변천이 불분명하지만 저는 구들+언덕애=구들애-->구드래로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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